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82)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81화(82/412)
#81. 꽃 향기가 너무 좋아서
“천상진 선수, 오늘 수원의 에이스 최경재 선수와의 맞대결에서 6이닝 무실점으로 호투하면서 시즌 4승째를 수확하셨습니다. 일단 소감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경기가 모두 끝났다.
오늘 수원의 에이스와 맞붙은 경기에서 승리하며 오랜만에 수훈선수로 선정된 천상진 선배가 담담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평소 다른 선수들을 상대할 때는 꽤나 사무적으로 느껴지던 리포터가 눈에서 하트를 뿅뿅 날리며 천상진 선배에게 마이크를 내밀었다.
상대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게 한눈에 보일 정도다.
“아, 나도 상진이처럼 생겼으면 인기 좀 있었을까?”
“선배님, 지금도 인기 좋으시잖아요.”
“모르는 소리 하지 마라. 작년에 팬 사인회 하는데 내 앞에는 애초에 몇 명 서지도 않았지만 전부 어디서 한 잔 걸치고 온 아저씨들뿐이더라. 만식아, 한 잔 해라, 한 잔 해라, 그냥 그 말밖에 기억이 안 나네.”
그거야 누구 말처럼 이만식 선배 얼굴이 술을 부르는 얼굴이라 그런 걸 테고.
어쨌든 천상진과 리포터라…….
뭐 정말로 저런 식으로 친분을 쌓다가 사귀게 될 수도 있는 거겠지.
프로야구 선수와 방송국 리포터, 기자, 혹은 치어리더.
이들 사이의 썸이나 연애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거 같은데, 뭐 아주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과거 그들 사이에 여러 가지 안 좋은 일이 있었다고 하니까.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건 그 사람들의 문제일 뿐이다.
남녀가 만나 사랑을 하는데 직업이 뭐냐에 따라 색안경을 낄 필요는 없다고 본다.
얼마 전에 밥을 먹으면서 성훈이 형한테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너나 잘하세요 라는 답으로 돌아왔다.
뭔 소리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오늘 우리는 수원과의 경기에서 4 대 3, 한 점 차 짜릿한 승리를 거뒀다.
천상진 선배가 6이닝 무실점으로 호투했고, 홍영식, 최정수 선배가 2이닝 동안 3점을 주면서도 어찌어찌 막아낸 후 양기철 선배가 등판해 9회를 깔끔하게 마무리 지었다.
첫 타석에서 내게 1타점 3루타를 허용한 수원의 최경재는 이후 내게 볼만 계속 던지다가 5회를 끝으로 마운드를 내려갔다. 그 뒤에 올라온 투수 역시 나를 없는 선수로 취급했고.
그 덕에 오늘 나는 3루타 하나, 타점 하나에 그치기는 했지만 팀 전체로 볼 때는 굉장히 값진 승리라 생각한다.
창단 년도로 따지면 10개 구단 중 가장 막내이면서도 세이버매트릭스를 기반으로 한 교과서적인 야구를 추구하는 팀. 어찌 보면 인천과 아주 흡사하지만 모든 면에서 약간씩 모자란 그런 팀.
오늘 선발로 나선 최경재를 필두로 에이스급 용병인 라파엘 디아즈가 마운드를 이끌고, 거기에 국가대표 주전 포수 정대한과 유격수 안태규, 중견수 최연우 등이 중심을 잡아주는 팀.
워리어스가 이번 시즌 가을야구에 진출하게 되면 가장 먼저 넘어서야 할 팀이 수원일 것이다.
그런 수원의 에이스가 오늘 또 한 번 우리 앞에 무릎을 꿇었다.
지난번 경기 때와는 달랐다.
그때는 그냥 최경재라는 선수 하나가 한수혁과의 대결에서 무너진 거라면 이번에는 팀 대 팀, 에이스와 4선발의 대결에서 밀려버린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수원과 포스트시즌에서 맞붙게 될 경우 선발로 최경재가 아닌 다른 투수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자, 천상진 선수, 오늘 인터뷰 정말 감사하고요! 개인적으로 예전 첫 완투승을 거두셨을 때 하셨던 말씀이 너무 인상적이었습니다. TV를 보고 계시는 야구팬 여러분, 그리고 프로를 꿈꾸는 아마추어 선수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네, 지난번에 제가 한 말이 화제가 되었다고 해서 조금 당황했습니다. 그냥 저는 제 마음 속에 있는 이야기를 한 것뿐이라서요.”
“그렇군요. 정말 진심을 담은 이야기여서 더 그랬던 거 같네요.”
“사실 지금 이렇게 프로 무대에서 승리를 거두고, 수훈 선수 인터뷰를 하는 것 자체가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오늘처럼 많은 관중분들 앞에서 환호를 받으며 공을 던지는 것도요. 어쩌면 제 마음은 아직도 텅 빈 2군 경기장에 머물러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천상진 선배의 별 것 아닌 한마디에 리포터의 눈가가 또 촉촉해졌다.
확실하다.
