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401)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400화(401/412)
#400화. 사랑하는 법, 그리고 사랑받는 법
“마지막으로 한수혁 선수, 한국 무대에 복귀한 후 첫 번째 시즌을 마친 소감,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을 듣고 싶습니다. 앞선 질문들에 단답형으로 대답해 주셨으니 이번에는 가능하면 길게, 아주 길게 부탁드려도 될까요?”
“길게요?”
“네, 아주 길게, 너무 길어서 듣다가 숨이 넘어갈 정도면 딱 좋을 거 같습니다.”
“부탁이신가요?”
“그럼요! 십수 년 동안 한수혁 선수를 따라다닌 열성팬의 마지막 부탁이라 생각해주시고…….”
“농담입니다. 음, 사실 제가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어서, 그래도 기왕 시작한 일이니 확실하게 해야겠죠. 좋습니다. 질문이 뭐였죠? 시즌을 마친 소감?”
“맞습니다.”
“음…….”
누군가에게는 치열했던, 하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싱겁게 느껴졌을 수도 있을 2040 KBO 리그가 워리어스의 우승으로 끝을 맺었다.
오랜만에 우승 트로피를 찾아온 워리어스는 곧바로 구단 재편을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25년 동안 마운드를 지킨 현역 최고령 투수 임준영이 코치 연수를 위해 시애틀로 떠난 것을 시작으로, 여러 선수들이 유니폼을 벗었다.
반면 새로 합류한 선수들도 많았다.
한수혁의 부름을 받고 신이 나서 달려온 신인 선수들, 그리고 팀의 취약점인 외야와 1루 자리를 메우기 위해 FA로 영입한 선수들.
하나의 시즌이 끝나고 다음 시즌을 준비하는 사이 그렇게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그리고 오늘 한수혁은 예전부터 줄곧 미뤄온 인터뷰를 진행하는 중이었다.
한수혁과 오랜 인연을 유지해온 KBC 해설위원 고동식이 진행하는 특집 프로그램.
특별한 주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야구 선수 한수혁의 진짜 속마음, 그리고 공개되지 않은 사생활 등 팬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이런 저런 대화가 오갔고, PD의 얼굴에 주름이 깊게 잡혔다.
한수혁을 모시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대부분의 대답이 단답형으로 끝나며 도무지 방송 분량을 채울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중 고동식의 부탁을 받은 한수혁이 생각에 잠기자 스튜디오 안의 공기가 일순간에 변했다.
‘허어, 분위기 장난 아니네. 이런 게 1인자의 포스라는 건가.’
어느 분야이건 최고의 자리에 오른 이들에게는 특유의 기운 같은 게 풍기기 마련이다. 오랜 시간 방송국 물을 먹어온 PD는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런 대단한 사람들 중에서도 한수혁은 유독 더 대단한 존재라는 걸.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1인자의 무게감을 느끼며 PD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잠시 후 닫혀 있던 한수혁의 입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열렸다.
“아주 오래 전 제가 야구를 한 이유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래 전이라… 얼마나 오래 전인가요? 프로 데뷔 초창기? 아니면 고등학교 때?”
“음, 그보다 좀 더 오래… 어쨌든 그때 저는 야구 말고는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할 줄 모르던 그야말로 바보 같은 놈이었습니다. 아마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부터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뭐랄까… 야구로 저 스스로를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몸에 박혔다고 해야 할까요.”
“음, 안타까운 이야기군요. 그런데 과거형으로 말씀하신 거 보니 지금은 조금 달라졌나 보군요?”
“네, 정상에 올라보니 알겠더군요. 다 부질 없는 짓이었다는 것을. 아무리 성공을 해도 그걸 같이 기뻐해줄 사람이 없으면 아무 소용도 없다는 것을. 제가 너무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살아왔다는 것을 말이죠.”
고동식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뭔가 이상했다. 한수혁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게 없다 자부하건만, 지금 그가 하는 말을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체 언제 적 이야기를 하는 거지? 정상에 올랐는데 기뻐해줄 사람이 없었다고? 혹시 고등학교 때?’
되묻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아냈다. 괜히 흐름을 끊었다가 기껏 열린 한수혁의 입이 닫힐 수도 있었으니까.
결론적으로 잘한 일이었다. 한수혁의 회귀 전 이야기를 일반 사람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고동식은 침묵했고, 한수혁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성공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모두와 함께 갈 수 있는 길을 찾고, 그들과 같이 걸을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해답을 찾는 데 성공했습니다.”
“음…….”
말을 하는 한수혁의 얼굴은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다.
고동식은 직감했다.
질문과 답변이 조금 빗나간 감이 있지만 지금 이 순간, 한수혁이라는 거인이 난생 처음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고 있다는 것을.
