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47)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46화(47/412)
#46. 준영아, 보고 있니?
내가 첫 계약팀으로 시애틀을 선택한 것도, 그리고 FA자격을 얻은 후 클리블랜드를 선택한 것도, 솔직히 말하면 모두 돈 때문이었다.
계약을 위해 접근하는 구단들에게 내가 해준 말은 딱 하나뿐이었다.
Show me the money.
어차피 내 입장에서는 애정 같은 걸 가질 이유가 하나도 없는 남의 나라 야구팀이다.
나는 그저 내 성적과 그에 따라오는 돈을 위해 게임을 뛰었다.
하지만 나를 영입한 그 팀 팬들의 생각은 조금 달랐던 거 같다.
아무리 팀에 대한 충성도가 부족하고, 팀 성적보다는 개인의 명예를 위해 뛰는 게 뻔히 보인다 해도 밥 먹듯이 완투를 하고 홈런을 쳐내는 선수를 마냥 미워하기는 힘들다.
그래서일까.
팬들은 내가 팀에 애정을 갖고 있다고 믿고 싶어 했으며, 개인 성적 부진으로 고민하는 나를 팀의 미래를 걱정하는 에이스의 모습으로 포장해주기도 했다.
뭐···
다 지난 일이다. 그리고 이제 와서 미안해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내가 입단한 시애틀은 창단 후 처음으로 월드시리즈에 진출하는데 성공했고, 클리블랜드는 무려 89년만에 월드시리즈 트로피를 들어올리기까지 했으니까.
좌우간 소속팀 자체가 약체이다 보니 나는 언제나 에이스의 무게를 짊어진 채 마운드에 올라야 했다. 적어도 부상으로 투수를 그만두기 전까지는 항상.
그래서 아주 잘 안다.
에이스로 살아간다는 게 정말 어렵다는 것 말이다.
팀이 연승 모드일 때는 그 연승이 끊기지 않도록 이어줘야 하고, 반대로 연패에 빠져 있을 때는 무조건 중간에서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줘야 한다.
에이스가 흔들리면 팀 전체가 흔들린다.
그라운드에 나서는 9명의 선수들에 대해 우열을 매길 수는 없지만, 투수와 타자를 모두 경험해본 입장에서 말하는 건데 그라운드의 주인공은 투수가 맞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지금 수원의 에이스 최경재는 더 이상 이 그라운드의 주인공이 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웃!”
내 홈런 한 방에 멘탈이 완전히 무너져버린 최경재가 맥스 워커와 조성오 선배에게까지 연달아 홈런을 허용하며 완전히 핀치에 몰렸다.
백투백투백 홈런. 여기서 한 방만 더 날리면 상대팀의 에이스를 조기 강판시킬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안치욱이 친 잘 맞은 타구는 수원 우익수의 슬라이딩 캐치에 걸리고 말았다.
“넌 어떻게 된 게 멘탈 터진 투수 공도 못 치냐?”
“···두고 봐라. 내가 꼭.”
수비 이닝을 준비하던 고참투수 이만식이 옅게 웃으며 한수혁과 안치욱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완전히 끝장났다 생각한 팀에 저 막내들이 입단한 후 참으로 많은 것이 변했다.
한수혁에 대해서는 뭐라 할 말이 없다.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장장 20년 넘게 야구를 하면서 단 한 번도 비슷한 놈조차 보지 못한 압도적인 재능.
처음에는 뭔가 막내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제 막 팀에 합류한 신인이 이 바닥에서 10년 넘게 구른 베테랑처럼 구는 게 어이없기도 했고, 나이로 따지면 조카뻘인 주제에 자연스레 다른 선배들을 내려다보는 눈빛에 기분이 좀 나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게 무슨 소용인가?
이 바닥에서는 실력이 곧 나이고 계급이다.
한수혁이 빠진 4경기 동안 전패를 하며 깨달았다.
이제 저 녀석이 빠진 워리어스라는 팀을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는 걸.
