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46)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45화(46/412)
#45. 괴물
“안 돼!”
벌떡
“허억, 허억, 허억···”
오늘 저녁, 서울 워리어스와의 원정 2차전에 선발 등판이 예정된 수원의 에이스 최경재가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게 다 꿈이었다고···?’
너무나도 생생하다. 그게 현실이고, 반대로 지금 이 순간이 꿈이라고 해도 믿길 정도로.
주르륵
꿈 속에서 얼마나 시달렸는지 온 몸이 다 땀투성이다. 이마에서 흘러 내린 땀이 베갯잇 위로 뚝뚝 떨어진다.
“하아···”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끌고 냉장고 앞으로 다가갔다.
벌컥벌컥
2리터짜리 생수 반 통을 먹어 치우고 나니 이제야 간신히 정신이 돌아온다.
저도 모르게 입에서 욕이 툭 튀어나온다.
“···씨발.”
지난 스프링캠프 연습경기에서 최경재에게 연타석 홈런을 때려냈던 한수혁.
도저히 1년차 신인이라고 믿기지 않는 괴물 같은 놈.
꿈 속에 나타난 그놈에게 이번에는 10연타석 홈런을 처 맞고 말았다.
어떤 반항도 소용이 없었다.
혼신을 다해 던진 강속구도, 더 이상 맞기 싫어 도망가듯 던진 공도, 모두 까마득한 홈런이 되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씨발, 씨발.”
그 모든 게 꿈이란 걸 알게 되었지만 기분이 너무 뒤숭숭하다.
어마어마한 홈런을 때려낸 후 자신을 비웃던 꿈 속 한수혁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냥.
야구장으로 출근하는 게 너무 너무 싫다.
오늘 하루는 집에 틀어 박혀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다.
‘아프다고 하고 드러누워 버릴까··· 아니면 시작하자 마자 등짝에다 냅다 한 대 던지고 퇴장당해버릴까? 아냐, 그놈 화나면 선배고 뭐고 없는 거 같던데··· 하아, 어쩌지’
고개를 돌려 보니 시간은 이제 겨우 새벽 3시, 최경재는 혹시나 또 그 악몽을 꿀까 잠도 자지 못하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다.
* * *
결론부터 얘기해보자.
성훈이 형과 대화 끝에 내린 결론은 당장은 서형주를 영입하는 건 무리라는 거다. 아무리 팔콘스 내에서 그놈에 대한 회의적인 의견이 주를 이루고 있다 해도 일단은 1라운더 신인이다.
물론 우리에게는 대전을 상대로는 치트키에 가까운 박재철 단장 카드가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찾아가서 서형주를 내놓으라고 하면 귀싸대기 맞고 쫓겨날 일이다.
조금 더 기다려봐야 할 거 같다. 대전에서 서형주를 완전히 폐급으로 취급할 때까지, 혹은 우리에게 대전을 꼬드길 수 있는 카드가 생길 때까지 말이다.
“흐음···”
어쨌든 그건 그거고 당장 중요한 건 눈 앞의 경기다.
우리는 대전과의 2차전에서 또 패배했다.
서형주가 계속 실책을 범하고, 병살타까지 치며 워리어스를 도왔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평소에는 그냥 평범한 4선발이지만 대전에만 오면 에이스급으로 변하는 정태호 선배가 잘 던져줬다. 하지만 이후 등판한 중간계투들이 우르르 무너지며 순식간에 게임이 터져버렸다.
이어진 3차전에는 라이언 스타크가 나섰다.
하지만 워리어스의 에이스 역시 연패를 끊어내지는 못했다.
이번에는 유격수와 3루수로 나선 내 동기 두 놈이 대폭발을 일으키며 투수의 멘탈을 작살냈고 결국 그 분위기를 뒤집지 못한 채 경기를 내주고 말았다.
물 흐르듯 아주 자연스럽게 3연패다.
그렇게 대전과의 원정 3연전을 어이없이 다 내준 워리어스는 잠실 홈으로 돌아와 수원과 1차전을 치렀다.
하지만
“죽어! 그냥 다 해체해버려!”
“니들이 프로냐! 그 따위로 하고도 억대 연봉을 받는다고?”
“차라리 다 2군으로 꺼지고 신인들이나 올리라고!”
미안하지만 2군에도 올릴 신인이 없는 걸.
아무튼 연패란 게 원래 그런 거다.
한번 시작되면 아무리 벗어나려 발버둥쳐도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수렁 같은 거다.
