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390)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389화(390/412)
#389화. 왕의 동반자
1회 초 한수혁의 투런 홈런을 시작으로 타자 일순하며 다섯 점을 선취한 서울 워리어스.
인천 레인저스가 자랑하는 메이저리그급 용병 투수 라파엘 로드리게스가 단 하나의 아웃카운트도 잡지 못한 채 강판 당하자 나카무라 도모야키 감독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오릭스 버팔로스와 세이부 라이온즈에서 각각 한 번씩의 우승을 경험한 백전노장 나카무라 도모야키.
그가 이웃나라 한국으로 넘어와 프로야구단의 지휘봉을 잡게 된 건 인천의 적극적인 구애 때문이었다.
지난 2010년대부터 KBO에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세이버매트릭스.
선수들의 플레이 하나하나를 모두 데이터로 집계해 분석하고 또 분석하는, 이 선진야구의 흐름에 가장 앞장섰던 건 다름 아닌 인천 레인저스였다.
그 덕에 200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 이어지는 왕조를 건설했던 인천 레인저스는 이후 뒤늦게 데이터 야구를 도입한 팀들에 밀려 이런저런 부침을 겪게 되었다.
가장 결정적인 건 한수혁의 등장이었다.
2027년 그가 데뷔한 후 KBO에는 워리어스의 시대가 열렸고, 한때 한국야구의 최강자로 불렸던 인천은 만년 2위, 급기야 3위로까지 떨어지며 암흑기 아닌 암흑기를 맞이했다.
국내 최고 자본력을 자랑하는 인천의 모기업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성적이었다.
바로 그때, 구단총수의 명이 떨어졌다.
리그 전체가 데이터 야구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있는 이때, 오히려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 오히려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지 않냐는,
야구를 좋아하긴 하지만 사실 아는 건 별로 없는 구단주의 오지랖에 프런트가 잽싸게 움직였다.
[2040년, 한국야구에 필요한 건 근성과 투혼, 인천 레인저스 “새로 취임한 나카무라 도모야키 감독은 인천이 추구하는 정신력 야구에 가장 적합한 사령탑.”] [나카무라 도모야키는 누구? 1980년대 한신타이거즈의 선발투수로 반(反) 요미우리 세력의 중심에 섰던 투수 출신 감독. 대표저서 ‘투수의 어깨는 쓸수록 강해진다.’ 등]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카무라 감독의 취임이 마냥 부정적인 결과만을 가져온 건 아니었다.
시대에 많이 뒤떨어진 구식야구라는 비판이 일기도 했지만, 해가 갈수록 나태해져가는 한국 프로야구 선수들, 그중에서도 평소 배가 부를 대로 불렀다 평가받던 인천 선수들이 바싹 긴장하는 계기가 되긴 했으니까.
다음 날 선발 등판을 앞둔 투수에게 하루 종일 불펜투구를 지시하고, 에러를 저지른 야수들을 모아 경기 후 지옥의 펑고를 날리고,
그런 일들이 반복되다 보니 적어도 한 가지 효과는 확실하게 나타났다.
인천 선수들의 눈빛에 독기가 서리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 만족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시즌 전반기의 막바지에 들어선 현 시점에서 워리어스와 타이탄스에 이어 3위에 올라 있는 레인저스의 팀 성적.
나카무라 도모야키는 생각했다.
구단이 자신에게 원한 건 우승이다. 2위, 3위 따위는 누구도 기억하지 못한다.
비록 1위 팀 워리어스에 세상 누구도 어쩌지 못할 괴물이 버티고 있지만,
괜찮다. 아무리 괴물이라 해도 전 경기에 선발로 등판할 수는 없는 법.
녀석이 등판하는 경기를 내준다 해도 나머지 두 경기를 잡으면 위닝 시리즈를 가져갈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노력들이 쌓이고 쌓이면 언젠가는 놈들을 앞서나갈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인천이 내세운 에이스 라파엘 로드리게스는 적어도 KBO에서는 적수를 찾아보기 힘든, 워리어스가 자랑하는 용병투수들에도 비견될 만한 커리어를 가진 대단한 투수였다.
그에 반해 워리어스에서는 4선발 천상진이 등판할 차례였다. 마흔을 바라보는, 이빨이 모두 뽑힌 힘없는 늙은 호랑이.
그렇기에 나카무라 도모야키는 오늘 경기 필승을 다짐했다. 어떻게든 오늘 경기를 잡아내고 이번 3연전을 위닝 시리즈로 가져가겠다는 각오였다.
하지만,
따아아아악!
5 대 0, 다섯 점 차로 뒤진 가운데 여전히 노아웃 무사 1루 위기 상황,
또 한 번 거대한 타격음이 울려 퍼지고, 그 타구를 때려낸 괴물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배트를 휙 집어던지는 순간,
“빠가야로!”
