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74)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73화(74/412)
#73. 뛰어 넘고 말 테다
“사장님, 이거 진짜 해야 합니까?”
“뭐? 야, 양두석이!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어? 그럼 그룹 비서실 타고 내려온 걸 거부할래?”
“아니, 그게 아니라 적어도 현장에 뭐라고 할 말은 있어야…….”
“그러니까 감독이 알아차리고 시끄러워지기 전에 조용히 처리하자는 거 아냐! 못 알아들어?”
대전 팔콘스의 사장실, 모기업 비서실로부터 걸려온 전화 한 통에 사장실이 벌컥 뒤집혔다.
상하 관계가 확실한 다른 구단 사장, 단장들과 달리 이 둘은 개인적으로도 꽤 친분이 있기에 평소에도 종종 몇 가지 사안을 놓고 말다툼을 하곤 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사장도 단장의 푸념을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이 구단의 주인이 직접 지시한 사항이다. 저번에 분명 오더를 내렸는데 왜 일이 진행 안 되냐는 질책성 전화가 걸려 왔다.
이제는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 무조건 지금 당장 처리해야 한다.
아직 주택담보대출도 5년이나 남았고, 딸내미는 다음 달 결혼식이 잡혀 있으며, 군대를 제대한 아들은 이제 막 유학을 준비 중이다.
여기서 자신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의 집안은 완전히 끝이다.
“헛소리 말고 빨리 도장 찍어서 워리어스에 보내주고, KBO에 공문도 보내! 형주 걔도 잘 포장해서 서울로 올려보내고. 워리어스 애들이 도장도 찍었다며? 그럼 이제 변명거리도 없잖아? 빨리 진행해!”
“하아…….”
대전 팔콘스의 단장 양두석의 입에서 깊고 진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박재철 그 인간이 회장님을 일대일로 만난다고 할 때부터 느낌이 쎄하기는 했다.
그가 미국에서 은퇴하고 대전에서 말년을 보낼 때 회장님의 은총을 듬뿍 받은 건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아무리 그래도 고향팀 1라운드 지명 신인을 날름 뺏어가?’
가뜩이나 박재철의 말이라면 껌뻑 죽는 게 팔콘스의 구단주다.
식사 시간 내내 이어진 투머치토크에 구단주가 홀랑 넘어가버렸다.
비록 시즌 평균자책점이 5점에 가깝지만 대전 마운드에만 서면 에이스급 활약을 하는 정태호.
그리고 대전의 1라운드 지명자였지만 지금 당장은 골치덩어리에 불과한 신인 서형주.
그 둘을 바꾸는 것이 양 구단에 윈윈이 될 것이라는 박재철의 설명에 팔콘스 구단주의 귀가 팔랑거렸다.
구단주 모임에서 망신을 당한 후 올해는 무조건 5위 안에는 들어야 한다고 선포한 상태다.
그런데 대전을 제집보다 더 편하게 여기고, 그곳 마운드에만 서면 에이스급 활약을 하는 선발투수를 폐급 신인 한 명과 바꿀 수 있는 기회라니.
박재철의 사탕발림에 홀랑 넘어간 구단주가 비서실을 통해 팔콘스 사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서형주 보내주고 정태호 받아오는 방안에 대해 연구해봐.’
‘네?’
‘얼른.’
팔콘스에서 그의 말은 법이고 진리다.
사장은 그의 말에 단 한마디 반항도 하지 못했다.
다만 이번 사태를 막아야겠다고 결심한 양두석 단장은 아주 작은 꼼수를 부려 시간을 벌었다.
서형주에게 내준 계약금이 5억, 몇 년 전 정태호가 워리어스로부터 받은 계약금이 2억.
박재철 단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트레이드를 하더라도 최소 그 3억의 계약금 차액, 그리고 지명권 한 장 정도는 받아야겠다고.
자칫 구단주의 심기를 거스를 수도 있지만 양두석 역시 그와의 인연으로 인해 이 자리에 오른 사람이다. 실무 차원에서 약간의 협상이 필요했다고 변명하면 바로 목을 날리지는 않을 것이다.
