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53)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52화(53/412)
#52. 인간이 맞는 건가
나이를 좀 먹은 야구인들 중에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혼을 담아서 던져라. 투수가 던지는 공에는 혼이 담겨야 한다.
좋은 말이다. 조금 구닥다리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한 번쯤 곱씹어볼 필요가 있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가끔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예전 일본 프로야구의 전설적인 투수인 미나가와 무츠오가 신인 시절 볼 판정에 항의하자 당시 심판이 그에게 ‘혼이 담겨 있지 않아 볼’이라는 말을 했다는 일화가 있다.
뭐, 툭하면 기백, 혼,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는 나라답다.
어쨌든 그 말을 들은 미나가와가 각성해서 대투수가 되었다는, 그런 훈훈한 이야기로 끝나는데.
그건 그냥 개소리다. 볼 판정은 컴퓨터처럼 정확해야지, 혼이 뭔 상관인가.
말이 좀 옆으로 샜는데, 투수가 던지는 공에는 그 선수의 혼까지는 아니더라도 많은 것이 실리게 마련이다.
투수로서의 자존심, 십 년 넘게 해온 야구에 대한 자부심, 가끔은 이번 달 말까지 상환해야 할 대출이자, 혹은 아들내미의 학원비 등등.
그런 여러 가지 의미가 담긴 공이 타자의 배트에 맞아 까마득히 사라져버릴 때 투수가 무슨 생각을 할지,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한수혁 나이스!”
“잘했어!, 한 방 먹여줬구나!”
지금까지 오랜 경험으로 미뤄볼 때 나에게 거대한 홈런을 얻어맞은 투수들의 반응은 둘 중 하나다.
예전 수원의 최경재처럼 나랑 눈을 마주치기도 힘들 정도로 위축이 되거나, 혹은…….
“준영이 저놈 제대로 열 받았네. 크크.”
“그러게요. 저거 승부욕이 장난 아닌 놈이라.”
“수혁아, 다음 타석에서 혹시 또 한 방 치게 되면 제대로 된 빠던 한 번 보여줘라. 오늘 준영이 공 치려면 멘탈부터 박살 내놔야겠다.”
“…준영 선배랑 친하시다면서요?”
“친한 건 친한 거고. 흐흐, 빠던 했다고 후배한테 빈볼 던질 놈은 아니니까 마음껏 한번 해봐. 대신 오늘 끝나고 준영이랑 같이 한잔하는 거다. 넌 술 안 마시니까 탄산수라도 마시던지.”
임준영, 저 사람처럼 더 활활 불타오르거나.
* * *
2회초 인천의 공격이 득점없이 끝난 가운데 다시 2회말 워리어스의 공격.
선두타자로 나섰던 조성오 선배가 3구 만에 2루수 땅볼로 물러나더니 헛웃음을 지으며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쟤, 오늘 공이 더 미쳤네.”
“진짜 저러다 메이저리그까지 터뜨리는 거 아냐, 정말?”
마운드 위에 선 임준영 선배의 얼굴이 마치 술이라도 한 잔 한 것처럼 벌겋게 달아올라 있다.
아직까지도 1회 때 내게 얻어맞은 거대한 홈런의 잔상이 남아 있는 탓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첫 타석에서 때려낸 홈런은 운이 살짝 따랐다.
배트가 나가는 순간 약간 빗맞을 거 같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공 끝이 생각보다 더 좋은 덕에 오히려 정타가 되었다. 물론 그게 장외로 넘어갈 거라고는 나조차도 생각 못 했지만.
저런 투수가 왜 내가 회귀하기 전에는 빅리그에 도전하지 않았던 걸까?
국가대표팀에서 딱 한 번 같이 뛰었던 임준영은 인천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워리어스가 해체되었으니 돌아갈 집이 없어졌던 걸까.
그래서 그냥 다 포기하고 인천에 주저앉았던 걸까? 혹은 인천이 거부할 수 없을 만큼의 큰돈을 줬던 걸까?
나로서는 그 이유를 알 방법이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방금 전 내게 던진 154㎞/h짜리 몸 쪽 낮은 포심을 자유자재로 컨트롤할 수 있다면 메이저리그에 가서도 충분히 통할 거라는 점이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하.
