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72)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71화(72/412)
#71. 가드 오브 아너
내가 처음으로 노히트노런을 달성했을 때의 순간이 떠올랐다.
빅리그 데뷔 3년 차 때였다. 상대팀은 당시 아메리칸 리그 최강이었던 보스턴 레드삭스.
사실 그날의 노히트노런에는 실력보다는 운이 크게 작용했다.
7회까지 제법 잘 맞은 타구가 많이 나왔음에도 이상하게 야수 정면으로 가는 바람에 기록에 도전할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8회에 접어든 나는 대놓고 대기록 도전을 선포했다.
‘잘 들어, 공을 놓치는 놈은 내가 절대 가만 안 둘 거야.’
아직 서른도 안 된 애송이의 으름장에도 야수들은 별 말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때는 그게 선발투수로서의 내 입지라든지, 팀내 최고 스타에 대한 존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들은 그저 생애 첫 대기록을 앞둔 애송이 투수를 배려했던 것이다.
아무튼 나는 나머지 2이닝을 무사히 막아내며 생애 첫 노히트노런을 달성했다.
가만…….
그러고 보니 그때 누가 포수를 봤더라?
음.
아, 생각났다. 말 많던 그 영감.
나이를 먹고 포수 마스크를 벗고 외야수로 밀려 났으면서, 심지어 일 년에 절반 이상은 마이너에 박혀 있으면서도 나만 보면 잔소리를 계속 해대던 그 인간.
야구는 돈을 위해 하는 게 아니다. 선수로서 명예를 지켜야 한다. 좋은 투수는 포수를 믿고 공을 던질 줄 알아야 한다.
그때는 그 소리가 왜 그렇게 듣기 싫었던지, 빅리그에 제대로 자리조차 못 잡은 퇴물의 잔소리로 치부하고 무시했지.
젠장, 다른 건 그렇다 치고 노히트노런을 함께 달성한 포수에게 고맙다는 말 정도는 했어야 했는데…….
“플레이!”
잡념은 이제 그만.
2루에 선 대주자, 그리고 1루에 양선우, 두 발 빠른 주자가 좌우로 몸을 움찔거리며 이만식 선배를 압박했다.
하지만 이만식 선배는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주자를 견제하기보다는 타석에 선 타자와의 승부에 더 집중하는 눈치였다.
나도 투수이기에 알 수 있다.
선배는 2루 주자가 홈에 들어와도 상관없다는 마음이었다. 1점을 내줘 자신의 노히트노런과 완봉이 깨지는 건 이미 고려 대상이 아닌 거다.
지금 그의 목표는 단 하나, 타석에 들어선 상대팀의 타자를 잡아내는 것, 그래서 이 팀에 승리를 가져오는 것뿐이었다.
지금까지 본 그 어떤 순간보다 진지한 표정이 된 이만식 선배가 천천히 셋업 포지션에 들어갔다.
퍼억
“볼.”
우리 배터리가 선택한 초구는 바깥쪽 체인지업. 존 안에서 밑으로 떨어지는 공을 이호영이 꿈쩍도 않고 참아냈다. 나이를 먹어 배트 스피드는 떨어졌지만 공을 골라내는 선구안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1루 견제를 한 번 하며 한숨을 돌린 이만식 선배가 다시 신중한 자세로 2구를 던졌다.
퍼억
“스트라이크!”
이번에는 몸 쪽 가장 높은 곳으로 들어가는 포심.
던진 투수보다 그걸 지켜보는 동료들과 벤치, 그리고 관중석을 더 긴장하게 만드는 그런 공이었다.
전성기 시절 저 코스에 가장 강했던 타자에게 저런 과감한 승부라니.
이만식 선배에 대한 생각을 조금 정정해야겠다.
그냥 체력 좋고 경험이 많은 것 외에는 장점이 없는 투수라고 생각했는데 배짱이 엄청나다. 저런 멘탈은 가을야구에 가면 꽤나 큰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퍼억
“볼.”
다시 볼 하나를 밖으로 뺀 이만식 선배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한 번 훔친 후 신중하게 투구 모션을 가져갔다.
한때 완전한 오버핸드에 가까웠던 투구폼이 이제는 사이드암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이만식에게는 예전 젊은 시절에는 없었던 노련함이라는 무기가 있다.
하지만 한때 매지션스라는 팀을 지탱하던 베테랑 이호영의 방망이는 여전했다.
따아악!
“허억!”
누구의 입에서 나온 건지 모르겠지만 큰 탄식과 함께 타구가 쭉쭉 날아갔다.
