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54)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53화(54/412)
#53.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어젯밤, 현 시점 리그 최강팀과 그 팀의 에이스를 상대할 생각에 잠을 못 이루던 이대준 감독은 문득 그런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선수들을 지휘하는 야구 감독, 그리고 병졸들을 통솔하는 전쟁터 장수의 모습이 꽤 닮지 않았나 하는 그런 생각.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최강팀 인천, 그중에서도 최고라 할 수 있는 임준영을 향해 돌격 명령을 내린다는 건 상당히 심장 떨리는 짓이었다.
자칫하면 휘하 병졸들이 모두 몰살당할 수도 있는 그런 무모한 작전.
하지만 1회에 이어 4회, 한수혁이 두 번째 홈런을 때려내는 순간 이대준은 깨달았다.
자신이 지휘하는 병졸들 중에 여포가 하나 끼어 있다는 사실을.
저쪽에 어떤 적이 튀어나오던 타고 있는 말과 함께 두 동강 내버릴 수 있는 무적의 전사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보스, 우리가 앞서가게 되었군요. 불펜에는 누굴 준비시킬까요?”
“어? 어, 그래요. 일단 정수랑 영식이, 그리고… 기철이도 몸을 풀라고 하세요.”
“탁월한 선택이군요.”
아직까지도 영 사이가 어색한 금발 머리 투수코치의 부름에 이대준 감독의 상념이 깨어졌다.
이번 시즌 처음으로 워리어스를 지휘하게 된 이대준은 하루하루가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1,500여 일 만에 1위 자리에 올랐을 때야 뭐 두말할 필요도 없었고, 한수혁이 빠진 후 4연패를 당했을 때는 또 다른 의미로 그러했다.
한 발만 잘못 딛으면 바로 지옥으로 떨어지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랄까.
‘음.’
그 생각을 떠올린 순간 이대준은 자신이 한수혁을 믿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광적으로 의지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솔직한 말로 한수혁이 없으면 자신도 사표를 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진짜 수혁이가 없을 수도 있잖아?’
되도 않는 상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한수혁이 장기 부상을 당해 병원에 드러눕는 생각, 혼자서 매지션스 놈들 아홉 명을 다 때려 눕히고 100경기 출장 정지를 먹는 생각…….
‘안 돼!’
순간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예전에 잠깐 앓았던 갑상선기능항진증이 재발한 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다행히 병은 아니었다.
투런 홈런을 치고 돌아온 한수혁이 벤치에 돌아와 자신의 옆에 털썩 주저앉는 순간 그 떨림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순간 이대준 감독은 자신을 가르친 은사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아주 오래전 대학을 막 졸업한 이대준 감독이 처음 워리어스에 입단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 시절 이대준은 세상 무서울 게 하나도 없는 거물급 신인이었다.
타자로는 역대 최고액이던 5억 원의 계약금을 받고 워리어스의 유니폼을 입었다. 서울보다 비쌌던 분당의 30평 아파트 가격이 2억이던 시절이다.
데뷔전에서 홈런을 쳐냈고, 전반기가 끝난 무렵에는 3할에 15홈런을 치며 팀의 3번 타자 자리를 꿰차게 되었다.
그런 이대준을 당시 워리어스 감독은 무척이나 싸고 돌았다.
무뚝뚝한 성격 때문에 팀 내 고참들하고 갈등이 생기면 감독이 직접 나서 문제를 해결해줬고, 경기장 밖에서 취객과 시비가 붙었을 때는 구단 직원 대신 감독이 직접 경찰서까지 찾아와 허리를 숙이기도 했다.
친아들이라 해도 그렇게까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대준은 그것이 그저 그 감독의 천성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수혁아, 이거 네가 전에 말한 음료수 브랜드 맞지?”
“네? 아, 감독님. 감사합니다. 저 아무 거나 마셔도 상관없습니다.”
