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44)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43화(44/412)
#43. 여왕의 분노
어제, 폭주한 한수혁이 황성민을 개박살내던 순간 민예린 역시 그곳에 있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흥분한 관중들과 함께 익사이팅 존 안전망을 무너뜨린 게 바로 그녀이지만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경기가 끝난 후 집에 돌아온 민예린은 손발이 벌벌 떨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빈볼에 맞은 워리어스의 캡틴이 걱정됐고, 벤클에 말려든 다른 선수들의 몸상태가 걱정되었다.
무엇보다 난생 처음보는 한수혁의 분노한 모습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가 그렇게 화를 낼 상황이 만들어질 때까지 대체 자신은 뭘 한 건가 자괴감까지 들었다.
현관문 앞에 쭈그려 앉아 한수혁의 귀가를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던가. 옆집 문이 열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그를 위로해주고 싶었지만 차마 행동으로는 옮기지 못했다.
내가 뭐라고, 내가 저 사람에게 뭐라도 된다고.
자신에게는 그를 달래 줄 자격이 없다는 걸 깨달은 민예린은 터덜터덜 침대로 돌아와 베게에 얼굴을 박고 울음을 터뜨렸다.
“으아아아앙!”
그렇게 밤새 울다 보니 날이 밝았다.
결국 아무런 답도 찾아내지 못한 민예린은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부터 하기로 했다.
주차장에 방치해 두었던 슈퍼카를 몰고 궁중요리 전문가인 이모를 찾아갔다.
‘문 열어! 이모! 나 왔어! 일어나서 나 음식 만드는 거 도와줘!’
‘이것아! 지금이 몇 시인지 알아? 5시야! 미쳤어? 그리고 웬 요리? 너 칼질이라도 한 번 해봤어?’
‘몰라! 손가락이 잘려 나가도 좋으니까 빨리 요리 가르쳐줘! 먹으면 막 기분 좋아지고 기운도 나는 그런 걸로, 빨리!’
‘아이구··· 내가 저것 때문에 미쳐···’
난생 처음 해본 요리는 너무나 힘들고 무서운 것이었다.
전복을 썰다가 손가락을 세번이나 베였고, 뜨거운 냄비를 잡다가 2026년 네티즌이 선정한 가장 예쁜 손가락 중 두개에 물집이 잡히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는 그런 것 따위는 눈에 들어 오지도 않았다.
힘들게 완성한 궁중요리들을 보온 기능이 있는 아이스박스에 차곡차곡 담아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에게도 걸리지 않고 그 박스를 한수혁의 집 앞에 놓는데 성공했다.
이제는 다시 집에 들어가 그가 박스를 발견하기만 기다리면 된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그런데 아뿔싸.
“민예린··· 씨?”
“헉···!”
하필이면 그때 그 집에 손님이 찾아오며 범행현장을 딱 들켜버리고 말았다.
한수혁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머리가 하얗게 되어버려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들어와서 차라도 한 잔 하실···?”
그런데 그 분께서 갑자기 자신을 집으로 초대해 주셨다.
뭔가 복잡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는 노릇.
민예린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잡념들을 일단 봉인한 채 경건한 마음으로 그의 집에 발을 디뎠다.
두번째 성지 방문이었다.
“음··· 일단 차라도 한 잔 드릴까요, 선배님들? 커피?”
“어, 난 아무 거나.”
“나도. 그냥 물 줘도 되고.”
“음, 저번에 선물 받은 좋은 커피가 어디 있을텐데···”
“아앗! 수혁 님! 제가 할게요! 괜히 뜨거운 물 만지다 손가락이라도 다치시면!”
“네?”
내가 차를 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자 기겁을 한 민예린이 후다닥 먼저 주방으로 달려가 능숙한 자세로 커피를 타기 시작했다.
아, 그러고 보니 지난 번에 아버지랑 왔을 때도 저 여자가 커피를 탔지?
흠.
“···야, 수혁아. 그런데 너 옆집에 민예린 씨 산다는 거 왜 말 안 했어?”
“왜 소근거리세요, 선배님?”
“이거, 이거 보기보다 이 놈 응큼한 놈이네?”
“···뭐가요?”