바깥 쪽 낮은 곳으로 들어온 슬라이더가 제대로 배트에 걸렸다.
좌익수 김수학 선배가 이를 악물고 전력질주를 시작했다. 하지만 누가 봐도 잡기는 힘들 것 같은 그런 타구였다.
“이익!”
외야 담장 바로 5미터 앞, 좌측 파울 라인 근처 애매한 곳에 떨어지려는 공을 향해 김수학 선배가 전력으로 다이빙 캐치를 시도했다.
촤아악!
“아악!”
아무리 봐도 글러브가 닿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상황.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파울 라인 안쪽으로 떨어질 듯 보이던 공이 갑자기 스핀을 먹으며 바깥쪽으로 휘기 시작했다.
“파울!”
“허억, 허억…….”
전력질주를 했던 김수학 선배가 숨을 헐떡이며 그라운드에 그대로 머리를 박았다.
다행이다.
라인 안쪽으로 들어왔으면 손도 못 쓰고 1타점 2루타가 되었을 타구였다. 막판에 스핀이 걸리며 파울이 된 건 정말 하늘이 도왔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이만식! 이만식! 이만식!”
“힘내라! 만식아!”
“잘했어! 잘하고 있어!”
그때였다. 지금까지 별다른 구호 없이 환호성만 지르던 워리어스 관중석에서 이만식 선배의 이름이 연호되었다.
그들도 알고 있는 거다.
지금 이 순간 투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말이다.
이만식 선배가 팔을 들어 땀인지, 혹은 눈물인지 모를 것을 스윽 닦아내는 것이 보였다.
다 끝난 줄 알았던 상황에서 기적처럼 찾아온 또 한 번의 기회.
이 팀의 암흑기를 혼자 견뎌냈던 노장에게 찾아온, 어쩌면 인생 마지막이 될지 모를 기회.
이제는 정말 투수가 가장 자신 있게 던질 수 있는 공이 등장할 차례다.
포수와 사인을 맞추고, 타자의 눈빛을 한 번 확인하고, 투구 동작으로 돌입.
타앗
그의 손끝에서 공이 떠났다.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과 함께 그 공이 그리는 궤적이 선명하게 내 눈에 들어왔다.
‘미친!’
그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자신의 대기록과 팀의 스윕을 위해 선택한 공은 다름 아닌 싱커였다.
지난 스프링캠프에서 처음 배우고, 내게도 조언을 구하고, 이후 실전에서는 단 한 번도 던지지 않은 그 공이 타자의 무릎 쪽을 향해 맹렬히 날아갔다.
순간 나도 모르게 2루 베이스 쪽을 향해 스타트를 끊었다.
거의 모든 타구를 우측으로 잡아당기는 좌타자이기에 1루수와 2루수는 우익수 쪽으로 많이 이동한 상황. 상대적으로 유격수와 2루수 사이의 공간은 텅 비어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나는 타자가 만약 저 싱커를 친다면 그 타구가 2루 베이스 쪽으로 날아갈 거란 예감이 들었다.
어쩌면 내 생각이 틀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내 예감을 믿고 2루 쪽으로 달렸다.
따아악!
강한 타격음과 함께 총알 같은 타구가 2루 베이스를 향해 날아갔다.
투수의 바로 왼쪽을 스치고 지나가는 총알 같은 타구.
1루와 2루 주자가 동시에 스타트를 끊었고, 2만5천 명에 달하는 관중들의 시선이 145g밖에 안 되는 하얀 야구공 하나에 집중된다.
그 순간 나는 확신했다.
내 예감이 맞아 떨어졌다는 걸.
타구를 따라 맹렬하게 돌진하는 와중에 저 멀리 당황한 1루 주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유격수가 왜 거기 있어? 주자의 얼굴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터억
2루 베이스 바로 앞에서 바운드 되며 외야로 빠져나가려는 타구를 억지로 글러브로 건져냈다.
중요한 건 지금부터다. 여기서 중심을 잃고 쓰러지면 모든 게 끝이다.
이런 순간을 위해 피땀을 흘리며 다듬은 내 육체가 기민하게 반응한다.
앞쪽으로 쏠렸던 중심을 즉시 중심으로 되돌리고, 밑으로 쏠린 밸런스 때문에 넘어지지 않도록 허리를 움직이고, 다시 한 번 또 중심을 잡고.
2루로 토스.
“아웃!”
공을 받은 2루수 이창모 선배가 다시 1루로.
“아웃!”
“와아아!”
“미친!”