“지금까지 야구선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을까요?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행복이라… 행복…….”
“너무 거창했나요? 그냥 가장 크게 웃었던 적이 언제인지 그게 궁금하군요.”
“아, 그거라면 바로 얼마 전에 끝난 한국시리즈 최종전 때일 것 같군요. 생각해 보니 그날처럼 제가 크게 웃은 날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음… 이런 답변이 조금 이상하게 들리실 수도 있지만 사실 제가 웃는 걸 잘 못합니다. 그렇기에 앞으로도 크게 웃으려 노력하겠습니다. 제가 행복해야 주변 사람들도 더욱 행복해질 테니까요.”
“참 좋은 말이군요. 맞습니다. 본인이 행복해야 주변 사람들도 더욱 행복해지는 거겠죠. 다른 언론에서 몇 번 질문을 드리긴 했지만 한국으로 돌아온 진짜 이유에 대해 또 한 번 궁금해지네요. 그것 역시 행복을 찾기 위한 일환이라고 봐야 할까요?”
“네, 맞습니다. 예전 제 삶에서 야구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돈과 명예를 가져오기 위한 수단 혹은 도구.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저는 아직도 그라운드에 설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오늘은 또 얼마나 멋진 경기를 할 수 있을까 설레이기도 하고요. 제 플레이에 기뻐하는 팬들, 그리고 주변 분들을 보며 감사합니다.”
“멋진 말씀이시군요. 오늘 야구선수 한수혁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런 좋은 자리를 만들어주셔서 저 역시 감사드립니다.”
“끝으로 한수혁 선수.”
“네, 고동식 위원님.”
“결혼 축하드립니다. 그런 뜻 깊은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하고요. 꼭 참석해서 맛있는 밥 얻어먹겠습니다.”
* * *
“예린! 오 마이 갓… 너무 아름답잖아요!”
“미아! 잘 왔어요! 한국까지 오느라 힘들지 않았어요? 비행 오래 걸렸죠?”
“아뇨, 전혀요. 예린 씨 덕분에 오랜만에 미국 땅을 벗어났네요. 저이가 은퇴한 이후에는 아예 집 밖으로 나가본 적이 별로 없어서요, 후후.”
“예린!”
“그래, 라일리! 이리 오렴!”
“안 돼요. 저 안으시면 메이크업하고 드레스 망칠 수도 있어요!”
“괜찮아, 이리 와. 다시 하면 되지.”
“히히, 네, 예린, 진짜 반가워요!”
2040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서울 워리어스의 홈구장인 워리어스 필드에서 특별한 행사가 준비되고 있다.
세계 야구 역사를 다시 쓴 역대 최고의 선수이자 워리어스와 매리너스, 두 개 구단을 소유한 구단주 한수혁,
그리고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세계 정상급 아티스트로 군림해온 팝스타 민예린,
두 사람의 성대한 결혼식이 거행되는 날이었다.
메이크업을 마친 채 신부대기실에 앉아 있던 민예린, 그녀를 가장 먼저 찾은 건 오래 전 결혼식 들러리를 약속했던 라이언 티보우의 부인 미아와 그들의 딸 라일리였다.
“그나저나 야구장에서 결혼식이라니, 정말 근사하네요. 들어오다 보니까 그라운드에서 준비가 한창이더라고요.”
“수혁 오빠 생각이에요.”
“역시 로맨틱 가이.”
“에에? 누가요? 오빠가요?”
“아닌가요?”
“에이, 제가 수혁 오빠를 너무 사랑하고 존경하지만 로맨틱 가이는 아니죠. 프로포즈도 제가 했는데요.”
“그래요? 그러고 보니 프로포즈 얘기를 못 들었네. 예린 씨가 한 거예요? 언제요?”
“미국에 그 영상은 안 퍼졌나 보구나.”
“네?”
“한국시리즈 4차전 끝났을 때 제가 안전망에 매달려서 소리쳤어요. 결혼해 달라고.”
“네에에?”
“결혼 안 해주면 거기서 확 뛰어내린다고 했더니 오빠가 알았다고 하더라고요. 뭐, 그렇게 된 거죠.”
민예린의 말에 라일리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아주 재미있는 농담이라고 생각하며.
물론 백프로 진실이지만.
“예린!”
“오, 애니, 어서 와!”
“우와, 드레스… 진짜 너무 이뻐요!”
“그래? 그럼 오늘 식 끝나고 선물로 줄까? 나중에 결혼 할 때 입을래?”
“그… 아뇨, 아마 제가 입으면 그게 음…….”
“어? 아, 아, 사이즈?”
“네, 제가 심하게 빈… 흑, 됐고, 아무튼 정말 축하드려요!”
“고마워, 정말 고마워. 애니. 그런데 제이콥은?”
