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80)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79화(80/412)
#79. 야구만 혀, 야구만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승부의 순간.
자신이 내놓은 카드가 상대방을 꺾었을 때의 쾌감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상대의 의중을 읽어냈다는 기쁨, 그리고 그 의중을 박살 내는 데서 오는 짜릿함.
그것에 한번 중독되면 헤어나올 길이 없다.
우리들이 게임이나 도박에 빠지면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 이유일 것이다.
워리어스의 바로 위, 시즌 순위 2위에 자리를 잡고 있는 강팀 수원.
유독 워리어스, 정확히 말하면 한수혁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상대팀 에이스의 선발 등판.
여러모로 불리한 상황에서 게임을 시작하게 된 이대준 감독이 방금 전 조성오의 스퀴즈 번트로 두 번째 점수를 올리는 순간,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자신이 내놓은 카드가 맞아떨어진 정도가 아니라, 그 카드가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해 점수를 만들어냈다.
이건 이대준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팀의 형태였다.
“예쓰!”
“보스……?”
“흐흐, 별 것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이대준이 벤치에서 벌떡 일어서자 옆에 앉아 있던 수석코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는 벤치의 사인도 없이 4번 타자가 번트를 댄 데 대해 감독이 기분 나빠하는구나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전혀 아니다.
오히려 조성오를 칭찬해주고 싶어 미치겠다.
역회전 볼을 자주 구사하는 최경재의 습성을 생각할 때 조성오의 타격 매커니즘상 뜬 공보다는 땅볼이 나올 확률이 높다. 수원 내야진의 수비력을 감안할 때 3루 주자가 홈에 들어오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에 저 서른다섯 살의 베테랑 타자는 가장 안전하게 한수혁을 홈으로 불러들일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결코 스윙을 하기가 무서워서, 그 결과를 책임지기 싫어서 도망간 게 아니라는 소리다.
“좋아, 잘했어. 주장, 이리 와! 자, 음료수부터 한 잔 하고. 수혁아, 너도 이거 하나 마시고!”
“감사합니다! 감독님!”
“좋아, 내가 너 때문에 산다. 흐흐.”
3루타를 치고 나가 홈까지 들어온 한수혁도 이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대준이 생각하는 야구관을 가장 완벽하게 구현해낸 주장이 너무나도 기특해 미치겠다.
이대준이 생각하기에 야구란 결국 선수가 하는 것이었다.
그건 자신을 가르친 은사의 영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현역 시절 그렇게 행동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투수가 공 하나하나를 던질 때마다 데이터에 따라 덕아웃에서 직접 사인을 내고, 수비 위치를 조정하고, 선수들의 플레이를 하나하나 컨트롤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선수들이 알아서 움직이는 그런 야구.
누군가는 그것이 구닥다리라고 할 수도 있고,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는다 할 수도 있지만 이대준의 생각은 달랐다.
모든 것을 덕아웃에서 컨트롤하고 선수들이 거기에 따르기만 한다면 당장 성적은 잘 나올 수도 있다. 아니, 잘 나올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는 A급 팀과 A급 선수는 만들어낼 수 있어도, 리그를 지배할 수 있는 왕조, 그리고 혼자서 게임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슈퍼스타는 만들어낼 수 없다는 게 이대준의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이대준은 그라운드에서 선수들이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방치한다. 그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그리고 행동하길 원한다.
실패해도 좋다. 어차피 덕아웃의 사인대로 플레이 해도 반드시 성공하리란 보장 같은 건 없으니까.
플레이에 대한 권한은 선수에게, 그리고 책임은 감독인 자신이.
이대준의 감독 철학이 그렇게 조금씩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 * *
“아웃!”
길었던 워리어스의 1회초 공격이 마침내 끝났다.
공 다섯 개로 장덕수 선배를 삼진으로 잡아낸 최경재가 고개를 떨군 채 홈팀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방금 타석 전까지 시즌 타율 0.269에 출루율 0.348, 장타율 0.421, 홈런 6개 30타점을 기록 중인 장덕수 선배는 최근 타격에 약간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안경을 착용한 후 타율이 3푼 가까이 오르고 장타율도 2푼 이상 올랐지만 아무래도 체력적인 문제가 발생한 것 같다.
