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395)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394화(395/412)
#394화. 인생의 목표
“음, 그러니까 네 의견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원심성 수축에 좀 더 비중을 두는 게 바람직하다, 뭐 그거구나.”
– 네, 아빠. 보내주신 데이터를 여기 프로그램에 넣어봤는데요. 다른 부분은 큰 문제가 없지만 관절 가동 범위가 미세하게 줄어든 경향이 관찰되더라고요. 피로 회복도도 1년 전 수치에 비교하면 확실히 떨어졌어요. 아무리 한이 대단한 선수라 해도 그 역시 인간이니까요. 투타 겸업을 계속 이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현재 신체 지표를 최대한 오래 유지하려면 제 판단에는…….
아주 오래 전,
자신이 회귀했음을 자각한 한수혁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투타 겸업에 도전할 육체를 완벽하게 관리해줄 개인 트레이너를 구하는 일이었다.
2040년 현재, 세계 최고의 트레이너라는 명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수혁 하나만을 위해 모든 걸 바치고 있는 제이콥 튜너 말이다.
두 사람의 만남은 비단 한수혁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도움으로 제이콥은 희귀병에 걸린 딸아이의 엄청난 치료비를 감당할 수 있었고, 결국 병을 이겨낸 아이는 훌륭한 성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당시 아홉 살에 불과했던, 치료법이 개발되기 전까지 작은 희망조차 품지 못했던 그 꼬마 아이는 이제 어엿한 대학생이 되어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다.
아버지의 뒤를 이을 훌륭한 스포츠 트레이너로서 말이다.
– 일 얘기는 이 정도로 하고요. 한은 잘 지내죠?
“솔직히 말해보렴. 내가 아니라 그 녀석이 궁금해서 전화한 거지? 아빠가 연락해도 매일 수업 때문에 바쁘다고 피해 다녔잖냐.”
– 아뇨, 그때는 제가 정말 바빠서…….
“됐다. 네 인생은 네가 알아서 살아가야지. 다만, 애니야.”
– 네, 아빠.
“야구 선수로서 녀석을 동경하고, 은인으로서 녀석에게 감사하는 건 얼마든지 괜찮지만… 그 이상 나가는 건 말리고 싶구나. 그 녀석 옆에는 자리가 없어.”
– 알아요. 전 그저…….
“잔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다. 난 그저 네가 상처 입길 원하지 않을 뿐이야. 내 마음 이해하겠지?”
– 그럼요. 저도 이제 스무 살인데요. 한의 옷자락을 잡고 철없이 징징거리던 그 꼬맹이가 아니라고요.
“허허, 그래. 맞다. 정말 시간 빠르구나. 웬만하면 그 상태 그대로 오래 머물렀으면 했건만 어느새 이렇게 다 커서 아빠 말 알기를…….”
– 그만! 아빠, 어쨌든 제가 최종 데이터 나오는 대로 다시 보내드릴게요. 더 필요한 거 있으시면 연락 주시고요. 일단 끊을게요. 저 수업 들어가 봐야 해서.
“그래, 애니. 뛰지 말고 조심하고. 나중에 다시 통화하자.”
젊은 시절, 급진적인 트레이닝 방식으로 학계와 업계의 우려를 샀던 제이콥 튜너였지만 이제 그 역시 중년의 나이로 접어들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튀어 나오는 최신 기계들과 복잡하기 짝이 없는 프로그램들을 모두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허나 다행인 건 제이콥이 굳이 그 낯선 기기들과 씨름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였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스포츠 트레이닝을 전공하고 있는, 아버지를 넘어서는 대단한 재능을 가졌다 평가받는 딸 애니 튜너가 이렇게 그를 지원해주고 있었으니까.
풍부한 경험과 식견을 가진 아버지와 최신 기술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딸의 조합,
적어도 한수혁이 은퇴하기 전까지는 그에게 최고의 트레이너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제이콥이 아쉬운 건,
‘괜한 마음을 먹으면 안 될 텐데.’
