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66)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65화(66/412)
#65. 시즌을 건 모험
야구는 통계의 스포츠다.
하루하루 경기 결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충분히 누적된 지표가 더욱 신뢰를 받는다.
좋은 성적을 유지하던 선수가 부진할 경우 잠시 슬럼프에 빠졌다고 믿으며, 반대로 시즌 내내 바닥을 기었던 선수가 잠깐 빤짝할 때는 플루크라 폄하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엑셀표에 가득한 숫자들만 있으면 모든 선수에 대한 기량과 몸값을 산출해낼 수 있다 믿는 세이버매트리션들뿐만 아니라, 실제 경기를 뛰는 선수와 감독, 그리고 야구팬들마저 이 통계의 함정에 빠져들곤 한다.
다만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는 법.
여기 그 통계의 함정에서 한 발자국 빠져나와 있는 규격 외의 선수가 있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라이벌전을 맞아 당장이라도 터져버릴 것처럼 달아오른 잠실야구장.
양팀의 에이스인 라이언과 히메네스의 격돌.
거기에 구단주의 직관 때문에 더더욱 달아오른 매지션스 선수단의 분위기까지.
굳이 지난번 양팀 간의 벤치 클리어링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지금 잠실의 분위기는 터지기 일보 직전의 화산과도 같았다.
“이제 슬슬 준비해두라고. 보스가 부를 시간이 다가오고 있어.”
“네? 아, 네, 넵. 코치, 아임 오케이, 스탠바이 오케이.”
보통 사람보다 유난히 길어 보이는 팔과 썰면 두 접시는 나올 것 같은 두툼한 입술, 거기에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밀어버릴까 말까 고민이 드는 악성곱슬 머리까지.
여러모로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 끄는 외모를 가진 투수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불펜코치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양기철은 생각했다.
‘혹시 날 방출하려는 건가? 일부러 이런 상황에 계속 마운드에 세워서?’
그도 그럴 것이 한진우와 트레이드되어 타이탄스에서 넘어온 후 첫 등판한 경기가 인천과 3 대 3으로 팽팽히 맞서던 상황이었다.
거기에 상대팀 마운드에 서 있던 투수는 당대 한국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선수 중 하나인 임준영.
뭔가 생각을 할 여유도 없이 마운드에 올랐고, 후배 한수혁의 조언에 따라 자신의 원래 투구폼으로 돌아가 미친 듯이 공을 던져댔다.
다행히 생소한 투구폼 때문인지 점수를 내주지 않고 마운드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죽다 살아났다.
경기가 끝나고 얼마나 위가 쓰리는지 양배추 즙을 네 봉지나 들이키고 나서야 간신히 그 속이 진정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양기철을 찾은 건 이 팀의 1군 투수코치를 맡고 있는 잭슨 설리반이었다.
‘얭… 기챌? 그냥 얭이라고 불러도 될까?’
‘네? 네, 코치님, 편하실 대로 하십쇼.’
‘좋아, 얭. 어제 경기는 잘 봤어. 아주 인상적이더군.’
‘아… 네…….’
질책을 당할 거라 생각했다.
다행히 결과는 괜찮았지만, 자신이 생각해도 괴상망측한 투구폼을 지적 받으리라 생각했다.
타이탄스 시절 코치에게 너무 호되게 혼이 난 탓이다.
뭐라고 했더라, 그런 폼으로 던지려면 서커스단에나 가라고 했던가?
하지만 워리어스의 금발머리 투수코치의 생각은 그게 아니었나 보다.
‘그 폼은 아마 미치 윌리엄스를 카피한 것이겠지?’
‘그게, 고등학교 때 감독님이 만들어주신 건데, 네, 맞습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나중에 그 이름을 알려주시더군요.’
‘훌륭한 분이군. 아무튼 좋아. 팀 내부에서도 자네 투구폼에 대해 이야기가 좀 있었어. 아무래도 수비에 허점이 있으니 말이야. 어쨌든 결론은 이거야.’
‘네?’
‘그 폼의 장점을 최대한 극대화시켜 보자고. 기왕 시작한 거 끝까지 한번 가보는 거지.’