저 여자, 선배가 당장이라도 밥 먹으러 가자고 하면 바로 따라올 기세다.
음, 보고 있으니 뭔가 답답하네.
애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결혼을 한 것도 아니고, 저렇게 대놓고 호감을 표시하는데 밥 한 끼 먹자고 할 융통성도 없나?
평생 야구만 하다 죽을 것도 아니고.
거참…….
“이유는 모르겠지만 세상에 단 한 분이라도 제 말에 위안을 받으신다면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문구이기도 합니다. 야구에 대한 열정은 스피드 건에 찍히지 않는다.”
“무슨 뜻인가요?”
“90년대 후반 애틀란타의 전성기를 이끈 톰 글래빈이라는 투수가 한 말입니다. 통산 300승을 기록한, 거기에 시즌 20승을 두 번이나 한 전설적인 좌투수죠.”
“아아.”
“어떤 기자가 질문했습니다. 그다지 빠르지 않은 공으로 어떻게 빅리그에서 300승을 달성할 수 있었냐고. 그 말에 그렇게 답하셨죠. 야구에 대한 내 열정은 스피드 건에는 찍히지 않는다.”
“많은 뜻이 담긴 말이군요.”
“예, 물론 투수로서 빠른 공을 가진다면 당연히 유리한 출발선상에 놓이게 될 겁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야구에 대한 열정과 집념이라고 생각합니다. 빠른 공만 믿고 뛰는 선수는 구속이 떨어지면 좌절에 빠지게 됩니다. 하지만 저처럼 애초에 가진 게 없는 투수는 그럴 일이 없습니다. 열정과 집념은 제가 얼마든지 지켜 나갈 수 있는 거니까요.”
천상진 선배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나운서를 향해 옅은 웃음을 지어 보인 그는 카메라를 바라보며 마지막 말을 이었다.
“프로를 꿈꾸는 아마추어 선수들이 지금 이 방송을 보고 계신다면, 혹시 자신의 재능 없음에 한탄하고 계신다면 쉽게 좌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조금 느릴지는 몰라도 열심히 걷다 보면 결국 목표한 지점에 도달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그 증거를 보여 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인터뷰가 끝났지만 감격을 먹은 리포트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클로징 멘트를 하는 걸 잊어버릴 정도로 모든 신경을 천상진 선배에게 빼앗겨버렸다.
하지만 선배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담담한 얼굴로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하… 저 인간, 진짜 답답해 죽겠네.
* * *
첫날 승리로 기세를 올린 우리는 2차전에서도 총력을 다했다.
하지만 수원을 상대로 한 연승은 쉽지 않았다.
임시 선발로 나선 이영주 선배가 와장창 무너지며 2차전에서 패배.
최소한 위닝시리즈를 가고 싶었던 우리는 에이스 라이언 스타크의 등판일을 하루 당기면서까지 3차전에 필살의 의지를 담았다.
양팀 합계 10명의 투수들이 등판한 말 그대로 총력전.
그 길고 긴 승부 끝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건 허무한 무승부였다.
저벅저벅
그렇게 1승 1무 1패로 3연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잡을 수 있었던 마지막 경기가 무승부로 끝나서일까, 오늘따라 발걸음이 유난히 무겁다.
“어이구, 이제 들어오시나 보네요.”
“아, 네. 안녕하세요. 시합이 늦게 끝나서요.”
“저런… 그럼 식사는 하셨고요? 아무리 젊어도 식사는 제때 해야 합니다.”
아파트 게이트를 지키던 관리인의 말에 문득 잊고 있던 사실 하나가 떠올랐다.
당장 집에 아무것도 먹을 게 없다는 사실 말이다.
지금 냉장고에 뭐가 있더라?
내 기억이 맞다면 닭 가슴살과 몇 가지 과일, 야채 정도가 전부다.
경기가 너무 늦게 끝난 탓에 간단하게 샤워만 하고 서울로 돌아온 게 실수였을까.
음.
먹는 것에 별로 집착하는 편은 아니지만 오늘은 몸이 피곤해서 그런지 뭔가 제대로 된 음식을 먹고 싶다.
최소한 그게 닭 가슴살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지금이라도 발을 돌려 뭐라도 사와 볼까? 아니면 배달이라는 걸 한번 시켜볼까?
저벅저벅
하아…….
역시 귀찮고 어색하다.
야구 외 내 삶을 위해 뭔가를 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 낯설다.
갑자기 밀려오는 공허함을 참아내며 아파트 안으로 들어섰다.
냉장고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차가운 닭 가슴살을 생각하며.
‘음?’
그런데 저건 뭘까?
현관문 앞에 커다란 박스가 놓여 있다.
뭔가를 시킨 적도 없고, 그렇다고 누가 택배를 보낼 일도 없는데… 혹시 성훈이 형인가?
의아한 마음으로 그 상자를 집어들던 그때.
삐걱.
옆집 문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돌려보니 그곳으로 살금살금 들어가는 누군가의 그림자가 보였다.
익숙한 실루엣이다.
“……?”