3번 유격수 자리에 한수혁 석자가 써 있지 않으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발이 벌벌 떨리는 지경에 왔다는 걸.
“수비라도 똑바로 해라. 안치욱.”
“···내가 3루 수비의 정석이 뭔지 보여주지.”
그 옆에 졸졸 따라붙어 다니는 안치욱이라는 놈도 하는 짓이 귀엽다.
처음 스프링캠프에서 봤을 때는 꽤나 엉망이었다.
스카우팅 리포트에서 읽은 바로는 정교한 타격으로 1-2루간 안타를 양산할 수 있는 좌타자라고 적혀 있었건만, 되도 않는 영웅 스윙으로 코치들의 뒷목을 잡게 했던 놈이다.
그러던 놈이 동기 한수혁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더니 꽤 많이 달라졌다.
조금씩, 조금씩 스윙이 간결해지더니 이제는 팀 내에서 스윙폼 하나만큼은 제일 예쁜 선수가 되어버렸다.
하긴, 생각해보면 달라진 건 저 놈만이 아니다.
술자리, 친목자리, 그 모든 걸 딱 끊은 채 마치 신인처럼 다시 뛰기 시작한 조성오 선배도 그렇고, 저기 2루 베이스 위에서 굳은 표정으로 발목을 풀고 있는 이창모, 지난 벤치클리어링 이후 유독 사이가 좋아 보이는 외야수들까지.
모든 이들이 변했다.
이만식은 그런 변화의 중심에 한수혁이 있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가끔 저런 선수들이 있다.
그 존재만으로 주변을 끓어오르게 만드는 이레귤러 같은 존재 말이다.
‘준영아, 보고 있니? 네가 생각하던 팀이 지금 여기 있단다’
이만식이 마음 속으로 예전 이 팀에서 함께 뛰었던 젊은 에이스 임준영에게 말을 걸었다.
누가 들으면 임준영이 죽은 걸로 착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그저 FA자격을 얻어 인천으로 팀을 옮겼을 뿐이다.
‘수혁이가 몇 년만 더 일찍 팀에 들어왔어도, 아니, 오강 그룹이 조금만 빨리 이 팀에서 손을 떼었더라면··· 그럼 준영이도’
몇년 전 자신과 함께 이 팀을 지키던 젊은 에이스 임준영과 황성민, 송기태, 그리고 한진우가 동시에 FA를 얻었을 때가 떠오른다.
팀 내 선수들, 그리고 팬들 모두 임준영만은 절대 놓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최하위권을 기록한 워리어스에서 유일하게 평균자책점 2점대를 기록한 에이스였고, 그 스스로도 워리어스에 남겠다는 의사를 거듭 밝혔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팀이 최하위를 기록한 그해 연말 구단 송년회.
구단주의 옆에서 아양을 떨며 아이돌 그룹 춤을 추는 황성민, 송기태, 한진우를 보는 순간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 구단주가 팀내 최고 투수인 임준영에게 말 한 마디 걸지 않는 걸 본 순간 머리가 어질어질해지는 것을 느꼈다.
‘선배, 저는···’
‘됐다. 준영아. 너라도 이 거지 같은 팀 탈출해야지. 인천에서도 열심히 해’
‘하지만···’
그렇게 이 워리어스에 모든 걸 바칠 각오였던 젊은 에이스가 허무하게 인천으로 떠났다.
다시 한 번 워리어스 왕조를 건설하겠다고 매일매일 스스로를 몰아 부치던 리그 최고의 투수가 타의에 의해 쫓겨나듯 이적했다.
그때부터였다.
이만식이 이 야구라는 스포츠에 흥미를 잃은 것이 말이다.
그저 먹고 살기 위해, 다른 동료들이 그렇듯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수동적으로 뛰었다.
‘준영아, 네가 있었으면 저 녀석들 보면서 정말 좋아했을텐데’
이만식이 고개를 들어 잠실야구장 상공을 바라보았다.
