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61)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60화(61/412)
#60. 한 대 맞아봐야 정신을
‘흠, 저 녀석이 한수혁.’
1회초 마운드에 오른 류한결이 갸름하게 뜬 눈으로 한수혁을 노려보았다.
듣던 대로 피지컬이 정말 어마어마하다.
덩치는 용병 타자들만 한데 머리는 작고 팔다리가 시원하게 뻗어서 그런지 눈으로 보기에는 오히려 더 커 보인다.
‘홈런 16개라…….’
지난 4월 한 달간 무려 16개의 홈런을 때려낸 괴물.
하지만 상관없다.
류한결이 그동안 국제대회에서 상대해온 괴물들.
특히 WBC에서 상대했던 놈들 중에는 메이저리그에서 시즌 50홈런 쳐낸 놈들도 있었고, 30-30을 밥 먹듯이 하는 놈들도 있었다.
류한결은 국가를 대표해 그런 괴물들과 싸워왔고, 올 시즌이 끝나고 나면 그놈들이 기다리는 빅리그로 넘어갈 몸이다.
그의 시선이 저 멀리 관중석 한가운데 어딘가로 향했다.
관중들 사이 손에 뭔가를 들고 있는 외국인들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류한결을 보기 위해 대전 구장을 찾은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이다.
4년 차 때였던가, 처음 저들이 자신에게 따라붙었을 때는 뭔가 신기하고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이제는 그냥 일상이 되어버렸다.
저들이 어떤 보고서를 쓰느냐에 따라 연봉과 계약금의 앞자리가 달라지긴 하겠지만, 이제 그 정도로 흥분하기엔 류한결은 너무 오랜 시간 야구공을 잡아왔다.
“한결아, 차분하게 가자. 요즘 워리어스 기세가 좋아.”
“형, 나 류한결이야. 오늘 경기 빨리 끝내 줄 테니까 걱정 말고 공이나 잘 받아줘.”
“알지, 아는데…….”
“걱정 말라니까. 내가 이 짓만 햇수로 7년째인데 설마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 왔다고 오버하고 그럴까. 안 그럴 테니까 걱정 말어.”
“…좋아. 그럼 너만 믿는다. 자, 파이팅이다.”
“믿으라니까.”
류한결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포수를 돌려보냈다.
그가 데뷔한 이후 지금까지 7년 동안 내내 호흡을 맞춰온 베테랑 포수다.
류한결이 빅리그 진출을 꿈꾸게 되기까지 많은 도움을 준 좋은 형이다.
‘미국 진출 계약이 확정되면 롤렉스라도 하나 사줘야 하나?’
아직 저 형과 함께 퍼펙트 게임을 한 적은 없지만 그래도 올해까지 7년간 그를 뒷바라지해준 단짝에게 선물 하나는 남기고 가야 할 것 같다.
류한결이 마음 속으로 롤렉스 가격을 떠올리고 있던 그때 주심의 입에서 경기 시작을 알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플레이볼!”
1번 타자 이창모.
빅리그 진출 전, 그러니까 인천에서 뛰던 시절만 해도 류한결의 공을 곧잘 쳐내던 선수 중 하나였다.
2루수로서 수비는 리그 최상급인 데다가 정교한 타격과 선구안, 그리고 기동력까지 갖춘.
그때 이창모는 꽤나 대단했다. 잘 치고, 잘 잡고, 잘 달리는.
KBO를 기준으로 하면 역대 최고 2루수 후보에 이름을 올릴 수도 있는 그런 선수였다.
하지만 빅리그에서 실패하고 국내로 돌아온 후에는 완전히 망가졌다.
5월 첫째 주 현재 2할 6푼대에 머물고 있는 타율, 출루율이 그보다 1할가량 높다는 게 눈에 띄긴 하지만 1번 타자이면서 도루 개수는 0.
한마디로 출루에만 모든 걸 걸고 있는 반쪽짜리 리드오프다.
“스트라이크!”
저런 타입의 타자를 상대할 때는 평소보다 좀 더 과감해질 필요가 있다.
초구 몸 쪽으로 바짝 붙인 포심이 정확하게 존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볼.”
같은 코스에서 공 한 개 정도 존 밖으로 빼 봤는데 배트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역시나 다른 건 몰라도 선구안 하나는 예전 전성기 때 그대로다.
좋아. 그럼 다음 공은.
“볼.”
존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흘러 들어가는 슬라이더에 주심의 손이 올라가지 않았다.
포수인 안철용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주심을 바라봤지만 소용없었다.
오늘 주심의 존이 좁다는 걸 깨달은 류한결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공을 준비했다.
투 볼 원 스트라이크, 여기서 공 하나 또 빠지면 볼 카운트가 불리해진다.
다른 타자라면 몰라도 타석에서 끈기를 발휘하는 저런 타입의 타자에게는 쓰리 볼은 위험하다.
