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52)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51화(52/412)
#51. 최고 VS 최고
‘으으음··· 성오 형 얼굴 많이 좋아졌네. 만식이 형도 그렇고···’
1회초 인천 레인저스의 공격이 삼자범퇴로 끝난 가운데 드디어 대전의 류한결과 함께 국내 최고 투수 1, 2위를 다투는 임준영이 친정팀을 상대하기 위해 마운드 위에 올랐다.
저 멀리 홈팀 덕아웃 앞에서 장난을 치고 있는 옛 동료들이 보인다.
지난 시즌만 해도 인천만 만나면 얼굴이 거멓게 죽곤 하던 선후배들이 활기찬 얼굴로 몸을 풀고 있다.
그 모습을 보는 임준영의 속마음은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착잡했다.
인천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지 횟수로 벌써 4년차지만 친정 팀의 유니폼을 보면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저도 모르게 눈가가 촉촉해진다.
“준영아, 오늘 컨디션은 괜찮고? 눈은 왜 그렇게 촉촉해? 하품이라도 한 거야?”
“아니, 괜찮아. 눈에 이거? 먼지가 좀 들어가서.”
“흐음···”
임준영과 벌써 4년째 호흡을 맞추고 있는 포수 손영진이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홈플레이트로 돌아갔다.
귀신 같은 놈이다.
동갑내기인 데다가 4년간 줄곧 배터리를 이루다 보니 이제 자신의 눈빛만 봐도 대충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리는 그런 놈이다.
괜히 포수를 마누라라고 부르는 게 아닌가 보다.
헤어진 옛 여친을 그리워하다가 마누라에게 딱 걸린 것 같은 기분이 된 임준영이 애써 복잡한 마음을 가다듬으며 투구준비에 들어갔다.
시간이 꽤 많이 흘렀다.
하지만 아직도 임준영의 마음은 저 멀리 워리어스의 덕아웃에 있었다.
“플레이볼!”
주심의 경기개시 사인과 함께 워리어스의 1번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2루수 이창모.
임준영이 워리어스를 떠난 후에 팀에 합류한, 그래서 서로 별다른 친분은 없는 선배다.
‘일단 몸 쪽 낮은 포심으로 가보자고’
끄덕
손영진의 사인에 임준영이 단 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시즌보다 타격이 조금 나아지기는 했지만 부상의 여파인지 여전히 몸 쪽 빠른 공에 약점을 가진 타자다.
슈웅
“스트라이크!”
허를 찔린 것인지, 아니면 일단 초구는 지켜본 것인지 이창모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아낸 임준영이 다시 포수와 사인을 주고받았다.
‘바깥쪽 높은 컷패스트볼’
요즘 들어 바깥쪽 공을 밀어처서 1-2루간 안타가 많이 나온다는 분석이다.
그렇다면 딱 좋은 미끼가 있다.
이창모가 좋아하는 바로 그 코스로 임준영이 던진 공이 날아갔다.
슈웅
딱
“아웃!”
148km/h 컷패스트볼에 이창모의 방망이가 따라 나왔다.
볼을 많이 보는 편인 이창모이기에 평소 같으면 참았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코스로 들어오는 포심까지 참아내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포심이라 생각하던 공이 타자 앞에서 변화를 일으키며 꺾여져 나갔고, 결국 배트 끝단에 맞은 공은 데굴데굴 굴러가 1루수의 글러브 안으로 들어갔다.
“좋아! 준영아!”
끄덕
상대하기 제법 까다로운 워리어스의 리드오프를 가볍게 잡아낸 임준영이 타석에 들어서는 다음 타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매지션스에서 건너와 주전 중견수 자리를 차지한 최민석. 발도 빠르고 타격도 괜찮고, 무엇보다 수비에 장점에 있는 선수.
역시 임준영과는 별 친분이 없는 선수다.
생각해 보면 워리어스는 이제 임준영이 알던 그 팀이 아니다.
1번부터 9번까지 라인업 중 임준영과 친분이 있는 선수라고는 1루수 조성오 선배와 좌익수 김수학 정도가 전부다.
많은 것이 변했다. 나도, 그리고 저 팀도.
따악!
“아웃!”
이번에는 한 가운데 포심이었다.
존 한 복판으로 날아 들어오는 포심에 최민석이 힘차게 배트를 내밀어보았지만 154km/h에 달하는 구속과 구위에 완전히 눌려버렸다.
어차피 임준영 정도 되는 투수에게 볼넷을 기대하는 건 무리라 판단해 빠른 승부를 갔지만 역부족이었다.
힘에서 완전히 밀려버린 최민석이 분한 듯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최근 상승세를 타고 있는 워리어스의 1, 2번 타자를 가볍게 잡아낸 임준영이 타석에 들어서고 있는 다음 타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한수혁이다.
이 바닥에서 십 수년을 굴러먹은 것 같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1년차 신인.
데뷔하자마자 리그를 거의 폭파시키다시피 하며 워리어스가 4위권을 유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상대 팀의 핵심 타자.
