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71)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70화(71/412)
#70. 아웃카운트 세 개
복잡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하루는 선택으로 시작해 선택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일어나야 하나, 조금 더 자도 될까? 아침 밥을 먹을까 말까, 머리를 감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뭘 입지? 버스를 탈까 아니면 지하철을 탈까, 조금 늦은 것 같은데 커피를 사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점심은 뭘 먹지? 짜장? 짬뽕?
생각만 해도 숨이 턱밑까지 차오른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그런데 그런 인간들 중에서도 특히 야구 감독이라는 존재는 조금 더 특별하다.
야구에서 선택의 순간이 몇 번 찾아오는가를 따지는 건 상당히 무모하면서도 무의미한 일이겠지만 굳이 그런 짓을 하자고 한다면 투수들이 던지는 공의 개수를 기준으로 하는 게 타당할 것이다.
일단 야구의 모든 플레이는 투수가 공을 던지면서 시작되는 거니까.
한 팀의 투수가 상대 타자들을 맞아 9이닝까지 던지는 공 개수의 총합은 아무리 적어도 120개 내외, 경기가 길어지고 등판하는 투수가 많아질 경우 200개 가까이 될 때도 있다.
그렇게 공 하나하나를 던질 때마다 덕아웃에서는 피를 말리는 선택을 이어가야 한다.
타자에게 기다리라고 해야 할까? 주자에게 리드를 좀 더 길게 잡으라고 지시할까? 차라리 작전을 한번 걸어볼까? 등등.
그리고 공수가 교대되면 반대 입장에서 또 선택을 계속 해 나가야 한다.
즉, 프로야구 감독이란 건 한 경기를 치를 때마다 양팀 투수들이 던진 공의 개수를 합한 것만큼의 선택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최소 240번에서 최대 400번까지.
얘기가 뭔가 길어졌지만 결국 이런 거다.
“보스, 얭을 준비시킬까요?”
“음…….”
9회초 워리어스의 공격이 또 득점 없이 끝났다. 선두타자가 안타를 치고 나갔지만 후속타가 불발되며 공격이 무산되었다.
매지션스가 불문율을 깨려는 시도를 하며 선수들 중 몇이 살짝 흥분한 기색을 보였다. 이에 이대준 감독은 주장 조성오를 불러 선수들을 다독일 것을 명했다.
‘무슨 생각을 하든 지금은 안 돼. 벤클 같은 걸 해서 만식이 기록 다 날릴 거야? 일단 오늘 경기부터 끝내. 내 말 이해했으면 저기 흥분한 놈들한테도 잘 전달하고.’
‘네, 감독님.’
그렇게 선수단 분위기를 다시 한번 추스른 이대준 감독은 이제 정말 중요한 선택의 순간이 왔다는 걸 깨달았다.
9회말 마지막 수비, 스코어는 2 대 0 두 점 차 리드.
마운드에 서 있는 건 이 팀의 투수 최고참이자 한국인 에이스.
지금까지 105개의 공을 던지기는 했지만 원래 체력이 좋은 덕분에 아직 한계투구수까지는 가지 않은 상태.
볼넷 허용 1개, 그리고 안타는 아직 하나도 맞지 않은 상황.
노히트노런 중인 투수를 여기서 내릴 수는 없다. 당연히 9회에도 이만식이 마운드에 올라갈 것이다.
문제는 다음 투수다.
새롭게 이 팀의 마무리 투수를 맡게 된, 현재로서는 가장 믿을 수 있는 카드인 양기철.
그를 준비시키는 게 맞는 걸까?
생각 같아서는 이 팀의 최고참 투수에게 경기를 모두 맡기고 손을 놔 버리고 싶다. 지든 이기든 모두 너에게 맡기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늘 경기를 이기면 서울 라이벌 매지션스를 스윕하는 것은 물론이고 3위 자리를 보다 확고히 굳힐 수 있게 된다.
“일단 기철이 준비는 시켜주세요.”
“네, 보스.”
감독의 지시를 받은 투수코치가 불펜에 전화를 걸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감독의 시간이다. 만약 이만식의 노히트노런이 깨질 경우 어떻게 해야 할지 선택해야 한다.
사실 노히트노런이 깨진다 해도 완봉승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일이다.
심지어 그것이 이 팀의 암흑기를 혼자 지탱해온 베테랑 투수의 것이라면 더더욱.
안타를 하나 맞아도 그냥 지켜볼까? 아니, 한 점 정도 줘도 그냥 조금 더 맡겨볼까? 완투승도 대단한 거잖아?
이대준 감독의 마음 속에서 여러 자아들이 튀어 나와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심적 갈등이 이어지는 사이 이만식이 마운드 위에서 몸을 풀기 시작했다.
결국 최후의 결정을 내린 이대준이 옆에 앉은 수석코치에게 말했다.