흘러가던 뭉게구름들이 한데로 뭉쳐 마치 임준영의 얼굴처럼 보였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임준영은 죽지 않았다. 그저 다른 팀으로 이적했을 뿐이다.
* * *
수원 커맨더스(원정) VS 서울 워리어스(홈)
스코어 0 : 3
투수 최경재
3회말 – 서울 워리어스 공격
투아웃
3번 타자 한수혁
1구 볼
2구 볼
3구 파울
4구 파울
5구 타격
좌중월 홈런 (비거리 : 135M)
﹂엌 또 터졌스요! 연타석!
﹂커) 시발··· 왜 또 거기서 높은 공을···
﹂커) 최경재 이 미친 놈아! 차라리 볼넷을 주라고!
﹂키야··· 멀리도 날아간다
﹂아 마음이 편안~ 해지는구나
﹂그래 이게 야구지
﹂이제 수혁이 빠지면 그냥 야구 보지 말아야겠다
﹂근데 또 싸움 나거나 부상당하면 어쩌냐? 암만 그래도 시즌 치르다 보면 빠질 날이···
﹂카르페디엠
﹂그게 뭐임?
﹂현재를 즐기라고
4번 타자 맥스워커
1구 타격
우중간 2루타
﹂ㅋㅋㅋ 최경재 완전히 멘탈 나간 듯
﹂오늘 높은 공만 던지다 계속 쳐맞네. 쟤 왜 저럼?
﹂커) 우리 에이스다 욕하지 마라 욕해도 우리가 할 거다 ㅠㅠ
﹂커) 시발 아까 낮은 공 사인에 계속 고개 저을 때부터 쎄하더니
﹂그동안 최경재한테 개털린 거 생각하면 이정도로는 안 된다
﹂투수 바꿀 거 같은데?
투수코치 마운드에 오름
투수교체
﹂엌 ㅋㅋㅋ 최경재 3회도 못 버티고 내려간다
﹂꺼억~ 낮에 먹은 고구마가 이제야 소화가 되는구나
﹂최경재 조기강판 당하는 거 처음 보는 거 같은데?
﹂ㅋㅋㅋ 예린이 누나 또 운다. 이번에는 감격의 눈물인 듯
﹂저 누나 한수혁 빠진 동안 경기장에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우리 여신님 미모 유지하려면 좋은 거만 보고 지내셔야 한다
﹂맞지, 한수혁 빠진 경기는 지금 생각해도 개끔찍했음
﹂아 한수혁 돌아오니까 모든 게 평온해진다. 내 마음도, 좆 같은 워리어스 야구도
* * *
“아이고, 우리 수혁이 덥지? 에어컨이라도 틀어줄까? 일단 이리 앉아. 여기 음료수도 하나 하고.”
“감사합니다. 감독님.”
“그래, 방금 수비할 때 오른쪽 무릎 살짝 불편해 보이던데 혹시 무슨 문제 있는 건 아니지?”
“아뇨, 거기 흙이 좀 파여 있어서, 들어오면서 심판한테 말해 놨습니다.”
‘아, 흙. 그래, 다행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경기 끝나고 나서 무릎 체크 한 번 해보자.”
“그러겠습니다.”
“좋아, 그래. 타순 돌아올 때까지 거기서 좀 쉬어. 에어컨 너무 센 것 같으면 자리 옮기고.”
부동심과 침묵을 최대 덕목으로 삼는 야구 감독이 1년차 신인을 바로 옆 자리에 불러 앉히고, 냉장고에서 음료수까지 꺼내다 주는 모습은 사실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니다.
아마 일반적인 팀 같았다면 고참들이 감독에게 불만을 품거나, 혹은 나를 따로 불러내 한 소리를 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덕아웃 분위기가 개판이라고 언론에 찌르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고.
하지만 이 팀이 신기한 건 아무리 팀 분위기를 망치던 놈들이 몽땅 쫓겨났다 해도 아무도 이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대상이 꼭 나여서가 아니다. 이대준 감독은 그 날, 그 날 잘한 선수들을 불러 이렇게 특별 대우를 해주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잘 한 선수가 칭찬을 받고, 못한 선수가 격려를 받는 것을 당연하게 느끼는 분위기.
