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75)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74화(75/412)
#74. 박 단장, 어디 좀 숨어 있으라고 해.
빅리그에서 처음 적응기를 보내던 시절을 제외하면 내 타순은 항상 2번, 아니면 3번이었다.
아주 오래전에는 팀에서 가장 강한 타자를 4번에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이후에는 팀내 최고 타자를 3번에 세워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얻었으며, 감독에 따라서는 2번에 가장 좋은 타자를 배치하는 경우도 있다.
내 개인적으로는 2번 타순이 가장 편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 앞에 출루율이 적어도 4할은 넘는 리드오프가 있어야 하고, 내 뒤로 평균 수준 이상의 클린업 트리오가 받쳐준다는 전제 하에서지만.
어쨌든 나는 오늘 한국 야구 데뷔 이래 처음으로 리드오프를 맡게 되었다.
빅리그 시절에도 몇 번 이 자리에 서기는 했는데… 내 기록이 어땠더라?
광주 재규어스(원정) 0 : 0 서울 워리어스(홈)
선발 투수 양지호
1회말 워리어스 공격
1번 타자 유격수 한수혁
└리드오프 한수혁이라… 이거 개 손해인데
└왜?
└홈런 쳐도 1점임
└ㅋㅋㅋ 미친
1구 볼
2구 볼
3구 볼
4구 볼
볼넷
타자 1루로 진출
└이젠 그냥 대놓고 볼만 던지네
└양지호 쪽팔린 줄 알아라. 그래도 국대 좌완이라는 놈이
└쟤가 결정했겠냐. 감독이 시켰겠지
└요즘 진짜 좋은 볼 안 들어오네. 홈런 본 지 좀 된 듯?
└그거 생각하면 1번도 나쁘지는 않네. 무조건 1회에 주자 하나 깔고 시작하는 셈이니
2번 타자 3루수 안치욱
스트라이크
1구 볼
2구 볼
1루 주자 도루, 2루에서 세이프
무사 주자 2루
└ㅋㅋㅋ 양지호 표정 봐라
└방금 웃긴 게 던지기 전에 투수랑 눈 마주쳤는데 한수혁 냅다 뛰어버림
└나라도 저렇게 당하면 멘탈 터질 듯
3구 타격
2루수 앞 땅볼
2루 주자 3루에서 세이프
타자 주자 1루에서 아웃
원 아웃 주자 3루
└역시 2땅 머신 안치욱
└찬스에서 저 지랄하면 속이 터지는데 이럴 때는 은근 든든하네
└무사 2루에서 안치욱 나오면 뭐다? 자동 1사 3루
3번 타자 1루수 조성오
└가자! 주장!
└큰 거 한 방 날려라 제발
└아들내미 학원비 벌려면 지금부터 빡세게 해야 한다
1구 볼
2구 스트라이크
3구 파울
4구 볼
5구 볼
6구 볼
볼넷
타자 주자 1루까지
1사 주자 1, 3루
└양지호 쫄았네
└요즘 한수혁 다음으로 주장이 제일 잘 침
└근데 양지호 쟤 저러면 WBC는 힘들 거 같은데
└재) 우리 대투수 욕하지 마라
└재) 보다 멀리 날기 위해 한 걸음 뒤로 물러섰을뿐…
└뭔 개소리야
4번 타자 우익수 맥스 워커
└큰 거는 잘 못 치지만 타점은 꼬박꼬박 먹어주는 새끼…
└야구는 별로여도 우럭 매운탕은 원샷하는 새끼…
└이 와중에 넷째까지 생겨서 분유값 벌어야 하는 새끼…
└힘내라 외노자
1구 볼
2구 스트라이크
3구 볼
4구 타격
우익수 플라이
3루 주자 홈으로
득점
2아웃 1루
└항상 느끼지만 귀신같이 타점은 먹어주는데 뭔가, 뭔가…
└그치? 좀 아쉽기는 함
└뭐 어쨌든 선취점 감사
* * *
“나이스!”
“맥스, 잘했어!”
“이대로만 가자!”
맥스 워커의 희생플라이로 선취점을 얻은 우리는 이어진 2회초 공격에서 재규어스의 용병 타자에게 큰 것 한 방을 허용하고 말았다.
스코어 1 대 1.
브룩스 파커가 다음 세 타자를 모두 중견수 플라이로 처리하면서 위기를 넘겼다.
이게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옆에서 다리를 덜덜 떨고 있는 2루수 유인철과, 저 멀리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좌익수 서형주 쪽으로는 아직 타구가 하나도 가지 않았다.