또 매지션스와의 벤치클리어링에서 주먹 세 방에 황성민의 이빨 세대를 발치 시켜버린 핵펀치.
‘흠’
임준영은 그 날 매지션스와 워리어스 사이의 벤치 클리어링 영상을 수십 번 돌려보았다.
예전부터 워리어스라는 팀을 좀 먹던, 결국 자신이 워리어스를 떠나게 만든 놈 중 하나인 황성민이 저 겁 없는 신인에게 걸려 걸레짝이 되는 게 얼마나 통쾌하던지.
평소 차분한 성격과 말투로 야구계에 신사라고 불리는 임준영이지만 그날만큼은 어찌나 신나는지 유튜브 영상에 댓글까지 직접 달았다.
﹂존나 시원하게 패는 듯
자신은 이제 워리어스 선수가 아니지만 매지션스와의 잠실 라이벌전은 언제 봐도 흥미진진하다.
하물며 워리어스가 매지션스를 이기고, 벤클에서조차 압살한 그런 경기는 더더욱.
아무튼 그건 그거고 당장은 저 겁 없는 타자를 상대해야 한다.
경기 전 감독과 투수코치, 포수, 그리고 자신이 참석한 가운데 워리어스 타자들에 대한 대책 회의가 열렸다.
거기서 한수혁에 대해 내린 결론.
주자가 없는 상황이면 볼넷을 줘도 좋으니 피해가고, 만약 주자가 있는 상황이면 보더라인에 걸치는 유인구로 승부할 것.
그 지침에 따르면 지금은 승부를 피해야 할 때다.
하지만.
‘그럴 수야 없지. 전 워리어스 에이스의 무서움을 보여주마’
현 시점 리그 최고의 타자이자, 정말 사랑했던 친정팀의 구세주이기도 한 저 한수혁이라는 선수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싶어졌다.
승부다.
‘야, 씨발 하지 마. 미친 놈아’
‘남자의 승부다. 말리지 마라. 마누라’
임준영이 승부구 사인을 내자 손영진이 기겁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손영진은 이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평소 얌전하고 중후하다는 소리까지 듣는 임준영이 한 번 뭔가에 꽂히면 절대 물러나지 않는다는 것을.
대전 팔콘스의 좌완 에이스 류한결과 함께 대표팀 1선발 자리를 다투는 저 인간이 사실은 세상 누구보다 다루기 힘든 꼴통이라는 걸.
‘하아···’
한숨을 크게 내쉰 포수가 마지못해 포수 미트를 내밀었다.
하긴, 이러니 저러니 해도 임준영은 이 나라를 대표하는 선발투수 중 하나다.
한수혁이라는 저 괴물과 한 번 붙어봐야 한다면 주자가 없는 지금이 적기일지도 모른다.
그런 포수를 향해 씨익 웃음을 보여준 임준영이 천천히 와인드업을 시작했다.
첫 키킹부터 시작해서 손에서 공이 떠나는 순간까지, 역대 국내 투수 중 가장 부드러운 폼을 가졌다고 평가받는 임준영이 현재 자신이 던질 수 있는 가장 자신 있는 공을 뿌렸다.
‘어디 한 번 받아봐라. 후배’
슈웅
최고 시속 156km/h에 달하는, 거기에 회전수까지 높아 체감속도는 더욱 빠르다는 임준영의 포심이 몸 쪽 낮은 곳을 향해 맹렬히 파고 들었다.
공이 손끝을 떠나는 순간 깨달았다.
방금 자신이 던진 공이 어쩌면 지금까지 그가 던진 모든 공들 중 최고일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하지만.
따아아아아악!
“커헉!”
자신이 혼신의 힘을 다해 던진 공이, 세상 그 어떤 타자가 와도 이건 못 칠 거라 생각했던 그 공이 엄청난 타격음과 함께 시야에서 사라졌다.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은 임준영이 그대로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보이지 않는다. 얼마나 높이 솟아올랐는지 타구가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깜짝 놀란 건 외야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야구공이 터지는 듯한 파열음이 들리자 곧바로 타구위치 파악에 나섰던 외야수들이 입을 떡 벌린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의 45도 이상의 각도로 솟아오른 타구가 어마어마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정도면 떨어지겠지, 이제 슬슬 내려올 때가 됐지.
하지만 한수혁이 때려낸 그 엄청난 타구는 마치 공에 엔진이라도 달려 있는 것마냥 계속 날아가더니 잠실야구장 좌측 외벽을 넘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 너, 너, 넘어갔습니다! 한수혁 선수가 친 타구가 잠실야구장 밖으로 날아가버렸습니다! 장외홈런! 정말 오랜만에 잠실야구장에서 장외홈런이 터졌습니다!
– 자, 보셨죠? 제가 아까 말씀드렸잖습니까. 저런 선수를 경험이 부족하다고 WBC 대표팀에 안 뽑는다고요? 뭐, 국민들에게 맞아죽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무방하겠네요
“그래! 이게 야구지!