양기철이 고등학교 은사와 함께 완성시킨 투구폼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제구력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구속과 무브먼트에만 모든 것을 올인한 그런 폼이었다.
어느새 졸업반이 되어 프로 진출을 꿈꾸게 된 양기철, 그의 고등학교 은사는 생각했다.
고교 레벨에서는 나름 나쁘지 않은 구속과 구위, 하지만 프로를 기준으로 한다면?
아마 잘해야 패전처리, 아니, 프로에 지명조차 받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그렇기에 제자를 위한 마지막 모험을 걸어 보기로 했다.
유난히 긴 팔과 탄력 넘치는 허리 힘.
오래전 메이저리그에서 마무리 투수로 뛰던, 현역 시절 와일드 씽이라고 불리던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수호신 미치 윌리엄스에게서 영감을 얻었다.
긴 팔을 채찍처럼 휘두르고, 그 반동 때문에 글러브 낀 손으로 땅까지 짚어야 하는 역동적인 투구 폼.
그것은 양기철이 가진 신체 조건을 극대화시켰다.
물론 오버핸드가 아니면 투수 취급도 안 해주는 타이탄스 코치 때문에 프로에 들어오자마자 봉인 당하고 말았지만.
어쨌든 지난 인천과의 경기에서 그 봉인을 푼 양기철은 코치와 함께 투구폼을 다시 한번 다듬었고, 결국 오늘 두 번째 출격 명령을 기다리는 중이다.
“헤이, 얭, 보스의 명령이야. 자, 엉덩이에 힘 빡 주고 마운드로 뛰어올라가라고!”
“예, 옛썰!”
드디어 그 순간이 다가왔다. 불펜 밖에서 관중들의 엄청난 환호성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경기는 어떻게 진행되어 가고 있을까?
모르겠다.
지금 양기철의 머릿속에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 그 하나뿐이었다.
* * *
“자, 다들 이쪽으로.”
투수교체를 위해 마운드에 올라온 코치가 내야수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
오늘 경기는 역시 내 예상대로 흘러 갔다.
지난번 경기에서 내게 한 경기 홈런 세 개를 허용했던 매지션스 1선발 히메네스는 오늘 경기에서 나를 그냥 없는 사람으로 취급했다.
첫 번째, 두 번째 타석 모두 볼넷.
심지어 세 번째 타석에서는 1사 1, 2루에서 나를 볼넷으로 걸렀다가 다음 타자인 조성오 선배에게 적시타를 맞아 2점을 내주기도 했다.
8회말 홈팀 매지션스의 공격이 진행되는 가운데 스코어는 2 대 1, 워리어스가 한 점을 앞서고 있었다.
우리가 히메네스에게서 두 점을 내는 동안 선발이었던 라이언 역시 혼신의 투구를 펼친 끝에 매지션스 강타선을 단 1점으로 막아냈다. 오랜만에 호투였다.
하지만 경기는 이제부터다.
구단주가 보는 앞에서 이대로 질 수 없다는 듯 독기를 가득 품은 채 덤벼드는 매지션스의 타자들.
앞으로 2이닝 동안 저놈들을 막아내야 경기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이대준 감독이 선택한 카드는 바로 양기철이었다.
저 멀리 불펜의 문이 열리고 잔뜩 긴장한 표정의 양기철 선배가 긴 팔을 휘적거리며 걸어온다.
표정만 봐서는 어디 도살장에라도 끌려가는 것 같은 그런 얼굴이다.
“잘 들어. 이제 2이닝만 막아내면 오늘 경기는 우리 것이야. 얭이 지난 인천전에서 첫 승리를 올린 거 다들 기억하지? 오늘은 이 친구에게 첫 세이브를 선물해주자고.”
“네, 코치. 물론이죠.”
“좋아, 그럼 저 매지션스 놈들을 박살 내러 가보자고.”
코치가 양기철 선배의 손에 공을 넘겨주고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8회말 2 대 1 한 점 차, 1루에는 4번 타자 고철환이 볼넷을 얻어 나가 있다.
안 그래도 부상 때문에 몇 경기를 결장한 저 덩치 큰 타자가 굳이 여기서 도루를 할 이유는 없다.