이럴 때는 역시 류한결의 주무기인 체인지업.
이심전심이라고 포수와 사인 한 번으로 구종을 결정한 류한결이 오늘 날 자신을 있게 만들어준 체인지업을 힘차게 뿌렸다.
따악
“어라?”
* * *
대기타석에서 이창모와 류한결의 승부를 지켜보던 최민석이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들에게 류한결에 대한 팁을 알려준 루키 한수혁.
그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배트를 땅에 박은 채 류한결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이다. 그의 말대로 되었다.
볼 카운트가 투 볼 원 스트라이크에 몰리자 정말로 체인지업이 들어왔다.
류한결의 체인지업은 미리 노리고 있지 않은 한, 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고 알려진 공이다.
직구와 완전히 똑같은 폼에서 나오는 데다가 공중에서 멈추는 것처럼 보이는 무브먼트도 예술, 무엇보다 던지는 타이밍이 굉장히 뜬금없다.
하지만 지금처럼 체인지업 타이밍을 미리 알 수 있다면?
프로 레벨의 타자들에게는 얼마든지 칠 수 있는 공이 되어버린다.
지금까지 7년 동안 류한결에 대한 수많은 분석 자료가 나왔지만 그가 어떤 타이밍에 체인지업을 던지는지 정확히 분석된 적은 없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다른 구종들과 달리 체인지업의 경우 벤치의 지시나 사전 데이터와 상관없이 그때그때 류한결의 기분에 따라 던지고 말고가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모든 것이 규칙대로 움직이는 카드게임에서 유일하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조커 같은 존재랄까?
여하튼 이창모는 한수혁이 건넨 팁을 정확히 이해했고, 마구라고 불리는 류한결의 체인지업을 정확히 받아쳐 좌익수 앞 안타를 만들어냈다.
그렇다면 이제 자신의 차례다.
“볼.”
자신의 주무기인 체인지업이 얻어맞은 당한 게 화가 났는지 류한결이 초구로 얼굴 높이로 날아오는 포심을 던졌다.
약간의 위협성 투구.
평소 같으면 욱 했을 수도 있지만 지금은 볼 하나를 얻어낼 수 있다는 생각에 반갑기만 하다.
자, 하나만 더.
“스트라이크!”
이번에는 전혀 예상 못 한 공이다. 방금 전과 비슷한 눈 높이로 날아오다가 존 안으로 떨어지는 체인지업이었다.
역시 담력이 엄청난 투수다.
까딱하면 배팅볼이 될 수도 있는 체인지업을 이런 식으로 써먹는 건 류한결밖에 없을 것이다.
헛웃음을 집어삼킨 최민석이 신중한 표정으로 다음 공을 기다렸다.
“볼.”
성공이다. 또 공 하나를 골라냈다.
바깥쪽 가장 낮은 존 안으로 들어오다가 휙 떨어지는 싱커를 잘 참아냈다.
평소 같으면 배트가 따라 나갔을 수도 있었을 텐데 오늘은 무조건 풀 카운트까지는 가겠다는 마음을 먹어서 그런지 용케 참아낼 수 있었다.
볼 카운트 투 볼 원 스트라이크.
방금 전 이창모 선배에게 체인지업을 던졌던 때와 같은 볼 카운트다.
한수혁이 말했다.
‘말씀드렸듯이 우타자 상대로 자기가 불리해지면 체인지업을 던지는데요. 그 불리하다는 기준은 그때 그때 달라요.’
‘그게 무슨 소리야?’
‘말하자면… 어떨 때는 투 스트라이크 원 볼이어도 본인에게 불리하다고 느낄 때도 있고, 반대로 원 스트라이크 쓰리 볼인데도 본인이 불리하다고 생각 안 할 수도 있다는 뜻이에요.’
‘아, 상황을 좀 더 종합적으로 보라는 뜻이지?’
‘네, 타자가 누구인지, 주자는 어디에 있는지, 아웃 카운트는 어떤지 등등 복합적으로.’
대충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지금 상황을 보자.
류한결 입장에서는 1회 선두타자에게 안타를 맞을 거란 생각은 안 했을 것이다. 만약 여기서 자신까지 내보내게 되면 무사 주자 1, 2루.
그 상황에서 한수혁이 들어선다. 4월 한 달간 홈런을 무려 16개나 때려낸 괴물이.
아무리 류한결이라고 해도 그런 상황을 만들고 싶을 리 없다.
그렇다면 류한결은 어떻게든 나를 삼진으로 잡으려 할 것이다.
볼 카운트 원 스트라이크 투 볼.
류한결이 생각하기에 못마땅한, 쉽게 말하면 자신이 불리하다고 느낄 만한 볼 카운트다.
그렇다면 노린다.