“국가대표 에이스가 뭐냐! 한수혁, 네가 최고야!”
“우와와! 오빠! 오빠! 나 미쳐! 진짜 미쳐!”
“한수혁! 한수혁! 한수혁!”
아나운서와 해설자의 입에서 연신 한수혁에 대한 찬가가 흘러나왔다.
홈팀 관중석에서 잠실야구장이 떠나갈 듯한 엄청난 함성이 쏟아졌고, KPOP의 여왕이라는 어떤 가수는 그 엄청난 성량을 이용해 소리를 꽥꽥 질러 대고 있었다.
그제야 자신이 말도 안 되는 홈런을 맞았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 임준영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이런 씨발···”
* * *
대전의 좌완 류한결, 수원의 좌완 최경재, 광주의 좌완 양지호.
좌 투수 일색인 국가대표 선발진에서 거의 유일한 우완 투수인 임준영.
올 시즌이 끝나면 해외진출 자격을 얻는 류한결과, 두번째 FA자격을 취득하게 되는 임준영을 노리는 빅리그 스카우터가 하나 둘이 아니라고 한다.
실제로 류한결은 예전 삶에서 빅리그에 진출했었다.
조성오 선배의 말처럼 현 시점에서 리그 최강팀, 그리고 그 팀의 최고 에이스와의 대결이다.
기분 좋은 긴장감이 온 몸을 지배한다.
나도 모르게 뿜어져 나오는 승리에 대한 갈망에 몸속 아드레날린이 마구 분비된다.
“플레이!”
주심의 콜과 함께 임준영이 천천히 투구준비에 들어갔다.
내가 투타 겸업을 하며 얻게 된 가장 큰 소득이라면 타자와 투수의 입장을 동시에 이해하게 됐다는 점일 것이다.
오늘 그의 얼굴에는 컨디션이 안 좋을 때 나타난다는 코주름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저 투수의 컨디션이 상당히 좋다는 뜻이다.
내가 워리어스에 입단한 후 만난 가장 어려운 상대, 심지어 그 상대의 컨디션이 좋다는데 왠지 기분이 더 좋아졌다.
잔잔하기만 했던 임준영의 표정이 점점 승부욕으로 물들어간다.
마운드에서 나를 바라보는 임준영의 표정은 아주 오래전 내가 마운드 위에서 상대 타자를 노려보던 그것과 아주 많이 닮아 있었다.
나는 투수가 저런 표정을 한 후 어떤 공을 던지는지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는 절대 나를 피하지 않을 것이다.
최고 구속 155km/h를 넘나드는 국내 최고 수준의 포심, 그리고 그 포심과 거의 구속차가 나지 않는 컷패스트볼.
여기에 간간히 던지는 체인지업과 커브까지.
그 중 최고를 꼽는다면 역시 포심이다. 임준영이라는 투수를 대표하는 시그니처 같은 구질.
하이 패스트볼을 거의 던지지 않는다는 전력분석팀의 자료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렇다면 낮은 공을 노린다.
그립을 낮게 조절하고, 오른쪽 발에 살짝 무게중심을 더 두고, 거의 티가 나지 않을 정도의 오픈 스탠스를 취한 후 타이밍은 155km/h 정도에 맞춰서.
슈웅
생각보다 조금 더 낮은 코스로 공이 날아온다.
그 공을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임준영이 얼마나 대단한 투수인지 말이다.
하지만.
따아아아아악!
나는 이보다 더한 괴물들이 날뛰는 곳에서 15년을 버티던 사람이다.
무릎 근처로 날아오다 중력에 의해 가라앉으려는 포심을 힘차게 걷어 올렸다.
오른쪽 무릎이 거의 땅에 닿을 정도로 자세를 낮추고, 마치 골프공을 퍼올리듯.
그렇게 때려낸 공이 잠실야구장 상공을 비행한다.
멀리, 멀리, 아주 멀리.
엄청난 포물선을 그린 타구가 외야 관중석 최상단을 넘어 기어코 잠실야구장 외벽을 넘어가는 순간.
“우와와와와와와와!”
아주 잠깐 정적에 빠져 들었던 관중석에서 일제히 함성이 발사되었다.
야구장이 뒤흔들릴 정도로 엄청난 관중들의 환호와 박수.
“한수혁! 한수혁! 한수혁!”
“미쳤다! 진짜 넌 미쳤어!”
승부 후에 들려오는 관중들의 함성은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한다.
그 짜릿한 감각을 즐기며 아주 천천히 그라운드를 돌았다.
1루를 돌아 2루로, 다시 3루로, 홈으로 들어와 대기타석에 있던 맥스와 하이파이브를 한 후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임준영과 눈이 마주쳤다.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 속에서 이글이글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굳이 말로 대화를 나눌 필요도 없었다.
그도 알고, 나도 안다.
비록 첫 타석의 승자는 내가 되었지만 우리 둘 사이의 승부는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걸.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