“아냐, 아냐. 그래서야 쓰나. 협찬이고 나발이고 싹 무시하고 앞으로 네 음료는 이걸로 준비하라고 해뒀다. 음, 가만있어 보자. 아예 한수혁 전용 냉장고를 만들어줄까?”
“네?”
임준영의 압도적인 호투에 워리어스 타자들이 찍 소리도 못 하고 눌려 있는 가운데 홀로 홈런 두 방으로 석 점을 따낸 괴물 타자.
“수혁아, 혹시 테이프 있으면 좀 빌려줄래? 배트 테이핑 좀 다시 해야 할 거 같아서.”
“음, 있긴 있는데 제가 그걸 어디다 뒀…….”
“잠깐! 야, 최민석. 그걸 왜 여기 와서 찾아? 훠이, 저쪽으로 가서 찾아보던지.”
“네? 감독님, 제가 뭘…….”
“됐고, 수혁이 쉬는 거 방해하지 말고 다른 데 가서 해결해.”
“…….”
다른 선수들이 조금 섭섭해한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이 팀을 지켜야 할 귀하신 몸이다. 혹시나 테이프를 찾다가 허리라도 삐끗하면 그건 대체 누가 책임진다는 말인가?
이제야 알겠다. 예전 자신이 현역 시절 감독님이 자신을 왜 그리 아끼고 챙겨줬는지.
자신이 감독이 되어서야 그 마음을 알게 되었다.
팀의 운명을 책임질 선수를 감독은 무조건 싸고 돌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감독님… 정말 감사했습니다. 언제 한번 꼭 찾아뵙겠습니다. 그곳은 편안하시죠?’
이대준이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허공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참고로 이대준을 가르쳤던 감독은 아직 죽지 않았다.
KBO 원로 자리에 올라 좋은 대접을 받으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뿐이다.
* * *
내 홈런 두 방으로 3 대 0으로 앞서 나가던 워리어스는 6회초 선발 브룩스 파커가 인천의 포수 손영진에게 무사 만루에서 싹쓸이 2루타를 맞으며 동점을 허용하고 말았다.
뭐, 방금 공은 브룩스의 실투라고 해도 무방한 그런 공이었다.
구위보다는 제구력과 무브먼트로 상대를 살살 꼬셔내는 브룩스가 딱 한 번 마음먹고 던진 하이패스트볼을 손영진은 놓치지 않았다.
순식간에 3 대 3 동점. 거기에 무사 주자 2루.
위기의 순간, 모두의 시선이 워리어스의 불펜 쪽으로 향했다.
그나마 인간같이 던지는 선발투수들에 비해 믿음이라고는 단 한 톨도 줄 수 없는 워리어스의 중간계투진, 과연 그들 중 누가 이 절대절명의 위기에 등판할 것인가.
이대준 감독은 여기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카드를 꺼내 들었다.
부산 타이탄스에 한진우를 보내고 대신 받아온 2년 차 투수 양기철을 마운드에 올린 것이다.
웅성웅성
누군지도 모를 투수의 등장에 관중석이 술렁거렸다.
그리고 우리 야수들은 그 새로운 투수를 다독이기 위해 마운드로 위로 모였다.
“기철아, 편하게 던져. 어차피 수혁이가 다 잡아줄 테니까.”
“그려, 성오 형님 말씀대로 편하게 던져. 괜찮여. 한 방 맞으면 수혁이가 또 쳐주겄지.”
“네? 네, 넵. 그럼 전 수혁이 형만 믿고…….”
“정신 차려. 수혁이가 왜 형이야. 크크. 이놈 진짜 잔뜩 얼었네. 야, 수혁이 올해 입단한 신인이잖아.”
“아? 네, 그, 그렇죠? 제가 헛소리를.”
시범 경기 때 잠깐 1군에 올라온 걸 빼고는 줄곧 2군에만 있던 양기철의 눈동자는 썩은 동태 눈깔처럼 풀려 있었다.
이해는 간다. 이런 상황에서 첫 실전 등판이라니.
그런 양기철을 어르고 달래 어떻게든 공을 던질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조성오 선배가 내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쟤 좀 도와줘라. 저러다 죽겠다.”
