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77)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76화(77/412)
#76. 어디 또 주워 올 놈 없나
야구계에서 이대준이라는 초보 감독을 평가함에 있어 가장 높은 점수를 주는 항목 중 하나가 바로 과감한 선수 기용이다.
본래 경험이 적은 감독일수록 자신의 판단보다는 외부의 평가나 객관적인 데이터 같은 것에 의존하는 경향이 크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아직 자신의 판단에 대한 자신이 없어서, 혹은 일이 잘못되었을 때 변명거리가 필요해서.
그런 면에서 이대준 감독은 조금 특별하다.
처음 면접 자리에서 박재철 단장은 이대준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워리어스에 필요한 감독은 음… 일단 잠시만요 따뜻한 차가 한 잔 필요하겠군요. 뭘로 드시겠습니까? 커피? 홍차? 그래요, 정신을 맑게 해주는 카모마일 차가 좋겠군요. 이게 피부에도 좋지만 신경 안정과 숙면에 굉장히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논문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하, 그러고 보니 제가 처음 빅리그에 진출했을 때가 생각나는군요. 그때는 불면증 때문에 상당히 힘들었죠. 그러니까 그걸 이기기 위해서 제가…….’
엄청나게 긴 이야기에 당황했지만 결국 결론은 하나였다.
새롭게 태어나려는 워리어스에는 기존의 틀을 깰 수 있는 혁명가가 필요하다는 것, 그러면서도 선수들을 따뜻하게 감싸줄 수 있는 형님 같은 감독이 필요하다는 것.
그래서 받아들였다. 그런 거라면 아주 잘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아무튼 이대준은 잘될 선수를 발견해서 과감하게 밀어주고, 안 될 선수는 빨리빨리 버리는 데 아주 능숙하다.
때문에 아무리 똥 같은 놈들이라고 해도 고액 계약으로 묶어 놓았던 황성민, 송기태, 한진우, 정기호 같은 선수들을 모두 내보낼 때도 전혀 아까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있었다.
이름값에 전혀 구애를 받지 않고, 연차나 과거 기록보다는 현재의 기량에만 포커스를 맞춘다.
그래서 전통적인 걸 선호하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욕을 먹긴 하지만 워리어스처럼 선수 뎁스가 얕은 팀에서는 그런 방식이 꽤 큰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물론 가끔은 연패에 빠질 때도 있지만 그럴 때는 분명 뚜렷한 이유가 있었다.
한수혁이 출장 정지로 빠졌다던지, 지난 부산 3연전처럼 주축 선수들이 차례로 부상을 당했다던지 말이다.
‘흠.’
이대준이 어제 있었던 광주 재규어스와의 1차전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자칫 9회에 터졌을지도 모를 경기를 양기철의 호투와 한수혁의 호수비로 막아내며 3연패 탈출에 성공했다. 거기까지 가는 과정에서는 서형주가 또 큰 역할을 했다.
사실 고민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뭔가 느낌은 오지만 과감하게 밀어붙이자니 확신이 안 서는 그런 고민.
“보스, 아직도 선발을 결정 못 한 건가요?”
“아, 벤자민. 이게 마음 속으로는 결정을 내렸는데 내가 좀 과한 거 아닌가 싶어서 말입니다.”
“으음?”
한국야구에서만 뛰다가 은퇴 후 해설위원을 거쳐 곧바로 감독이 된 40대의 이대준, 그리고 빅리그와 마이너리그를 오가며 오랜 시간 감독, 코치 생활을 거쳐온 60대의 벤자민 레이놀즈.
이제는 호흡을 맞춘 지 한 달하고도 반이 훌쩍 지나갔건만 여전히 두 사람 사이에는 얇은 벽 같은 게 존재하고 있다.
그것이 통역이 없으면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언어의 문제인지, 아니면 두 사람의 야구관이 달라서 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렇다.
“혹시 제가 도움이 될 일이 있겠습니까?”
“물론이죠, 벤자민.”
그럼에도 이들 사이에 별다른 불협화음이 나지 않는 건 두 사람 모두 뚜렷한 공통의 목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워리어스의 승리라는 확실한 목표.
“어디 한번 우리 보스의 고민을 들어볼까요?”
경력도 경력이지만 순수하게 나이만 놓고 봐도 거의 부자지간만큼 차이가 나는 관계다.
그럼에도 벤자민의 말 속에는 보스에 대한 존중이 담겨 있다.
“어제 서형주와 한수혁, 두 녀석의 콤비 플레이를 보다 보니까 말이죠.”
“확실히 인상적이었죠. 공수 모두에서요.”
“네, 그걸 보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저 두 녀석을 하나로 묶으면 시너지가 엄청나지 않을까 하는…….”
