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40)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39화(40/412)
#39. 불길한 기운
한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내 인생, 적어도 야구에 관한 것이라면 그게 뭐든 계획하고 컨트롤할 수 있을 거란 오만한 생각.
하지만 스무 살 풋내기던 내가 미국으로 건너가 서른 다섯이 될 때까지 선수로 뛰며 깨달은 건 인생은 결코 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1년 만에 빅 리그로 올라가겠다는 계획은 부상 덕분에 산산이 부서졌고, 이제는 완전히 투타 겸업체계가 자리잡았다고 생각하던 순간 어깨부상 때문에 타자로 전향해야만 했다.
남들은 모두 내 야구 선수로서의 커리어를 부러워했지만 생각해보면 내 계획대로 된 건 단 하나도 없었다.
그렇기에 새로운 삶의 기회를 얻게 된 나는 아무 것도 계획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대신 목표라는 걸 세우고 전력을 다해 부딪히는 중이다.
계획한 대로 일이 되지 않을 경우 마음을 다칠 수 있지만, 목표에는 기한이란 게 없기에 실패해도 또 다시 도전할 용기가 남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 내 목표는 워리어스의 승리다.
그리고 그 승리에 방해물이 될 무언가가 홈플레이를 향해 맹렬하게 돌진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끼어들 수도 없는 그런 상황. 내 목표달성의 키를 쥔 건 장덕수 선배였다.
* * *
대타 고철환이 친 타구가 1-2루 간을 꿰뚫는 순간 장덕수는 저도 모르게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2아웃 주자 1, 2루 상황.
2루에 있던 주자 박수길이 전력을 다해 달리고 있었다.
포수 치고는 제법 빠른 발을 가진 선수다. 심지어 장덕수의 고등학교 3년 선배이기도 하다.
안 그래도 아까 타석에 들어섰을 때 한 소리를 들었다. 후배들을 똑바로 교육시키라고.
일단은 알았다고 하고 한 발 물러섰다. 얽히고 설킨 한국야구에서 고등학교 3년 선배에게 대드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끄아아!”
3루를 돈 박수길이 기합을 내지르며 홈으로 뛰어들었다.
그와 동시에 맥스가 뿌린 송구가 레이저처럼 날아와 장덕수에게로 향했다.
터억!
과연 어깨만큼은 메이저리그 급이라던 평가가 맞았다. 총알 같은 송구였다.
그 송구를 잡아낸 장덕수가 재빨리 3루 쪽으로 몸을 돌렸다.
공은 이미 자신의 미트 안에 있었다. 하지만 박수길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그대로 공과 함께 자신을 날리겠다는 듯 상체를 잔뜩 수그린 채 마치 미식축구 태클을 하는 듯한 자세로 뛰어들었다. 팀의 득점을 위해 모든 걸 건 남자의 돌진이었다.
그렇게 박수길이 장덕수를 향해 전력으로 달려들었다.
퍼어억!
“꾸웩!”
하지만 어림도 없는 짓이었다.
‘미안하구만유’
뭔가 심각하게 부서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박수길이 옆으로 튕겨 나가버렸다.
마치 덤프트럭에 치인 경차마냥 볼품없이 데굴데굴 구르더니 부르르 경련을 시작했다.
“아웃!”
심판의 입에서 단호한 아웃 선언이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매지션스 주석도 감독이 그라운드로 뛰쳐나왔다.
“주루방해야!”
“아뇨, 이미 글러브에 공이 들어 있었습니다. 정당한 플레이였어요.”
“아우! 씨발!”
심판의 말이 맞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주석도가 욕설을 내뱉으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잠실야구장이 떠나갈 듯한 함성이 울려퍼졌다.
“워! 리! 어! 스!”
“장! 덕! 수!”
“최고다! 2연승이야!”
“매지션스 새끼들 다 죽여버려!”
오랜만에 잠실 라이벌 전에서 2연승을 맛보게 된 워리어스 팬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오늘도 일반석에서 경기를 관람하던 민예린이 안전망에 들러붙은 채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어흐흐흑! 워리어스! 승리하리라!”
