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84)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83화(84/412)
#83. 그딴 게 투혼이라고
– 야구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초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십니까? 여기 그 더위를 뚫고 팀의 가을야구 진출을 위해 온몸을 던지는 18명의 전사들이 있습니다. 홈팀 서울 워리어스와 원정팀 대전 팔콘스 간의 1차전 중계를 맡은 아나운서 이철모 인사드립니다. 제 옆에는 고동식 해설위원님 나와 계십니다.
프로야구 한 경기를 중계하기 위해 움직이는 인원의 숫자는 수십 명에 달한다.
카메라와 음향 등 현장을 담당하는 스태프들부터 시작해서, 한 발 뒤에 물러나 각종 자료와 백업을 담당하는 기록원들, 홈팀과의 업무 연계를 위해 동행하는 운영팀 직원들까지.
하지만 그중에서도 역시 가장 눈에 띄는 건 시청자들과의 접점에 놓이게 되는 아나운서와 해설자라 할 수 있다.
그중 단기, 혹은 1년 단위로 계약을 이어가야 하는 계약직 해설위원과 달리 아나운서야말로 이 중계팀의 선봉대장이라 할 수 있겠다.
다른 말로 하면 마당쇠.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경기 내용을 빠짐없이 중계해야 하고, 마이크가 비지 않도록 적절한 멘트를 끼워 넣어야 하며, 또 가장 중요한 건…….
– 안녕하세요, 고동식입니다. 지난 경기에서 류한결에게 엄청나게 강한 모습을 보였던 한수혁 선수가 오늘 경기에서도 얼마나 대단한 활약을 보일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첫 멘트부터 누가 들어도 중립성을 의심받을 만한 말을 지껄이는 해설위원을 통제하는 임무 역시 아나운서의 몫이다.
처음 고동식이라는 인간과 함께 중계를 맡게 되었을 때 이철모 아나운서는 정신이 어질어질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아무리 이 인간이 워리어스 선수 출신이라는 것도 알고, 길바닥, 아니, 인터넷 개인방송을 하며 입을 자유자재로 털던 인간이란 것도 잘 알지만.
방송 내내 뿜어져 나오는 한수혁에 대한 찬가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5회말이 끝난 후 클리닝 타임, 본사 아나운서국과 연결된 직통전화가 울리는 순간 심장이 두근거렸다.
경기 중계를 모니터링 중인 선배 아나운서의 호통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저번처럼 쪽팔리게 대가리 박으라고 하면 어떻게 하지. 나도 내일 모레면 마흔인데.
별의별 생각을 다 떠올리며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이야기는 그가 상상했던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 좋아, 반응 좋아. 그 인간 너무 심하면 안 되지만 수위 조절하면서 계속 그 분위기 유지해봐.
‘반응이 좋다고요? 지금 이게요?’
– 그래, 한수혁이 워낙 관심 대상이라 그런가 시청자들이 좋아한다고, 국장님도 박수 치고 난리니까 조금 더 가봐. 단, 너무 멀리 가면 안 돼. 그걸 조절하는 게 오늘 네 임무야.
방송 해설이라기보다는 한수혁을 찬양하는 개인방송 같은 이걸 시청자들이 좋아하다니.
아무리 지금이 2027년이라 해도 자신이 알던 야구중계는 이게 아닌데.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이철모로서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고동식이 제법 괜찮은 소리를 할 때는 맞장구를 쳐주고, 선을 넘으려 할 때는 재빠르게 다른 말로 돌려버리거나 광고를 소환하고.
그렇게 한두 번 호흡을 맞추다 보니 2027년 가장 기대되는 프로야구 중계 콤비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세상이 점점 이상해지는 것 같다.
자꾸 떠오르는 잡생각을 간신히 밀어내며 이철모가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 네, 위원님. 한수혁 선수의 활약도 물론 중요하지만 오늘 경기에 임하는 팔콘스 선수들의 각오도 상당해 보입니다. 모든 선수단이 삭발을 하고, 양말까지 올려 신었네요. 꼭 고등학교 야구선수들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투지가 대단해 보이네요?
– 저거 다 ㅅ… 아, 죄송합니다. 보여주기예요. 머리를 짧게 깎고, 양말을 무릎까지 올려 신고… 보기에는 투지 넘쳐 보이죠? 그런데 저런다고 갑자기 야구가 잘해집니까? 그럼 전 세계 최고라는 빅리그 선수들은 전부 삭발에 농군 패션이겠네요?
조금 선을 넘으려는 기미가 보였지만 아나운서는 일단 고동식의 다음 말을 기다려 보기로 했다.
– 그럼 위원님은 다른 생각을 갖고 계시다는 거죠?
– 당연하죠. 저기 저 선수들 하나하나는 말하자면 모두 개인 사업자입니다. 구단하고 매년 2월 1일부터 11월 30일까지 계약을 맺고 뛰는 프로라 이거죠. 계약이 해지되는 즉시 남이 되는, 그런 비즈니스 관계란 말입니다.