노 감독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 나왔다.
저기, 자신의 계획을 모두 망친 괴물이 마치 산책을 하듯 다이아몬드를 돌고 있다.
오늘만큼은 다를 거라 생각했다. 한 팀의 에이스와 4선발이 맞붙는 경기에서조차 진다면 할 말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믿었던 에이스는 아웃카운트 하나 잡지 못한 채 강판 당했고, 그 와중에 부끄럽지도 않은지 입을 헤 벌리고 괴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뿐인가.
이제라도 그라운드로 뛰쳐나가 뒤지고 있는 경기를 역전시켜야겠다, 의욕에 활활 불타야 할 벤치 멤버들이 자신의 눈을 피해 눈치를 슬슬 보는 것 아닌가.
“칙쇼…….”
갑자기 머리 쪽으로 혈액이 쏠리며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주치의의 신신당부가 떠올랐다. 절대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 된다고, 혈압 관리에 주의해야 한다고.
“하아…….”
끓어오르는 화를 간신히 내리 누른 나카무라 도모야키가 덕아웃 뒤편 문을 열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당황한 코치들이 일본어 통역의 얼굴을 쳐다보았지만 그 역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따아아아악!
감독이 사라진 인천 레인저스가 허둥지둥대는 사이, 워리어스 타자들의 공격은 멈출 줄을 몰랐다.
때리고, 때리고, 때린 데 또 때리고, 쓰러진 상대를 일으켜 세워서 또 때리고,
[28 대 1, KBO 한 경기 최다 득점 및 최다 점수 차 승리 거둔 서울 워리어스] [4홈런 7타점 한수혁, 2홈런 4타점 데릭 플레밍, 1홈런 5타점 안치욱, 3안타 3타점 최재민 등 워리어스 선발타자 전원 안타, 전원 득점 기록 수립] [1회 다섯 점을 내주고 강판당한 인천 레인저스 용병 투수 라파엘 로드리게스 “신이 인간에게 천벌을 내렸다.” 횡성수설, 대체 무슨 뜻?] [경기가 끝난 후 갑작스레 병원에 입원한 인천 레인저스 감독 나카무라 도모야키, 의료진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한 상태”]* * *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네, 민예린 씨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럼 다음 주 본 공연 때 뵙죠.”
“알겠습, 아앗! 거기 잔디, 잔디 조심해 주세요!”
“어이쿠, 이런, 죄송합니다.”
“다른 건 몰라도 잔디만큼은 절대 지켜야 해요. 제 말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감독님?”
1조 원이 넘는 어마어마한 공사자금이 투입된 개폐식 돔구장 워리어스 필드.
유지보수비를 포함 연간 운영비만 100억 원이 넘게 소요되는, 솔직히 말하자면 KBO 레벨에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매머드급 구장이었지만 이를 운영하는 워리어스 구단에서는 별다른 부담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기존 잠실야구장 사용료로 서울시에 지불하던 금액이 근 90억 원에 달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구단주인 한수혁이 돔구장 운영 관련한 별도 예산을 책정해 줘서이기도 했다.
돈 많은 구단주 덕에 한 번 열고 닫을 때마다 웬만한 직장인 연봉이 전기세로 나간다는 개폐형 지붕을 마음 내킬 때마다 여닫고 있는 워리어스 필드.
금전적으로는 별로 아쉬울 게 없었지만, 워리어스 측은 처음 이 구장을 설립할 당시 서울시 측과 문화행사 대관용으로 임대하겠다는 약속을 한 바 있다.
그리고 다음 주, 그 일환으로 민예린의 복귀 콘서트가 이곳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자, 다들 장비 철수할 때 최대한 잔디 조심하고!”
“알겠습니다!”
민예린의 특별 부탁을 받은 스태프들이 콘서트 리허설을 위해 설치해 두었던 장비들을 조심스레 철거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홈경기가 없는 날 사용할 것이고, 콘서트가 끝난 후에는 다시 새 잔디를 이식할 예정이지만,
‘혹시나 폐가 되긴 싫어. 아이 참, 그래서 다른 데서 하고 싶었는데.’
지난 3년간 활동을 중지한 채 앨범 작업과 한수혁 따라다니기에만 전념했던 민예린의 복귀 콘서트.
행여 워리어스에 폐가 될까 다른 곳에서 콘서트를 진행할 생각이었지만 우천 여부와 상관없이 행사를 진행할 수 있는, 거기에 5만 명에 가까운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다른 장소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럼 진짜 들어가 보겠습니다!”
“조심해서 가세요.”