고작 송기태랑 황성민을 잡겠다고 저런 투수를 놓친 거라고?
내 배다른 형이라는 놈은 대체 뭐 하는 새끼일까?
올해가 인천과의 계약 마지막 해라는데… 만약 빅리그를 포기하고 우리 팀으로 다시 돌아오라고 하면 어떻게 반응할까? 미친 소리 하지 말고 꺼지라고 하려나?
저런 투수를 영입하려면 자금력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까지 사는 작업이 필요하다. 또 운도 따라줘야 하고.
빅리그에서 오퍼가 오고, 거기에 국내 10개 구단이 전부 달려드는 상황이 벌어지면 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을 수도 있다.
음.
일단은 경기부터 끝내고 생각하자.
오늘 까딱하면 내가 친 홈런이 마지막 득점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으니.
“자, 수비 가자.”
“준영이 진짜 불타오르네. 2회부터 전력투구라니.”
“저놈 원래 어깨 하나는 타고났잖아. 저러고도 7회 이상은 충분히 던질 거다. 자, 브룩스. 오늘은 너만 믿어. 트러스트 유. 베리베리 굿 피칭. 무브무브!”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임준영이 조성오 선배에 이어 6번 안치욱과 7번 강진석 선배를 연속 삼진으로 잡아냈다.
그러고도 뭔가 성에 차지 않는지 씩씩대며 인천 덕아웃으로 돌아가고 있다.
음.
포스 장난 아닌데.
볼수록 탐난다.
너무너무 갖고 싶다.
얼마면 될까, 응? 얼마면 되는 거냐고.
* * *
“…선배님, 저기 이거 드십쇼.”
“응? 아, 그래. 고마워.”
1회 한수혁에게 솔로 홈런을 내주기는 했지만 2회말을 삼자범퇴로 막아낸 임준영.
그럼에도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건지 콧등을 잔뜩 찌푸린 채 벤치에 앉은 그에게 인천의 선수 누구도 말을 걸지 못했다.
가뜩이나 예민한 선발투수들, 그중에서도 특히나 에고가 강한 임준영이기에 이럴 때는 배터리를 이루는 포수조차 웬만하면 그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단 한 사람, 지금 이온음료를 건네고 있는 앳된 얼굴의 중간계투 투수 말고는.
“선배님, 오늘따라 공이 더 좋으신 거 같습니다.”
“좋긴, 시작하자마자 한 방 맞았는데.”
“그건…….”
한수혁이 워낙 괴물 같은 놈이라서 그런 거 아니냐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다 쑥 내려갔다.
왠지 그 말이 위로가 되지 않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팀 내에서 임준영이 가장 총애하는 후배이자 이 팀의 중간계투로 쏠쏠한 활약을 하고 있는 김용재가 마음 속에 있던 말 대신 다른 말을 꺼내 들었다.
“제가 보기에는 저 녀석이 운이 좋았던 거 같습니다. 홈런 맞을 공이 아니었어요.”
“됐어. 야구는 결과론이야. 내가 진 거야.”
별 것 아닌 말 한마디였다.
그런데 그 말을 뱉는 순간 임준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꼈다. 방금 전까지 가슴을 꽉 누르던 무언가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졌다. 분명 첫 번째 타석에서는 자신이 졌다.
설마 그걸 때려내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국가를 대표하는 투수들이 즐비한 국가대표팀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것이 바로 자신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패스트볼 구위만큼은 자신이 최고라고 자부하고 있다.
마침 제구도 완벽했다.
우투수가 우타자의 몸 쪽 낮은 곳으로 바싹 붙인 포심을 때려내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한수혁이라는 저 미친 후배가 그걸 해냈다.
저놈이 오른쪽 무릎을 거의 꿇다시피 하며 낮은 코스 포심을 억지로 걷어내는 순간, 지난해 미국 대표팀과의 올림픽 8강전에서 맞은 홈런이 떠올랐다.
저건 엄청난 코어 힘과 배트 컨트롤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스윙이다.
국내에 저런 스윙이 가능한 타자가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흐흐.”
“…선배님?”