“저걸 잡았어! 무조건 빠져나갈 줄 알았는데!”
“한수혁!”
“됐다! 이겼어! 노히트노런이야!”
“이만식! 이만식! 만식아! 축하한다!”
“노히트노런 축하해!”
관중석에서 일제히 엄청난 함성이 발사되었다.
그라운드 위에 있던 8명의 야수들이 일제히 글러브를 집어 던지고 투수를 향해 달려갔다.
저 멀리 덕아웃에서도 모든 선수들이 뛰쳐나와 만세를 불렀다. 이대준 감독은 자기가 더 감격스러운지 눈가를 훔치고 있었다.
결정적인 순간 병살타를 친 매지션스의 이호영이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헬멧을 벗고 이만식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동료들에 둘러싸인 이만식 선배는 비록 그 광경을 보지 못했지만 언젠가 TV를 통해 상대 선수가 보낸 그 경의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런 날을 위해 민예린이 기부를 해 놓았다는 폭죽이 잠실야구장의 밤하늘을 환하게 밝혔다.
“나는… 나는…….”
오늘 같은 날을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팀의 최고참 투수가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팬들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오늘은 그 노장의 인생에서 절대 잊지 못할 하루가 될 것이다.
* * *
[워리어스 이만식, 생애 첫 노히트노런 기록하며 라이벌 매지션스 스윕] [3볼넷 3삼진 0에러, 그의 노히트노런을 도운 건 야수들의 철벽 수비] [마지막 순간 엄청난 수비로 최고참의 대기록 도운 유격수 한수혁] [선수단 전용 통로 앞에서 수백 명의 팬들로부터 가드 오브 아너 받은 이만식] [경기가 끝난 후에도 계속된 불꽃축제, 그리고 팬들이 자발적으로 벌인 페스티벌] [피켓을 들고 기다리던 A씨 “야구는 처음 봤지만 정말 감격적이었다”] [인터넷 포털 검색어 1위 ‘이만식 노히트노런’, 2위 ‘민예린 신곡’] [개인 방송 통해 신곡 발표 예고한 민예린, 테마는 베테랑을 위하여?]경기가 끝난 후 선수단이 퇴근하는 통로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 사람들의 손에는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이만식 선배의 대기록 달성을 축하하는 피켓들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그들 중 누군가는 이만식이 데뷔할 때부터 보아온 오래된 팬이었고, 또 누군가는 민예린의 부탁을 받고 처음 야구장이란 곳을 오게 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걸 구분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자신을 축하하기 위해 몰려든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만식 선배가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축하해요!”
“축하합니다!”
“만식아! 축하한다!”
이만식 선배의 인사가 끝나자 그 많은 사람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하나의 통로를 만들어냈다.
그렇게 만들어진 통로를 이만식 선배와 워리어스 선수들이 걸어갔다.
누군가는 폭죽을 쏘아 올렸고, 또 누군가는 큰 목소리로 이만식 선배의 응원곡을 불렀다.
그 순간.
이만식 선배가 결국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그리고 나 역시 울컥할 수밖에 없었다.
팀이 앞으로 나아가는 데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든든한 베테랑들의 존재다.
신인들을 주축으로 한 젊은 에너지가 앞에서 팀을 이끈다면, 그 뒤에서 묵묵히 밀어주는 베테랑들의 역할 역시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워리어스는 이제 투타 양면에서 믿음직한 베테랑들을 갖게 되었다.
매지션스를 스윕하며 17승 11패 1무로 3위 자리를 확고히 지킨 팀 성적.
3할대의 타율에 홈런 6개 28타점의 호성적을 기록 중인 최고참 타자 조성오.
거기에 생애 첫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며 평균자책점을 3점대까지 낮추는 데 성공한 베테랑 투수 이만식.
그 둘을 중심으로 팀원들이 계속 힘을 내준다면 워리어스가 정말 가을야구의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울컥한 건 그런 계산 때문이 아니었다.
그냥… 이만식이라는 선수가 맞은 위대한 순간에 함께하고 있다는 것에 감격했을 뿐이다.
잠시 후 모든 것이 정리되고, 사람들이 각자 갈 길로 돌아서려던 그때.
“다들 정말 고마워, 고맙습니다! 모두 여러분 덕분입니다!”
참고 참았던 이만식 선배의 눈물이 터져버렸다. 30대 중반을 향해 달려가는 노장이 마치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기 시작했다.
그런 선배의 등을 두드려주며 생각했다.
어쩌면 나 역시 평생 이 순간을 잊지 못할 거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