물론 타고난 장사인 데다가 유연성도 좋아 부상을 잘 당하지는 않지만 황성민이 퇴출된 후 지금까지, 출장정지로 빠진 1경기를 제외하면 줄곧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거기에 팀 사정상 5번으로 타순이 올라온 걸 감안하면 더더욱.
사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가끔은 장덕수 선배가 지명타자로 빠지고, 대신 다른 포수가 마스크를 써줘야 하지만…….
음.
우리 팀 백업 포수인 용지훈은 솔직히 말하면 포수라기보다는 1루수에 더 가깝다.
2군 배터리 코치가 지금 눈에 불을 켜고 백업 포수감을 찾고 있다고는 하지만 글쎄, 차라리 트레이드로 데려오는 게 빠르지 싶다.
그걸 아는지 워리어스 팬들도 삼진을 먹은 장덕수가 아닌 구단을 욕했다.
└진짜 이 팀 미친 거 아님? 포수 하나로 시즌 나려는 건가?
└구단주 대체 뭐 함? 한수혁 데려온 거 말고 한 게 뭐임?
└서형주도 데려오긴 했지
└그건 박재철 단장 업적이고
이거 뭔가 억울한데.
아무튼 팬들 반응과 상관없이 백업포수 문제는 최대한 빨리 해결해야 할 것 같다.
그나저나 오늘 선발로 나서는 천상진 선배의 얼굴이 유난히 상쾌해 보인다.
“선배님, 오늘 컨디션 좋아 보이시네요.”
“응? 아, 그래. 구단에서 전력분석원 붙여 주셔서 내 할 일이 많이 줄어들었거든. 어제는 3년 만에 야구 말고 다른 걸 TV로 봤다니까.”
3년 만에 야구 말고 다른 걸 봤다고?
나도 야구에 미치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아닌데.
어젯밤만 해도 예전 민예린이 나왔던 음악방송도 잠깐 보고…….
흠.
뭐, 그건 그렇고.
“아무튼 수혁아, 오늘도 잘 부탁한다.”
“언제든지요.”
이 선배를 보면 그 말이 떠오른다.
-야구 경기는 잠에서 깨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말 그대로다. 한마디로 잠에서 깨어난 순간부터, 다시 잠에 들 때까지 그 모든 시간이 선수에게는 경기의 연속이라는 뜻이다.
누가 한 말이냐고?
레지널드 마르티네즈 레지 잭슨.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좌타 거포이자 배리 본즈의 이종사촌으로도 유명한 전설적인 타자 레지 잭슨이 남긴 말이다.
어쩌면 천상진이라는 선수는 그 말을 남긴 레지 잭슨보다 더 그 말을 잘 따르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이 사람이 대단한 건 야구에 대한 열정만은 아니다.
그냥 마운드를 향해 걸어가기만 하는데 여자 팬들이 자지러진다.
“끼악!”
“상진 오빠!”
“오빠야 보러 대구에서 왔다! 여기 좀! 이쪽 좀!”
나도 여자 팬들이 꽤 많은 편이지만 누구 말처럼 엘프 혼혈처럼 생긴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에 운동 선수치고는 약간 여려 보이는 천상진 선배의 겉모습이 여심을 제대로 자극한 모양이다.
방송에서 그러더라. 역대 국내 운동선수 중 가장 여자들에게 먹힐 외모라고.
좋아.
유니폼 판매량 올라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거 같네.
아무튼 지난 4월 말 첫 1군 무대에 데뷔한 이후 5월 말까지 다섯 경기에 출전해 3.62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3승 1패를 기록 중인 천상진 선배는 이제 팀원들과 팬들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 투수가 되었다.
“자, 다들 파이팅!”
“파이팅!”
천상진이 마운드에 오르고, 내야수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았다. 안치욱의 옆모습을 보니 저절로 잔소리가 튀어 나온다.
“오늘 그라운드가 젖었으니까 타구 바운드 맞출 때 조심하고.”
“오케이.”
“그리고 아까 형주가 그러던데?”
“뭐라고?”