보스라 불리지만 사실은 형님처럼 느껴지는 덕아웃의 최고 책임자.
어쩌면 지난 수년 간 쌓여 있던 쓰레기들이 한 방에 정리되고 아예 백지에서부터 다시 시작했다는 게 이런 분위기가 형성된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이 팀의 코치들이 대부분 외국인이라는 것도 한 몫을 하는 것 같고.
어쨌든 개인적으로는 이런 분위기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편이다.
스타플레이어 하나 없이, 조금은 중심에서 소외되었던 선수들이 힘을 모아 앞으로 나아가려는 워리어스에는 카리스마나 무게감보다는 이런 친근한 리더십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중에 이름값이 높은 선수들이 점점 늘어나면 상황은 조금 달라지겠지만.
“좋아, 조금만 점수 더 벌려보자. 가자!”
수원의 에이스 최경재가 3회 조기 강판당한 후 우리팀은 바뀐 중간계투를 상대로 석 점을 더 뽑아내며 7대 0을 만들었다.
비록 이만식 선배가 6회초 솔로 홈런을 맞고 마운드를 내려갔지만 여전히 우리는 7대 1, 여섯 점 차로 크게 앞서 있다.
세번째 타석에서 범타로 물러난 나는 이번 이닝 선두타자로 타석에 들어서게 되었다.
오늘 경기 내내 내게 말장난을 치던 포수에게 이번에는 내가 먼저 말을 걸어보았다.
“이번에는 정말 포심 주실 거죠?”
하지만 수원의 포수 정대한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음, 화가 난 건가.
굳이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데 계속 주절거릴 필요는 없다.
출장정지 복귀 첫 경기부터 또 싸우기도 싫고.
오늘은 그만 입 다물고 야구나 열심히 해야지.
그런데 그때 정대한이 정말 속상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경재가 많이 아파해.”
“네?”
“우리 경재, 네가 너무 많이 패서 아파한다고.”
정대한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온 순간 하마터면 소리 내어 웃어버릴 뻔했다.
세상에,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선후배를 떠나 상대팀 타자한테 이런 말을 하다니.
아까 첫 타석에서부터 느낀 거지만 그만큼 나를 편하게 생각하는 걸 수도 있고, 혹은 이 정대한이라는 포수가 내 생각보다 더 재미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
다른 팀 선수를 보고 친하게 지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이 사람이 처음이다.
“플레이!”
주심의 입에서 경기개시가 선언되었다.
오늘 2군에서 올라왔다는 수원의 중간계투는 공을 던지기 전부터 얼굴이 허옇게 질린 게 영 틀려 보였다.
방금 전 정대한이 한 말이 아직도 머리속에 남아서일까.
나도 모르게 입에서 쓸데없는 말이 툭 튀어나왔다.
“저 투수, 괜찮은 거 맞죠?”
“···너보다 형이야.”
“네, 알아요. 그냥 걱정돼서요.”
KBO에서 뛰기 시작한 후 상대 선수와 이렇게 말을 많이 해본 것 자체가 처음이다.
아예 입을 닫고 살 때는 몰랐는데 한 번 시동이 걸리니 이게 멈춰지지가 않는다.
타석에만 서면 양키 놈들과 거친 욕을 주고받던 예전의 버릇이 살아난 건지도 모르겠다.
물론 지금 나누는 대화는 욕이 아니라 친목에 가깝지만.
혹시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볼.”
바깥쪽으로 엄청나게 빠지는 볼이다. 포수가 따라가는 걸 포기할 정도로 어이없는 폭투.
음.
생각해보니 우리가 가을야구에 나가게 되면 무조건 수원하고는 한 번 만나게 될 것 같다.
기왕 에이스 멘탈을 터뜨린 김에 대미지를 좀 더 줘볼까?
내가 그냥 신인이라면 이런 소리를 한다는 건 말도 안 되겠지만.