유인철은 그렇다 치고, 서형주 저놈이야 뭐…….
잘할 거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원래 빅리그 골든글러버가 될 놈이니까.
“플레이!”
그렇게 경기가 계속 진행되었다.
두 번째 타석에서도 나는 또 볼넷으로 1루에 진출했다. 그리고 안치욱의 안타 때 전력으로 질주해 1, 3루를 만들었다.
하지만 잘 맞은 조성오 선배의 타구가 상대 2루수의 호수비에 걸리며 득점에는 실패.
1회 1점을 먼저 내주기는 했지만 역시 좋은 투수다.
광주 재규어스의 좌완 에이스이자 국대 선발투수 중 하나로 대투수라는 별명을 가진 양지호.
지금까지 내가 상대해온 인천의 임준영, 대전의 류한결, 수원의 최경재 등과 함께 한국야구를 대표하는 투수들 중 하나.
대부분의 팀들이 용병으로 1, 2선발을 채우는 걸 감안하면 저런 국내 선수가 에이스급 기량을 갖고 있다는 건 상당히 큰 플러스 요인이다.
물론 우리 팀의 3선발인 이만식 선배도 아주 기량이 떨어진다고는 할 수 없지만 역시나 가을야구를 생각하면 조금 아쉽기는 하다.
아무튼 그건 나중 일이고…….
5회초, 여전히 스코어는 1 대 1인 가운데 2아웃까지 잘 잡아낸 브룩스가 광주의 3루수에게 2루타를 허용하며 순식간에 위기에 몰렸다.
타석에 들어선 건 최근 광주 타자들 중 타격감이 가장 뜨거운 용병 1루수.
타임을 요청하고 마운드에 오른 투수코치가 브룩스를 달랜다.
“이봐, 브룩스. 오늘 승부 타이밍이 너무 빨라. 자네답지 않게 왜 그래?”
“젠장, 내가 등 뒤에 선 저 애송이들 때문에 너무 긴장했나 보네요.”
“음, 그럴 때는 말이지 고개를 우측으로 60도 정도만 돌려봐.”
“네?”
“한번 해봐.”
“음.”
코치의 말대로 브룩스가 고개를 우측으로 60도 돌렸다.
거기에는 심각한 표정의 한수혁이 좌우에 선 자신의 동기들에게 잔소리를 해대고 있었다.
“이제 좀 괜찮아졌나?”
“무척이요.”
“좋아.”
코치가 마운드를 내려갔고, 안정을 되찾은 브룩스가 다시 타자와의 승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멘탈이 안정되었다고 해서 안 맞는 건 아니다.
따아아악!
타격음과 함께 잘 맞은 타구가 좌익수 쪽으로 힘차게 날아간다.
잡아 당기는 습성이 강한 만큼 전체적인 수비 라인이 좌측으로 이동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좌익수가 잡기에는 힘든 타구.
워리어스 팬들의 입에서 좆 됐다는 말이 터져 나오려던 그 순간.
“어? 어?”
“왜 쟤가 저기 있어?”
“미친?”
“발 개 빠른데?”
“원래 쟤 저렇게 수비 범위가 넓었나?”
오늘 경기 내내 별다른 존재감이 없던 좌익수 서형주가 미친 듯이 타구를 향해 질주했다.
순수한 주력만 놓고 보면 어쩌면 이 팀에서 가장 빠를지도 모를 그가 순식간에 타구를 따라잡더니 힘차게 몸을 날렸다.
타앗
“아웃!”
“우와아아!”
“장난 아니다! 서형주!”
“서형주! 서형주! 서형주!”
“외야에 한수혁 서 있는 줄 알았네.”
완전히 빠져나가던 공을 간신히 잡아낸 서형주가 관중석에서 들려오는 어떤 관중의 말 한마디에 귀를 쫑긋했다.
한수혁이 서 있는 줄 알았네.
인생의 목표를 그 괴물 따라잡기로 설정한 서형주로서는 최대의 찬사나 다름없었다.
기분이 한껏 좋아진 서형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관중들을 향해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우와아아아!”
다시 한번 엄청난 함성이 서형주에게로 향한다.
이에 고무된 녀석은 마치 월드시리즈 마지막 타구를 잡아낸 야수처럼 눈을 꼭 감은 채 감격에 빠져들었다.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눈물을 흘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수혁아, 쟤 좀 데려와라. 왜 저러냐? 이닝 끝난 거 모르나?”
“…데려올게요, 코치님.”