스태프와 장비들이 모두 철수하고, 하나뿐인 매니저가 뒷정리를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살금살금 덕아웃에 다가가 한수혁이 평소 즐겨 앉는 벤치에 엉덩이를 살짝 기댄 민예린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열린 지붕 사이로 스며드는 기분 좋은 초여름 햇살, 그 틈을 타고 솔솔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룰루룰루루~”
자기도 모르게 다리를 까닥거리며 콧노래를 부르던 민예린이 새삼 지난 몇 달간의 일들을 떠올렸다.
언제부터인가 메이저리그에서의 선수 생활에 약간의 무료함을 느끼던 한수혁.
그 누구보다, 심지어 본인보다 먼저 그 낌새를 알아채고 대안을 준비해온 민예린.
한수혁의 입에서 은퇴라는 말이 나왔을 때 민예린이 한국행을 추천할 수 있었던 건 그렇게 항상 한 발 앞에서 모든 걸 준비해왔기 때문이었다.
조금은 망설여지기도 했다.
어쩌면 정말 한수혁에게도 휴식이 필요한 건 아닐까, 은퇴하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이긴 하지만 그는 투수와 타자를 겸업하며 다른 선수들보다 두 배 많은 노력을 기울여오지 않았는가.
하지만 민예린은 아직 야구선수 한수혁을 떠나보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라운드를 떠난 한수혁이 정말 행복해질 수 있을지도 자신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한국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했고, 한수혁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삽시간에 결정된 한국행.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아주 현명한 선택이었다.
한수혁의 얼굴에 한동안 찾아볼 수 없었던 웃음이 돌아왔다.
미국에 있는 내내 이상할 정도로 걱정하던 박성훈 대표의 건강을 직접 챙길 수 있게 되었고,
언젠가는 다시 한 팀에서 뛰자 약속했던 선후배, 동기들과 만나 다시 한 번 호흡을 맞출 수 있게 된 덕분일 거다.
세계 최고 무대라는 메이저리그와 그곳에서 얻을 수 있는 엄청난 돈과 명예를 포기한 대가치고는 무척 소박했지만.
‘오빠가 행복해하면 그걸로 충분한 거지, 뭐.’
어차피 돈은 차고 넘쳤다.
한수혁의 개인자산도 엄청났지만 설사 그가 파산한다 해도 민예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한수혁 하나 정도는 평생 호의호식하게 해줄 자신이 있었으니까.
두 사람이 사귀기 시작한 지도 어언 10년이 넘었다.
짧지 않은 연애 기간이었지만 민예린은 여전히 한수혁만 보면 마음이 설렜다.
일 년에 절반 이상을 집을 떠나 외지로 떠도는 프로야구 선수여서 그런지, 거기에 자신조차도 활동이 시작되면 거의 스튜디오에 틀어박혀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처지여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 두 젊은 연인은 항상 서로를 새로워하고, 또 그리워하고 있었다.
단 한 가지 민예린이 이해할 수 없는 건.
가끔, 아주 가끔,
한수혁이 자신을 묘한 눈빛으로 바라본다는 사실이다.
그럴 때마다 민예린의 직감은 한수혁이 자신을 통해 다른 누군가를 바라본다 느끼곤 했다.
누구일까, 혹시 오래전 한수혁이 찾아다니던 그 여자일까?
솟아오르는 궁금증에 가끔 속내를 물어보고 싶기도 했지만, 민예린은 그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설사 그 눈빛에 다른 뜻이 숨겨 있다 해도, 아직까지도 자신에게 말 못 할 비밀을 감추고 있다 해도,
적어도 한 가지만은 확실했으니까.
자신은 한수혁을 사랑하고 있고, 한수혁 역시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민예린에게 중요한 건 오직 하나, 그것뿐이었다.
“앗, 내 정신 좀 봐.”
잠시 상념에 빠졌던 민예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인천으로 원정을 떠나 있는 워리어스, 한수혁의 등판 경기가 시작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 파앙!
– 스트라이크!
– 대단합니다! 1회 세 타자를 연속 삼진으로 돌려세우는 한수혁 선수! 군더더기 하나 없는, 정말 완벽한 피칭입니다!
다행히 많이 늦지는 않았는지 1회 워리어스의 수비가 이제 막 끝나고 있었다.
세 타자를 완벽히 잡아낸 한수혁이 짓궂은 표정을 지은 채 동기 안치욱의 뱃살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민예린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떠올랐다.
그래, 이제는 정말 확신할 수 있을 것 같다.
한수혁을 위해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 정말 올바른 선택이었다는 것을.
“자, 그럼 이제 내 차례인가. 힘을 내자, 민예린! 가자!”
스스로를 향해 힘찬 파이팅을 외친 민예린이 출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저 멀리서 마무리 작업을 마친 매니저가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열린 지붕 사이로 스며들던 초여름의 햇살이 어느새 석양으로 변해 경기장 구석구석을 물들이고 있었다.
그 석양을 한 몸에 받으며 민예린이 앞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