음…….
일단은 상당히 인상적인 외모 말고는 딱히 눈에 띄는 게 없다.
한진우와 양기철의 트레이드를 추진한 박재철 단장의 말로는 2년 이내 괜찮은 중간계투가 될 투수라고 했는데…….
하지만 나는 양기철이 연습투구를 시작하는 순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 저 양반 알 것 같은데?
유난히 풀려 있는 눈동자 상태 하며, 긴팔 원숭이 같이 흐느적거리는 두 팔, 도저히 관리가 불가능해 보이는 저 악성 곱슬 머리, 거기에 썰면 두 접시는 나올 거 같은 두툼한 입술.
아! 그 투수 이름이… 얭? 양기철, 저 사람이 그 얭이라고?
내가 메이저리그에서 마지막으로 사이영 위너가 됐던 8년 차 때의 일이었다.
날 죽이겠다고 덤벼들던 양키 하나를 줘 패고 5경기 출장 정지를 당한 상태였다.
팀은 원정 경기를 떠나고 나만 홀로 시애틀에 남겨진 상황.
집에만 있자니 몸이 근질거려서 구장에 나와 몸을 풀고 있는데, 평소 내 편을 자주 들어주던 출입 기자 하나가 뭔가를 보여주었다.
내셔널 리그에서 얼마 전 데뷔한 동양인 투수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 기자가 건네 준 태블릿 속에는 말린스 유니폼을 입은 괴상망측하게 생긴 동양인 투수 하나가 말도 안 되는 투구폼으로 이상한 공을 던지고 있었다.
‘…이 친구 누굽니까?’
‘하핫, 역시 한수혁 선수가 관심을 보일 줄 알았습니다. 한국에서 왔다더군요. 부산이라는 팀에서 방출당하고 트라이아웃을 통해서 말린스에 들어간 모양인데 이게 빅리그 첫 등판이었답니다. 어떤가요? 이 투수, 앞으로 빅리그에서 적응할 수 있을까요?’
기자가 내게 그 영상을 보여준 이유는 그거였다.
같은 한국인 투수로서 이 괴상한 친구가 빅리그에서 먹힐까에 대한 호기심. 혹시라도 내가 재미있는 멘트를 던져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
그런 기자를 향해 나는 퉁명스러운 대답을 던지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내가 뭐라고 했더라…….
저런 미미한 놈에게까지 신경을 쓰기에 너무 바쁘다고 말했던가?
흠.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이거 인성이 아예 없는 수준인데.
아무튼 그 선수의 등판에 Yang이라고 쓰여 있던 것이 기억난다.
그 뒤에 그 선수는 어떻게 됐냐고?
모르겠다.
어차피 리그가 달라서 말린스와 만날 일이 거의 없는 데다가 그 일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어깨 부상이 재발하며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으니까.
내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은 걸 보면 그렇게 그 투수의 빅리그 도전기는 흐지부지 되었던 거 같기도 하고…….
아무튼 그 끝이야 어쨌든 그 기자가 보여준 영상 속 Yang이라는 투수는 꽤나 재미있는 공을 던졌었다.
공을 던진 후 글러브 낀 손으로 땅을 짚어야 할 정도로 다이나믹한 투구폼.
그 반동에 힘입어 마치 채찍처럼 휘둘러지는 긴 팔, 거기서 튀어나오는 예측불허의 공들.
몸 쪽으로 공이 들어오는 줄 알고 타자가 뒤로 물러나는 사이 휙 궤도를 바꾸며 존 안으로 파고들던 그 슬라이더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가만…….
그럼 지금 우리가 한진우 그 폐급을 부산에 보내고 장래의 메이저리거를 데려온 건가?
미친.
박재철 단장 진짜 회귀자라도 되는 거야?
아니, 잠깐.
그것도 그거지만 저 양기철이라는 투수는 자기 투구 폼은 어디다 팔아먹고 저런 어정쩡한 오버핸드로 던지고 있는 거지?