“음.”
“그래서 방금 라인업 용지에 1번 서형주, 2번 한수혁을 썼다가 지웠다가 그러고 있는 참이었습니다. 1할 초반대의 타자를 리드오프로 세운다는 게 맞는지 확신이 안 서서 말이죠.”
이대준의 말에 벤자민이 뭔지 알겠다는 듯 옅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초보 감독이라면 꼭 한 번은 지나가야 할 과도기, 지금 눈앞의 이 젊은 보스는 바로 그 시기를 지나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보스.”
“네.”
“제가 야구판에 꽤 오래 있어 봤지만 말입니다. 어차피 이 바닥에서 확실한 성공으로 가는 길 따위는 없더군요.”
“저도 조금씩 배워가고 있습니다.”
“길게 말할 필요도 없군요. 뭘 망설이시나요? 이 팀의 보스는 당신입니다.”
벤자민 수석코치의 말에 이대준이 잠깐 멍한 표정이 되었다가 이내 평소의 얼굴로 돌아왔다.
이제야 머릿속이 조금 맑아지는 기분이다.
“고맙군요. 벤자민. 당신은 정말 최고의 조력자입니다.”
“별 말씀을.”
* * *
광주 재규어스(원정) VS 서울 워리어스(홈)
투수 마이크 캠벨
1회말 워리어스 공격
1번 타자 좌익수 서형주
└얘가 왜 1번임? 이대준 드디어 미침? 부상 선수가 너무 많아 돌아버린 거임?
└1할 2푼따리 리드오프라…
└팔) 우리가 버린 애 주워다가 1번으로 쓰는 꼴 보게
└팔) 1할 따리를 거기 세우고 싶음?
└야, 쟤 너희 1라운더 지명이었어. 왜 욕함?
└팔) 그냥 너희가 딱해서
└씨발, 이제 하다 하다 팔콘스 놈들한테 놀림을 당하네
1구 볼
2구 스트라이크
3구 스윙, 스트라이크
└스윙 꼬라지 봐라
└저러니 대전에서 1라운더를 그냥 미련 없이 버리지
└팔) 우리가 뭐랬음. 쟤 폐급이라니까?
└됐고 2번이 수혁이니까 화장실이나 다녀와야겠다
4구 타격
좌익수 앞 안타
주자 1루
└?
└???
└?????
└누가 우리 갓형주 욕했음?
└어떤 야알못이 워리어스 차기 리드오프를 욕함? 디질라고?
└아까 깝치던 팔콘스 새끼들 다 어디 감?
└퇴물 정태호 데려가서 행복야구 하는 놈들 왜 안 보임?
└ㅋㅋㅋ 미친놈들 태세전환 보게
└근데 어제도 그렇고 타구 질이 장난 아닌데
└진짜 쟤도 설마 우리 팀에서 살아나는 거임?
2번 타자 유격수 한수혁
└오… 이렇게 되니까 무사 1루에 한수혁이네
└이대준 갓장님…
└이러면 거르지도 못하지. 거르면 무사 1, 2루에서 조성오 상대해야 함
└ㅋㅋㅋ 이상하다. 이창모, 최민석 빠졌는데 왜 구멍이 안 보이는 거 같지?
└정태호 아깝다고 한 놈들 대가리 박아라
1구 볼
2구 볼
└투수 멘탈 터진 듯. 육수 흘리는 거 봐라
└얼굴이 하얘서 그런가, 마운드에 웬 시체가 하나 서 있는 거 같네
3구 타격
우익수 앞 안타
1루 주자 3루까지, 타자 주자 1루까지
무사 주자 1, 3루
└고오오오급 야구!
└뭔가 되게 편안하다
└95년생 아재인데 2010년대 워리어스 야구 보는 것 같음
└여기 그때 야구 본 놈들 몇이나 될지 몰겠네
3번 타자 1루수 조성오
└희플! 희플! 희플!
└주장 요즘 얼굴만 봐도 진짜 믿음직함
└제발 병살타는 안 돼!
└근데 저쪽 투수 얼굴이 하얗다 못해 이제 투명해진 거 같은데?
└ㅋㅋㅋ 존나 웃김. 투명했다 빨개졌다, 투명했다 빨개졌다
1구 볼
2구 볼
3구 스트라이크
3루 주자 도루, 포수 3루로 송구, 주자 3루로 귀루해서 세이프
그 사이 1루 주자 2루로
무사 주자 2, 3루
└?
└방금 뭐임?
