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76)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75화(76/412)
#75. 한수혁을 평가한다는 건
팬의 입장에서 야구라는 스포츠가 참으로 매력적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엔터테인먼트와의 결합이 용이하다는 것이다.
마케팅 기법 같은 거창한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고 그냥 이런 거다.
팀이 9회 한 점 차로 앞서가고 있는 상황에서 등판하는 마무리 투수.
척 보기에도 강인해 보이는 얼굴과 넘쳐흐르는 카리스마, 그리고 그런 분위기를 만드는 데 일조하는 강렬한 등장곡까지.
상대 타자들과 팬들을 질리게 만드는 그 압도적인 연출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역대 메이저리그 통산 세이브 기록 2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트레버 호프만이다.
팀이 지고 있는 상황에서 트레버 호프만의 등장을 상징하는 지옥의 종소리, AC/DC의 ‘Hells Bells’가 울리면 상대팀 선수들은 저도 모르게 경기를 포기하곤 했다.
이런 게 바로 선수의 스타성에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가 결합된 효과라 할 수 있다.
빅리그뿐만 아니라 국내에도 그런 선수들이 몇 있다.
긴 머리를 휘날리며 강속구를 뿜어내는 매지션스의 좌완 마무리 이하영, 지금은 선발로 전환했지만 마무리로 뛰던 당시 불펜에만 등장해도 상대팀을 겁먹게 만들었던 대전의 구철중 등.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야구모자 밖으로 풍성하게 빠져나온 악성 곱슬머리와 메기를 연상시키는 두툼한 입술, 거기에 동요를 개사해서 만든 등장곡을 가진 양기철은 상대에게 공포보다는 웃음을 유발시킨다고 봐야 할 것 같다.
타고난 외모야 그렇다 치고, 등장곡이라도 당장 교체해야 할 것 같은데.
암만 그래도 쭈꾸쭈꾸 뿜뿜은 좀 심하지 않은가?
이건 상대팀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팀 기운부터 쭉쭉 빠지는 거 같으니 원.
“헤이, 얭. 팀의 승리를 지켜낼 준비는 다 된 건가?”
“네? 아, 아, 네. 물론입니다, 코치.”
“좋아. 다들 우리 얭을 적극적으로 도와서 오늘 경기를 승리로 가져와 보자고.”
이 팀의 마무리를 맡게 된 지도 꽤 되었건만 여전히 뭔가 어리버리해 보이는 양기철 선배가 두터운 입술을 들썩이며 말했다.
저 입술, 진짜 봐도 봐도 신기하네.
“다들 잘 부탁해. 잘 부탁합니다, 선배님들.”
“3루 쪽 타구는 저희가 최대한 처리할 테니까 걱정 마세요, 선배님.”
“그래, 수혁이 너만 믿는다. 오늘 잘 막아내면 내가… 음, 그런데 왜 날 그렇게 쳐다봐?”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양기철 선배의 두꺼운 입술에 계속 시선을 뺏기던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입술을 한 번 잡아보고 싶다는 욕망을 간신히 참아냈다.
진짜 신기하게 생겼네. 사람 입술이 어쩜 저렇게…….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아무튼 선배의 부탁은 그런 거였다.
오른손 투수인 양기철 선배는 공을 던진 후 왼쪽 글러브 낀 손으로 바닥을 짚어야 할 정도로 투구 동작이 말도 안 되게 크고 다이나믹하다.
그러다 보니 투구 후 수비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나 중심이 완전히 무너져버린 투수 우측 타구는 더더욱.
그래서 나와 안치욱은 양기철 선배가 등판할 때마다 긴장 상태가 될 수밖에 없다. 일반 타구도 문제지만 기습 번트에도 대비해야 하니 말이다.
하지만 다행인 건 포심 구속이 최대 154㎞/h까지 나오는 데다가 슬라이더 각이 엄청나다 보니 상대팀에서 쉽게 번트 작전을 하지 못한다는 거다.
“양뚜기 파이팅!”
관중석에서 누군가 양기철 선배의 새로운 별명을 크게 외친다.
공을 던진 후 완전히 넘어질 듯 말 듯한 폼 때문에 생긴 별명이란다.
양기철 선배의 표정이 살짝 상기되었다.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딱히 반길 만한 별명은 아니건만, 저번에 물어보니 본인은 양뚜기라는 별명이 마음에 든단다.
뭐, 본인이 좋다면 된 거겠지.
“플레이!”
9회초, 스코어는 2 대 1.
