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85)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84화(85/412)
#84. 진짜 야구가 뭔지 알려주지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 굳이 그 사람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하루 종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술 한 잔에 서로의 속마음을 털어놓을 필요는 없다.
가끔은 그냥 상대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는 것만으로, 그리고 그가 가끔 내뱉는 말들 속에서 진심이 담긴 것들을 골라내는 것만으로 하나의 인간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때가 있다.
한수혁의 입단 후 그가 출장한 워리어스의 전 경기를 따라다니며 경기 내내 모든 포커스를 그에게 맞추고, 경기가 끝난 후에는 다시 침대에 누워 그의 타석과 수비 모습을 수십 번 반복 감상해온 민예린은 오늘 그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의 심리를 이해하고 그것을 완벽한 감성으로 표현해내는 데 통달한, 그 덕에 타고난 천재 작곡가라 평가받는 민예린이다.
가뜩이나 인간의 감성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촉이 예민한 그녀가 깨어 있는 시간의 90% 이상을 한수혁에게만 집중해 왔으니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무언가를 느낀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물론 정작 가장 중요한 자신의 마음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수혁 오빠에게서 감정이 안 느껴져…….’
지금까지 그녀가 보아온 한수혁이라는 사람은 인간의 기본 감정이라 할 수 있는 희로애락 중에서 ‘희’와 ‘락’의 색채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
쉽게 말해서 기쁘거나 즐거워 보이는 순간이 거의 없다는 뜻이었다.
야구를 하는 동안에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항상 뭔가에 화가 나 있는 듯했고, 또 가끔은 다른 선수들을 보면서 슬픈 표정을 짓기도 했다.
즐겁고 기쁜 감정이 표출될 때도 있지만 그런 순간은 아주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곤 했다.
그래서 민예린은 한수혁이 더욱 안쓰러웠다. 그에게 더 잘해주고 싶었고, 정말 그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제는 워리어스에서 뛰어서 한수혁이 좋은 건지, 아니면 그냥 한수혁이 속해 있어서 워리어스가 좋은 건지조차 구분이 잘 안 될 정도였다.
그동안 자신의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워리어스라고 생각해온 민예린으로서는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왜 저렇게 차갑게 느껴지는 거지…….’
시작은 1회 초 대전의 공격 때였다.
팔콘스 1번 타자 김세준이 고의성이 다분한 플레이로 힛바이피치드볼을 얻는 순간부터 한수혁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진 병살 플레이, 거기서 자신의 발목을 노리고 들어오던 주자의 얼굴을 한수혁이 글러브로 후려 갈기는 순간 민예린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평소 같으면 안전망에 기어올라 다 죽여버리라고 외쳐댔을 그녀였건만 이번에는 그러지 못했다.
잔뜩 화가 나 있어야 할 한수혁의 얼굴, 평소 같으면 화가 나서 길길이 날뛰었을 한수혁의 얼굴에서 분노의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분노하는 게 나았을 것 같다.
살얼음이 낄 것 같은 냉막한 표정의 한수혁, 그가 대전 선수들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그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마치 인간이 아닌 무생물체, 길가에 굴러 다니는 쓰레기를 바라보는 듯한 그런 눈빛.
‘이상해…….’
그 차가운 눈빛에 왠지 모를 낯섦을 느낀 민예린은 한수혁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곧 그것이 시작되었다.
대전 선수들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그 경기가.
* * *
‘저놈 눈빛이 왜 저래?’
이번 시즌 들어 워리어스를 두 번째 상대하게 된 에이스 류한결.
죽어도 머리 같은 건 밀기 싫었지만 고참들의 눈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대세를 따르게 된 그가 타석에 들어서고 있는 한수혁을 바라보았다.
누구보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류한결은 지금 덕아웃에 감도는 비장한 분위기 자체가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숨통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다.
차라리 이렇게 마운드에서 타자들을 상대하는 게 훨씬 마음 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플레이!”
지난번 경기에서 자신을 상대로 어마어마한 홈런을 때려 냈던 괴물 신인.
1회와 2회 순식간에 4점을 내주기는 했지만 그날 류한결이 8이닝 동안 내준 점수는 그게 다였다. 결코 못 던진 경기는 아니었다.
다만 한수혁에게는 완전히 패배했다. 그날 저 녀석에게 홈런 한 방 포함 안타를 세 개나 허용하며 개망신을 당하고 말았다.
그때를 생각하면 뭔가 정신이 어질어질해진다.
다행히 오늘은 워리어스의 1번과 2번 타자를 모두 잡아낸 상황이다.
팀에 있을 때 몇 번 말을 섞지 않아 거의 친분이 없던 서형주, 워리어스로의 트레이드 이후 제법 성적이 좋아지긴 했지만 그래 봐야 애송이다.
2번으론 나선 안치욱이라는 놈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번에는 어어 하다가 한 방 맞고 말았지만 오늘은 삼진으로 잡아냈다.
뭔가 저 녀석들이 자신의 볼 배합을 읽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일부러 평소와 조금 다르게 로테이션을 가져갔다.
아무튼 그렇게 만들어진 투 아웃 주자 없는 상황에 한수혁이 들어섰다.
방금 전 녀석에게 글러브로 한 대 얻어 맞은 김세준이 한 번만 몸에 맞혀 달라고 청탁을 하기도 했지만.
‘웃기는 소리.’
애초에 먼저 시작한 게 그쪽이었던 데다가 괜히 도루 능력까지 갖춘 놈을 1루로 내보내고 싶은 생각 같은 건 추호도 없었다.