“오늘 너 펑고 받는 거 보니까 무조건 에러 하나는 할 거 같다고.”
“…두고 봐라. 저 외야에서 놀고먹고 있는 놈 코를 내가 납작하게 해줄 테니까.”
3루수 안치욱과 중견수 서형주.
눈만 마주치면 서로 티격태격하지만 한쪽이 빈볼이라도 맞으면 가장 먼저 달려나가는, 라이벌이자 친구 같은 그런 관계.
가끔 녀석들이 정말 순수하게 경쟁 의식을 불태우고, 또 서로를 챙기는 모습을 보면 부러울 때가 있다.
겉보기에는 녀석들과 같은 나이지만 이미 서른다섯의 삶을 살아본 나는 저 순수한 스무 살 풋내기들의 감성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종종 있다.
그렇기에 한 발 뒤로 물러서서 녀석들을 바라본다.
저 두 놈은 그런 내 눈빛이 기분 나쁘다고 투덜거리기는 하지만.
아무리 동갑내기로 보려고 해도 그냥 조카처럼 느껴지는 걸 어쩌란 말인가.
두 번째 삶을 산다는 건 그래서 가끔은 즐겁기도, 가끔은 고통스럽기도 한 일이다.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항상 고려하며 살아간다는 건 생각만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니까.
어쩌면 내가 유일하게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은 그라운드 위에서 치고 달리는, 그 때뿐일지도 모르겠다.
* * *
‘오늘 그라운드가 음… 상태가 별로네. 외야 쪽도 그렇고.’
오늘 아침까지 내린 비로 그라운드 상태가 평소보다 좋지 못하다. 구장 관리팀이 열심히 정비를 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하지만 천상진은 크게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가끔 무심한 눈으로 어딘가를 노려볼 때면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곤 하지만 사실 동료들에게는 세상 누구보다 친절한 포수 장덕수.
10개 구단 1루수 중에서 수비력만 따지면 최고일지도 모를 1루수 조성오.
아직도 가끔은 불안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지만 그래도 부족한 수비력을 강한 어깨로 커버하는 3루수 안치욱.
중견수에서 좌익수로 자리를 이동한 후에도 여전히 빠른 발을 이용한 재치 있는 수비를 보여주고 있는, 사실 좌익수를 보기에는 아까운 수비력을 가진 최민석.
그리고 스피드나 타구 판단력은 평범한 수준이지만 홈플레이트까지 노바운드로 송구할 수 있는 메이저리그급 어깨를 가진 우익수 맥스 워커.
모두 좋은 수비수들이다.
하지만 진짜는 따로 있다.
‘2루수 이창모, 유격수 한수혁, 중견수 서형주.’
천상진이 생각하기에 10개 구단 전체를 통틀어도 최고라고 자부할 수 있는 센터라인.
그것을 깨달은 순간 천상진은 자신의 투구 로테이션을 바꿔서라도 최대한 타구를 중앙으로 유도하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타격폼과 그날 그날 배트 스피드에 따라 포심의 속도를 조절한다든지, 바깥쪽으로 타자 밸런스를 쏠리게 한 후 몸쪽 공을 던지는 식으로 말이다.
물론 천상진으로서는 그 센터라인이 전직 메이저리거 둘과 미래의 메이저리거 하나가 섞여 있는, 사실상 KBO에서는 반칙에 가까운 조합이라는 걸 모른 채 그저 본능적으로 하는 행동이지만 말이다.
“플레이!”
천상진이 자신의 뒤를 지킬 야수들에 대해 하나하나 음미하는 사이 수원 커맨더스의 1번 타자 안태규가 타석에 들어섰다.
‘유격수 안태규, 우투좌타. 데뷔 초기에는 볼 카운트와 상관없이 과감하게 배트가 나왔으나 3년 차에 접어들면서부터 갑자기 선구안이 개화한 수원의 리드오프, 코스와 상관없이 밀고 당기는 것이 가능하며 초구에 기습 번트를 할 때도 있음. 팬들이 SNS에 몰려와 몸 쪽 공 치는 연습 좀 하라고 했더니 바로 차단을 해버린 불 같은 성격. 최근에는 온라인 게임에 푹 빠져 있어 친구들과 매일 밤 랭크전을 하는 중. 게임 존나 못하네 병신 새끼라는 욕을 아주 싫어함. 얼마나 게임에서 욕을 많이 먹었는지 그 불 같은 성격이 최근 들어 도를 넘어서고 있음.’