* * *
서형주의 극적인 다이빙캐치로 스코어는 여전히 1 대 1.
1회에 1점을 내준 후 뭔가를 깨달은 듯 각성해버린 양지호가 8회말 현재까지 계속 마운드를 지키고 있는 가운데, 우리팀의 선발이었던 브룩스도 7회까지 1점으로 잘 막은 후 홍영식 선배에게 마운드를 넘겼다.
불길한 예감이 든다.
아니, 이건 예감 같은 게 아니다. 실제 닥쳐올 현실이다.
이대로 가면 진다.
지난 8회초 수비에서 안타 2개와 볼넷 1개를 내주고도 내 호수비 덕에 무실점으로 이닝을 막아낸 홍영식 선배의 질린 표정을 보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조건 이번 이닝에 점수를 내야 한다. 무조건.
이번 8회말 우리의 공격은 9번 타자 서형주부터 시작된다.
오늘 두 번의 타석에서 중견수 플라이와 1루수 땅볼로 물러난 서형주의 표정은 잔뜩 굳어 있었다. 수비는 내가 기억하는 그대로였지만 타격은 또 별개의 문제인가 보다.
하지만 이대준 감독은 굳이 대타를 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애초에 대타로 내보낼 만한 타자도 없었거니와, 고등학교 시절 서형주가 보여준 재능을 깨우려면 조금 강하게 키우는 게 정답이라 판단한 모양이다.
“야.”
“어? 왜.”
“너 어깨가 자꾸 먼저 열리는 거 알고 있냐?”
“어깨가?”
“그래, 그립 위치도 많이 낮아졌고.”
“내 원래 타격폼은 알고?”
“알지. 기억이 나니까.”
“음.”
물론 내가 기억하는 건 녀석의 고등학교 시절이 아니라 미국에서 뛰던 시절의 타격폼이기는 하지만.
그리고 지금 녀석의 폼이 묘하게 밸런스가 틀어져 있다는 걸 눈치챈 건 나 혼자만이 아닐 거다.
그냥 이럴 때는 누가 얘기를 해주느냐에 따라 효과가 달라질 수 있다.
나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기에 감독이나 코치가 먼저 지적하길 기다렸지만 두 사람은 오늘 하루 서형주에게 특별한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어쩌면 대전에서 완전히 기가 눌린, 거기에 이적하자마자 선발로 나서게 된 녀석을 배려해서일지도 모르겠다. 오늘 하루 정도는 편하게 뛰어보라는 그런 마음?
하지만 난 그런 거 모른다.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말해줄 뿐.
“그리고 양지호, 손가락 힘이 많이 떨어져서 슬라이더보다는 체인지업을 던지려고 할 거야. 음, 약간 어퍼스윙을 가져가보는 것도 좋겠지.”
“그런가?”
“그렇지.”
“…….”
안치욱 놈하고 얘기를 할 때와는 조금 느낌이 다르다.
저 녀석이 곰 같다면 서형주 이놈은 뭐랄까, 여우 같다고 할까?
내 말에 뭔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이 된 서형주가 타석에 들어섰다.
그리고.
따아악!
– 아, 잘 맞았습니다! 서형주 선수가 초구를 받아쳐 멋진 2루타를 만들어냈습니다!
– 이게 얼마 만의 안타인가요? 서형주 선수가 대전에서 워리어스로 팀을 옮긴 것이 전화위복이 된 걸까요? 정말 잘 맞힌 타구였습니다.
– 진짜 행복해 보이네요. 아까 호수비도 그렇고 서형주 선수 이제 다시 아마 시절의 명성을 되찾아가는 걸까요?
– 그럴지도 모르죠. 대전 팬들이 보시면 조금은 섭섭하시겠습니다. 자, 이제 무사 주자 2루에서 한수혁 선수네요. 재미있는 승부가 될 것 같아요.
– 또 거를까요, 위원님?
– 글쎄요. 오늘 재규어스 벤치에서 한수혁 선수를 철저히 피하기는 했지만 여기서 걸러서 무사 1, 2루를 만든다? 다음에 나올 타자가 진루타를 아주 잘 치는 좌타자인 데다가, 그 다음에는 이 팀에서 한수혁 선수 다음으로 타격감이 좋은 조성오 선수죠. 이제 워리어스에도 양기철이라는 괜찮은 마무리 투수가 있다는 걸 감안하면… 여기서 저 같으면 안 거를 거 같습니다.
– 그럼 승부를 걸겠군요.
– 아마도요.
