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81)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80화(81/412)
#80. 야구하기 좋은 날
미국 메이저리그 구단 프런트에서 마케팅 업무를 담당하다 은퇴한 한국계 전문가 하나가 이런 말을 남겼다.
2027년의 프로야구 선수는 단순한 운동선수를 넘어 서비스직의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고.
2025년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메이저리그의 시장 규모가 약 11조, 일본 NPB의 시장 규모는 그 15% 수준인 1.5조 원.
그보다는 한참 적지만 KBO의 시장 규모 역시 5천억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적은 규모가 아니다.
그리고 그런 시장이 존재할 수 있는 건 결국 팬이 있고 관중이 있어서다.
가끔 팬들의 사인 요청을 거부하거나 SNS에서 팬들과 싸움을 벌이는 놈들은 정말 제대로 정신을 차려야 한다.
자신들이 지금 누구 때문에 수억 원의 연봉을 받으며 공놀이를 하고 있는지를 망각한 거니까.
물론 나 역시 예전에는 그다지 팬 서비스가 좋지는…….
음.
솔직히 말하면 그래, 나부터 반성해야 한다.
그래도 뭐 KBO에서 뛰기 시작한 후로는 누구보다 열심히 팬서비스를 하려고 노력 중이니까.
아무튼 수원의 리드오프 안태규는 그나마 팬들의 고마움에 대해 잘 알고 있고, 팬서비스 역시 좋다는 평을 듣는 선수였다.
비록 불 같은 성격과 약간의 게임중독 증상으로 인해 분노 조절에 어려움을 겪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런 안태규가 멍한 표정으로 관중석을 바라보았다.
“죽어!”
“이 말똥구리 같은 놈아! 왜 우리 상진 오빠한테 화풀이야!”
“우리 오빠 건드리면 내가 죽여버릴 거야!”
천상진의 이름이 박힌 저지를 맞춰 입은 젊은 여자 팬 십여 명이 안전망에 딱 달라붙어 자신에게 저주를 퍼붓고 있는 것 아닌가? 그것도 홈팀 응원석에서.
나름 운동선수치고는 잘생긴 외모와 젠틀한 태도로 여성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생각했던 안태규는 그녀들의 행동에 큰 충격을 받았다.
“야구나 혀. 머리가 복잡혀? 간단하게 만들어줘?”
게다가 등 뒤에서는 도저히 인간이라고는 볼 수 없는 거대한 괴물이 한심하다는 목소리로 으르렁거리고 있다.
그 순간 복잡하던 머릿속이 말끔하게 정리되었다.
‘그래, 야구나 하자.’
생각을 정리한 안태규가 천상진이라는 놈의 다음 공을 예측했다.
몸 쪽으로 너무 붙어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사실 공의 위력 자체는 별 것 없다.
140 언저리의 포심과 체인지업, 조금 빠른 커브, 많이 느린 커브, 거기에 간간히 던지는 싱커.
구속이나 구종만 봐서는 전혀 까다로울 게 없는 투수다.
경기 전 영상으로 볼 때도 그랬다. 대체 왜 저 공을 타자들이 못 치는 걸까 궁금증만 계속 쌓였다.
‘혹시 저 투수가 공을 던질 때마다 등 뒤에서 이 포수가 협박을 한 건 아니겠지?’
프로 무대에 올라온 지는 꽤 되었지만 황성민에 밀려 출장 경기수가 거의 없었던 데다가, 그나마 상무에서 1년 반을 보낸 장덕수는 다른 팀 선수들과 별로 친분이 없었다.
‘막 그런 거 아냐? 공 던질 때마다 뒤에서 치면 죽여버릴 거예유. 알아서 해유. 응?’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자신이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잡생각을 모두 지워버린 안태규가 다시 투수와의 승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공이 몸쪽 포심… 그러면 다음은 아마 바깥쪽이겠지. 커브? 체인지업?’
안태규가 심각한 표정으로 투수를 노려보며 바깥쪽 공에 대비했다.
하지만.
슈웅
“커헉!”
“스트라이크!”
또 몸 쪽이다. 그 전 공과 비슷하게 들어오던 공이 존 안으로 휙 꺾어져 들어갔다.
빠른 커브?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이번에는 진짜 맞을 뻔했는데 그게 스트라이크라고?”