└3루에 있던 서형주가 도루하는 척 페이크 걸었고, 그 사이 한수혁이 2루로 냅다 뜀
└미친… 작전 걸린 건가? 3루 주자 런다운 걸리는 줄 알고 식겁
└방금 그냥 선수들이 알아서 한 거 같은데? 이대준 표정 봐
└진짜네. 이대준도 개 놀란 듯
└ㅋㅋㅋ 골때리네
* * *
온몸에 전율이 흐른다.
“보스?”
“아, 아, 이런, 죄송합니다.”
“타자에게 사인 보내야죠. 웨이팅 사인 유지할까요?”
“음, 아뇨. 이제는 선수들에게 맡겨두죠.”
“좋은 선택이군요.”
감독의 의중을 확인한 타격코치가 타석에 선 조성오에게 마음대로 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사실 방금 전 상황은 순전히 선수,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서형주의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무사 주자 1, 3루. 아무리 한수혁의 발이 빠르다 해도 타자가 조성오라는 걸 감안하면 병살타가 나올 수도 있는 상황.
바로 그때 서형주와 한수혁이 사인을 주고받는 게 보였다.
더블 스틸, 정확히 말하면 3루 주자는 뛰는 척만 하고 귀루하고, 그 사이 1루 주자는 2루로 뛰는 작전.
서형주가 벤치를 향해 승낙을 요하는 사인을 보냈다.
이대준은 뭐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고, 결국 저 두 명의 신인들이 멋지게 상대 배터리를 농락해 무사 2, 3루 상황을 만들어냈다.
‘미친.’
또 한 번 전율이 온몸을 휘감는다.
어제 경기에서 보았던 서형주와 한수혁의 콤비 플레이.
거기에서 영감을 얻어 둘을 붙여 놓은 것이 1회부터 바로 긍정적인 결과로 돌아왔다.
이래서 야구를 끊을 수가 없다.
‘음.’
그 순간 이대준의 머릿속에서 이창모와 최민석, 둘이 돌아왔을 때의 라인업 구상이 시작되었다.
물론 1번 타자 자리에는 서형주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 * *
서형주의 플레이에 영감을 받은 건 이대준 감독만이 아니었다.
나도 살짝 놀랐다.
벤치에서 승낙이 떨어졌기에 저 녀석이 하자는 대로 하긴 했지만 조금 위험하지 않나 싶었다.
오늘 광주 재규어스의 안방을 지키는 포수의 어깨가 강하다는 점, 그리고 서형주가 바로 어제까지 1할의 타율에 허덕이던 데뷔 1년차 신인이라는 것이 내 판단의 근거였다.
하지만 저 녀석이 3루수와 투수, 포수를 멋지게 농락하는 순간, 그리고 그 틈을 타 내가 2루에 도착하는 순간.
피식.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어제 저 녀석이 유격수의 시야를 가려 아웃이 될 타구가 외야로 빠져나갔을 때, 그리고 지금 다시 콤비 플레이를 이뤄 상대 배터리를 농락했을 때.
야구가 재밌다는 생각이 다시 들기 시작했다.
뭐랄까, 다른 동료들에게는 조금 미안한 얘기지만, 내 플레이를 이해하고 옆에서 보조를 맞춰줄 녀석을 발견했다는 데서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따아악!
조성오 선배가 때린 타구가 2루수 방면 땅볼이 되었고, 그 사이 서형주는 홈으로, 그리고 나는 3루로 진루하는 데 성공했다.
정말로 방금 전 도루가 없었다면 병살타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홈 플레이트를 밟은 서형주가 타점을 올리고 흐뭇하게 웃고 있는 조성오 선배에게 다가가 아양을 부린다.
저 녀석의 기량이 제대로 터지려면 시간이 좀 필요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을 조금 수정해야 할 것 같다. 이러면 설사 이창모 선배가 돌아오더라도 리드오프 자리를 지키는 건 서형주가 될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뭐가 저 녀석을 저렇게 열심히 뛰게 만드는 걸까, 그리고 대체 뭐가 저렇게 즐거운 걸까?
모르겠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중요한 건 드디어 워리어스에 제대로 된 리드오프가 생겼다는 거다.
그동안 1번 타자로 나서던 이창모 선배에게 부족했던 기동력까지 갖춘.
그야말로 리드오프의 정석에 가까운 타자.
꾸욱
뭔가를 이뤘다는 성취욕, 그리고 만족감에 절로 주먹이 꽉 쥐어진다.
이 팀을 처음 넘겨 받을 때만 해도 몰랐던 감정.
좋은 선수들, 내 뒤를 받쳐 줄 수 있는, 우승이라는 목표를 향해 함께 달려갈 수 있는 동료들을 하나하나 모은다는 게 이렇게 재미있을 줄이야.
어디… 또 거저 주워 올 놈 좀 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