대주자가 나올 수도 있다 생각했지만 상대팀에서는 연장전까지 염두에 둔 듯 굳이 4번 타자를 경기에서 빼지 않았다.
뭐, 나쁘지 않다. 이로써 우리는 다음 타자에게만 신경 쓰면 되니까.
“기철 선배님, 파이팅입니다. 걱정 마세요. 제가 다 잡아드립니다.”
“수혁아…….”
별 것 아닌 내 말 한마디에 양기철 선배의 눈동자가 촉촉해졌다.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눈망울과 메기 같이 두꺼운 입술이 진짜 매칭이 안 된다.
어쨌든.
땀을 흘릴 때마다 실시간으로 풍성해지는 이 악성 곱슬 머리 투수의 어깨에 우리 팀의 미래가 달려 있다.
마무리 같지도 않은 마무리 한진우를 부산으로 보낸 후 우리 팀의 주전 마무리는 최정수 선배와 홍영식 선배가 번갈아 맡아 왔다.
둘 다 공은 빠르지만 제구, 혹은 멘탈에 문제가 있는 파이어볼러들이다.
중간계투로는 그럭저럭 써먹을 만하지만 절대 마무리투수 감은 아니다.
그 사람들 때문에 세이브 상황에서 경기를 날린 게 대체 몇 번이던가.
만약 양기철 선배조차 마무리 투수로 자리를 잡는 데 실패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어쩌면 이번 시즌 초반 우리 팀의 운명을 결정지을 주사위가 이제 막 던져질 준비를 하고 있다.
“플레이볼!”
슈웅
“스트라이크!”
– 아! 이게 뭡니까? 양기철 선수가 던진 초구가 무려 154㎞/h가 나왔습니다!
– 대단하네요! 1군 데뷔 무대였던 지난 인천전에서도 150㎞/h를 기록하며 잠깐 화제가 되었는데요. 공이 더 빨라졌습니다!
– 투구폼이 정말 특이하죠? 화면 다시 보시면서 설명해 주실까요, 위원님?
– 물론이죠. 자, 보세요. 긴 팔을 이용해서 몸통 뒤에서부터 채찍처럼 팔을 휘두르죠? 여기, 바로 이 부분에서 허리 회전을 가속화하고, 자, 이거 때문에 투구가 끝나면 반대쪽으로 휘청하는 겁니다.
– 그렇군요. 제구에는 문제가 없을까요? 척 보기에도 상당히 불안해 보이긴 하는데요.
– 물론입니다. 제구에 문제가 있겠죠. 하지만요.
– 하지만?
– 154㎞/h, 거기에 등 뒤에서 휘둘려 나오는 저런 포심이라면 한국야구에서는 마구에 가깝습니다. 제구력이요? 글쎄요, 제가 워리어스 감독이라면 이 선수를 마무리로 쓸 것 같은데요?
그리고 결과는 아마도 잭팟이 될 것만 같다.
* * *
서울 워리어스(원정) 2 : 서울 매지션스(홈) 1
원아웃 주자 1루
5번 타자 이호영
1구 스트라이크
2구 스트라이크
3구 볼
4구 스윙 아웃
투 아웃
└미친 거임? 왜 저딴 공에 배트를 휘두름?
└ㅋㅋㅋ 넘어지면서 공을 던지는데 153㎞/h… 만화도 아니고
└아니 방금 공은 냅두면 그냥 볼인데 왜 휘두름?
└그야 등 뒤에서 150 넘는 공이 휙 날아오니까 자기도 놀란 거지
└왜 저 멍청이 편을 듦? 이호영 가족임?
└홍영식이나 최정수 올라올 줄 알았더니 긴팔 원숭이가 올라와서 날뛰네
투아웃 주자 1루
6번 타자 포수 박수길
1구 볼
2구 스트라이크
3구 스트라이크
└저건 포수라는 놈이 선구안 봐라. 아니 저걸 왜 안 치는데?
└와 진짜 갈피를 못 잡겠네. 솔직히 이해는 간다. 저걸 어케 침?
└아니 한수혁처럼 167도 아니고 그래 봐야 154인데 왜 못쳐?