수원과의 홈경기 1차전이 딱 그런 케이스였다.
3연패에 몰린 워리어스 선수들이 이를 악물고 덤벼들었지만 여기저기서 크고 작은 문제들이 터지며 또 경기를 내줬다.
이로서 4연패다. 내가 빠진 경기에서 워리어스는 결국 전패를 하고 말았다.
세상에.
<위기의 워리어스, 4연패로 5할 승률마저 위협>
<한수혁이 빠진 후 완전히 생기를 잃은 워리어스, 이대준 감독 “그는 곧 돌아온다”>
﹂잠시 착각했다
﹂뭘?
﹂워리어스가 세진 줄 알았더니 그냥 한수혁이 센 거였음
﹂그걸 이제 알았음?
﹂씨바··· ㅋㅋㅋ 설마 신인 하나 빠졌다고 이렇게 개판 날 줄은 몰랐음
﹂앞으로 벤클 나면 한수혁 덕아웃 기둥에 묶어 놔야 함
﹂하긴, 어차피 장덕수 하나만 있어도 다 정리 가능하니 한수혁은 안 나서도 될 듯
﹂하아··· 겨우 네 경기 빠진 것뿐인데 정신이 어질어질해진다··· 빨리 돌아와···
사라락
네 경기만에 다시 복귀한 그라운드.
오랜만에 밟게 된 잔디의 감촉을 느끼며 나는 수원 커맨더스와의 2차전을 준비하고 있다.
“안치욱, 눈에 힘줘라.”
“응?”
“세상 다 산 것 같은 표정 하지 말고, 거기 상대 투수 데이터라도 한 번 더 봐 두라고.”
“······”
4연패를 당해서일까, 팀원들의 눈빛이 모두 썩은 동태 눈깔처럼 변해 있다.
거기에 잠실야구장에 모인 관중들은 워리어스 선수단을 공개처형이라도 할 기세였다.
“차라리 매각이 아니라 그냥 해체를 하지 그랬어! 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그냥 다 때려치라고!”
“신인 하나 빠졌다고 4연패하는 게 팀이냐! 어?”
한국 야구판에서 보기 드물 정도로 격렬한 관중들의 반응이다. 순간 내가 서 있는 곳이 컵스 홈구장인가 착각이 들 정도로.
“한수혁!”
음, 내 이름도 튀어나오네?
“야! 너 임마! 벤클도 좋지만 너 때문에! 하아··· 아니다! 네가 무슨 죄가 있겠냐.”
“때려도 안 걸리게 좀 때려!”
“차라리 싸움 붙을 거 같으면 이쪽으로 도망와! 아저씨가 대신 때려줄랑게!”
뻘건 해병대 모자를 쓴 군복차림의 아저씨가 망에 매달려 고함을 질려 대다가 안전요원에 의해 어디론가 끌려 갔다.
민예린이 안전망을 제 집처럼 오르락내리락 한 후 이상하게 저기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많아진 느낌이다.
팬들이 저렇게 격렬하게 반응하는 건 단지 1위를 달리다가 순식간에 5위로 추락한 팀 순위 때문만은 아니다.
지금 워리어스 팬들은 일종의 PTSD를 느끼는 거다.
최하위권에 처박혀 빌빌대던 시절의 악몽이 떠오른 것이다.
이럴 때 뭐가 가장 필요한지 나는 오랜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야, 수혁아. 너 누굴 그렇게 무섭게 노려보냐? 왜? 또 누구 때려눕히게?”
“아뇨, 제가 무슨 깡패도 아니고.”
“흐흐, 농담이야. 농담.”
최민석 선배에 이어 이번에는 안치욱 놈까지 지나가며 한 마디를 보탠다.
“한수혁, 너 출장정지 해제되고 또 벤클 벌이면 가중처벌 받는다.”
“시끄럽고, 자료 보란 거 다 봤고? 입 털 시간에 할 일부터 먼저 해라.”
“왜 내가 무슨 말만 하면….”
음, 내 눈빛이 진짜 좀 이상하긴 한가?
저놈 말처럼 진짜 누굴 패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다.
그냥.
저 멀리 원정팀 불펜에서 몸을 풀고 있는 상대팀의 선발투수.
수원의 에이스 최경재를 터뜨려버릴 생각으로 머리속이 가득 찼을 뿐이다.
* * *
“아웃!”
“나이스!”
“만식이 잘 한다!”
“이제야 좀 야구 보는 거 같네!”
1회초 수원의 첫 번째 공격은 득점 없이 끝났다.