‘정태호와 서형주 간의 트레이드에서 예전에 받은 계약금을 논한다는 건 마치 잘 자란 싸움 닭 두 마리를 서로 교환할 때 그 두 마리의 닭이 원래 계란이었을 때 얼마였느냐를 따지는 것만큼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음, 이에 대해서는 예전 미국에서 진행한 연구 결과를 인용해야겠군요. 그 논문에 따르면… 여보세요?’
박재철이 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려 하길래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리고 대신 메시지를 남겼다.
[계약서 보냈습니다. 서형주 <-> 정태호+3억+2라운드 지명권, 사인해서 회신 주세요]스마트폰이 계속 진동하며 박재철이 보낸 메시지가 수북하게 쌓여 갔지만 하나도 읽지 않았다. 그 인간이 보낸 말도 안 되는 메시지를 보면 뒷목을 잡고 쓰러질 것 같아서.
됐다. 이대로 시간을 끌어보는 거다.
3억이라는 돈은 그렇다 치더라도 팀을 재건해야 하는 워리어스의 입장에서 2라운드 지명권을 포기한다는 건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어느 정도 맞아 떨어졌다. 워리어스 프런트에서도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가운데 일주일의 시간이 흘렀다.
양두석은 부디 구단주가 정태호와 서형주로부터 관심을 끊어주기를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세상 일은 그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일이 터져 버렸다.
중견수 최민석과 2루수 이창모, 워리어스의 핵심 야수 둘의 연쇄 부상.
궁지에 몰린 워리어스에서는 곧바로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후 팔콘스로 보내왔다.
‘젠장, 일이 안 될려니까.’
구단 내 모두가 서형주는 안 된다고 말할 때, 유일하게 그의 가능성을 믿고 있는 양두석은 남몰래 눈물을 삼키며 전화기를 들었다.
“접니다. 지금 2군에 있는 서형주, 바로 짐 챙겨서 서울로 보내세요. 네, 트레이드입니다. 워리어스로 갈 거에요.”
* * *
“자, 조금 급작스럽기는 하지만 일이 이렇게 진행됐다. 휴식일이라 태호가 인사도 못 하고 떠났지만 어차피 다음에 대전하고 경기할 때 만나게 될 테니까 그때 따로 인사하는 걸로 하고… 주장.”
“네, 감독님.”
“이제부터 형주는 우리 식구고 막내다. 수혁이, 치욱이, 인철이랑 똑같이 대해주고, 빨리 팀에 적응할 수 있게 도와줘.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알겠습니다. 염려 마십쇼, 감독님.”
“좋아, 일단 팀 사정상 형주 포지션은 외야가 될 테니까 그렇게 알고, 이만 해산. 코치들은 저 좀 따라오시고.”
한동안 정체되었던 두 팀 간의 트레이드가 순식간에 마무리되었다.
부산에서의 3연전을 모두 내주고, 심지어 그 과정에서 주전급 야수 두 명을 잃은 우리는 휴식일에 새로운 놈을 팀원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서형주.
대전 팔콘스의 1라운드 지명자로 내야와 외야, 여러 수비 포지션을 커버 가능하며, 타석에서는 빠른 발과 정교한 타격을 가졌다고 평가받던 최정상급 유망주.
하지만 지금 당장은 1할대의 타율에 허덕이다 다른 팀으로 팔려온 천덕꾸러기.
“형주야, 조금 낯설지? 다들 좋은 녀석들이니까 너도 빨리 적응할 수 있을 거다. 대전에서 조금 부진했던 거 알지만 괜찮아. 다들 그렇게 시작하는 거야. 천천히 1군에 적응할 수 있도록 내가 도울 테니 운동만 열심히 해. 알았지?”
조성오 선배가 선수단을 대표해 서형주를 맞았다.
그가 어깨 동무를 하는 순간 서형주가 몸을 움찔하며 인상을 쓰는 게 내 눈에 띄었다.
문득 저 녀석이 대전에서 동료들과 전혀 어울리지 못하고 겉돌았다는 소문이 생각났다.
아무리 내가 요청해 진행된 트레이드라 해도, 그리고 설사 우리 팀 야수가 완전히 바닥나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상황이라 해도.