– 그건 그렇죠.
– 저 선수들이 머리를 깎고 양말을 올려 신은 게 구단의 지시일지, 혹은 고참들의 지시일지는 몰라도 누군가는 불만을 갖고 있을 겁니다. 내가 왜 머리를 깎아야 하는 거지? 이번 주말에 여자 소개받기로 했는데? 아, 난 머리 깎으면 속이 비어 보여서 안 되는데 등등등.
– 아주 틀린 말씀은 아니군요.
아나운서가 저도 모르게 고동식의 페이스에 말려 들어갔다.
실시간 중계 채팅창에는 대전 선수 중 누가 요즘 숱이 없어진 거 같다 등의 탈모 드립이 난무하고 있었다.
– 그러니까 제 말은 이겁니다. 우리 프로야구가 출범한 지 햇수로 벌써 46년째입니다. 선수들에게 정신력을 강조하는 것도 좋지만, 사실 냉정하게 말하면 구단에서는 잘하는 선수에게 높은 연봉을 주고, 못하는 선수들은 과감하게 버리고, 그렇게 팀을 운영하면 되는 겁니다. 초등학교 선생님처럼 굴지 말고요.
– 무슨 뜻인지는 이해했습니다. 시청자분들 중에서도 일리 있다는 댓글이 많군요.
– 네, 그러니까 제가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건 그 잘하는 선수들 중에서도 가장 잘하는 선수인 한수혁 선수에게 올 시즌 후에는 정말 파격적인 연봉 인상을…….
– 말씀드리는 순간, 팔콘스의 선공으로 경기가 시작되었습니다. 1번 타자 3루수 김세준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 * *
앞서 말했듯 나는 프로야구 선수가 삭발을 하고 농군 패션을 하는 게 경기력에 도움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경기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느냐 묻는다면 꼭 그렇지는 않다.
저들도 기왕 머리를 깎은 이상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 어차피 한 걸음 앞으로 내딛은 이상 말이다.
가령 저런 거다.
퍼억
“윽!”
원래 몸 쪽 공 승부를 즐기는 우리 팀 선발 브룩스 파커의 초구가 대전의 리드오프 김세준의 팔꿈치를 강타했다.
솔직히 몸에 맞을 공은 아니었지만 김세준이 워낙 타석에 붙어 있었던 데다가, 공을 피하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심판이 힛바이피치드볼을 선언하자 이대준 감독이 바로 벤치를 박차고 뛰쳐나갔다.
“피하려고도 안 했잖아?”
“물러서세요. 제 판단입니다.”
“하아, 미치겠네. 정말, 이런 식으로 한다 이거지?”
자칫 1회부터 감독이 퇴장당할 수도 있기에 이대준은 그 정도에 물러섰다.
그 역시 심판들이 왜 저러는지 잘 안다. 아직까지 타석에 바싹 붙어 몸쪽으로 날아오는 공을 피하지 않는 걸 근성이라 부르는 게 이 나라 야구의 현실이다.
저 심판들 역시 그런 마인드를 갖고 있는 데다가 오늘 경기에 임하는 대전 선수단의 각오, 그리고 야구계에 미치는 팔콘스 구단주의 영향력 등을 감안해 저 정도 플레이는 눈 감아 주기로 한 것이다.
어쩔 수 없다. 대책은 나중에 생각하고 오늘은 일단 거기 맞추는 수밖에.
“브룩스에게 몸 쪽 승부 조심하라고 전달해요.”
“네, 보스.”
팔꿈치에 공을 맞은 팔콘스 김세준이 인상을 잔뜩 쓰며 1루로 향했다.
원정석에 있던 대전 팬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지만, 글쎄…….
대전 야수들 중 몇 안 되는 국가대표인 김세준이 방금 부상을 입을 뻔했다는 걸 알기는 하는 걸까? 아무리 보호대가 있어도 저 부위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데.
“브룩스, 진정해. 흥분할 필요 없어.”
“젠장, 고마워.”
브룩스가 살짝 흥분한 것 같아 일부러 몇 마디 해주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왜 대전 선수들이 일부러 팔꿈치를 내미는지, 심판은 그걸 고의라고 판단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뭐가 됐든 투수는 일단 평상심을 유지해야 한다. 특히 제구력과 머리싸움으로 먹고 사는 브룩스 같은 선수는 더더욱.
그렇게 무사 주자 1루 상황이 만들어졌다.
대전의 2번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고, 1루에 선 김세준이 계속 도루 스타트를 끊는 시늉을 하며 투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매년 3할에 가까운 타율과 20개 이상의 도루, 거기에 두 자리 수 홈런을 쳐낼 수 있는 김세준은 국가대표팀에서도 자주 이름을 올리는 타자다.
그런 그가 마음먹고 투수를 괴롭히는 데 전념하자 브룩스의 제구력에 약간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볼.”
“볼.”
평소 같으면 존 안으로 들어왔어야 할 공 두 개가 모두 밖으로 빠지며 볼 카운트 투 볼 노 스트라이크가 되었다.
