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397)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396화(397/412)
#396화. 도움을 받아들이는 법
“자, 오늘 이 자리를 빛내기 위해 학교를 직접 찾아준 서울 워리어스 최재민 선수에게 힘찬 박수 부탁드립니다!”
KBO의 휴식일인 월요일, 성지학원 교정 내에 새로 완공된 대강당에 모인 전교생들이 누군가를 향해 힘찬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이곳 성지학원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프로야구 1군 리그에서 뛰고 있는 야구선수 최재민이 그 대상이었다.
사회봉사의 일환으로 이곳을 찾았다가 최재민을 알게 된 한수혁은 그를 발굴해 워리어스의 주전급 선수로 키워냈다.
이후에도 그는 이곳 학교에 대한 지원을 계속해 나갔고, 급기야 올해는 그의 이름을 딴 한수혁 강당이 세워지기에 이르렀다. 성지 학원 운동선수들이 우천 시에도 훈련을 이어갈 수 있는 공간 말이다.
1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청각장애 학생들의 프로야구 진출은 요원하기만 했다. 2040 시즌 기준 프로야구 1군에 등록된 청각장애 선수가 최재민 혼자라는 것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성지학원 출신 양규철, 광주 재규어스와 신인 계약 체결] [퓨처스리그에서 3할 타율 기록한 성지학원 출신 곽철환, 내년 1군 데뷔 청신호]지금 이 순간 각 구단의 2군, 혹은 육성군에서 적지 않은 숫자의 청각장애 선수들이 미래에 대한 꿈을 키워나가고 있다.
그들을 위해 워리어스는 현장검증을 마친 청각장애 선수를 위한 각종 시스템을 나머지 9개 구단에 무상으로 배포했다.
[프로야구 최고 스타 한수혁 “야구 선수에게 장애가 있냐 없냐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그저 야구를 얼마나 잘하는지로 평가받길 원한다. 그 외에는 어떤 동정도, 편견도 필요치 않다.”] [청각장애 학생들 외에도 가정형편이 어려워 야구를 포기한 선수 등을 대상으로 후원을 이어가고 있는 한수혁, 한국 프로야구계를 받치는 거대하고 튼튼한 기둥] [2040년, 대한민국 중고등학생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1위 ‘한수혁’]지난 시즌 타율 0.283, 출루율 0.363, 장타율 0.435, 20홈런 75타점을 기록하며 지명타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한 최재민.
그는 올 시즌에도 타율 0.290, 출루율 0.377, 장타율 0.488, 17홈런 59타점의 호성적을 기록하며 지명타자로, 그리고 때론 대타로 워리어스의 1위 질주에 공헌하고 있다.
그런 최재민이 단상에 오르자 강당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여기 이 자리에 모인 성지학원 학생들, 특히 최재민의 후배인 야구부 선수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아마도 한수혁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너무 멀리 있는, 마치 별과도 같은 존재이다. 일반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닿을 수 없는, 먼 곳에 존재하는 우상일 뿐이다.
반면 최재민은 다르다.
그는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청각장애를 가진,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프로야구 1군 무대에 주전급 선수로 자리 잡은 보다 현실적인 존재이다.
그렇기에 학생들은 더욱 신경을 집중하고 최재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잠깐 동안 눈을 감고 무언가를 생각하던 최재민이 천천히 손을 들어 수화를 시작했다.
“제가 이 학교에 다니던 시절, 저는 단 하나의 희망도 찾지 못하고 매일 방황하던 힘없는 학생이었습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야구부는 운영비 때문에 폐부 위기에 놓여 있었고, 저는 드래프트에서 어떤 팀의 지명도 받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절망 속에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덩치가 아주 큰 야구 선수 두 분이 이곳을 찾았습니다. 그 두 분이 어떤 이유로 이곳을 찾았는지, 그라운드에서 얼마나 무서운 사람들인지 알기에 처음에는 조금 떨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곧 알게 되었습니다. 마냥 무섭고 대단한 존재인 줄만 알았던 그분들이 사실은 우리처럼 야구를 사랑하는 사람이란 걸 말이죠.”
“그 두 분 중 한 사람, 제가 가장 존경하는 야구선수이며, 가장 사랑하는 형인 한수혁 선배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직접 공을 던져주겠다고, 거기서 가능성을 보이면 직접 입단 테스트를 주선해 주겠다고. 네, 그 다음은 여러분도 아시는 대로입니다. 전 워리어스 육성선수로 프로에 첫 발을 디뎠고, 오늘날 프로야구 선수라고 스스로를 칭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길은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아니,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앞길은 항상 가시밭길일 거라 생각합니다. 여전히 전 그라운드 위에서 공포를 느낍니다. 다른 선수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기에, 배트에 공이 맞는 소리를 들을 수 없기에, 갑자기 어디서 뭐가 날아올지 알 수 없기에 두렵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동료들, 그리고 코치님들이 저를 도와줍니다. 저 하나만을 위한 수신호를 개발해 계속 사인을 보내주시고, 제가 이해 못 할 상황에 맞부딪힐 때면 어떻게든 설명해주기 위해 애쓰십니다.”