저기서 이상한 짓을 하는 순간 서형주가 선택해야 할 길은 둘 중 하나다.
워리어스 2군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평생 썩든가, 아니면 내 손에 반쯤 죽도록 얻어맞은 후 새사람이 되든가.
농담이 아니다. 다른 건 몰라도 동료들, 특히 선배들에게 함부로 하는 놈은 내 팀에 필요 없다.
그것이 설사 미래 텍사스 레인저스의 주전 중견수이자, 골든글러버라고 해도 말이다.
“저는…….”
서형주의 입이 천천히 떨어졌다.
자, 과연 너는 무슨 선택을 할 거냐.
“열심히 하겠습니다! 선배님들!”
“응?”
“예전부터 정말 이 팀에 오는 게 소원이었습니다. 정말로요.”
“어, 어, 뭐, 그래. 그럼 다행이고.”
“죽을 힘을 다해 뛰겠습니다. 정말 잘 부탁드립니다. 친구들아, 너희도 반갑다!”
서형주의 입에서 그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순간 살짝 긴장했던 선수단의 분위기가 언제 그랬냐는 듯 풀려버렸다.
“야, 너 듣던 거랑은 많이 다르네? 나 누군지 알지?”
“그럼요! 김수학 선배님, 워리어스 외야의 자존심! 함께 뛸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뭐? 으하하, 그래. 말이라도 듣기 좋네. 우리 그럼 캐치볼이라도 할까?”
“제 평생 소원이었습니다. 선배님하고 캐치볼 하는 거요.”
“하하하, 멋진 녀석일세.”
…뭐지, 저 새끼.
분명 대전에서는 사회부적응자처럼 굴었다고 들었는데.
* * *
“…야, 한수혁. 나 기억나냐?”
“흠.”
그렇게 들려오는 소문과는 전혀 다른 짓을 하며 선배들 하나하나와 인사를 나눈 놈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아는 체를 해왔다.
정말로 이 상황이 기꺼운 것인지 살짝 상기되기까지 한 얼굴, 예전 대전에서 봤던 멍한 눈빛 역시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기억 안 나……?”
“나지.”
정확히 말하면 이 녀석이 말하는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은 내게 없다.
15년 전, 그것도 같은 학교도 아니어서 1년에 몇 차례 대회 때나 만나던 빡빡머리 사내놈 따위를 기억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녀석에 대한 다른 기억을 갖고 있다.
내가 8년 차가 되던 해, 빅리그에 도전장을 내밀었던 한국인 타자 서형주.
약팀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첫 해 주전 중견수 자리를 꿰찬 후 2년 차에는 기어코 골든글러브까지 차지한 놈.
수비력 하나만큼은 메이저리그에서도 손꼽히던, 거기에 끈질긴 타격으로 상대하는 팀의 골머리를 썩게 만들었던 레인저스의 선봉장.
물론 나와 특별한 인연 같은 건 없었다.
같은 한국인, 거기에 동갑내기라는 공통점이 있긴 했지만 어차피 지구가 같을 뿐 시애틀과 텍사스의 거리는 멀고도 멀었고, 나는 딱히 친구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었으니까.
그냥 두 팀 간 경기가 있을 때는 서로 아는 척을 하는 사이.
그게 나와 서형주 사이 인연의 전부다.
음.
그러고 보니 저 녀석 미국에서 뛸 때 언론 인터뷰 때마다 나를 들먹이던 게 기억 난다.
뭐라고 했더라, 언젠가는 한수혁을 뛰어넘을 거라고 했던가.
그때는 세상 물정 모르는 애송이의 헛소리라고 그냥 웃어 넘겼는데.
시간이 한참 지나 다시 생각해보니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저 녀석, 그게 혹시 나랑 친해지고 싶다는 신호 같은 거였나.
“그래? 기억한다는 거지? 나를?”
“응.”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게 있는 거니까.
기억한다는 말 한 마디에 서형주의 얼굴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밝아졌다.
그러고는 활짝 웃음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오늘 정식으로 선포한다. 내 목표는 너를 뛰어 넘는 거야. 한수혁, 긴장해라.”