나를 포함한 주축선수들이 모두 복귀하자 이만식 선배가 힘을 냈다.
수원의 1번 타자에게 안타를 맞기는 했지만 다음 타자들을 차례차례 범타로 처리하며 1회를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이어지는 1회말 워리어스의 공격.
1번 이창모 선배와 2번 최민석 선배가 나란히 삼진으로 물러난 가운데 내 타석이 돌아왔다.
타석에 서자 마자 상대 포수가 말을 걸어온다.
“야, 너 진짜 잘하더라.”
“감사합니다. 선배님.”
“그래, 혹시나 우리 투수들이 이상한 데로 공 던져도 실투니까 너무 화내지 말고, 응? 우리 좋게 좋게 가보자. 경재 쟤는 마음이 약해서 빈볼 던지라고 해도 못 던지는 애거든.”
“네, 알겠습니다.”
“덕수한테도 말 좀 잘해줘. 아까 우리 용태가 무심결에 뒤를 돌아봤는데 아주 죽일 듯이 쳐다봤다는데? 걔가 그렇게 노려 보면 심장 약한 애들은 기절해서 못 깨어날 수도 있어.”
“아마 별 생각 없이 쳐다본 거겠지만 그래도 전해는 드릴게요.”
“좋아, 땡큐. 그런 의미로 첫 번째 공은 가운데 포심 하나 주지.”
지난 연습경기에서 안면을 익힌 수원 포수 정대한이 너스레를 떨며 포구 자세를 취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황성민을 박살내서 그런가, 수원 선수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예전 연습경기 때와는 많이 다르다.
뭐랄까, 막내, 혹은 후배에 대한 약간의 호의조차 담겨 있지 않다는 느낌이다.
그래, 결국 내가 예상했던 대로 편한 야구계 막내 생활 같은 건 물 건너 간 것 같다.
상관없다.
내가 고작 친목질이나 하자고 다시 배트와 글러브를 잡은 건 아니니까.
“볼!”
그나저나 가운데 포심이라더니.
“가운데 포심 감사합니다.”
“아하하, 경재가 오늘 컨트롤이 좀 별로네. 다음에는 진짜 좋은 공 하나 줄게.”
한가운데 좋은 공을 준다던 정대한의 말과 달리 존 안에서 밖으로 흘러 나가는 슬라이더가 들어왔다.
그 공에 내가 꿈쩍도 하지 않자 정대한이 다시 너스레를 떨며 포수 미트를 팡팡 두드렸다.
그나마 이 선배는 태도에 별로 변화가 없다.
이것이 진심인지, 연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다.
“진짜다··· 좋은 공 하나 줄 테니까 이 형 한 번 믿어봐.”
뭐,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고.
지난 연습 경기 후 우리 전력분석팀의 설명을 듣고 알게 되었다.
수원 커맨더스의 에이스 최경재가 첫 대결에서 큰 거를 허용한 타자에게 시즌 내내 호구를 잡히는 징크스가 있다는 걸 말이다.
1회말부터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최경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잠을 제대로 못 잔 건지 눈동자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다. 거기에 사인이 서로 잘 안 맞는지 계속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댄다.
안 봐도 알 수 있다. 지금 내 등뒤의 포수는 바깥쪽 낮은 코스를 요구하고 있을 것이다.
누가 뭐래도 최경재라는 투수의 주무기는 그 바깥쪽 꽉 찬 코스에서 더 바깥쪽으로 빠져나가는 역회전 공이니까. 알아도 못 치고, 쳐도 범타가 되는 바로 그 공.
하지만 그 코스를 던지다 내게 연타석 홈런을 허용한 최경재는 본능적으로 공포심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됐다.
이러면 선택은 아주 간단해진다.
최경재가 바깥쪽 역회전 공 다음으로 즐겨 던지는 공, 아직까지 내게는 한 번도 던지지 않은 그 공.
몸쪽 높은 하이 패스트볼.
“자, 이번에는 바깥쪽 꽉 찬 슬라이더다. 안타 나오면 형한테 나중에 밥 한끼 사고.”
“네, 전복침채 혹시 좋아하세요?”
“뭐? 그게 뭔데?”
모르지, 나도.
저번에 민예린이 가져다줘서 한번 먹어봤을뿐.
뭐라더라, 예전에 조선시대 임금님이 드시던 음식이라던데.
아무튼 그게 뭐든 그런 건 아무 상관없다.
지금 포수와 내가 주고받는 이야기는 그냥 서로의 머릿속을 혼란하게 만들려는 쓸데없는 잡설 같은 거니까.