“거기 위험해요! 왜 자꾸 거기 달라붙습니까? 내려오세요!”
“됐어요! 그냥 이대로 죽어도 좋아!”
“내려오라니까!”
최소한 동점, 혹은 역전까지 가능했던 찬스가 허무하게 끝나버린데 대해 매지션스 팬들이 분노했다.
두루마리 휴지가 그라운드로 날아들었다. 그 중 일부에는 불까지 붙어 있었다.
장관이었다. 이정도면 경찰이 출동해야 하지 않나 싶을 정도의 그런 광경이었다.
“나와라, 수혁아. 인사해야지.”
“네? 아, 네, 선배님.”
“그나저나 수길이는 괜찮으려나 모르겠네.”
선수단을 불러모은 조성오 선배가 저 멀리 들것에 실려 나가고 있는 매지션스 포수 박수길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길래 인간이 왜 덤프트럭에 맨 몸으로···
흠, 여하튼 2연승이다. 그리고 승리보다 더 기쁜 건 바로 저것이다.
“장덕수! 장덕수!”
“자! 관중 여러분! 장덕수 선수와 워리어스 선수단을 향해 힘찬 박수 부탁드립니다!”
“최고다! 네가 포수 중에 최고야!”
한때 순한 성격 탓에 아무 것도 못하고 이리저리 휘둘리기만 하던 장덕수 선배가 벌개진 얼굴로 관중들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의 표정에는 난생 처음 보는 희열이라는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이제야 확신할 수 있을 것 같다.
황성민 같은 쓰레기가 지키던 워리어스 안방에 드디어 제대로 된 주인이 나타났음을.
그렇게 매지션스와의 2차전이 끝났다.
경기가 끝나자마자 병원으로 실려간 박수길에 대한 뉴스가 올라 왔다.
<매지션스 포수 박수길, 홈플레이트 충돌로 최소 4주 이상 명단에서 제외될 듯>
<탈장으로 입원한 백업포수에 이어 주전포수까지 부상, 정규 시즌 우승 노리는 매지션스 최대 위기에 봉착>
이상하게 10개 구단이 모두 포수 난에 시달리고 있는 2027 시즌이다.
그 와중에 백업포수의 부상으로 홀로 매지션스 안방을 지켜오다시피 한 박수길이 장기 결장하게 되었다.
지난 시즌 준우승의 한을 풀기 위해 그룹 차원에서 총력전을 선포한 매지션스다.
당장 내일 경기에 나설 포수조차 마땅치 않게 된 매지션스가 어떤 대책을 내놓을지,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집중되었다.
– 수혁아, 인터넷 한 번 봐라. 정민식 이 새끼가 대형 사고 쳤다
“응? 뭔데?”
– 일단 한 번 봐바
매지션스의 대응책을 알게 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박수길의 결장 소식이 알려진 지 불과 한시간 후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뉴스가 전해진 것이다.
그것은 지난 사태를 기억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정말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주전 포수와 백업 포수 모두 잃은 매지션스, 워리어스에서 방출된 황성민과 1년 2억 계약>
<계약과 동시에 1군 등록 마친 황성민, 내일 친정팀과의 경기에 선발로 나설 듯>
<워리어스 시절부터 이어온 정민식 단장과 황성민 간의 인연, 결국 매지션스에서까지>
<매지션스 정민식 단장 “황성민과 충분한 대화 나눠, 모두 오해였다고 판단한다”>
<후배에게 야구배트를 휘두른 게 오해? 매지션스 측 “CCTV의 기술적 오류” 대체 무슨 말?>
<황성민의 현역 복귀에 대해 워리어스 박재철 단장 노코멘트, 기자들 “할 말이 없다고? 깜짝>
<도덕과 규범보다는 팀 성적을 선택한 매지션스에 비난 쏟아져, 우승이 그렇게 중요한가?>
<매지션스 유니폼 입게 된 황성민 “오해가 빚어낸 지난 과오는 야구로 보답하겠다”>
<민예린 “야구는 당신이 먹고 살려고 하는 거고, 보답하려면 전재산을 기부하던지 아님 그냥 조용히 사라져라”>
﹂아 존나 속이 다 시원하네. 예린 여신님···
﹂진짜 음주운전하고 폭행한 운동선수 새끼들 왜 자꾸 성적으로 보답하겠다고 함? 그건 지들 먹고 살려는 건데?