“수혁한테 갔을 거예요. 아니면 어디 구석에 숨어서 담배 피고 있거나.”
“아직 못 끊으셨나 보네. 선수들 건강만 챙기지 말고 본인 몸도 챙겨야 할 텐데.”
“그러게요. 진짜 걱정돼 죽겠어요.”
미아와 라일리에 이어 제이콥의 딸이자 한때 한수혁을 짝사랑했던 애니까지,
많은 사람들이 신부대기실을 찾아 민예린을 축하했다.
10년이 넘는 오랜 연애 끝에 마침내 결실을 맺게 된 두 사람의 사랑.
옆집에 사는 스토커와 야구 선수, 안전망을 타고 넘는 훌리건과 스타 사이로 시작한 두 사람의 관계가 여기까지 올 줄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직 한 사람, 처음 한수혁을 볼 때부터 일편단심이었던 민예린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자, 우리 사진 찍자. 치즈!”
“라일리, 너도 이쪽으로 와. 다시, 치즈!”
떠들썩했던 인사가 끝나고 신부 대기실을 찾은 손님들이 하나둘 그곳을 빠져나갔다.
일생일대의 결혼식을 앞둔 신부에게 잠시나마 혼자만의 시간을 주기 위해.
아마 더 이상 올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애초에 초대한 사람 자체가 적었고, 이혼 후 연락이 끊긴 어머니가 이제 와서 딸의 결혼식에 참가할 일은 없을 테니까.
“하아암…….”
갑자기 조용해지니 조금씩 피곤이 밀려왔다.
바로 지난주까지 유럽 투어를 다녀온 그녀는 잠시 쉴 틈도 없이 결혼식을 준비해야 했다.
“지금 잠들면 안 되는데…….”
완벽하게 셋팅된 메이크업과 주름 하나까지 고르게 편 드레스가 구겨질까 걱정이 됐지만, 밀려오는 수마에 민예린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의 의식이 꿈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 *
‘여긴 어디… 저 아이는…….’
꿈인가, 아니면 현실인가.
민예린의 눈에 어린아이의 모습이 들어왔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에 찬란한 금빛 머리카락을 가진 작고 귀여운 여자아이.
제3자의 시점으로 그 아이를 지켜보던 민예린은 문득 무언가를 깨달았다.
처음 보는 광경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오래 전 체험했던 그 이상한 감각, 마치 누군가의 과거를 들여다보는 듯했던 그 기묘한 기억들.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눈앞에서 인형놀이를 하고 있는 어린아이는 바로 그때, 민예린이 기억을 엿보았던 바로 그 여자아이였다.
‘얘, 너 누구니? 내 말 안 들려? 얘!’
아무리 불러도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아예 민예린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달은 민예린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아이를 바라보았다.
순간, 갑자기 시간의 흐름이 빨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허리춤에나 올까 말까 하던 아이의 키가 조금씩 자라는 게 느껴졌다.
그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너무나도 신기한 경험이었다.
민예린은 한 여자아이의 성장을 실시간으로 목격했다.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고, 친구들과 사귀고, 누군가를 짝사랑하고,
민예린의 눈앞에서 아이는 소녀가 되었고 다시 숙녀로 성장했다.
어느새 이십대 후반의 나이가 된 그 여자 아이는 이사벨 올리비아라는 이름을 가진 팝스타가 되어 있었다.
순간 민예린은 깨달았다.
그 여자의 얼굴이 너무나도 익숙하다는 것을.
그랬다.
그녀는 다름 아닌 한수혁이 그토록 애타게 찼던 초상화 속 그 사람이었다.
‘이게 대체…….’
충격에 빠진 민예린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계속 그녀를 바라보았다.
팝스타가 된 이사벨이 메이저리그 개막식에 참석해 미국 국가를 노래했고, 그곳에서 너무나도 익숙한 남자를 만나는 걸 목격하게 되었다.
한수혁이었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잠시 후면 자신의 영원한 짝이 될 남자.
전율에 빠진 민예린이 자기도 모르게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그 속에서 민예린은 철저한 관찰자일 뿐이었다.
‘오빠, 이게 대체 뭐예요… 난, 난…….’
그렇게 한수혁을 만나게 된 이사벨은 줄곧 그의 뒤를 따라다녔다.
팬으로서, 그리고 그를 사랑하는 여인으로서 사랑을 갈구했다.
하지만 한수혁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가 매몰차게 그녀를 내칠 때는 지켜보는 민예린의 마음도 함께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사벨이 마침내 그를 포기했다.
한수혁과의 전화통화에서 모진 말을 들은 직후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왜 이런 광경을 보고도 질투가 전혀 들지 않는지,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를 짝사랑하는 여자, 그녀를 응원하는 마음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인지.