“워리어스 유니폼을 입은 지 12년, 이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다른 사람에게 기대고, 그들의 도움을 받는 데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마음이라는 걸. 그리고 그렇게 받은 도움을 다시 다른 이들에게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걸 말이죠.”
“저를 포함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자꾸 어디론가 숨고 싶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이 세상이 악의로 가득 차 있다 말하기도 하지만 적어도 제가 본 세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늘 행사가 끝나면 저는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공포와 싸워야 합니다. 하지만 이제 두렵지 않습니다. 제게는 저를 도와주는 수혁이 형, 그리고 많은 동료들과 선후배들이 있으니까요.”
“언젠가는 여러분도 그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다시 한 번 대강당 설립을 축하드리며, 이곳에서 좋은 기량을 가진 선수들이 많이 나오길 갈망합니다. 감사합니다.”
* * *
“잘 다녀온겨?”
“네, 덕수 형님. 걱정해주신 덕분에요.”
“애들은 다 잘 있고? 거기 교장 선생님도 그대로 계시지?”
“그럼요. 안 그래도 덕수 형님 안부 물으시더라고요.”
“이이, 그려. 나도 한번 내려가 봐야 하는디 시간이 잘 안 나네.”
“사회봉사활동 예정된 거 있지 않으세요? 시즌 끝나고 그걸로 가시면…….”
“맨날 쌈박질 때문에 봉사하러 가는 게 겸연쩍어서 그러지.”
“아아…….”
수화 통역을 사이에 두고 대화를 주고받은 두 사람이 멋쩍은 듯 씨익 웃음을 지었다.
처음 한수혁이 최재민을 발굴했을 때 함께 성지학원에 봉사를 나왔던 장덕수.
한때 스승과 제자였던 이 두 사람은 워리어스 중심타선을 이루는 콤비로 거듭나 있었다.
이번 시즌 한수혁의 복귀가 결정되었을 때 전문가들이 꼽은 워리어스 내 가장 큰 약점은 장덕수와 최재민이 지키는 4번과 5번 타순이었다.
워리어스의 주전 1루수 장덕수.
한때 이 팀의 주전포수이자 역대 최강의 싸움꾼으로 불리던 이 거한은 전성기 시절 40홈런 100타점이 보장되는 거포 중의 거포였다.
특히 한수혁이 미국으로 떠난 2030시즌에는 은퇴한 용병 월터 스미스와 함께 100홈런 250타점을 합작하는 등 KBO를 대표하는 거포로 군림했다.
그렇게 매년 3할을 넘나드는 고타율에 40개 이상의 홈런을 날리며, 파워와 컨택 능력을 동시에 겸비한 타자라는 평을 받던 그였지만 2미터에 130㎏이 넘는 그의 거대한 체구가 결국 문제를 일으켰다.
부상이 깊어졌고 결국 주전 포수 자리를 내놓아야 했다.
이후 조성오에게 1루수 자리를 물려받으며 타자로서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그 역시 30대 중반에 접어들며 서서히 기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워리어스가 3년 연속 중위권에 머문 데에는 장덕수의 노쇠화도 한 몫을 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었다.
“그럼 형님, 전 들어가서 유니폼 갈아입겠습니다.”
“이이, 어여 들어가.”
지난 시즌 0.254의 타율에 출루율 0.348, 장타율 0.558, 35홈런 98타점을 기록한 장덕수.
나이를 생각하면, 아니, 나이 요소를 제외한다 해도 상당히 뛰어난 실력임에 분명하지만 영원한 우승 후보 워리어스의 4번을 맡기에는 뭔가 아쉽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전문가들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한수혁의 조언에 따라 배트 무게를 대폭 줄이고, 스윙 매커니즘에 변화를 준 장덕수는 지난해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시즌 95경기, 타율 0.298, 출루율 0.405, 장타율 0.535, 22홈런 97타점.
지난해에 비해 장타율이 조금 하락했지만 OPS가 3푼4리가량 상승했고, 타율도 4푼 이상 오르며 약점이던 컨택 능력이 대폭 개선되었음을 증명했다.
만약 장덕수가 이렇게 각성한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면 한수혁과 안치욱에 대한 견제는 더욱 심해졌을 것이다.
“자, 오늘 선발 라인업이다. 요즘 버팔로스 애들 기세 좋은 거 알지? 거기다 상대 에이스가 등판하는 경기다. 다들 각 잡고, 조금이라도 해이한 모습 보이면 바로 그라운드에서 끌어내릴 테니 명심해.”
“알겠습니다! 감독님!”
이제는 제법 감독 티가 나는 조성오가 라인업 용지를 붙여놓고 클럽하우스를 빠져나갔다.