한 점 뒤진 광주 재규어스의 타순은 2번 유격수 송도준을 시작으로 3번 1루수 이현중, 4번 좌익수 매튜 로빈슨 순으로 이어진다.
10개 구단 최고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약하다고 하기도 힘든, 나름 괜찮은 상위타선.
사실 광주 재규어스가 지금 하위권을 맴도는 건 타력보다는 부실한 투수진에 원인이 있다.
양지호와 용병 두 명을 빼면 사실상 전멸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닌 1군 투수진 말이다.
왠지 남 일 같지가 않다.
천상진 선배와 양기철 선배가 갑자기 튀어나오지 않았다면 우리도 저 꼴을 면치 못했겠지.
잠깐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양기철 선배가 투구 준비에 들어갔다.
상대할 재규어스의 2번, 3번 타자가 모두 우타자다. 아마도 오늘 양기철 선배는 횡으로 변하는 슬라이더를 적극적으로 구사할 것이다.
슈웅
“우왓!”
“스트라이크!”
몸 쪽으로 들어가다 존 안으로 확 휘는 슬라이더에 송도준이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양기철 선배가 마무리 투수가 된 건 154㎞/h에 달하는 포심도 있지만 바로 저 멋진 슬라이더를 던질 줄 알아서다.
내가 던지는 고속 슬라이더와는 결이 좀 다르다.
뭐랄까, 우타자 입장에서 보면 정말 몸에 맞을 것처럼 날아온다고 해야 할까?
저건 알고도 치기 힘들다. 적어도 나 정도 레벨의 타자가 아니라면.
“스트라이크!”
이번에는 바깥쪽 높은 코스로 들어가는 152㎞/h짜리 포심.
방금 전 몸 쪽으로 파고는 공의 잔상이 머리에 남아 있던 송도준은 그 반대쪽 코스의 공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생각해보니 시즌 초반 어떤 언론에서 나와 송도준을 하나로 묶어 차세대 국가대표 유격수 후보라고 불렀던 기억이 난다.
글쎄.
어쩌면 그 기자가 광주 팬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스트라이크! 아웃!”
이번에는 다시 몸쪽으로 바싹 붙어 들어오다가 크게 휘어 나가는 슬라이더.
좌우좌우, 존을 엄청나게 크게 이용하는 양기철 선배의 투구 로테이션에 송도준이 삼구삼진을 당하고 말았다.
하는 꼴을 보아 하니, 쟤도 1군에 오래 있기는 힘들 거 같은데.
“플레이!”
송도준이 물러난 자리에 이제 재규어스의 3번 타자 이현중이 들어섰다.
벌써 10년 넘게 광주에서만 뛴 프랜차이즈 1루수.
어떻게 보면 우리팀 조성오 선배와 많이 닮았다. 2할 후반대의 타율에 20개 정도의 홈런을 기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주장을 맡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준비해라.”
“오케이.”
“응.”
내 좌우에 선 안치욱과 유인철에게 지시를 내린 후 시선을 타자의 배트에 고정했다.
방금 전 맥없이 물러난 송도준과는 차원이 다른 강타자다.
게다가 나이에 걸맞지 않게 배트스피드가 좋아 강한 내야 타구가 자주 나온다.
1루를 제외하면 전원 신인으로 구성된 우리 내야진은 오늘 큰 실수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건 이미 지나간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에러가 터져서 게임을 내주게 되면 아무 의미도 없다는 뜻이다.
평소보다 조금 뒤로 물러나 수비 위치를 잡았다.
만에 하나 좌우의 두 녀석이 실수를 할 경우에도 커버할 수 있도록.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까 좌익수 자리에서 엄청난 수비를 보여줬던 서형주, 저 녀석이 내야로 들어오면 어떨까?
안치욱을 지명으로 보내고 대신 3루를 보게 하면 팀에 더 도움이 되려나?
모르겠다.
확실한 건 그런 고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이 팀의 뎁스가 점점 두꺼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건 선수이기에 앞서 이 팀의 소유주로서 무엇보다 반가운 일이다.
“볼.”
초구 바깥쪽 슬라이더를 그대로 흘려 보낸 이현중이 심각한 표정으로 다시 타격 자세를 잡았다.
저 타자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볼 카운트와 상관없이 자기 스윙을 할 줄 안다는 거다.
한 점 차 뒤진 상황에서 무엇보다 출루가 필요하겠지만 저 타자는 자신의 눈에 공이 들어오면 무조건 풀스윙을 할 거다.