이제 갓 성인이 된 딸의 마음이 자꾸만 어디론가 향한다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한수혁을 친오빠처럼 따르던, 병상에서 일어난 후에는 그의 경기를 따라다니며 정을 쌓아온 딸.
혹시나 그 애의 마음이 다치지 않을까, 그게 걱정될 뿐이었다.
‘잘 하겠지. 어린애도 아니고.’
제이콥이 생각하기에 한수혁과 민예린은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최고의 연인이었다.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걸 보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저 둘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인연의 끈이 연결되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끊어지지 않을 단단한 매듭이 지어져 있는 것 같다는 생각.
말로 설명하긴 어려운 일이다.
그저 오랜 시간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되는 감일 뿐이니까.
“헉, 헉, 헉… 제이콥. 다 했어요. 어이구, 나 죽어!”
“흠, 벌써 다 했다고?”
제이콥의 상념이 누군가의 목소리에 와장창 깨어졌다.
얼마 전부터 한수혁의 지시로 이곳 연습실에 다시 합류하게 된 안치욱.
땀에 푹 절은 그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보기엔 아직 여력이 남은 것 같은데. 흠, 일단 러닝 20바퀴 추가.”
“커헉! 제이콥! 날 죽일 셈이에요? 당장 내일 모레 경기가 있다고!”
“안 죽어. 딱 안 죽을 정도로 셋팅 해놨으니까 날 믿고 달리라고. 자, 무브! 무브! 나도 같이 달릴 테니까 어서!”
“하아…….”
안치욱의 등을 밀며 실내 러닝 트랙을 도는 제이콥,
그가 마음속으로 다시 한 번 한수혁에게 감사했다.
매일 병실에만 누워 있던 딸이 저렇게 어엿한 성인이 되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니.
그 사랑이 짝사랑이라는 게 아버지로서는 가슴 아픈 일이긴 하지만, 당초 몇 년을 넘기지 못할 거라던 아이가 저렇게 사랑의 아픔을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조차 감사할 따름이었다.
당장은 가슴이 아프겠지만 언젠가는 딸도 그 아픔을 극복하고, 또 새로운 사랑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는 그저 그 아픔의 시간이 너무 길게 가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자, 속도 조금 더 높여서! 빨리! 빨리!”
“하아, 하아, 오늘 이상하게 힘드네. 제이콥, 혹시 집안에 무슨 일…….”
“무브! 무브!”
* * *
이번 시즌 한수혁의 복귀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건 단연 서울 라이벌 매지션스였다.
지난 시즌에 이어 2년 연속 우승에 도전하던 매지션스는 한수혁을 넘지 못하면 우승은 없다는 각오로 전력을 다해 그에게 덤벼들었다. 그리고 무참하게 박살 났다.
두 번 연속 스윕, 거기에 10점 차 이상 패배만 세 번.
지난겨울 동안 전력을 다해 가다듬은 전열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고, 선수들의 사기는 수직으로 하강했다.
각 팀당 90경기 내외의 경기를 치른 가운데 워리어스와 타이탄스, 커맨더스, 레인저스에 이어 5위로까지 떨어진 매지션스.
이대로 가다가는 가을야구마저 위험할 수 있다는 경고가 내려졌고, 신임 감독 김성수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로베르토, 너만 믿는다. 내 목숨 줄이 너에게 달렸어.”
“보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믿어주세요.”
“좋아, 어떻게든 버텨다오. 무슨 수를 써서든 점수를 낼 테니 마운드 위에서 버텨주는 게 오늘 네 임무다.”
“한과의 승부는…….”
“피한다, 무조건. 무사 만루 상황이라 해도 망설임 없이 자동고의사구를 요청할 거야. 오늘 그 녀석은 전 타석 볼넷으로 출루하게 될 테니 없는 셈 치면 돼. 넌 다른 타자들에게만 집중해다오.”
현역 시절 최고의 좌타자라 불린 그였지만 이제는 모두 옛말이다.
지금 그는 한 해 한 해 계약 연장을 걱정해야 하는 파리 목숨 감독이다.
시즌 개막전에서 한수혁을 향해 호기롭게 도전장을 던졌던 김성수는 이제 없다.