부산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 * *
잠실에 모인 2만5천 명의 야구팬들, 그리고 TV로 경기를 보고 있는 수많은 시청자들이 모두 한수혁과 임준영의 대결에만 신경을 쓰는 사이.
여기 홀로 마운드에 올라 외롭게 떨고 있는 한 투수가 있었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3 대 3 동점 상황에서 마운드에 오르게 된 양기철이 썩은 동태처럼 보이는 눈에 억지로 힘을 꽉 주고 홈플레이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동태처럼 보이는 건 어렸을 때 앓은 황달의 후유증 때문이다. 결코 맛이 가 있는 건 아니다.
아침에 한 시간 동안 드라이를 해서 열심히 폈건만, 땀 조금 흘렸다고 그새 멋대로 빠져나오기 시작한 곱슬머리가 너무 신경을 건드린다.
‘그냥 삭발을 해버릴 걸 그랬나… 아냐, 그러면 진짜 아프리카 토인처럼 보일 텐데.’
고개를 한번 흔든 양기철이 쓸데없는 잡념을 간신히 지워버렸다.
지금 이런 생각에 빠져들 때가 아니다.
올 시즌 첫 1군 등판이 하필 이런 접전 상황이라니, 심지어 상대 팀 마운드를 지키는 건 국가대표 선발투수 임준영이다.
‘덜덜덜’
그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갑자기 손발이 덜덜 떨려 왔다.
모르겠다.
대체 이 워리어스라는 팀은 왜 자신을 선택한 걸까?
아무리 최근 성적이 부진하다고 해도 몇십억을 주고 계약한 한진우를 보내고 하필 왜 나를 데려온 것인가.
그가 데뷔한 부산 타이탄스에는 성골과 진골이라는 팀 내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했다.
쉽게 말하자면 출신 고등학교에 따라 입단하자마자 계급이 결정된다는 뜻이다.
성골과 진골에 속하는 학교 출신 선수에게는 팀에 들어오자마자 같은 학교 출신 선배들과 프런트 직원, 코치, 감독, 심지어 단장까지 나서 집중 케어를 해준다.
하지만 그 밖의 학교 출신들은 그저 머릿수를 채우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같은 실력을 가졌다 해도 신분의 차이에서 오는 한계 때문에 좀처럼 위로 올라갈 수 없다.
당연한 말이지만 양기철은 성골과 진골,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굳이 계급을 부여하자면 노비와도 같은 존재였다.
처음 부산에 입단할 때만 해도 조금은 자신 있었다.
스스로 만들어낸 다이나믹한 투구폼에서 나오는 포심과 횡으로 흘러 나가는 슬라이더면 그래도 프로에서 몇 타자 정도는 잡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2군에서 처음 만난 투수코치는 그를 보자마자 바로 투구폼 변경을 지시했다.
‘야, 이 미친놈아. 공 던지면서 넘어지는 게 투수야? 네가 무슨 메이저리거라도 돼? 이 새끼 이거 안 되겠네. 너 나 따라와. 아주 뿌리부터 싹 뜯어고쳐 줄 테니까.’
온몸을 마치 팽이처럼 회전시키며 투구가 끝난 후에 넘어질 듯 휘청거리는 이 투구폼은 그를 유난히 아껴주던 고등학교 감독님과 함께 만들어낸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틀에 찍어낸 듯 선수들을 조련하는 고등학교 야구부 감독들과 달리 양기철의 은사는 과감한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보다 유난히, 아니, 엄청나게 긴 팔과 탄력 있는 허리 회전을 가진 양기철의 신체에 주목했다.
그대로 두면 프로 지명을 받기에 조금 애매한 기량. 결국 감독은 양기철과 면담 후 모험을 걸어 보기로 했다.
오래전 빅리그에서 뛰던 미치 윌리엄스라는 투수의 폼을 카피하기로 했다.