“스트라이크 맞습니까?”
“맞아.”
“하…….”
심드렁한 표정의 심판이 더 이상의 반론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대답하는 순간 안태규는 깨달았다.
투수와 포수, 관중, 거기에 심판까지.
누구 하나 자신의 편이 없다는 것 말이다.
* * *
서울 워리어스(원정) VS 수원 커맨더스(홈)
1회말 수원 공격
투수 천상진
1번 타자 안태규
1구 볼
2구 스트라이크
3구 스트라이크
4구 스트라이크 아웃
원아웃
└우리 팀 1번 타자 지금 뭐 함…
└저 새끼 어제도 밤새 게임 접속해 있던 거 같던데
└랭업하려고 대리 돌린다던데
└차라리 대리가 낫지. 겜도 존나 못하는 게 이길 때까지 겜만 하는 것보다는
└표정 봐라… 뭐가 억울한데? 내가 봐도 스트라이크 맞구만
└게임 너무 많이 해서 시력 맛 간 거 아님?
2번 타자 중견수 최연우
1구 타격
유격수 앞 땅볼
1루에서 아웃
투아웃
└ㅋㅋㅋ 저걸 잡네
└진짜 저건 내가 봐도 존나 억울하겠다
└최연우 쟤도 가만 보면 억까 장난 아님
└걍 유격수 쪽으로 타구 안 보내면 안 됨? 거기로 가면 다 잡히는 느낌
└그 정도는 아닌데 진짜 안타 될 타구도 자꾸 잡히긴 하는 듯
3번 타자 1루수 피오 페르난데스
1구 스트라이크
└와 저걸 잡아주네
└좀 애매하긴 한데
└피오 쟤 얼굴 또 빨개졌다
└장덕수 저 새끼가 또 뭐라고 협박한 거 아냐?
└하… 저게 야구 선수임? 격투기 선수임? 나 같아도 저런 게 등뒤에 있으면 쫄아서 암것도 못 할 듯
2구 스트라이크
3구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쓰리 아웃
공수교대
└ㅋㅋㅋ 저쪽은 점수 존나 쉽게 내고, 우리는 타자들 다 얼빠져서 나가 떨어지고
└왜 워리어스 애들만 만나면 게임이 꼬이는 거 같지?
└한수혁 하나도 상대하기 벅찬데 이제는 천상진까지 날뛰네…
* * *
“친구, 내게 행운을 빌어줘.”
“음?”
“농담이 아니라 정말 신의 축복이 필요해.”
“그럼 신에게 빌어야지, 왜 나한테?”
“내가 보기에는 야구의 신이 너한테 강림한 것 같거든.”
“뭐?”
“흐흐, 신성모독인가? 상관없어. 어차피 나도 그리 독실한 신자는 아니거든. 여하튼 좋아. 그럼 난 또 돈 벌러 나가봐야겠군.”
천상진 선배가 수원의 1, 2, 3번 타자를 간단하게 잡아낸 가운데 2회초 워리어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번 이닝 선두타자는 맥스 워커.
시즌 초반 4번으로 시작해 조성오 선배와 장덕수 선배에 밀려 어느새 6번까지 타순이 밀려버린 외국인 타자다.
지난 스프링캠프 당시 전지훈련지까지 찾아온 와이프와 외출을 했던 맥스는 한 달 전 넷째가 생겼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거기에 부모님의 병까지 계속 깊어지고.
맥스의 어깨는 더욱 무거워졌지만 상황은 그에게 점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6월 첫주 현재 타율 0.278에 출루율 0.335, 장타율 0.401, 거기에 홈런 5개에 31타점.
나름 라이벌이라고 생각했던 조성오 선배가 홈런 8개를 기록하는 동안 맥스의 홈런 숫자는 계속 제자리 걸음을 하는 중이었다.
맥스에 대해서는 구단 내에서도 의견이 꽤 갈리는 상황이다.
2할7푼의 타율에 홈런은 5개에 불과하지만 2루타를 제법 많이 터뜨려 장타율은 0.401까지 끌어올린 상황.
하지만 0.736의 OPS는 용병 타자로서는 솔직히 평균에 못 미친다 할 수 있는 성적이다.