…이거 왠지 데자뷰 같은데.
뭐, 선발 투수 하나에 3억, 거기에 무려 2라운드 지명권까지 얹어주고 데려온 놈이 이렇게 활기차니 다행이다.
만에 하나 또 헛짓거리를 하면 몇 대 쥐어박아서 정신 차리게 하면 되겠지.
* * *
“자, 오늘 라인업이다. 형주가 오자마자 선발로 뛰게 됐으니 다들 많이 도와주고, 서형주! 좌익수 수비 괜찮겠지?”
“예! 감독님! 목숨을 걸고 외야를 지키겠습니다!”
“…왜 그렇게 오버해? 혹시 선배들 중에 누가 갈구기라도 한 거야? 야, 쟤 왜 저래?”
“원래 저랬는데요, 감독님. 저놈 오자마자 저 상태예요.”
“흠… 좋아. 뭐, 괜히 애들 군기 잡는다고 이상한 짓들 하지 말고. 자, 라인업 확인하고 형주한테 수비 포메이션이랑 사인 다시 한번 알려주고. 이상.”
“알겠습니다!”
오늘 최민석 선배와 이창모 선배가 빠진 상황에서 이대준 감독이 선택한 라인업은 이랬다.
1번 유격수 한수혁
2번 3루수 안치욱
3번 1루수 조성오
4번 우익수 맥스 워커
5번 포수 장덕수
6번 중견수 김수학
7번 지명타자 강진석
8번 2루수 유인철
9번 좌익수 서형주
선발투수 브룩스 파커
약간은 실험적인 라인업이다.
이 팀에 온 후 처음으로 리드오프로 뛰게 되었다.
새로 이적해온 서형주가 좌익수 겸 9번 타자로 들어와 최민석 선배의 빈 자리를 메웠다.
그리고 이창모 선배의 공백은 유인철이 매웠다.
이렇게 놓고 보니 라인업에 1년 차 신인만 4명이다.
어떤 의미로는 대단한데, 이거.
“파이팅!”
“그래, 파이팅!”
흠, 오늘 처음 이 팀에 합류한 놈이, 오랜만에 1군 그라운드를 밟게 된 놈이, 그것도 전 소속팀에서 워크에식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받았던 놈이 먼저 파이팅 선창을?
모르겠다.
대체 저 녀석이 무슨 생각인 건지.
* * *
먼저 파이팅을 선창한 서형주가 긴장된 표정으로 허리를 살짝 숙이며 수비 준비를 시작했다.
오늘 상대는 광주 재규어스이지만 지금 중요한 건 상대팀이 누구냐가 아니다.
워리어스에 이적한 후 처음 뛰게 된 경기다.
무조건 잘할 거다.
지금 서형주는 행복했다.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자신의 재능이 한수혁에 비해 뒤진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다만 주변 환경이 문제였다. 아니, 적어도 자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신인의 성장을 기다리기보다는 당장 성적을 내야 하는 팔콘스의 상황, 후배들을 품어주기보다는 자신들부터 챙기기 바쁜 고참들, 자신만 보면 욕부터 해대는 팬들.
그런 상황이 자신의 성장을 막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의 착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팔콘스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에 나서기만 해도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는 것을, 관중들의 야유와 선배들의 타박에 하루하루가 지옥처럼 느껴지는 것을.
그러던 차에 워리어스로 트레이드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날아갈 것만 같았다.
새로 합류한 팀의 분위기는 무척 마음에 들었다. 선배들은 자신을 따뜻하게 감싸주려 애썼고, 신인이라고 해서 무작정 군기를 잡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마음에 든다.
이제는 적어도 환경적인 측면에서 누구를 원망할 일은 없어졌다.
남은 건 오직 하나, 한수혁, 저 녀석을 뛰어넘는 것.
시즌 초반, 많은 시간을 허비해 당장은 힘들겠지만 언젠가는 넘어설 것이다.
‘좋아! 그럼 진짜 해보자고!’
장래 텍사스 레인저스의 주전 중견수가 될 운명이었던 서형주가 한수혁을 이기기 위해 전력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