“동점을 주기 전까지는 만식이 내리지 않겠습니다.”
“좋은 선택이군요, 보스.”
* * *
이상한 기분이 든다.
나보다 나이도 많은, 지난번 집에 놀러 온 이후로는 형이라고까지 부르게 된 이만식 선배의 뒷모습이 왜 이렇게 작고 가련하게 보이는 걸까?
뭐랄까.
어린 시절 병원에서 예방주사를 맞은 후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친구의 겁먹은 표정을 보는 기분이랄까?
흠.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일부러 모른 척한 걸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이제는 확실히 알아버렸다.
9회말 투구를 위해 마운드로 올라오던 이만식을 향해 술 취한 관중 하나가 냅다 고함을 질렀기 때문이다.
“만식아! 노히트노런 가즈아! 내가 맛난 거 사주마!”
그 말을 들은 이만식 선배의 어깨가 움찔하는 걸 분명히 보았다.
자, 이러면 일은 복잡해지지만 또 한편으로는 간단해진다.
투수가 자신의 기록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럼 야수들이 할 일은 단 하나다.
그가 그라운드 위에서 외롭다고 느끼지 않도록 평소보다 더 크게 파이팅을 외치고, 조금 더 열심히 몸을 움직이면 되는 거다.
“파이팅!”
“……?”
“어, 파, 파이팅!”
“파이팅!”
워리어스에 입단한 후 난생 처음 파이팅을 선창한 것 같다.
그래서일까,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선배들이 이내 구호를 따라하며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보면 정말 별 것 아니다.
세 명.
그래, 딱 세 명만 잡아내면 모든 게 완성된다.
이만식 선배의 대기록도, 그리고 매지션스를 스윕하고 3위 자리를 굳히는 것도.
물론 지금 이 시점에서 세 명은 지금까지 상대했던 세 명과는 무게감이 전혀 다를 것이다.
주변을 돌아보니 동료들의 표정에도 긴장감이 가득하다.
그래, 여기서 나라도 정신 차려야지.
“안치욱, 혹시나 공 더듬더라도 절대 정신 놓지 말고 세컨 플레이로 이어가. 넌 어깨가 좋으니 상관없어.”
“응.”
“우리 둘 사이로 날아오는 타구 같으면 그냥 나한테 맡겨. 내가 다 처리할 테니까.”
“알았어.”
상황이 상황인지라 안치욱조차 별 말 없이 내 지시에 고개만 끄덕인다.
좋아, 준비는 끝났다. 이제 실전이다.
“플레이!”
9회말 매지션스의 마지막 공격은 8번 타자부터 시작되었다.
중요한 순간 선두로 나서게 된 타자가 비장한 표정으로 타석을 골랐다.
머릿속이 복잡할 거다.
신중하게 공을 골라야 할까? 아니면 초구부터 적극적으로 타격을 해볼까?
그도 아니면 전 이닝의 마지막 타자처럼 기습번트를 시도해 볼까?
정해진 정답 같은 건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어떤 선택을 하든 결과를 책임지는 건 타자 본인이라는 사실이다.
“스트라이크!”
이만식 선배가 가장 어려운 초구를 스트라이크로 잡아냈다.
경험이란 저래서 중요한 거다.
술 취한 관중 때문에 자신이 노히트노런 중이란 걸 알게 되었음에도 이만식 선배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는지 과감하게 한가운데 포심을 던졌다.
142㎞/h, 오늘 그가 던진 포심 중 최고 구속이다. 아마도 지금까지는 페이스를 조절해 왔지만 이제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모든 힘을 쏟아부을 모양이다.
확실히 이만식이라는 투수가 갖고 있는 가장 큰 장점은 저런 배짱과 경험 외에도 9이닝에 최고 구속을 갱신할 수 있는 강한 체력이다.
“볼!”
두 번째 공은 바깥쪽으로 공 한 개 정도가 빠진 포심.
이런 상황에서 포심이라니, 그것도 겨우 140을 겨우 넘는 포심.
이만식 선배의 선택에 절로 탄성이 나온다.
승패를 떠나 너무 재미있는 경기다.
이 재미에 야구를 못 끊는다니까.
틱
“파울!”
이번에는 허를 찌르는 슬라이더가 존 안으로 말려들어 갔다. 당황한 타자가 급하게 배트를 내서 커트해버렸다.
“볼!”
아쉬운 공이었다.
존 중앙으로 들어오다 뚝 떨어지는 체인지업을 최병만이 참아냈고, 잠깐 멈칫했던 주심이 바싹 마른 목소리로 볼을 선언했다.
심판 역시 대기록이 진행 중인 걸 알기에 모든 면에서 신중을 기하고 있는 듯하다.
투 볼, 투 스트라이크.