“에헤이, 성오 형님. 그런 건 그냥 모른 척 해줘야지. 주책이라고 욕 먹어요.”
“하긴, 그래, 괜히 이상한 소문 나면 안 되지. 흐흐, 아무 것도 못 본 걸로 해줄게.“
아니, 이 양반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얼마 전까지는 저 여자 이름이 민예린이라는 것도 몰랐는데.
당황한 내가 뭐라 말을 하려던 그때, 커피 네 잔을 들고 돌아온 민예린이 다급하게 대답했다.
“아니에요! 제가 어떻게 감히 수혁 님에게··· 물론 제가 가장 존경하고 숭배하는 분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야구선수로서···”
또 횡설수설이다.
음, 그나저나···
아까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저 여자, 눈두덩이가 퉁퉁 부어있다.
뭐지, 밤에 라면이라도 먹고 잔 건가.
“크흠.”
농담으로 시작한 말에 민예린이 크게 정색하자 조성오 선배가 멋쩍은 듯 헛기침을 하며 다른 쪽으로 말을 돌렸다.
“아무튼 그건 그렇고··· 넌 괜찮은 거지?”
“저요? 그럼요. 그보다 선배님은··· 어깨 괜찮으세요?”
“나? 응. 사진까지 다 찍어봤는데 단순 타박상이래. 며칠 잘 쉬면 나을 거라네. 최동석 그 새끼도 똥볼 다 됐어. 이런 늙은이 뼈 하나도 못 부러뜨리고. 흐흐.”
“그런 말씀 마세요, 성오 형님. 내가 그 새끼 다음에 만나면 진짜 죽여버릴 거니까. 어제는 제가 복수도 못하고 수혁이한테 짐 떠넘긴 거 같아서 정말 죽고 싶네요.”
“아니야. 네가 이성 잃지 않고 애들 잘 다독여서 그나마 무승부라도 한 거잖아. 야, 그나저나 우리가 1위야. 믿어지냐?”
서른 다섯과 서른 셋, 우리 팀의 타자와 투수 최고참이자 회귀 전 나만큼이나 긴 선수생활을 해온 베테랑 둘이 마치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기뻐하고 있다.
“흑흑흑, 진짜 수고 많으셨어요. 두 분 다요.”
그리고 이 팀을 목숨보다 사랑한다는 저 광팬은 덩달아 눈물샘이 터지고 말았다.
“민예린 씨, 지난 번 개막전 공연도 그렇고 정말 감사합니다. 선수들이 진짜 좋아하거든요. 민예린 씨만 보면 저절로 기운이 난다고.”
“맞아요. 저번에 만식이 저 놈은 민예린 씨 투구 지도하고 나서 이틀 동안 손도 안 닦···”
“어엌! 성오 형님! 그런 걸 이런 데서 얘기하면 어떻게 해요! 민예린 씨가 들으면 기분 나쁠 수도 있잖아요!”
“아뇨, 아뇨. 제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다니 정말 기뻐요. 어떻게 여기서 노래 한 곡 더 해드릴까요?”
이거 그냥 두면 끝도 없을 것 같다.
점점 혼란스러워지는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그런데 선배님들, 정말 저거 주러 오신 거예요?”
“응, 원래 남자 혼자 살면 집에서 밥 먹는 게 제일 힘들잖아. 네가 아침, 점심은 식단 지키는 거 알지만 그래도 저녁은 먹어야 할 거 아냐? 냉장고 넣어 놓고 조금씩 덜어서 먹어. 더 먹고 싶으면 언제든 말하고.”
“그래, 그리고 저 갓김치는 우리 장모님이 유일하게 잘 하는 음식이야. 입맛 없을 때 물 말아서 저거 한 입하면 크···”
“한수혁 선수님, 저도 부족하지만 전복침채와 녹말다식, 쇠고기 순대, 메밀전병을 준비했어요. 입맛 없으시더라도 꼭 저녁 챙겨드셔야 해요! 이 팀의 미래는 수혁 님에게 달려 있으니까요!”
전복침채는 대체 뭐고 녹말다식은 또 뭘까··· 소고기로 순대를 만든다고?
그리고 손가락에 저 반창고는 다 뭐야? 설마 음식 하다가 베이기라도 한 건가.