그나마 우익수 수비가 제법 괜찮다는 게 장점이었지만 서형주가 중견수로 가고, 최민석 선배가 좌익수로 가면서 김수학 선배가 지명타자로 나서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다가는 조만간 김수학 선배가 우익수로 가고 맥스가 지명타자로 밀려날 수도 있다.
그러면 일은 더 복잡해진다. 수비가 아닌 공격으로만 평가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 놓이기 때문이다.
“플레이!”
멀리서 봐도 맥스의 어깨에 잔뜩 들어간 힘이 느껴진다.
저럴 때는 아무리 힘을 빼라고 해도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그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큰 거를 쳐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고 싶을 테니까.
글쎄, 이럴 때는 나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그의 말처럼 야구 신의 은총이 닿기를 기도해주는 수밖에.
따아악!
“우와와!”
정말 기도가 통했던 것일까?
잔뜩 긴장한 표정의 맥스가 최경재가 던진 초구를 그대로 잡아당겼고 그 타구가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우측 담장을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아웃!”
더 이상 뻗지 못한 타구는 담장 바로 앞 워닝트랙 앞에서 우익수에게 잡혀버리고 말았다.
저런 타구가 나왔을 때는 절대 그 타격감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 잘 맞은 타구가 담장 앞에서 잡혔다고 다음 타석에서 더 힘을 주게 되면 악순환의 시작될 뿐이다.
방금 친 타구는 열이면 일곱은 넘어갈 타구였다. 그저 아주 약간 빗맞은 데다가, 마침 바람이 역으로 불며 야수에게 잡혔을 뿐이다.
그러니 그 감각 그대로 밀고 나가면 된다.
“Fuck!”
욕을 입에 달고 다니는 다른 팀 용병들과 달리 언제나 얌전하기만 했던 맥스가 연신 욕설을 뱉으며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평소 같으면 다가가 장난이라도 쳤을 안치욱조차 녀석의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했다.
조만간 뭔가 계기가 있지 않으면 맥스가 슬럼프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든다.
그리고 그 사이, 1번에서 7번까지 타순이 떨어진 이창모 선배가 타석에 들어섰다.
시즌 타율 0.273에 출루율 0.363, 장타율 0.385, 홈런 3개, 25타점.
타율에 비해 출루율이 거의 1할 가까이 높은, 전형적으로 선구안이 좋은 타자의 스탯이다.
얼마 전 이창모 선배와 타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서형주의 입단으로 수비 위치와 타순이 많이 바뀌었기에 선수들의 생각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내 예상을 전혀 벗어나 있었다.
‘타순이 무슨 상관이야, 안 그래?’
‘네?’
‘어차피 한 바퀴 돌면 다 엉켜버리는 게 타순인데 1번이든 7번이든 뭔 상관이겠어. 그보다 형주 그놈 진짜 수비 잘하지 않냐?’
어쩌면 이미 한 번 정점을 찍고 내려온 사람의 여유일지도 모르겠지만 진심으로 이창모 선배는 7번으로 내려간 것에 대해 아무런 불만이 없는 듯했다.
그보다는 자신의 등 뒤를 지키는 중견수의 수비력에 대해 진심으로 감탄하는 듯했다.
그런 이창모 선배가 최경재와 풀카운트 승부를 이어갔다.
“볼.”
그리고 결국 볼넷을 골라 1루로 출루했다.
좋은 타자다. 비록 부상 이후 기동력을 거의 기대할 수 없고, 가끔은 참을성이 너무 지나칠 때가 있다는 게 문제이지만 그래도 저 정도 2루수는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다만 저 선배를 볼 때마다 뭔가 조금 아쉬운 건 그의 전성기 시절을 기억하는 우리들의 미련 같은 것이겠지.
따아악
시즌 초반 6번 좌익수로 고정 출전 하던 김수학 선배는 이제 수비 포지션을 잃고 8번 지명타자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시즌 타율 0.270, 출루율 0.341, 장타율 0.361, 4개의 홈런과 21개의 타점, 그리고 도루 4개.
저 선수의 커리어 내내 그랬듯 딱히 장점도, 그렇다고 단점도 찾기 힘든 지표.
그런 그가 오랜만에 최경재에게 안타를 때려낸 후 1루에서 포효하고 있다.