안태규에 대한 검색이 모두 끝났다.
전력분석팀에서 천상진을 위해 특별히 붙여준 직원과 함께 추출해낸 자료들이다.
뭔가 엄청나게 많은 것 같지만 쓸 만한 건 딱 하나뿐이었다.
가뜩이나 욱하는 성격을 가진 안태규가 최근 거듭된 랭크전 패배로 더욱 궁지에 몰렸다는 것. 아마도 수면이 부족해서 짜증이 쉽게 터질 거라는 것.
그렇다면 흔든다.
이런 타자에게 가장 적합한 볼이 하나 있다.
‘끄덕’
자신이 먼저 장덕수에게 사인을 낸 천상진이 천천히 투구를 시작했다.
옛 코치들의 방치 속에서 홀로 익혀야 했던 투구 폼에 워리어스의 새 코치가 조금 손을 댔다.
필요에 따라 릴리스 포인트를 동일하게 가져가 타자가 포심인지 변화구인지 모르게 던지기도 하는 방법.
때로는 일부러 릴리스 포인트에 차이를 둬 상대를 헛갈리게 하는 방법.
그 두 가지를 혼용하는 것.
사실 쉬운 일은 아니다. 자칫하면 다양성을 추가하려다 중심을 잃게 될 수도 있다.
‘천, 이건 강권이 아니라 권유야. 자네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기를 바란다면 한번 도전해 보자는 거지.’
‘경청하겠습니다, 코치님.’
‘좋아, 일단 릴리스 포인트를 모두 일정하게 하면 타자는 다음 공이 뭐가 나올지 알 수가 없어. 그러면 예측 타격을 하거나, 혹은 상황에 따라 즉석에서 대응하는 타격법을 취할 수밖에 없지.’
‘이해했습니다, 코치.’
‘좋아. 우리는 여기에 하나를 더 섞어 보는 거야. 첫 번째와 두 번째 타석까지는 그렇게 릴리스 포인트를 일정하게, 하지만 세 번째 타석부터는 포심과 브레이킹볼에 릴리스 포인트 차이를 두는 거지. 그러면 상대가 어떻게 될 것 같은가?’
‘헛갈리겠죠.’
‘맞아.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다시 패턴을 바꾸는 거야. 동일한 릴리스 포인트로 돌아오는 거지. 물론 쉽지는 않아. 자칫하면 밸런스를 잃을 수도 있거든. 어때, 한번 해볼 텐가?’
천상진은 진심으로 코치와 함께하는 시간들이 너무 즐거웠다.
아직 코치의 가르침을 따라가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그렇게 자신을 이해해주는 누군가와 야구에 대해 토론을 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즐거웠다.
천상진이 천천히 와인드업을 시작했다.
코치와 함께 조금씩 다듬어 가고 있는 투구폼, 그 손끝에서 그가 던질 수 있는 가장 빠른 공이 발사되듯 튕겨져 나갔다.
슈웅
“어헉!”
“볼.”
좌타자의 몸쪽, 몸에 맞을 듯한 코스로 들어온 포심.
천상진의 그 초구에 안태규가 발끈하려는 순간.
“하지 말어.”
“뭐요……?”
“뭘 할 생각인지 몰라도 하지 말어. 나 또 출장 정지 먹기 시른께.”
“…….”
“야구만 혀. 야구만.”
마운드로 뛰어올라가려던 타자를 말 한마디로 제압한 장덕수가 덤덤한 표정으로 천상진에게 공을 던져주었다.
얼굴이 벌개진 채 이도 저도 못하고 있는 타자,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신을 향해 포수 미트를 내미는 장덕수.
그 모습에 천상진은 저도 모르게 씨익 웃음을 지었다.
즐겁다.
천상진은 자신이 생각하는 공을 마음껏 던질 수 있는 이 순간이 진심으로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