떨떠름한 마음을 속으로 감추며 다시 선배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내게로 향해 있었다. 그 안에는 걱정스러움이 한 가득 담겨 있었다.
“왜요? 선배님들, 제 얼굴에 뭐 묻었나요?”
“그게 아니라··· 괜찮은 거지, 정말?”
“네? 네, 아무렇지 않아요. 손목이 약간 뻐근하기는 한데 이거야 뭐 드레싱 좀 해주면 금방 나을 것 같고요.”
“다행이다. 우리는 네가 속상해할까봐 걱정했거든.”
“제가요? 왜요?”
“사람이 사람을 때린다는 게 얼마나 마음에 상처가 되는데, 우리가 그걸 모를까. 미안하다. 애초에 우리가 먼저 나섰어야 했는데.”
무슨 이야기인지 알 것 같다. 지금 이 두 사람은 내가 그놈을 팬 것에 양심의 가책 같은 걸 느낄까 걱정하는 것이다.
음, 예전에는 한달이 멀다 하고 한 놈씩 조지고 다녔는데.
솔직히 말하면 간만에 스트레스가 제대로 풀린 것 같은 느낌도 들고.
일단 좀 더 들어보자.
“네가 입단하기 전만 해도 이 팀 꼬라지가 말도 아니었거든. 단장하고 사장, 코치들, 프런트 팀장들, 선수들까지 파벌 싸움하느라 서로 헐뜯고, 견제하고··· 거기 발 담그기 싫어서 황성민이나 송기태 같은 놈들을 그냥 지켜만 봤네. 다 내 잘못이야.”
“에이, 그게 어떻게 만식이 네 잘못이야. 야수조 조장인 내 잘못이지.”
“하아··· 진짜 쪽팔리네. 아무튼 다행이다. 구단 매각될 때만 해도 걱정했는데 새로 온 구단주 님도 좋은 분 같고, 박재철 단장님이야 뭐 워낙 대단한 분이고, 이제는 파벌 싸움하려는 놈들도 다 나갔고.”
“그래, 이제 우리만 열심히 하면 되는 거지. 수혁아, 이러니 저러니 해도 우리가 네 선배야.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생겨도 절대 먼저 주먹 휘두르지 마.”
“맞아. 그런 일 생길 거 같으면 차라리 우리한테 말해. 주먹질 하고 퇴장당하는 건 늙은이들이 하는 게 낫지.”
“하, 그나저나 늙은이 늙은이 하니까 진짜 늙은이가 된 기분이네.”
“성오 형님이나 저나 이제 은퇴 몇 년이나 남았다고, 늙은이 맞아요. 흐흐.”
젊은 시절을 워리어스라는 팀에 통째로 갖다 바친 두 베테랑의 자조 섞인 대화에 나는 굳이 끼어들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쉴 새 없이 조잘거리던 민예린조차 입을 닫고 조용히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문득 방금 전 꿈에서 보았던 쓸쓸한 병실의 풍경이 떠올랐다.
하루 입원료만 수천 달러에 달하던 그 크고 화려한 병실에서 나는 혼자였다.
메이저리그 최고의 스타였던 그때의 내 위상과 KBO 신인에 불과한 지금의 나 사이에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간극이 있다.
하지만 지금 내 옆에는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주는 선배들과, 아직까지 도통 속내를 모르겠지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눈치를 보는 오래된 팬이 함께 하고 있다.
왠지 모를 안도감이 밀려와 내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만든다.
그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기 위해 나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어야 했다.
“수혁아, 아무튼 오늘 중으로 징계결과 나올텐데, 넌 그냥 신경 쓰지 말고 구단에 맡겨. 갑자기 마운드에 오른다고 무리한 것도 있고, 출장 정지 받으면 그 김에 좀 쉰다고 생각해.”
“맞아요, 수혁님! 혹시나 징계가 과하게 나오면 제가 KBO 앞에서 할복을 해서라도 막아낼 테니까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컨디션 관리만 하시면 돼요!”
음.
할복이라니··· 어디서 그런 무서운 소리를.
“그나저나 집이 넓기는 한데 너무 휑하네. 빌트인 가구 말고는 아무 것도 안 산 거야? 이사 온 지 얼마 안 된 거지? 집들이는 했고?”
“집들이요?”