“용재야, 네가 보기에 저 한수혁이라는 놈 어떤 거 같냐? 투수로서 말이야.”
“한번 붙어보고 싶은 상대라고 생각합니다.”
“진짜? 그럼 내가 무사 만루 만들어 놓고 한수혁 타석에서 너랑 교체해 달라고 할까?”
“…그건.”
“농담이다. 아무튼 용재야.”
“네, 선배님.”
“형이라고 부르라니까.”
“알겠습니다, 형님. 제가 자주 깜빡깜빡해서.”
“됐고, 저 한수혁이라는 놈 잘 봐둬. 저 녀석이 곧 KBO를 지배하게 될테니까.”
“…….”
“너도 앞으로 중요한 순간에 저놈 많이 만나게 될 거야. 그러니까 내가 승부하는 거 잘 봐둬.”
“…네.”
“농담 아니야. 다음 타석에서 저 녀석 상대할 생각하니까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린다.”
김용재의 시선이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선배 임준영에게로 향했다.
그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자신은 안다. 임준영이라는 투수가 언제 저런 눈빛을 하는지.
KBO를 대표하는 최고의 투수 중 하나인 임준영이 한수혁을 완벽한 대전 상대이자 경쟁 상대로 인식하고 있다는 걸 김용재는 깨달았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김용재는 왠지 한수혁이 부럽게 느껴졌다.
* * *
인천 레인저스(원정) VS 서울 워리어스(홈)
스코어 0 : 1 노아웃
레인저스 투수 임준영
4회말 – 서울 워리어스 공격
2번 타자 최민석
1구 스트라이크
2구 볼
3구 스트라이크
4구
몸에 맞는 공
1루로 출루
└요즘 들어 느끼는 건데 최민석 진짜 잘 데려온 듯
└ㅇㅇ 송기태 주고 최민석 받아왔으면 진짜 개혜자임
└ㅋㅋㅋ 임준영 쟤 열 받았다
└방금 거는 솔직히 피하려면 피했지. 최민석이 저런 얍삽한 거 잘함
└그나저나 송기태는 요즘 뭐 함?
└저번 벤클 이후 타율 1할대 꼬라박고 2군 갔음
└정기호도 2군에만 처박혀 있다더만 결국 우리 팀에서 간 애들 둘 다 2군이네? ㅋㅋ
└매) 씨발 이 개새끼들아 트레이드 사기 친 거 물려줘
└매) 어디 송기태 같은 폐급 던져주고 최민석을 뺏아가? 내놔 돌려달라고
└우리 인천이랑 경기 중인데 왜 매지션스가 튀어나옴?
└꺼져 주전 유격수 오토바이 타다가 무릎 작살나서 송기태 모셔갈 때는 언제고
└솔직히 최민석도 매지션스 계속 있었으면 SNS에 지 댄스 영상이나 올리면서 관종짓이나 했을 듯. 워리어스 와서 정신 차린 거지
└맞음 쟤 매지션스 통산 타율이 0.210인가 그렇잖아
└탈매 효과 죽이네
└매) 씨발 4년째 가을야구도 못 가는 놈들이
└응, 32년째 한국시리즈 무관
3번 타자 한수혁
└임준영 왜 저렇게 땀을 흘리냐. 아직 여름 오려면 멀었는데
└어디 원수라도 만났냐. 눈빛이 왜 저래?
└쟤 원래 감정 표현 잘 안 하는데
└첫 타석에 홈런 맞은 게 너무 충격이 컸나 ㅋㅋㅋ
1구 볼
2구 스트라이크
3구 볼
└임준영 혼자 WBC 결승전 치르는 중?
└겁나 집중하네… 왜 저러냐, 무섭게
└저게 바로 혼이 실린 투구라는 것인가
4구 타격
우익수 방면 2점 홈런(비거리 125M)
1루 주자 홈인
타자 주자 홈인
인천 레인저스 0 : 서울 워리어스 3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터졌스요!