몸통에서 최대한 먼 곳에서부터 팔을 휘두르기 시작해 투구를 마친 후에는 반대쪽으로 몸의 중심을 완전히 옮기는, 남들이 보기에는 불안하기 짝이 없는 투구 폼.
그 폼으로 양기철은 고등학교 3학년 마지막 대회에서 나름 선전을 했고 결국 타이탄스의 지명을 받는 데 성공했다. 물론 그를 지명한 스카우터는 혹시 돈 받아먹었냐는 비아냥을 듣기는 했지만.
문제는 프로에 들어와서였다.
‘잘 들어, 이 새끼야. 너 투구 폼 제대로 바꾸기 전까지는 2군 경기에도 안 내보낼 거야.’
투수라면 모름지기 오버핸드로 던져야 한다는 지론을 가진 타이탄스 2군 투수코치가 달라붙어 양기철을 개조하기 시작했다.
그는 양기철의 신체적 특징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저 자신이 가르치는 2군 투수가 말도 안 되는 투구 폼을 사용할 경우 자신의 커리어에 흠집이 될 것이라는 생각뿐이었다.
양기철은 눈물을 머금고 투구폼을 변경했다.
그리고 결국 이도 저도 아닌 투수가 되어버렸고, 워리어스 박재철 단장의 지목을 받아 한진우와 유니폼을 바꿔 입게 되었다.
‘대체 왜 날…….’
심판이 빨리 공을 던지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풀리지 않는 그 의문을 가슴에 담은 채 양기철이 천천히 와인드업을 시작했다.
타격 부진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하위 타선으로 밀린 용병타자가 죽일 듯한 눈으로 양기철을 노려보았다.
장덕수 선배의 리드에 따라 일단 바깥쪽으로 공 하나를 빼 보기로 했다.
‘아차.’
그런데 시작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너무 긴장을 한 것인지 손에서 공이 미끄러지며 이도 저도 아닌 밋밋한 변화구가 한가운데로 몰린 것이다.
따악
배트 중심에 맞은 총알 같은 타구가 유격수 오른쪽을 향해 빛살처럼 쏘아져 나간다. 맞는 순간 안타임을 직감할 수 있는 그런 타구였다.
하지만.
타악
슈웅
“아웃!”
“와아아아!”
“그래! 이거지!”
“최고다! 한수혁! 네가 최고야!”
“국가대표 유격수가 누구? 이태웅? 꺼지라고 해! 이제는 한수혁이야!”
너무 긴장한 나머지 형이라 착각했던 신인 유격수가 그 타구를 가볍게 잡아내 1루에서 타자를 아웃시켰다. 심지어 눈빛 한 번으로 2루 주자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묶어버렸다.
TV에서나 보던 메이저리그 진기명기 수준의 수비다.
이제야 양기철의 머릿속에 방금 전 선배들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대충 던지면 한수혁이 다 처리해줄 거라는 말. 그게 정말이었다니.
아주 약간이나마 자신감을 회복하게 된 양기철이 이번에는 제대로 제구가 된 커브를 던졌다.
따악
하지만 이번에는 타자가 잘 쳤다.
총알 같은 라인드라이브 타구가 내야를 빠져나가려는 순간.
원래 자신의 수비 위치도 아닌 곳에 자리를 잡고 있던 한수혁이 제자리에서 거의 1미터 이상 점프하더니 그 타구를 잡아내고 말았다.
“아웃!”
“씨발!”
안타 하나를 도둑 맞은 상대 타자가 욕설을 뱉으며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순식간에 아웃카운트가 두 개로 늘었다.
하지만 그 두 번 다 정타를 당한 양기철은 그나마 쥐꼬리만큼 있던 자신감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그 순간 방금 전 안타성 타구를 잡아낸 한수혁이 자신을 향해 다가왔다.
눈빛이 좀 이상하다.
뭘까, 설마 궁둥이라도 걷어차면서 똑바로 안 던지면 죽여버리겠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내가 선배인데.
하지만 한수혁의 입에서 나온 얘기는 그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선배님, 원래 그 투구 폼 아니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