“그래, 임마. 이사했으면 팀원들 불러서 집들이도 한 번 해야지.”
“와아! 그럼 수혁님은 바쁘실 테니까 제가 대신 준비하면 어떨까요?”
“민예린 씨가요? 그거 엄청 힘들어요. 어떻게 혼자 하실려고.”
“왜 제가 혼자서 해요? 일 도와줄 후배들 좀 부름 되죠. 아무튼 날짜만 잡아주세요. 제가 다 책임집니다.”
“오오··· 애들이 들으면 미쳐버리겠네. 민예린 님이 준비하는 집들이라니··· 그럼 진짜 날짜 잡아볼까요?”
“전 언제든지 좋아요! 알겠습니다. 제가 최선을 다해 준비해보겠습니다!”
“저기··· 집주인 의사도 좀···”
뉴욕 양키스의 포수로서 올스타에 15번이나 선정된 전설적인 포수 요기베라는 그 커리어 외에도 독특한 어록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라 해도 그가 남긴 가장 유명한 명언 정도는 들어 봤을 것이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좋은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가 남긴 말 중 이것을 가장 좋아한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다면 당신은 곧 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가게 될 것이다.
예전의 내가 그랬다.
야구선수로서 성공하는 것에만 집착해 내가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르고 무작정 달리기만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후배의 마음을 걱정해 이른 아침부터 음식을 싸 들고 찾아오는 선배들, 그리고 이 팀을 목숨처럼 끔찍이 사랑하는 팬까지.
그 사람들과 함께 하는 한 내가 갈 길을 잃을 일은 없을 것이다.
워리어스를 우승시키고, 좋은 팀을 만들고,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길.
나는 그 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볼 생각이다.
* * *
<휴식일에 소집된 KBO 상벌위원회, ‘매지션스 최동석 10경기, 황성민 20경기, 워리어스 김수학 3경기, 한수혁 10경기 출장정지 발표>
<워리어스 즉시 항소 “배트를 맞을 뻔했는데 10경기?>
<매지션스 “징계 결과 겸허히 받아들이겠다” 항소 포기>
<분노한 워리어스 팬들, KBO 앞으로 몰려드는 중>
“그거 이리 줘. 오빠.”
“···예린아, 이거 진짜 할 거야?”
“달라고! 저것들이 지금 매지션스는 대기업이고, 워리어스는 하꼬라고 무시하는 거잖아.”
“하아···”
“두고 봐. 내가 여기 싹 다 뒤집어버릴 테니까.”
KBO 본사 건물 앞에 돗자리를 깐 민예린이 매니저로부터 피켓 하나를 건네받았다.
그녀가 그 피켓을 머리 위로 번쩍 들어올리는 순간 옆에서 기다리던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일시에 터졌다.
[사람 목숨 노린 백정 놈 처단하고, 살기 위해 정당방위 선택한 무고한 선수는 석방하라]비록 주어는 빠져 있었지만 그것이 황성민과 한수혁을 가리키는 거란 걸 모두가 알 수 있었다.
기자들이 보도블럭 위에 털썩 주저 앉아 속보를 올리기 시작했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팬들과 시민, 그리고 유튜버들이 1인 시위를 시작한 민예린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중계하기 시작했다.
<진노한 여왕 민예린, 황성민 엄벌과 한수혁에 대한 징계 철회 1인 시위 시작>
<한수혁의 10경기 출장정지, 과연 정당한 것인가?>
<후배 장덕수에 대한 폭행으로 이미 한차례 물의를 일으킨 황성민, 20경기 출장정지로 충분할까?>
<배트와 스파이크 등을 흉기로 분류하는 MLB 관계자들, KBO의 이번 결정에 어리둥절>
<눈물을 흘리며 1인 시위를 이어가는 여왕의 초췌한 모습에 KPOP 팬들 그녀의 곁으로 모여드는 중>
<민예린 시위에 합류하는 팬들과 구경꾼으로 KBO 앞은 인산인해, 일대 교통 마비>
<해킹 당한 KBO 홈페이지 ‘아직도 황성민을 비호하는 배후는 누구?’ 배너 걸려>
<부정적인 여론에 화들짝 놀란 KBO, 긴급회의 소집하고 징계수위 다시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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