모두의 머릿속에 1루 주자의 도루라는 선택지가 떠올랐다.
하지만 우리 벤치에서는 공을 빼는 대신 그대로 승부를 선택했다. 여기서 피치 아웃을 했다가 쓰리 볼이 되면 상황이 더욱 복잡해지리라는 판단이었다.
브룩스의 주무기인 싱커가 타자의 몸 쪽으로 날아갔다.
그 순간 1루 주자가 스타트를 끊었고, 타자가 힘차게 스윙을 시작했다.
대전의 선택은 런앤히트였다.
하지만 운이 따르지 않았다. 1루 주자가 스타트를 하면서 살짝 중심을 잃은 데다가 배트에 지나치게 정확하게 맞은 강한 땅볼 타구가 내 쪽으로 날아왔다.
그 타구를 잡아 2루 베이스를 밟으려는 순간.
촤아악
늦었다는 걸 직감한 1루 주자 김세준이 베이스 한참 멀리서부터 발목을 노리는 태클을 하며 미끄러져 들어왔다.
타이밍상 아웃이 확실한 상황에서 타자 주자라도 살리기 위한 변칙 플레이, 보다 정확히 말하면 동업자의 발목을 노리는 더러운 플레이.
그것을 본 순간 갑자기 마음이 차갑게 식어버렸다.
경기 전 대전 선수들의 짧은 머리카락을 보면서 들었던 아주 약간의 동정심마저 깨끗하게 날아가버렸다.
베이스 커버를 포기하고 오히려 한 걸음 앞으로 더 나아간 후 공이 든 글러브로 주자의 머리통을 후려갈겨 버렸다.
퍼억
“악!”
“아, 아웃!”
발이 베이스에 닿는 것보다 내 태그가 더 빨랐다. 그것을 확인할 필요도 없이 그대로 글러브에서 공을 빼내어 1루로 송구.
땅볼을 치고 1루로 전력 질주하던 대전의 2번 타자가 헤드퍼스트 슬라이딩까지 감행했지만 결과는 또다시 아웃.
“아웃!”
“그게 왜 아웃이야!”
이번에는 대전 벤치에서 뛰어 나와 곧바로 비디오 판독을 요청했다.
내게 글러브로 면상을 얻어맞은 김세준이 한참 동안 그 자리에 누워 있다가 일어서더니 내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씨발, 야구 잘하면 선배고 후배고 다 없다 이거지?”
“후배 발목 노리는 선배 같은 거 필요 없습니다.”
“뭐 이 새끼야?”
2루 베이스 옆에서 나와 김세준이 대치하자 양팀 선수들이 우르르 몰려 들었다.
내가 또 주먹질을 하다 퇴장을 당할까 염려한 동료들과 코치들이 얼굴이 하얘진 채 달려와 나를 뒤로 끌어냈다.
상관없다. 겨우 이 정도로 주먹질을 할 만큼 내가 미친놈은 아니니까.
그보다는 그냥 저놈들을 개박살 내고 싶어졌다. 주먹이 아닌 야구로.
자신들이 지금 하는 플레이가 반칙이 아닌 정신력이라고 믿는, 그리고 상대 팀 선수의 발목을 노리는 행동이 투지라고 믿는 미친놈들에게 야구가 무엇인지 진짜로 알려주고 싶어졌다.
“성오 형님, 저 흥분 안 했습니다. 놓으셔도 돼요.”
“어? 진짜? 수혁아, 진짜지?”
“네, 제가 미친놈도 아니고 무조건 싸우고 안 그래요. 그보다 저기 덕수 선배를 말리시는 게 나을 거 같은데요. 표정이 좀 이상한 거 같은데.”
“덕수? 어디? 진짜네? 야! 덕수야! 안 된다! 마운드에 또 고구마 심고 그러면 안 된다!”
내게 시비를 걸었던 김세준이 욕설을 뱉으며 덕아웃으로 돌아가고, 내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다시 수비 위치로 돌아가자 후끈 달아올랐던 그라운드의 분위기가 금세 냉각되었다.
평소 같으면 다 죽여버리라고 소리를 질러댔을 민예린조차 그런 분위기를 눈치챈 것인지 걱정이 한가득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씨발.
진짜 기분이 더러워졌다.
그 대상이 누구인지조차 모르겠다.
야구단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고 선수들에게 투혼을 강조하는 구단의 주인?
그런 구단주의 뜻을 필터링 없이 밑으로 내려보내 선수들을 압박하는 중간 관리자들?
그도 아니면 지금 자신들이 하는 짓이 비겁한 반칙이라는 걸 깨닫지 못할 정도로 길들여진 대전 선수들?
모르겠다.
확실한 건 내가 저놈들을 완전히 개박살 내버리고, 다른 팀 선수들의 안전을 담보로 하는 그런 투혼 따위는 이 야구판에서 먹히지 않는다는 걸 알려주고 싶다는 거다.
그 순간, 나는 회귀 후 가장 진지하게 게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