└ㅋㅋㅋ 타석에 세워놓으면 100짜리 공만 봐도 오줌 지릴 새끼가
└야 이 미친 @#$!^%(매니저에 의해 퇴장당했습니다)
└워) 소개한다. 우리팀의 새로운 주전 마무리되시겠다
└워) 참고로 오늘부터 시작해서 50세이브로 세이브왕 되실 분이다
4구 스윙 아웃
쓰리 아웃
공수 교대
└ㅋㅋㅋ 지랄났네 진짜…
* * *
“스윙! 게임 셋!”
“씨발!”
“와아아!”
“최고다!”
“양기철! 양기철! 양기철!”
양기철 선배가 9회말 매지션스의 마지막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운 순간 잠실야구장이 또 한 번 들썩였다.
민예린 측에서 구단에 기부했다는 폭죽이 야구장 하늘을 수놓았고, 잔뜩 흥에 취한 응원단과 민예린이 칼 군무를 하며 워리어스의 응원가를 불러댔다.
“축하한다, 기철아. 데뷔 첫 세이브. 자, 여기 기념구.”
“앗! 감사합니다, 선배님.”
“이 자식 울어? 진짜? 겨우 이 정도로 운다고?”
“아앗! 아닙니다! 절대 우는 건 아니지만! 수혁아, 그리고 아까 진짜 고맙다. 그게 빠져나갔으면…….”
“아뇨, 별 거 아니에요. 선배님. 축하드립니다.”
양기철 선배의 2이닝 무실점 세이브로 워리어스가 잠실 3연전 1차전을 가져왔다.
포수 바로 뒤 관계자석에 앉아 있는 매지션스 구단주가 벌개진 얼굴로 빠져나가는 걸 보니 속이 다 시원하다.
음, 반대로 워리어스가 졌으면 내가 저 꼴이었으려나.
아무튼.
오늘 승리는 워리어스에게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다.
단순한 라이벌전에서의 승리가 아니다.
일단 나만 무턱대고 볼넷으로 내보낸다고 해서 워리어스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걸 보여줬다.
매지션스 투수들의 계속되는 볼질에 나는 오늘 스윙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했다.
원래 저놈들의 계획은 내 뒤 타자를 잡아내는 거였을 거다. 그런데 거기서 조성오 선배가 2타점 적시타를 쳐내며 놈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했다.
그리고 워리어스의 가장 큰 약점으로 지적된 뒷문, 몇 년간 계속된 마무리투수의 부재.
그것을 해결할 인재를 드디어 찾아냈다.
물론 백 프로 완벽하지는 않았다.
양기철 선배의 문제점은 제구력뿐만이 아니었다.
투구를 마친 후 글러브 낀 손으로 땅을 짚어야 할 정도로 모션이 크다 보니 땅볼 타구나 번트 타구 수비에 엄청난 약점을 보였다.
9회말 마지막 공격에서 매지션스 타자가 기습번트를 시도한 게 바로 그 증거다.
어떻게 됐냐고? 미리 번트 작전을 눈치챈 내가 투수 대신 공을 잡아 처리했다.
이거면 되는 거다. 세상에 완벽한 투수 따위는 없다.
가을야구에 대한 희망이 점점 커져만 간다.
갑자기 등장한 천상진이라는 괜찮은 선발 투수로 인해 라이언, 브룩스, 이만식, 천상진으로 이어지는 4선발 체계가 확립되었다.
5선발 자리가 문제이기는 하지만 괜찮다. 어차피 KBO에서 완벽한 5선발 시스템을 구축한 건 인천과 수원, 두 팀 정도다.
그리고 선발투수보다 더 심각했던 마무리 쪽에 양기철이라는 신기한 투수가 추가되면서 기존 임시 마무리던 최정수, 홍영식 선배를 필승조와 셋업맨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던 투수진에 조금씩 기틀이 잡혀가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나는 모험을 걸어보려 한다.
천상진과 양기철, 두 투수를 보강하며 생긴 약간의 여유를 활용해 올 시즌 팀의 운명을 결정지을지도 모를 과감한 모험을 해보고자 한다.
“성훈이 형, 그래. 이제는 결정을 내릴 때가 온 것 같네. 박재철 단장 뜻대로 한번 가보자.”
– 오케이, 그럼 서형주 영입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