“야, 진짜 궁금하다. 전복침채가 뭐야?”
그런데 정대한은 정말 처음 들어보는 음식 이름이 궁금한 건지 계속 말을 걸어왔다.
피식 웃으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다. 그리고 대답 대신 높은 공을 치기 위한 준비 자세에 들어갔다.
평소 내가 즐겨 사용하는 어퍼스윙 대신 하이패스트볼에 최적화된 레벨 스윙.
드드득
잠깐 사이, 땀을 한 바가지는 흘린 것 같은 최경재가 충혈된 눈을 껌뻑거리며 와인드업을 시작했다.
오버핸드의 정석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의 시원하고 깨끗한 투구폼.
그 폼에서 뿜어져 나온 공이 맹렬하게 나를 향해 날아온다.
슈우욱
됐다. 예상대로다.
존 가장 높은 곳에서 공 한 개 정도 더 높은 코스로 날아들어오는 포심.
내가 좋아하는 공은 아니지만 잘 맞추기만 하면 장타를 만들어낼 수 있는 곳으로 힘차게 공이 날아들어 왔다.
팔꿈치를 몸통에 단단히 고정하고, 팔이 아닌 허리로 스윙한다는 기분으로.
따아아아악!
“커헉!”
임펙트가 되는 순간 그 탄력을 이용해 그대로 배트를 뒤로 힘껏 집어 던져버렸다.
빙글빙글 회전하며 날아간 배트가 기록원실 앞 백네트까지 날아가고, 그 배트에 맞은 타구는 외야를 향해 총알같이 날아간다.
타구의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외야수들이 아예 따라갈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이어 저 멀리서 들려오는 굉음.
콰아앙!
날아오는 타구에 기겁을 한 관중들이 서둘러 몸을 피했고, 그렇게 비어 버린 좌측 외야 관중석 최상단 의자에 타구가 직격했다.
모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 호옴런! 홈런! 홈런입니다! 어마어마한 타구가 나왔습니다. 최경재 선수의 몸쪽 높은 공을 한수혁 선수가 좌측 담장 너머에 일직선으로 꽂아버렸습니다!
– 우와··· 진짜 엄청나다는 말 밖에 안 나옵니다. 이런 말씀드리는 게 조금 설레발일 수도 있지만 괴물들만 모인다는 메이저리그에서도 저런 타구는 절대 쉽게 나오지 않거든요.
– 다시 한 번 화면 보시죠. 아··· 이건 뭐 맞는 순간 넘어가는 타구였군요. 만약 외야 관중석 높이가 낮은 구장이었다면 대체 어디까지 날아갔을지 감도 안 오는 그런 빨래줄 같은 타구였습니다
– 대단하네요. 이게 진짜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 설명이 어려울 정도인가요?
– 제 말은, 음, 그러니까, 지금 한수혁 선수의 타격폼을 보면 평소 사용하던 어퍼 스윙 대신 배트를 수평으로 눕히는 레벨 스윙에 가까웠거든요. 그것도 완전히 힘을 뺀 스윙이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맞은 타구가 저기까지 날아가네요. 이야··· 정말 할 말이 없습니다! 대단하다는 말로는 표현이 안 될 정도입니다!
타구가 완전히 담장 밖으로 넘어갈 때까지 배터 박스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관중들의 시선이 타구가 아닌 내게로 향하고, 그들의 입에서 뒤늦은 함성이 터져 나온 후에야 아주 천천히 1루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딱히 상대를 자극하고 싶은 건 아니다.
아무리 나라 해도 출장정지가 끝나자마자 또 벤클 같은 걸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냥 이건 팬들을 위한 퍼포먼스 같은 거다. 메시지를 보내는 거다.
보아라. 이 팀을 구원하기 위해 내가 돌아왔다. 걱정 말고 응원이나 열심히 해라.
뭐 이런···
흠.
조금 낯 간지럽기는 하지만 어쨌든 팬들은 응원하는 선수의 이런 거만한 태도에 오히려 자존감이 올라간다는 걸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우와와와와!”
“그래! 시발! 이거지! 바로 이거야!”
“수혁아! 난 너 욕 안 했다!”
“잘 돌아왔어! 앞으로 절대 사람 때리지 마!”
팬들의 쏟아내는 엄청난 함성 소리를 들으며 최대한 천천히 그라운드를 돌았다.
1루를 지나 2루로, 3루로.
“우와아!”
“엉어엉! 워리어스! 승리···하리라! 한수혁, 최고!”