﹂진짜 보답하려면 연봉 전액 사회기부라도 하던지
﹂야 그나저나 진짜 황성민 그 깽판치고 다시 현역 복귀하는 거?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황성민이 원래 정민식 단장 라인이었잖아. 아마 매지션스로 부를 타이밍만 재고 있었는데 주전포수 다치면서 제대로 명분 생긴 거겠지
﹂그때 황성민 그새끼 선수자격 정지를 먹였어야 했는데, KBO 미친 새끼들
﹂그 안에 황성민 옹호하는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게 쉽겠냐
﹂아니, 매지션스 이 새끼들 암만 우승이 하고 싶어도 그렇지, 황성민을··· 기도 안 차네 정말
﹂야, 그럼··· 오늘 매지션스 선발이 포수 황성민, 유격수 송기태야?
﹂거기에 저쪽 선발이 최동석임
﹂최동석이면 황성민 동창 아녀? 휴우, 오늘 우리 애들 조심해야겠다. 전쟁나겠네 진짜
그런 개망신을 당하고도 호시탐탐 야구계 복귀를 노리던 황성민, 워리어스 시절부터 황성민을 싸고 돌던 정민식 단장, 거기에 욕 먹는 걸 감수하고라도 지난해 실패한 우승의 꿈에 다시 한 번 도전하길 원하는 구단 수뇌부들.
황성민의 복귀는 그런 이들의 욕망이 한데 뭉쳐 벌어진 참사였다.
거기에 놈이 워리어스 출신으로 우리팀 작전이나 내부 사정을 훤히 안다는 것도 한 몫을 했을 거다. 뭐가 어찌 됐든 스윕 만큼은 피하고 싶다는 거겠지.
아무튼 놈의 복귀가 확정되고, 곧바로 우리와의 경기에 투입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워리어스 팬들 사이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경기가 과열될 걸 우려하는 건 팬들뿐만이 아니었다.
경기 당일 아침, 감독실로 불려간 나는 이대준 감독과 마주 앉았다.
“수혁아, 오늘 하루만 쉬자.”
“네? 저는 괜찮은데요.”
“그래. 알아. 네 체력 괜찮은 거. 그래도 신인이 유격수로 10경기 넘게 풀타임으로 뛰었잖아. 이러면 부상이 언제 와도 이상하지 않아. 그리고 2연승했으니 오늘은 여유도 좀 있고.”
“하지만···”
“오늘 쉬면 내일 휴식일이니 이틀 휴식. 그러면 피로는 확실히 풀리겠지. 어때?”
좋은 감독이다. 인상만 보면 선수들을 무작정 윽박지를 것 같은 느낌인데 실제로는 전혀 다르다.
그의 눈동자에서 나에 대한 걱정을 읽었다.
오늘 매지션스 포수로 출전하게 될 황성민과 송기태, 거기에 상대 선발 투수는 황성민과 고교 동창.
모든 면에서 나나 장덕수 선배에게 빈볼이 날아오거나 스파이크가 덮쳐올 가능성이 농후하다.
감독은 특히 나를 더욱 걱정하는 모양이다.
“수혁아. 그렇게 하자. 응?”
싫다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다가 쑥 내려갔다.
저런 눈으로 선수를 바라보는 감독 앞에서 어떻게 싫다고 대답할 수 있겠는가.
그래, 이번 한 번만 양보하자.
“알겠습니다. 감독님. 그럼 언제든 나갈 수 있게 대타로라도 대기하겠습니다.”
“좋아.”
내 대답이 떨어지자 이대준이 이제야 안심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벌겋게 달아올라 있던 얼굴이 이제야 제 혈색을 찾아간다.
그 모습을 보고 결심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감독 같은 건 하지 않기로.
감독 자리는 생각하고 고려해야 할 게 너무나도 많은 것 같다.
* * *
“죽여버려! 다 죽여버리라고!”