개인 기록을 생각하면 볼을 하나쯤 더 빼 보는 것도 괜찮다. 어차피 퍼펙트게임은 깨진 상황이니 안타가 아닌 볼넷 정도는 줘도 상관없다.
하지만 이 팀의 최고참인 저 베테랑 투수는 자신의 기록보다는 팀의 안정적인 승리를 택했다.
두 점 차 리드에서 선두 타자를 내보내지 않겠다는 듯 좌타자의 가장 먼 바깥쪽 존 안으로 힘차게 포심을 뿌렸다.
따아악!
타자의 배트가 힘차게 돌았다. 마치 그 코스로 공이 들어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
외야 좌측 라인 안쪽을 향해 힘차게 날아가는 타구. 평소 같으면 무조건 2루타로 연결되었을 타구다.
하지만.
타악.
“아웃!”
미리 라인 쪽으로 중심을 옮겨 놨던 있던 좌익수 김수학 선배가 어렵지 않게 그 공을 받아냈다.
작전의 승리다. 바깥쪽 공을 던지면 최병만이 밀어 칠 거라 예상해 시프트를 건 거다.
덕아웃 쪽을 보니 감독과 수비코치가 서로 하이파이브를 하며 활짝 웃고 있다.
자신을 제외한 한국인 코치들이 박재철 단장에 의해 일거에 쓸려 나갔을 때만 해도 잔뜩 기 죽은 채 겉돌던 수비코치도 이제 슬슬 자신의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듯하다.
그렇게 대기록 달성을 위해 필요한 3개의 아웃카운트 중 하나가 채워졌다.
이제 남은 건 두 개.
“파이팅!”
“파이팅!”
조성오 선배의 선창에 내야수들이 또 한 번 파이팅을 외쳤다.
이제는 정말 실력과 함께 행운이 우리 편을 들어줘야 한다.
“대타!”
팀에서 가장 타격이 약한 9번 타자 대신 대타가 들어섰다.
가벼운 부상으로 경기에서 빠졌던 매지션스의 용병 타자 토마스 켐벨.
주로 1루와 외야를 담당하는 용병으로 부상 전까지 10개 구단 타자 용병 중 가장 좋은 타격지표를 기록하고 있던 선수다.
물론 약점은 뚜렷하다. 애초에 약점이 없는 타자 같으면 KBO가 아니라 MLB에서 뛰고 있겠지.
빠른 공에 강하고, 보통의 용병들이 약점을 보이는 바깥쪽 낮은 공도 곧잘 때려낸다.
하지만 포심과 구속 차이가 나는 커브, 혹은 체인지업 같은 브레이킹볼에 약점을 보인다.
문제는 이만식 선배의 포심이 그런 체인지업을 돋보이게 할 정도로 위력적이지는 않다는 점이다.
“볼.”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는 큰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힘이 좋은 타자다.
여기서 토마스에게 한 방을 맞으면 노히트노런과 완봉이 동시에 날아가는 것은 물론, 1점 차로 바짝 쫓기게 된다.
그것은 자신의 대기록보다 팀의 승리에 더 무게를 두고 있는 베테랑에게 가장 끔찍한 일이 될 것이다.
“볼.”
“볼.”
“볼.”
그런 공포감이 육체를 지배한 것일까.
갑자기 이만식 선배의 제구가 크게 흔들리며 스트레이트 볼넷을 내주고 말았다.
결국 매지션스의 두 번째 주자가 1루를 밟았다.
갑자기 상대팀 덕아웃이 분주해졌다. 토마스를 대신해 발 빠른 대주자가 나왔고, 부상으로 명단에서 빠졌다가 오늘 1군에 복귀한 장발머리의 왼손 마무리 투수가 천천히 몸을 풀기 시작했다.
혹시나 이번 이닝이 동점으로 끝날 경우 10개 구단 최강이라 불리는 매지션스의 마무리 이하영이 등판하게 될 것이다.
“볼.”
한번 흔들린 제구는 또다시 문제를 일으켰다. 원래 투수라는 게 이렇게 예민한 거다.
선구안만 따지면 10개 구단 리드오프 중 최고라 평가받는 1번 양선우가 또 볼넷을 골라 1루로 진출했다.
순식간에 원아웃 1, 2루가 되었다.
이제는 기록이 문제가 아니라 큰 거 한 방이면 역전까지 가능한 상황.
그 순간 매지션스가 또 대타 카드를 뽑아 들었다.
베테랑 좌타자 이호영, 한때 매지션스의 간판 타자였으나 세월의 힘을 거스르지 못하고 주전에서 밀려난, 하지만 대타로 나서기에는 너무 과분한 선수.
어쩌면 이런 순간 가장 상대하기 힘든 베테랑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그가 등장하자 잠실야구장이 삽시간에 침묵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만식 선배의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