뭐 어때?
황성민을 두들겨 패는 순간 착한 후배 코스프레 같은 건 어차피 물 건너 갔는데.
그냥 야구 존나 잘하고 싸가지없는 9개 구단의 공적으로 살아보지 뭐.
“선배님.”
“왜?”
“저희 구단주님이랑 저랑 친한 거 아시죠?”
“···그런데?”
“구단주님이 최경재 선배 올해 FA 풀리면 꼭 데려오고 싶으시대요. 꼭 좀 전해주세요.”
“뭐?”
따아악!
대답 대신 힘차게 배트를 휘둘렀다. 2루수 옆을 깨끗하게 꿰뚫는 안타.
1루로 달려가 주루코치에게 보호대와 장갑을 넘긴 후 다시 정대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방금 한 말은 몽땅 헛소리다.
그냥 다음에 우리랑 또 만날 최경재를 미리 좀 흔들어 놓으려는 트래시 토크 같은 거다.
그 투수의 몸값이 얼마나 될까?
수원에서 어떻게든 잡으려 할 테니 최소 4년 100억? 어쩌면 120억?
좋은 투수이기는 하지만 그 정도 돈을 줄 값어치는 없다는 게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대전의 류한결, 인천의 임준영 정도면 몰라도.
“수혁아! 한수혁!”
“수혁님!”
“네가 최고야! 진짜 너 때문에 산다!”
“씨발 진짜 다음부터는 절대 싸우지 마! 아니다, 그렇다고 맞지도 말고!”
1루 베이스와 가장 가까운 관중석, 그곳 안전망에 얼굴을 파묻듯이 한 팬들이 나를 향해 소리를 지른다.
그 소리에 최경재에 대한 상념이 어디론가 떠밀리듯 사라졌다.
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아들을 목마 태운 채 나를 향해 소리지르는 남성, 워리어스 저지를 맞춰 입은 젊은 여자들, 머리가 히끗히끗한 장년의 팬들.
그리고 얼굴에 안전망 자국이 나는 것도 모르는지 얼굴을 마구 부비며 울고 있는 민예린.
홈런도 아니고 고작 안타 하나를 쳤을 뿐인데, 저 사람들은 왜 이렇게 내게 큰 환호를 보내주는 걸까?
나도 모르게 그 사람들을 향해 몸을 돌리고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우와아아!”
“한수혁! 한수혁! 한수혁!”
“다치지 마! 싸우지도 마! 그렇다고 맞지도 말고!”
“네가 최고야!”
다시 한 번 엄청난 함성이 울려 퍼진다. 1루쪽 상황을 모르던 수원 선수들과 심판들이 깜짝 놀라 쳐다볼 정도로 큰 소리였다.
그 사람들을 향해 다시 한 번 손을 흔들어주려던 순간,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멈칫하고 말았다.
젠장.
예전에 내가 시애틀이나 클리블랜드 팬들의 환호에 이렇게 답을 해준 적이 있던가.
나 혼자 흥에 겨워 소리 지르고, 주먹을 내지른 것 말고 관중들의 환호에 이렇게 호응해준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헤이, 챔피언, 왜 그래? 표정이 안 좋은데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는 건가?”
“아뇨, 코치님. 괜찮습니다.”
내 표정이 이상했는지 1루 베이스 코치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묻는다.
괜찮다고 답해주었지만 사실 안 괜찮은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별 것도 아니고, 고작 팬들의 환호에 진심으로 대답해준 적이 있는지 그게 떠오르지를 않는다.
갑자기 기분이 확 나빠졌다.
안 되겠다.
이 거지 같은 기분이 날아갈 때까지 제대로 날뛰어 봐야겠다.
오늘 아주 수원 덕아웃에서 곡소리가 나게 해주마.
타다닷
투수의 손에서 공이 떠나는 순간 2루를 향해 스타트를 끊었다.
전력을 다해 달리는 내 등 뒤로 관중들의 함성소리가 다시 한 번 메아리쳤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