└속이 뻥
└와 진짜… 와… 저건…
└이거 분명 KBO인데 왜 메이저리그 보는 거 같냐
└방금 거의 한 손으로 친 거 아님
└맞음 바깥쪽으로 빠져나가려는 거 한 손 놓고 그대로 후려쳐버림
└미친… 저게 진짜 가능한 거냐
└레) 야 이 개새끼들아 양심 있으면 한수혁은 빼고 하자
└레) 저게 인간 새끼냐 어? 한 손으로 홈런 치는 게 인간 맞냐고
└레) 이거 무조건 약물 검사해 봐야 함
└꺼져 병신들아 안 그래도 너희 같은 놈들 때문에 우리 수혁이 하루 걸러 하루 강제 헌혈 중
└임준영 뺏어간 거 생각하면 아직도 열받으니까 우리 앞에서 함부로 입 놀리자 마라
└씨발 진짜 트럭으로 인천 구장 정문 가서 들이받는 수가 있으니까 개소리 하지 말라고
└레) 이 새끼들 진짜 살벌하네;;; 야, 임준영 우리가 정당하게 FA로 사온 거야. 착각하지 마
└씨발 그러니까 더 열받지 아무튼 나대지 마라. 우린 잃을 게 없는 몸이다
* * *
“고동식 위원님. 방금 한수혁 선수의 홈런, 어떻게 보셨습니까?”
“두 눈으로 아주 잘 봤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흠, 제 나름의 농담이었고요. 죄송합니다. 하나도 안 웃겼군요. 본론으로 돌아가서 방금 한수혁 선수의 타격은 힘과 기술이 집약된 최고의 홈런이었다 그렇게 평가하고 싶군요.”
지난 특집 방송에서 한수혁을 빨아준 후 SNS 팔로워 숫자의 급증과 각종 방송 출연 요청이 늘어난 고동식 위원은 이제 한수혁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좀 더 자세한 설명 들을 수 있을까요?”
“네, 화면 보시죠. 가운데로 들어오던 공이 바깥쪽으로 휙 꺾이죠? 저게 바로 임준영 선수가 자랑하는 컷 패스트볼입니다. 보통 저런 공이 들어오면 배트의 끝에 맞고 범타가 되는 경우가 99%거든요.”
“99%요?”
“네, 99%. 어쩌면 100%. 아무튼 처음 스윙을 시작했을 때는 분명 포심 궤적에 맞춰져 있었거든요. 그런데 컷패스트볼인 걸 깨닫은 순간 왼손을 슬쩍 놓고 오른손으로 스윙의 방향을 수정했습니다. 그렇게 배트 중심에 맞은 공이 훨훨 날아서 우측 담장을 넘겨버린 거죠.”
“뭔가 굉장히 심오하군요.”
“당연하죠. 사실 이런 홈런은 메이저리그에서도 쉽게 나오는 게 아닙니다. 순간적인 판단력과 기술, 거기에 엄청난 손목 힘이 더해져야 가능하거든요. 제가 직접 측정해 보지는 못했지만 아마 한수혁 선수의 손목 힘은 메이저리그 선수들을 통틀어도 최고라고 확신합니다.”
“하하… 세계 최고라, 말만 들어도 저도 기분이 좋아지네요. 그나저나 오늘 임준영 선수가 한수혁 선수에게만 홈런 2방을 허용했습니다.”
“네, 하지만 딱히 임준영 선수 컨디션이 나빠 보이지는 않습니다. 평소 우리가 알고 있는 국가대표 선발투수 임준영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하긴 그런 임준영이니까 최근 투수들이 승부를 피하는 한수혁 선수에게 정면 승부를 건 것이겠죠.”
“물론이죠. 에이스로서 자존심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게다가 임준영 선수로서는 한수혁 선수에게 묘한 감정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어떤 감정인가요?”
“임준영 선수의 친정팀이 워리어스잖아요? 저 팀이 암흑기를 걷는 동안 에이스로서 팀을 지탱한 임준영으로서는 이제 막 워리어스에 입단해 불꽃을 태우고 있는 젊은 후배에게 여러모로 복잡한 감정이 들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긴 임준영 선수가 워리어스를 떠날 때 정말 많이 아쉬워했죠.”
“네, 그때 생각하면 정말 가슴이 찢… 아무튼 전 워리어스의 에이스와 현 워리어스의 에이스 사이의 투타 대결은 현재까지 한수혁 선수가 압도적으로 앞서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