1번 우익수 데릭 플레밍
2번 중견수 한수혁
3번 3루수 안치욱
4번 1루수 장덕수
5번 지명타자 최재민
6번 포수 박동석
7번 유격수 유인철
8번 좌익수 서준석
9번 2루수 박경배
투수 호세 카를로스
현 시점에서 워리어스가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라인업에 선수들의 고개가 위아래로 끄덕여졌다.
잠시 후 경기가 시작되고, 최근 4연승을 달리며 기세가 잔뜩 오른 버팔로스의 용병 에이스 투수가 마운드에 올랐다.
따악!
시작은 그리 좋지 않았다.
159㎞/h에 달하는 위력적인 포심에 데릭 플레밍이 삼진으로 물러났고, 한수혁이 친 공을 버팔로스 우익수가 다이빙 캐치로 건져냈다.
양 팀 용병 투수 간의 맞대결, 이런 경기에서 선취점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는 워리어스 팬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선수들을 응원했다.
따아악!
무기력하게 끝날 것만 같았던 워리어스의 첫 번째 공격에 희미한 불씨 하나가 살아났다.
최근 들어 타격감이 바싹 오른 안치욱이 2루수 머리를 넘기는 깔끔한 안타를 뽑아내며 1루에 진루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차례가 돌아왔다.
[4번 타자 1루수 장덕수]이 팀의 주장이자 주포인 장덕수의 차례가.
“형님,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시죠?”
“이이, 그려, 너도 잘 지내지?”
“어휴, 말도 마세요. 요즘 아들 놈 학원비 때문에 등골이 휩니다.”
“그려? 갸가 벌써 학원 다닐 때가 됐남?”
“그럼요. 내년이면 초등학교 입학인데요.”
대표팀에서 호흡을 맞췄던 후배 포수의 인사를 장덕수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오가는 말은 정겨웠지만 사실 두 선수의 신경은 날카롭게 바싹 서 있었다.
어떻게든 1회 초를 무사히 막아내고 싶은 포수, 그리고 1루에 있는 주자를 홈으로 불러들이고 싶은 타자.
배터리 간의 사인이 오가고, 첫 번째 공이 날아왔다.
파앙
“볼.”
“…형님, 실투인 거 아시죠? 저 친구가 가끔 이래요.”
“한 번은 참아주겠지만 두 번은 안 되는디.”
“어휴, 그럼요. 제가 확실하게 단속하겠습니다.”
몸 쪽으로 날아오는 위협구에 포수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혹시나 여기서 장덕수가 열받아 투수를 두드려 패기라도 하면?
올 시즌 최하위만은 벗어나자는 마음으로 전력을 다하고 있는 팀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릴 것이다.
한수혁과 함께 역대 최강의 싸움꾼으로 불리는, 어떤 면에서는 한수혁보다 더 무서운 존재인 거한 장덕수.
아주 오래 전 그가 국제무대에서 쿠바 투수를 마운드에 심어버리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때 그 일을 당한 투수는 결국 기량을 회복하지 못하고 쓸쓸히 은퇴하지 않았는가.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실투였습니다, 형님.”
“알았다니께, 야구나 하자고.”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아니면 한수혁이 돌아와 마음이 조금 유해진 것인지.
장덕수는 별다른 말없이 다시 타격 자세를 취했다.
그제야 안심한 포수가 다시 투수를 향해 사인을 보냈다.
‘바깥쪽 낮은 코스’
장덕수도 얼마 후면 마흔이다.
아무리 타고난 장사라 해도 배트 스피드가 무뎌지고, 손목에 힘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 타자를 상대할 때는 바깥쪽 빠른 공이 가장 좋은 해법이다.
운이 좋으면 헛스윙을 유도할 수도 있고, 배트에 맞더라도 단타로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예전 같으면 밀어치는 홈런을 주의해야겠지만 포수가 생각하기에 지금 장덕수에게는 그런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바깥 쪽 낮은 코스, 포심’
끄덕
1루 견제를 마친 투수가 고개를 끄덕인 후 투구 동작에 들어갔다.
어차피 주자도, 타자도 모두 발이 느리다. 짧은 안타 정도는 맞아도 괜찮다.
긍정회로를 돌린 포수가 요구한 코스 쪽으로 미트를 옮겼다.
하지만,
따아아아아악!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 한수혁만큼 엄청난 타격음을 낼 수 있는 선수는 없을 거라고, 만약 그런 선수가 또 존재한다면 아마도 그건 장덕수일 거라고.
장덕수의 거대한 체중이 실린 아름답고 강력한 스윙이 공을 강타했다.
힘이 떨어졌을 거다,
버팔로스 포수의 생각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다.
예전 같으면 장외로 넘어갔을 타구가 관중석 중단에 떨어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홈런은 홈런이었다.
선제 투런 홈런.
모처럼 만에 4번 타자로서 제 몫을 해낸 장덕수가 홈플레이트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최재민에게 말했다.
“역시 홈런이 최고여. 그치, 재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