“이대준! 왜 한수혁 라인업에서 뺀 거야? 자존심도 없어?”
“황성민! 너 이 새끼 나랑 따로 함 보자! 진짜 죽여버릴 거다!”
워리어스 응원석에서 격렬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러자 매지션스 팬들도 가만 있지 않았다.
“위아래도 모르는 건방진 새끼들!”
“우리 밑에 깔려서 꼴찌나 하는 새끼들이 운 좋게 신인 하나 뽑고 큰소리를!”
“어디 한 번 덤벼봐! 내가 상대해줄 테니까!”
···솔직히 좀 놀랐다.
메이저리그에서도 이런 모습은 컵스나 필리스 홈구장에 가야 볼 수 있는 건데.
팀 성적이 바닥으로 처박으며 라이트 팬이 모두 떠난, 그래서 악에 받친 아재들만 남은 워리어스 팬들은 둘째 치고 매지션스 팬들까지 저 난리라니.
음, 이거 한국야구도 꽤나···
“수혁아, 우리가 걱정되냐?”
“네? 뭐가요?”
“아니, 지금 네 눈빛이 꼭 부모 없이 심부름 가는 어린애들 보는 것 같아서.”
“제가요?”
조성오 선배의 말에 나도 모르게 흠칫했다. 정말 내가 그런 눈으로 선배들을 보고 있었다고?
“흐흐, 괜찮아. 나이를 떠나서 네 실력이면 우리가 못 미더운 건 사실일 테니까.”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수혁아. 한 번 믿어봐. 다른 팀도 아니고 매지션스잖아. 쉽게 물러날 생각 없다.”
평소답지 않게 비장함이 감도는 조성오 선배의 표정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이 팀에 입단한 후 처음으로 선발 라인업에서 빠졌다. 반대로 말하면 다른 선수들 역시 유격수 한수혁이 없는 시합은 처음이라는 뜻이다.
“자, 그럼 다들 모여봐. 오늘은 수혁이가 없다. 그래도 막내 하나 빠졌다고 우리가 기 죽을 수는 없잖아. 다들 파이팅하고. 혹시나 성민이나 기태가 시비 걸어도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지 마. 그건 내가 책임지고 처리할테니까. 자, 그럼 하나, 둘, 파이팅!”
주장 조성오 선배의 말에 워리어스 선수들의 얼굴에도 비장함이 감돌기 시작했다.
오늘 이대준 감독이 제출한 선발 라인업은 이랬다.
1번 2루수 이창모
2번 중견수 최민석
3번 1루수 조성오
4번 우익수 맥스 워커
5번 3루수 안치욱
6번 지명타자 강진석
7번 좌익수 김수학
8번 포수 장덕수
9번 유격수 유인철
선발투수 이만식
나 대신 유격수로 들어간 동기 유인철이 9번으로 가고, 대신 조성오 선배가 3번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안치욱 놈이 5번으로 나서게 되었다.
둘 다 신인인 유격수, 3루수 라인이 굉장히 불안해 보인다. 실력적으로나 멘탈적으로나.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오늘 선발투수가 백전노장 이만식 선배라는 점이다.
매지션스 놈들의 장난질에 쉽사리 놀아나지도 않을 거고, 경험부족한 내야수들을 잘 다독여줄 것이다.
그래, 부디 아무런 일 없이 오늘 경기가 끝났으면 좋겠다.
“자, 자, 그럼 마지막으로 파이팅 한번 만 더!”
“파이팅!”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을 걸 나는 알고 있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 라인업에서 뺀 감독의 노력도, 괜한 시비를 방지하기 위해 매지션스 고참들을 따로 만난 조성오 선배의 노력도.
결국은 본래 의도를 잃고 다른 곳으로 흘러갈 확률이 높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다.
“안치욱, 쟤들한테 얻어맞으면 괜히 어설프게 대들다 한 대 더 맞지 말고 그냥 엎어져 있어라. 형이 갈 때까지 기다리라고.”
“그게 대체 뭔 소리야?”
오랜 시간 야구판을 구른 내 머릿속에서 요란한 사이렌이 울리고 있었다.
오늘, 뭔가 큰 일이 벌어질 것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