‘나, 나는, 나는…….’
한수혁을 잊기로 한 이사벨은 이후 자신의 인생을 살아갔다.
시간이 흐르고, 이사벨의 마음속에 한수혁의 존재가 거의 지워졌을 무렵,
그 일이 일어났다.
끼이이이익!
‘안 돼!’
오랜만의 휴일을 맞아 조카와 함께 경기장 주변으로 산책을 나간 이사벨,
그녀가 잠시 한눈을 판 틈을 타 조카가 어디론가 달려갔다.
그런 아이를 향해 달려오는 거대한 트럭.
그 순간, 그가 나타났다.
한수혁,
오래 전 그녀의 마음을 거절하고 밀어낸 그가 아이를 구하기 위해 몸을 던졌다.
조카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 한수혁이라는 걸 깨달은 이사벨이 그 자리에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그녀는 절규했다.
트럭이 덮치고 간 자리, 의식이 없는 한수혁을 끌어안고 절규했다.
살려달라고, 제발 그를 돌려달라고, 차라리 내 목숨을 가져가더라도 그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달라고.
그리고,
마치 암전이라도 된 것처럼 모든 것이 칠흑으로 변해버렸다.
한참 동안 이어진 어둠,
그것이 걷히는 순간 민예린은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사벨의 의식이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 꼬마 여자 아이 하나가 앉아 있었다.
그건 바로 자신이었다.
민예린이라는 이름을 가진, 어린 시절부터 노래와 춤을 사랑하던 꼬마 아이.
‘나는… 그래, 나는…….’
바로 그 순간, 민예린의 머릿속에 마구 헝클어져 있던 기억과 의식들이 하나로 모여들었다.
이제야 깨달았다.
어릴 때부터 꿔 온 지독한 악몽, 그리고 누군가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 기억.
자신이 왜 그렇게 노래와 춤을 사랑했는지, 마치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가수의 길을 선택한 것인지.
왜 한수혁이라는 사람을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져들게 된 건지,
수십 년의 시간이 지나서야 간신히 깨닫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이었고, 나는 곧 그녀였다.
이사벨 올리비아는 곧 민예린이었고, 민예린은 곧 이사벨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거절하고 떠난 남자, 그가 자신의 어린 조카를 구하고 대신 세상을 떠났을 때,
이사벨은 기도했다.
자신의 목숨을 가져가더라도 제발 그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달라고.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또 사랑할 수 있는 법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해 달라고.
세상에 신은 존재하는 것일까.
무신론자인 민예린은 그에 대한 해답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전생이 이사벨 올리비아라는 걸 알게 된 민예린은 그 누구인지 모를 절대적 존재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올렸다.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우리 두 사람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줘서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남은 시간 동안 단 한 점의 후회도 없도록 열심히 사랑하며 살아가겠노라고.
민예린의 눈에 비친 어떤 여자아이에 대한 영상은 거기서 끝이 났다.
“…린아.”
“예린아.”
“예린아! 음, 얘 피곤한가 보네. 침도 막 흘리고.”
“예린아! 어, 이거 화장도 다 번진 거 같은데, 큰일이네.”
누군가의 부름에 민예린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눈물을 흘린 것인지 메이크업이 다 번져 엉망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 눈앞에 그 사람이 있었다.
자신이 두 번의 삶을 살아내며 한결같이 사랑해온 남자가.
한수혁.
그가 자신을 보며 웃고 있었다.
“예린아, 너 빨리 세수부터 해야겠다. 밖에 대충 준비 끝났거든. 그러니까 일단 사람 불러… 컥!”
와락!
민예린이 그의 품에 힘껏 안겼다.
“예린아, 일단은 이거 놓… 커헉. 너 왜 이렇게 힘이 세?”
“오빠.”
“어, 알았으니까 일단…….”
“사랑해요.”
“응?”
“사랑해요, 진심으로. 다음 생을 살게 된다 해도 제 선택은 오빠일 거예요.”
민예린의 눈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한수혁이 옅게 미소 지었다.
그녀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그가 말했다.
“울지 마. 그리고 나도 사랑해.”
“오빠.”
“항상 내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 예린아.”
2040년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던 크리스마스 이브 날,
세계 최고의 야구 선수, 그리고 팝스타가 하나가 되었다.
회귀와 환생을 통해 얽히고설켰던 두 사람의 운명이 한 방향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한수혁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 〈천재투수가 170㎞/h〉를 숨김 본편 끝 **
** 작가의 말 **
당초 200화에서 끝내려던 이야기가 장장 400화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항상 응원해주시고 격려해주신 독자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완결후기에서 하기로 하고, 이제 정말 마지막이 될,
야구의 신 한수혁의 마지막 시즌을 담은 외전연재를 바로 시작합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