* * *
‘두근두근’
오늘 수원과의 3차전 경기 중 먼저 야구장을 빠져나온 민예린이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왔다.
경기가 끝나기도 전에 야구장을 먼저 빠져나온 건 오늘이 처음인 것 같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9회말 수원의 정대한이 친 끝내기 안타성 타구를 극적으로 잡아낸 한수혁.
끝날 뻔했던 경기가 그 수비 덕에 연장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민예린의 관심은 이미 경기 결과에 있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서 왠지 모를 피로를 엿보았다.
그것이 꼴찌팀을 3위로 끌어올리면서 누적된 육체적 피로인지, 아니면 정신적 피로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표정을 본 순간 민예린은 자신이 지금 뭘 해야 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빨리 나와, 오빠! 나 집에 데려다 줘.’
‘어? 왜? 야구 한참 재미있게 보는데 어딜 가려고? 예린아, 이거 야구 생각보다 재밌는데?’
‘그렇게 재미있으면 나중에 혼자 더 보던지 하고 나 집에 데려다 달라고, 빨리!’
민예린의 재촉에 그녀의 매니저가 아무 반항도 하지 못하고 그녀를 집에 데려다 주었다.
가끔 너무 막무가내로 굴 때도 있지만 일반적인 연예기획사 매니저에 비하면 2배가 넘는 연봉을 받고 있는 반면 업무량은 10분의 1도 안 된다.
신이 내린 직장이다. 이 정도 투정 정도는 얼마든지 받아줄 수 있다.
그렇게 집에 도착한 민예린은 2026년 네티즌 선정 ‘국내 연예인 중 가장 예쁜 손’에 선정된 그 인형 같은 손가락으로 미친 듯이 전복을 손질했다.
벅벅벅벅
전복 주름 사이사이에 낀 때를 칫솔로 제거하는데 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힘들다.
하지만 괜찮다. 이걸 먹을 사람이 한수혁이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없던 힘도 솟아난다.
북북북북
마침내 모든 때를 제거하고, 송송 썰은 전복과 조심스럽게 퍼낸 내장을 넣고 죽을 끓여냈다.
됐다. 비록 요리에는 초보이지만 입맛만큼은 초일류급인 그녀다.
내가 만들었지만 이 정도면 아주 훌륭한 맛이다.
정성껏 끓여낸 전복죽을 보온 기능이 있는 스티로폼 박스에 넣어 식지 않게 포장했다.
‘경기는…….’
스마트폰을 보니 이미 경기는 무승부로 끝났고, 아마 지금쯤 워리어스 선수들을 태운 퇴근버스가 잠실을 향해 달려오고 있을 것이다.
마음이 급해졌다.
정성스럽게 박스 포장 한 전복죽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아파트 1층으로 뛰어내려갔다.
그리고 아파트 게이트가 훤히 내다보이는 화단 한가운데 몸을 숨겼다.
이상한 일이다.
벌써 두 번이나 그의 집에 출입했고, 가끔 보면 서로 인사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막상 직접 끓인 전복죽을 건네려 하니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는다.
지난번에 신선로를 가져다줄 때도 그랬다. 얼굴을 맞댈 용기가 안 나 메모지를 끼워 집 앞에 두지 않았던가.
“거기 누구요? 화단에서 뭘 하시나?”
화단에 숨은 민예린에게 지나가던 관리인 아저씨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꽃향기가 너무 좋아서 그렇다고 답해주었다.
저녁 산책을 나온 아주머니 한 분이 손으로 아이의 눈을 가리며 저런 거 보면 못 쓴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그런 건 아무 상관없었다.
자신에게는 꼭 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까.
얼마나 기다렸을까.
마침내 저 멀리서 한수혁의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냈다.
척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압도적인 체격과 신체 비율이다. 저런 사람이 이 아파트에 또 있을 리 없다.
그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민예린이 서둘러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미친 듯이 클릭했다.
심장이 미친듯이 뛰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뒤에 한수혁이 나타날 것 같아 뒷목이 쭈뼛거린다.
‘띵’
다행히 그가 들어서기 전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재빠르게 35층으로 올라간 민예린이 집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올려 놓았던 전복죽을 집어 들었다.
스티로폼 박스 만세다. 아직도 박스 전체가 따뜻하다. 이 바보 같은 짓거리를 한 보람이 있다.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서둘러 현관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쾅
현관 문지방에 발가락이 부딪힌 것도 못 느낀 민예린이 마침내 따끈한 전복죽이 든 박스를 한수혁의 집 앞에 내려 놓으려던 찰나.
아뿔싸!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너무나도 익숙한 실루엣이 그 안에서 걸어나왔다.
뭐 이렇게 빨리 올라온 걸까?
당장이라도 밖으로 튀어나올 듯한 심장을 간신히 달래며 전복죽이 든 박스를 한수혁의 집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걸리지 않게 조심조심 자신의 집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찰나.
“민예린… 씨?”
그 목소리가 민예린에게는 마치 천둥이 치는 것처럼 크게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