해설자의 예언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비슷한 선택을 할 상황이었다.
여기서 한 점이라도 주면 양기철이 올라온다.
비록 마무리로서 아직 완전한 검증을 받은 건 아니지만 예전 워리어스의 뒷문을 책임졌던 한진우나 최정수와는 급이 다른 투수다.
결국 광주 벤치에서는 나와의 승부를 선택했다.
아주 어렵게, 정말 어쩔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서는 볼넷이 된다는 걸 각오하고.
이런 건 결국 투수와 타자 간의 인내심의 싸움이다.
어떻게 해서는 유인구로 범타를 잡아내려는 투수, 그리고 그 공을 정타로 연결하려는 타자.
“볼.”
“스트라이크!”
“볼.”
몸쪽과 바깥쪽 보더라인을 타고 양지호의 슬라이더와 체인지업이 춤을 춘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나라고 해도 큰 타구를 만들어 내기는 힘들다.
평소보다 방망이를 조금 짧게 잡고, 임펙트도 조금 더 간결하게.
가볍게 맞춰서 내야를 뚫는다는 생각으로.
따악!
몸 쪽으로 들어오는 슬라이더를 그대로 받아쳤다.
“아악!”
“안 돼!”
낭패다. 생각보다 공이 훅 가라앉으면서 유격수 쪽으로 가는 땅볼 타구가 되고 말았다.
평소 같으면 안타가 될 수도 있는 코스였지만 그쪽으로 시프트가 걸린 탓에 타구 방향에서 유격수가 대기하고 있었다.
관중석에서 허탈한 비명이 터져 나오려던 그 순간.
– 아, 아앗! 이게 뭡니까! 유격수 송도준이 타구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2루 주자 서형주, 3루 돌아서 홈으로! 중견수가 뿌린 송구가 홈으로 향합니다! 과연! 세이프! 세이프! 살았습니다! 서형주 선수가 기가 막힌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으로 득점에 성공합니다! 그 사이 타자 주자는 2루까지!
– 네, 정말 대단하네요. 워리어스, 아니, 서형주 선수!
– 방금은 재규어스의 유격수 송도준 선수의 실책 아닌가요?
– 맞습니다. 실책으로 기록되기는 할 거예요. 하지만 제가 보기에 이건 송도준 선수의 잘못이 아닙니다.
– 그런가요?
– 느린 화면 다시 보시죠. 몸 쪽으로 들어온 공을 한수혁 선수가 잘 잡아당겼죠? 하지만 시프트가 걸려 있어서 유격수 정면으로 향했습니다. 2루 주자 서형주는 베이스에서 살짝 떨어진 상태였고요.
– 그렇네요.
– 원래대로라면 이 상황에서 2루 주자는 그대로 베이스로 빠르게 귀루해야 합니다. 혹은 상황에 따라 3루로 뛸 수도 있겠죠. 그런데 서형주 선수가 플레이 하는 걸 보세요. 슬쩍 두 발 앞으로 이동하면서 타구의 방향을 가려버렸습니다. 유격수인 송도준 선수 입장에서는 시야가 완전히 가려버린 거죠.
– 아아! 그래서 공을 놓친 거군요.
– 대단하네요. 센스 있는 플레이로 아웃이 될 타자를 살려내고 자신은 홈까지, 그리고 타자 주자는 2루까지 진루시켰어요. 타구에 맞으면 아웃이 될 수도 있는데, 겁도 나지 않는가 보네요! 서형주 선수가 프로에 와서 부진했던 걸 오늘 한 번에 씻어냅니다!
“와아아!”
“서형주! 서형주! 서형주!”
오랜만에 정말 전력을 다해 달렸다.
서형주가 타구 쪽으로 중심을 이동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움찔했지만 곧 녀석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확실히 머리회전이 엄청나게 빠른 놈이다.
2루 베이스 위에 서서 저 멀리 팀원들의 환대를 받고 있는 서형주를 바라보았다.
뭔가 짜릿한 기분이다.
다른 동료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 팀에 온 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예전 빅리그 시절에나 가능했던 콤비 플레이를 성공시키고 나니 온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미친, 저런 녀석을 고작 정태호…….
음.
아무튼 그렇게 헐값에 데려올 수 있었다니.
갑자기 승패를 떠나 야구가 너무 재미있게 느껴진다.
그나저나 이거 혹시 팔콘스에서 박재철 단장 죽이려고 드는 건 아니겠지?
아무래도 박재철 단장에게 당분간 전화기 끄고 어디 잠적해 있으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