지금 이곳 잠실야구장에 남은 건 당장 다음 주에 내야 할 딸아이의 학원비를 걱정하는 책임감 강한 아버지뿐이었다.
“플레이!”
오늘 경기마저 내준다면 매지션스는 팔콘스에 5위 자리를 내주게 될지도 모른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오늘 선발 매치가 매지션스의 용병 에이스 대 워리어스의 4선발 천상진이라는 점이었다.
천상진,
여전히 좋은 투수이다.
하지만 워리어스의 1, 2, 3선발에 비하면 훨씬 덜 끔찍하다.
이긴다, 무조건 오늘 경기를 잡아낸다.
파앙
“스트라이크! 아웃!”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선두타자와의 승부를 지켜보던 김성수 감독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선발 로베르토 고메스가 풀카운트 접전 끝에 상대 리드오프 데릭 플레밍을 삼진으로 잡아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우우우우우!”
“이런 비겁한 놈들!”
“1회부터 이럴 거야? 어?”
한수혁이 대기타석에서 걸어 나오자 김성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동고의사구를 요청했다.
잠실야구장을 가득 메운 워리어스 원정팬들이 미친 듯한 야유를 보냈지만 그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선수 시절이었다면 저런 야유를 감당하기 힘들었겠지만 자신은 이제 매지션스의 3번 타자 김성수가 아닌, 우승을 위해 뭐든 해야 하는 5위 팀의 감독일 뿐이니까.
“타자, 1루로.”
그렇게 1사 주자 1루 상황이 만들어졌고, 타석에 안치욱이 들어섰다.
현역 시절 좋은 후배였고, 아직도 사적으로 가끔 만남을 가지는 사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 다시 없을 적이었다.
오늘 한수혁 피하기 작전의 결말은 매지션스 투수들이 안치욱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막아내느냐에 달려 있었다.
파앙
“스트라이크!”
이런 벼랑 끝 상황에 긴장한 건 투수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앞 타자가 노골적인 고의사구에 노출될 경우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건 다름 아닌 그 뒤 타자이니까.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안치욱.
부웅
“스윙!”
스트라이크 존에서 한참 빠져나간 어이없는 공에 배트가 따라 나오며 순식간에 노 볼 투 스트라이크.
‘몸 쪽 투심’
김성수가 직접 낸 사인이 포수를 거쳐 투수에게 전달되었고, 고개를 끄덕인 매지션스의 에이스가 전력을 다해 그 공을 뿌렸다.
그리고,
따악!
“아악! 이런 젠장!”
“또 땅볼이야!”
“야! 안치욱! 너 정신 안 차릴래?”
4-6-3으로 이어지는 병살타.
김성수의 작전이 제대로 먹혀 들어간 순간,
매지션스 덕아웃에서 옅은 함성이 터져 나왔고, 워리어스 덕아웃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 * *
“야, 안치욱. 일부러 퍼 올리려고 하지 마. 밸런스만 더 무너지잖아. 그냥 하던 대로 해.”
1회에 이어 3회, 또 한 번의 병살타를 때린 안치욱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수비 위치를 향해 걸어 나갔다.
그런 안치욱의 엉덩이를 툭 치며 한수혁이 조언을 건넸지만 지금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시즌을 치르면 치를수록 한수혁에 대한 다른 팀의 견제는 점점 더 심해져만 갔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90경기가 끝난 현재, 타율 0.459, 출루율 0.591, 장타율 1.110, 50홈런 105타점이라는 말도 안 되는 성적을 기록 중인 타자에게 정면승부를 거는 건 누가 봐도 어리석은 짓이었으니까.
하지만,
‘젠장, 한심하네.’
한수혁이 저런 성적을 낸 건 비단 올해만의 일이 아니었다.
메이저리그에서도 항상 4할 이상의 타율과 70개 내외의 홈런을 때려낸 이레귤러가 한수혁 아닌가. 견제는 늘 있어 왔고 그와 매리너스는 그걸 슬기롭게 잘 극복해냈을 뿐이다.
시애틀 매리너스 시절, 한수혁의 뒤에는 타이 존슨이라는 당대 최고의 타자가 있었다.