장덕수 선배의 미트가 바깥쪽 낮은 코스로 고정되었다.
순간 촉이 발동했다.
“유인철, 긴장.”
“…꿀꺽.”
대답 대신 침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본래 포지션이 유격수인 1년 차 신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상황이다.
하지만 버텨야 한다. 원래 이런 상황을 자꾸 겪어봐야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법이다.
모자 밖으로 빠져나온 악성 곱슬 머리를 한 번 정돈한 양기철 선배가 천천히 와인드업을 시작했다.
언제 봐도 신기한 투구폼.
그 손 끝에서 144㎞/h에 달하는 슬라이더가 뿜어져 나갔다.
따아악!
몸에 맞을 듯 들어오다 휙 꺾이는 공을 이현중이 멋지게 받아쳤다. 저 공에 손도 못 대고 당하던 송도준과는 확실히 레벨이 다른 타자다.
배트 중심보다는 살짝 끝부분에 맞긴 했지만 그래도 임펙트가 제대로 이뤄진 강한 타구가 2루수 쪽으로 날아간다.
깜짝 놀란 유인철이 몸 중심을 밑으로 확 낮추며 글러브를 내밀었다. 잡지는 못하더라도 몸으로라도 막아내겠다는 각오다.
“아악!”
의도는 좋았지만 운이 없었다. 강하게 날아와 글러브에 맞은 타구가 몸쪽이 아닌 2루 베이스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그대로 안타가 되겠구나 하던 그 순간.
탓
슈욱
턱
“아웃!”
뒤쪽에서 달려온 내가 맨손으로 공을 걷어 올려 그대로 송구, 간발의 차로 타자를 잡아냈다.
“미친!”
“진짜… 우와… 왜 쟤가 저기 있는 건데?”
“한 달에 한 번씩 하이라이트급 수비를 뽑아내네…….”
기자실에 있던 기자들 사이에서 저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일부 기자들은 자신이 방금 카메라에 담은 역동적인 모습을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 아앗, 위원님. 방금 그건 대체 뭔가요? 저건 무조건 안타 아니었습니까?
– 네, 이건, 이건 정말… 제 생각을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 생각을 바꾸다니요?
– 어제까지만 해도 한수혁 선수에 대해 아주 좋은 피지컬과 타고난 센스로 수비를 하는 선수라고 판단했거든요.
– 맞는 얘기 아닌가요?
– 네, 맞기는 한데… 그보다 더 중요한 걸 빼먹고 있었네요.
– 그게 뭡니까?
– 방금 화면을 보세요. 2루수 글러브를 맞고 굴절되어서 외야로 빠져나가죠? 저건 2루수를 욕할 수도 없는 그런 타구였어요. 정말 강하게 맞았거든요. 글러브를 댄 게 장할 정도로요.
– 그런데요?
– 지금 1루수와 2루수, 3루수 수비 위치를 보시면 1-2루간 타구에 대비한 모습이었어요. 유격수와 3루수는 정상 위치였고요. 바깥쪽 공을 던져서 밀어치기를 유도한 거죠.
– 네, 이해했습니다.
– 그런데 여기, 투수가 공을 던지는 순간을 보세요. 한수혁 선수가 왼쪽 무릎을 굽히면서 2루수 쪽으로 달려갈 준비를 하죠?
– 어, 정말이네요.
– 네, 그리고 타격음이 들리자마자 마치 예측이나 한 것처럼 유인철 선수의 뒤를 커버합니다. 그것도 정확하게 공이 굴절될 곳으로 말이죠. 지금 수비는 그래서 가능한 겁니다.
– 에… 뭐 한수혁 선수가 공이 어디로 굴절될지 예측이라도 했다는 말씀이신가요?
– 그렇게밖에는 설명이 안 되네요. 둘 중 하나입니다. 한수혁 선수에게 초자연적인 예측력이 있거나, 혹은 저런 상황에서 어떤 타구가 나올 확률이 가장 높은 지 계산해낼 수 있는 엄청난 경기 경험이 있거나.
– 믿기지 않는 이야기네요.
– 그렇죠? 둘 다 말이 안 되죠? 그래서 저는 한수혁 선수의 이번 플레이를 평가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 엄청난 칭찬이시군요. 평가 불가능한 선수라니요.
– 저 말고 어떤 해설위원을 가져다 놔도 마찬가지예요. 정말 한수혁 선수를 붙잡고 묻고 싶군요. 대체 어떻게 저런 플레이가 가능한 건지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