1루 베이스를 밟고 도는데 익사이팅 존에 앉아 있는 민예린이 온 몸을 부르르 떨며 통곡을 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지난 번 일에 대해 정식으로 고맙다는 인사도 못했건만, 저렇게 울고 있는 모습까지 보니 이유도 없이 미안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그건 그저 생각일 뿐, 막상 뭔가를 하기에 나는 다른 사람의 마음에 대해 너무 아는 게 없다.
“와아아!”
머리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한쪽 구석으로 밀어내며 3루로 향했다.
그곳 베이스를 지키던 수원의 용병이 뭔가 기분 나쁜 듯한 표정으로 노려보길래 일부러 걸음 속도를 늦추고 한 마디 해주었다.
“그 좆 같은 눈깔 다른 데로 안 돌리면 인생의 쓴맛이 뭔지 제대로 알게 될 거다.”
내가 영어로 냅다 욕을 박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지 놈이 움찔하며 시선을 바닥으로 내린다.
저런 놈들을 대할 때는 세게 나갈 필요가 있다. 미국에서 뛰다 온 놈들은 양보와 배려를 상대방이 겁먹은 걸로 판단하기도 하니까.
그렇게 3루를 돌아 홈으로.
“수혁아! 임마!”
“잘했어!”
“오늘 저녁은 내가 쏜다!”
동료들의 환대를 받으며 벤치에 털썩 주저 앉았다.
마운드 위로 시선을 돌려 보니 최경재는 여전히 땅바닥에 시선을 처박고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 앞에 선 포수의 얼굴에서는 당혹감이 느껴진다.
장담한다.
오늘 저 투수, 얼마 못 던질 거다.
* * *
“경재야. 그냥 나만 믿고 낮게 던지라니까?”
“형, 나 좆된 거 같아. 어딜 던져도 다 맞을 거 같은데 이거 어쩌지.”
“야, 경제야··· 그게 대체 뭔 소리야. 괜찮아, 오늘 네 공 좋아.”
“하아··· 씨발, 오늘 꿈자리가 뒤숭숭하더라니, 저 새끼 진짜 왜 메이저 안 가고 여기 남은 거래? 저게 인간이야? 그 공을 그렇게 후려쳐서 저기까지 날려보내?”
“자자, 일단 흥분 가라앉히고.”
“지난 번에 낮은 공을 미친 듯이 퍼올리기에 몸쪽 높은 데로 던졌더니 그것도 넘겨버리네? 미친, 크크, 미친, 진짜. 크크크.”
눈이 풀려버린 최경재가 자기 자신조차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자 포수 정대한의 심장이 쿵 내려 앉았다.
벌써 수 년째 최경재와 호흡을 맞춰온 그는 알고 있다.
평소에는 국내투수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의 위력적인 투구를 보이는 최경재가 왜 국가대표팀에 소집되면 류한결이나 임준영에게 밀려 중간계투 밖에 못하는지.
그것은 불안하기 짝이 없는, 유리 같다는 말로 밖에는 표현 안되는 이 멘탈의 문제였다.
하지만 당장은 어쩔 도리가 없다.
용병 투수 하나가 부상으로 1군에서 아예 제외된 상황임을 감안하면 최경재의 멘탈이 더 이상 무너지지 않도록 잘 달래야 한다.
“하, 형. 진짜 내 말이 맞지 않아? 저런 새끼가 왜 한국에서 뛰냐고, 왜!”
최경재의 말에 수긍하는 척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리고 시계를 보고 있는 주심에게 미안하다고 한 번 손짓을 해준 후 덕아웃 쪽으로 시선을 돌려 감독과 눈을 맞췄다.
도리도리
척하면 착이다.
주전포수 정대한이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좌우로 젓자 수원의 감독이 굳은 표정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중간 애들 준비시키고, 상태 좋은 애부터 보고하라고 해.”
“벌써요?”
“하라면 그냥 해.”
지난해 3위를 기록한 강팀 수원의 최용식 감독이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억지로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제 막 경기가 시작되었을 뿐이고, 마운드에는 에이스가 올라온 상황인데 벌써 다음 투수를 준비해야 하다니.
‘하아, 젠장. 저런 괴물인줄 진작에 알았으면 내가 연습경기에 경재 안 내보냈지. 내가 저런 놈 기를 죽이려고 한 건가? 미친···’
타임머신 같은 게 있다면 연습경기 전으로 돌아가 멍청했던 자신의 턱주가리에 펀치를 날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