좋은 사람이지만 지금 우리 팀 라인업 구성상 특징이 없는 선수는 점점 자기 자리를 잃을 공산이 크다.
사실 팀 입장에서 보면 저런 선수가 주전이 아닌 백업으로 버텨주는 게 더 도움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매년 고과를 평가받고 연봉협상을 해야 하는 선수 입장에서는 환장할 노릇일 거다.
어쨌든 그렇게 주자 1, 3루 상황이 만들어졌고, 타석에는 이제 시즌 타율 0.280에 출루율 0.362, 장타율 0.398, 홈런 3개 24타점, 9개의 도루를 기록 중인 최민석 선배가 들어섰다.
스탯만 봐서는 1번이나 2번에 어울리지만 이대준 감독의 판단에 의해 9번에 서게 된 타자.
저 선배의 장점은 상황에 따라 재치있는 플레이를 할 수 있다는 거다.
그래서일까.
스퀴즈에 대비하기 위해 수원의 내야수들이 수비 위치를 조정했고, 최경재는 어떻게든 병살을 만들어내기 위한 볼 배합을 이어갔다.
하지만 원래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게 야구다.
따악!
최민석 선배는 스퀴즈 대신 큰 스윙을 선택했다.
그가 친 큰 타구가 멀리 날아가더니 좌측 파울라인 바로 안쪽에서 좌익수에게 잡혔다.
그 사이 3루 주자였던 이창모 선배가 홈으로 들어오며 스코어는 3 대 0.
수원 응원석에 침묵이 감돌았고, 오랜만에 타점을 올린 최민석 선배가 콧노래를 부르며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오늘 진짜 야구 하기 좋은 날 아니냐? 응? 그렇지, 수혁아?”
“야구는 언제 해도 좋죠.”
“그래? 하하, 그래. 네 말이 맞네.”
우리 팀의 1번부터 9번까지 라인업과 성적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시즌 초만 해도 정말 답도 없는 선수 구성이었다.
20홈런은커녕 두 자리 수 홈런도 간당간당 해 보이던 조성오 선배와 이제 막 입단한 신인 안치욱이 중심 타선에 나서야 했고, 외야수들 중 누구 하나라도 부상을 당하면 답이 없을 정도로 선수 자체가 모자랐다.
용병 두 명과 이만식 선배를 제외하면 5이닝 이상을 먹어줄 선발이 전무했고, 새로운 필승조와 마무리 투수는 연일 불꽃쇼를 펼치며 팬들의 가슴을 미어터지게 만들었었다.
그러던 팀이 불과 두 달 만에 많이도 변했다.
조성오, 안치욱, 장덕수, 이만식 같은 기존 선수들의 각성, 거기에 서형주, 천상진, 양기철 같은 새로운 얼굴들의 등장.
“한수혁, 뭐 하냐? 나가야지.”
“너 초구치고 아웃 당하는 거 보고 잠깐 멍 때리는 중.”
“…초구가 워낙 좋은 공이 들어와서.”
“됐다. 네 말대로 수비나 하러 가자고, 애송이.”
“애송이? 하, 야, 너랑 안치욱 나, 셋 중에 내가 생일 제일 빨라. 아마 야구도 내가 제일 먼저 시작했을 텐데?”
“어이, 신참들. 그만하고 다들 수비하러 가야지.”
“아니, 주장. 그게 아니라 이놈이 지금…….”
“됐어. 흐흐, 그래 봐야 너 말로는 수혁이 못 이긴다. 가자, 오늘 이기면 내가 한턱 쏜다.”
예전 나와 함께 뛰었던, 그리고 함께 빅리그의 정상에 올랐던,
어쩌면 이 지구상에서 가장 야구를 잘하는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를 옛 동료들은 이제 내 곁에 없다.
대신 앞으로 갈 길이 창창한, 혹은 자신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또 다른 동료들이 나와 함께하고 있다.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최고의 선수들과 함께 뛰는 것,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 조금은 부족한 선수들과 호흡을 맞추는 것.
서로 비교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많은 차이가 있음에도 왠지 나는 지금 이 순간이 더 행복한 것 같다.
“와아아아!”
오랜만에 찾아온 상념이 관중들의 함성 소리에 깨끗이 날아가 버렸다.
그래, 수비하러 나가야지.
오늘은 정말 야구하기 좋은 날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