슈웅
따악
예전 매지션스의 타격코치는 이럴 때 어깨에 힘을 빼고 1-2루 간으로 밀어 치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워리어스의 노란머리 타격코치는 이와 전혀 다른 말을 했다.
‘친구, 타자들의 피지컬과 타격 기술이 상승하면서 자연스럽게 야수들의 수비 실력도 향상되고 있지. 어설프게 밀어 친 느린 타구는 병살타를 양산해낼 뿐이야.’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코치?’
‘간단해. 자네가 할 수 있는 가장 강하고 빠른 스윙. 타구 속도를 극한까지 끌어 올려. 내야를 빠져나가면 가장 좋고, 설사 야수 쪽으로 간다 해도 포구가 어려울 정도로 강한 타구를 날리면 되는 거지.’
‘아아.’
뭔가 기존에 알고 있던 틀이 깨지는 기분이었지만 크게 상관없었다.
트레이드 후 직접 몸으로 체감한 워리어스 감독 코치들의 특징은 일이 잘못될 경우 그 책임을 선수들에게 전가하지 않는다는 거였으니까.
믿고 따르면 된다.
그런 코치진의 태도가 최민석의 어깨를 가볍게 했다.
그가 강하게, 하지만 부드럽게 받아 친 타구가 유격수 옆으로 빠져나가며 순식간에 무사 주자 1, 3루가 되었다.
1루로 진출한 최민석이 약간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KBO에서 마구라고 불리는 류한결의 체인지업을 이렇게 정확히 받아 쳐 본 건 난생 처음이다.
오늘 이 감각을 잊지 않으려면 뭘 해야 할까?
최민석의 시선이 저 멀리 타석에 들어서고 있는 한수혁에게로 향했다.
* * *
‘이게 뭐야, 씨발.’
평소 멘탈이 강하기로 유명한, 어지간한 상황에서는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는 걸로 알려진 류한결이 마음 속에서 솟구치는 당혹감과 분노를 억지로 참아 누르고 있었다.
경기 시작하자마자 무사 주자 1, 3루라니.
오늘 대전 구장을 찾은 빅리그 스카우터들의 숫자가 무려 여섯이다.
물론 그들이 오늘 한 경기의 결과를 놓고 류한결을 평가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심 마음 속으로 완봉을 기대했던 류한결로서는 당혹스럽기 짝이 없는 경기 전개였다.
“한결아. 괜찮냐?”
“어, 괜찮아. 그보다 이상하게 볼 배합이 읽히는 기분이지?”
“맞아. 혹시 모르니 사인은 B-1로 바꾸자.”
“좋아.”
에이스의 자존심을 생각해서인지 포수는 별 말 하지 않고 사인 교체만 확인한 후 다시 홈플레이트로 돌아갔다.
정말 이상하다.
왜 저놈들이 내 체인지업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지?
고개를 다시 몇 번 갸웃거린 류한결이 신중한 표정으로 다음 타자를 바라보았다.
일단 맞은 건 맞은 거고, 중요한 건 다음 타자를 잡는 거다.
무사 주자 1, 3루.
저 한수혁이라는 놈만 잘 처리하면 그 뒤로는 별 것 없다.
줄줄이 나오는 좌타자 3인방과 만년 2군 멤버에 가까운 지명타자.
‘좋아.’
가장 좋은 건 한수혁을 삼진으로 잡고 다음 타자 조성오를 병살타로 유도하는 거다.
혹 그게 어렵다면 한수혁에게 희생플라이로 한 점 정도는 줘도 괜찮을 것 같다.
생각을 정리하자 금세 마음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자신이 누구인가.
WBC 4강전 9회말 2사 만루에 구원 등판해 아메리칸 리그 MVP를 상대로 삼진을 잡아낸 강심장 아닌가.
쫄 것 없다.
아무리 저놈이 슈퍼루키라 해도 설마 그때 그 양키보다 더 대단할까?
생각을 정리한 류한결이 포수를 향해 먼저 사인을 보낸 후 천천히 투구 동작에 들어갔다.
초구 체인지업.
헛스윙을 유도해내면 좋고, 빗맞아 땅볼이 나오면 더더욱 좋은.
류한결이 생각하기에 자신이 절대적으로 불리한 이 상황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주무기 체인지업이 포수의 미트를 향해 쏘아졌다.
하지만.
공이 손끝을 떠나는 순간 류한결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타석에 서 있던 한수혁이 웃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순간 자신이 맹수 앞에 선 초식동물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씨발!’
따아아아아아아아악!
그리고 곧 어마어마한 타격음이 대전 야구장에 울려 퍼졌다.
배트에 맞은 타구가 순식간에 류한결의 머리 위로 날아가버렸다.
그 타구를 때려낸 루키의 손에서 배트가 마치 미사일처럼 공중으로 발사되었다.
그 순간 류한결은 자기도 모르게 그 자리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