누적 커리어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살아 있는 전설 말이다.
그가 은퇴한 후에는 한수혁의 유일한 라이벌이라 불렸던 제임스 테일러가 FA로 이적해와 그 자리를 메꿨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한수혁의 뒤에는 항상 당대 최고의 타자가 서 있었다는 뜻이다. 물론 한수혁을 제외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안치욱은 그들만큼 좋은 타자일까?
아직은 모른다. 그에 대한 해답은 안치욱이 빅리그에 진출한 후에나 가려질 테니까.
하지만,
90경기 동안 타율 0.351, 출루율 0.433, 장타율 0.581, 21홈런 98타점을 기록하며 자신의 커리어하이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타자를 부진하다 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충분히 좋은 타자였다. 다만 타이 존슨이나 제임스 테일러만큼의 위압감을 갖추지 못한 것뿐이었다.
“플레이!”
처음 이 팀에 합류했을 때 안치욱의 목표는 한수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 목표는 어느 순간 한수혁의 뒤를 따르는 것으로 변했고, 그가 미국으로 진출한 후에는 한수혁이 복귀하기 전까지 이 팀을 지키는 것으로 또 한 번 변했다.
자신이 세운 그 모든 목표를 안치욱은 훌륭하게 이뤄냈다.
그럼에도 지금 안치욱의 마음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기껏 국내무대로 복귀한 친구이자 우상이 자신 때문에 발목이 잡혀 제대로 된 플레이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감 때문이었다.
따아아악!
“아…….”
“하아, 오늘은 힘들겠네.”
“괜찮아, 천상진! 잘했어!”
안치욱이 좌절에 빠져 있는 사이, 천상진이 두 번째 홈런을 허용했다.
그에 반해 워리어스 타자들은 매지션스의 에이스를 상대로 단 한 점도 내지 못했다.
스코어 3 대 0, 경기는 어느새 9회로 접어들었다.
8회까지 115개의 공을 던진 매지션스 에이스 로베르토 고메스가 홈팬들의 박수를 받으며 마운드에서 내려갔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매지션스가 자랑하는 마무리 오동철이 등판했다.
한수혁 복귀 이전 국내선수로서는 가장 빠른 158㎞/h의 포심을 자랑하던 압도적인 마무리 오동철.
그가 워리어스의 6번 유인철과 7번 서준석을 연속 삼진으로 돌려세울 때까지만 해도 매지션스의 승리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따악!
하반기 들어 타격 상승 곡선을 그리기 시작한 2년차 2루수 박경배가 중전 안타를 치고 나가며 마지막 희망의 불씨를 살렸다.
그리고 서른 후반의 나이에도 여전히 백업 멤버로 쏠쏠한 활약을 보여주고 있는 최민석이 볼넷을 골라내며 2사 1, 2루 찬스가 만들어졌다.
당황한 매지션스의 투수코치가 마운드에 오르고 잠시 경기가 중단되었다.
여러 의견이 오갔지만 투수 교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김성수 감독은 오동철을 믿기로 했다.
[1번 타자 우익수 데릭 플레밍]하지만 한 번 흔들린 마무리는 결국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오동철이 던진 마지막 승부구가 볼 판정을 받고, 인내심을 발휘한 데릭 플레밍이 1루로 걸어 나가는 순간 원정 응원석에서 엄청난 함성이 쏟아져 나왔다.
[2번 타자 중견수 한수혁]투아웃이라 해도 타자가 다름 아닌 한수혁이다.
각자의 팀 경기를 지켜보던 팬들조차 잠시 채널을 돌리게 만드는, 결정적 승부의 시간이 돌아왔다.
그러나 팬들이 기대했던 멋진 홈런, 혹은 삼진은 없었다.
“타자, 1루로.”
“우우우!”
“이런 겁쟁이들!”
김성수 감독은 자신의 말을 지켰다.
만루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요청된 자동고의사구.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한수혁이 1루로 걸어 나갔고, 3루 주자가 홈으로 들어오며 스코어는 3 대 1로 좁혀졌다.
계속되는 2사 만루 상황,
대기타석에 선 안치욱의 얼굴이 당장이라도 터질 듯 벌겋게 달아올랐고, 그 사이 매지션스의 투수가 오동철에서 유한영으로 교체되었다.
올 시즌 안치욱을 상대로 9타수 무안타로 절대적인 상성 우위를 보여줬던 베테랑 좌투수.
안치욱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또 한 번 망신을 당하는 건 상관없었다. 팀의 패배 역시 지금만큼은 크게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드는 생각은 단 하나뿐이었다. 또 한 번 저 녀석을 실망시키면 어쩌나 하는 걱정, 그 걱정이 안치욱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플레이!”
교체된 투수의 연습투구가 끝나고 경기가 재개되었다.
베테랑답게 침착하게 사인을 주고받은 유한영이 초구를 던졌다.
부웅
“스윙!”
관중석 여기저기에서 탄식이 새어나왔다.
누가 봐도 확연히 티가 날 정도로 굳어버린 안치욱.
헛스윙으로 인해 몸이 완전히 굳어버린 안치욱이 자기도 모르게 1루 베이스 위 한수혁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한수혁이 움직였다.
‘가볍게.’
베이스를 밟고 선 한수혁이 마치 스윙을 하듯 가볍게 팔을 휘둘렀다. 그리고 안치욱을 향해 뭔가를 중얼거렸다.
순간 경기 전 한수혁이 해준 말이 떠올랐다.
억지로 퍼 올리려 하지 말라는, 병살타나 수비 시프트 때문에 겁먹지 말고 자신의 스윙을 하라는 한수혁의 조언이 생각났다.
드륵
절벽 끝에 매달린 안치욱에게 동아줄 하나가 내려왔다.
‘가볍게, 억지로 어퍼스윙 하려고 하지 말고, 맞춘다는 마음으로.’
어떤 타자든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타격 매커니즘이 존재한다. 강한 어퍼스윙이 세계 야구계를 지배하고 있지만 반드시 그것만이 정답이라 할 수는 없었다.
굳어 있던 안치욱의 어깨가 쭉 펴졌고, 복잡하기 짝이 없던 머릿속이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그 순간 유한영의 손끝에서 공이 떠났다.
그리 빠르지는 않지만 완벽하게 제구 된 몸 쪽 낮은 공.
그 공에 맞춰 안치욱의 배트가 힘차게 돌았다.
수만, 아니, 수십만 번을 반복한 안치욱의 아름다운 레벨스윙이 공과 한 점에서 만났다.
따아악!
“우아아아아!”
“됐다! 됐어!”
“달려! 달리라고!”
안치욱의 스윙이 가장 완벽하게 이루어졌을 때 나오는 강하고 빠른 일직선 타구가 우중간을 향해 힘차게 날았다.
3루 주자와 2루 주자가 홈을 밟으며 동점이 되었고, 당황한 매지션스 우익수가 공을 한 번 놓치는 사이, 1루에 있던 한수혁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홈을 향해 전력 질주했다.
“세이프! 세이프!”
“와아아아아아!”
일순간에 경기를 역전시키는 3타점 2루타.
홈을 밟은 한수혁이 2루에 도착한 안치욱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자, 이대로 끝내자!”
“가자! 워리어스!”
9회 말, 워리어스가 자랑하는 철벽 마무리 에릭 바클리가 매지션스의 세 타자를 연속 범타로 처리하며 경기는 워리어스의 승리로 끝났다.
오늘 경기 MVP로 선정된 안치욱 주위로 기자들이 모여들었다.
여전히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지 눈가가 벌겋게 달아오른 안치욱이 마이크를 앞에 놓고 입을 열었다.
“오늘 깨달았습니다. 제가 얼마나 부족한 선수인지, 정말 제대로 된 야구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더 노력을 해야 하는지. 아니, 어쩌면 저는 평생 제가 목표하는 그곳에 도달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저에게는 대신 그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친구가 있으니까요. 앞으로도 그 친구의 뒤를 따르기 위해 전력으로 달리겠습니다. 그것이 제 남은 야구 인생의 목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