허슬플레이랍시고 상대 수비수의 발목을 노렸다면 그 뒤책임도 본인이 질 일이다.
류한결은 그런 지저분한 일에 끼어들 생각이 없었다.
도리도리
포수가 요구한 건 초구 체인지업.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만 지난 경기에서 체인지업을 많이 맞아서 그런지 왠지 내키지가 않는다.
류한결이 고개를 가로젓자 이번에는 바깥쪽 컷패스트볼 사인이 나왔다.
우타자에게서 가장 먼 쪽으로 날아오다가 타석 바로 앞에서 존 안으로 파고 드는 컷패스트볼.
스트라이크가 되어도 좋고, 타자가 친다 해도 장타가 될 확률이 낮은 그런 공.
끄덕
맘에 드는 사인이다.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여준 류한결이 힘차게 와인드업을 시작했다.
빅리그 스카우터들조차 감탄한,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후에도 거의 건드릴 필요가 없다고 평가받은 완벽한 투구폼에서 공이 뿌려졌다.
슈웅
그리고 다음 순간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툭
“어억!”
“뭐야!”
“투수! 아니, 1루, 1루!”
KBO에 데뷔한 후 단 한 번도 번트를 댄 적이 없던 한수혁.
그가 처음으로 번트를 시도했다. 그것도 투 아웃 주자 없는 상황에서 기습 번트를.
강한 타구에 대비하기 위해 뒤로 멀찌감치 물러서 있던 내야수들, 그리고 설마 한수혁이 번트를 댈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류한결이 휘청거렸고, 그 사이 한수혁은 여유 있게 1루에 들어갔다.
“이게 무슨…….”
류한결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차라리 홈런을 맞는 게 나았을지 모른다.
새까만 신인에게 농락을 당한 기분이랄까?
고개를 돌려보았다.
누구도 예상 못 한 기습번트로 1루에 나간 한수혁이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류한결은 왠지 모를 불길한 기분에 휩싸였다.
* * *
툭툭
1루 베이스를 밟은 상태에서 조성오 선배, 그리고 벤치를 향해 사인을 보냈다.
초구에 뛰겠다는 도루 사인이었다.
잠깐 뭔가를 생각하던 수석코치에게서 승낙의 사인이 돌아왔다. 조성오 역시 알아들었다는 듯 딴청을 피우며 사인을 보내왔다.
6월에 접어 들며 이대준 감독으로부터 언제든 뛰고 싶으면 뛰라는 그린라이트를 부여받은 상태다.
방금 전 사인은 그저 조성오 선배에게 조금 기다려 달라고 말하기 위한, 그런 거였다.
“플레이!”
투 아웃 주자 1루, 타석에는 4번 타자.
당연한 말이지만 여기서는 4번 타자의 큰 것 한 방을 기대하는 게 가장 확률 높은 공격 방법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내가 류한결을 상대하는 법을 알려줬다 해도 상대는 좌타자 킬러라 불리는 국가대표 에이스.
정석대로 게임을 풀어 나가면 여기서 점수가 날 확률은 20% 미만.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한 나는 조금 다른 접근 방식을 취하기로 했다.
그 작은 확률에 기댈 생각은 없다. 나는 저놈들을 완벽히 부숴버리고 싶다.
슈웅
견제는 없었다. 설마 내가 여기서 뛸 거라고는 생각치 못한 듯하다.
힐끔힐끔 나를 몇 번 바라본 류한결이 애써 당혹감을 감춘 표정으로 힘차게 초구를 뿌렸다.
그 순간 나는 아무 망설임 없이 스타트를 끊었다.
타탓
“엇! 2루!”
생각지도 못한 도루에 가뜩이나 막장 수비를 자랑하는 팔콘스 내야가 휘청거렸다.
포수가 공을 받자마자 2루로 송구했지만 사인이 엉켜버린 2루수와 유격수가 서로 베이스 커버를 미루면서 그 송구가 외야로 굴러가 버렸다.
그사이 나는 3루까지 거의 걸어 들어갈 수 있었다.
“아…….”
3루 측 원정 응원석 어딘가에서 허탈한 관중의 탄식이 뿜어져 나온다.
바로 이런 거다.
머리를 밀고 양말을 끌어 올리고, 다른 팀 선수들을 향해 스파이크를 들어 올릴 시간이 있으면 이런 기본적인 플레이나 계속 반복 연습하는 게 훨씬 낫다.
하긴, 어차피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기는 하다. 지금 내가 할 일은 이 머저리 같은 놈들에게 야구의 무서움을 알려주는 거니까.
“너 이 새끼, 성오 형이 참으라고 해서 참긴 하겠지만…….”
“참지 마세요.”
“뭐?”
“전 성오 형님이 참으라고 해도 안 참을 거니까.”
“…….”
3루에 들어서자마자 내게 글러브로 얼굴을 얻어 맞은 3루수 김세준이 헛소리를 내뱉았다.
별 의미도 없는 말이 계속 나올 것 같아 단칼에 끊어버렸다.
이 나라에서 야구를 하는 놈들은 뭔가 이상한 게 하나 있다.
툭하면 자기 팀, 혹은 상대 팀 고참 이름을 들먹인다.
누가 참으라고 해서, 누구 얼굴을 봐서, 너희 고참은 그렇게 가르치냐 등등등.
나이 스물, 서른을 넘은 사회인 놈들이 하는 짓은 여전히 고등학교 시절에 머물러 있다.
이 세상에 자기 인생을 책임져줄 수 있는 건 오직 자신뿐이다.
고참의 명령대로 빈볼을 던졌다가 경기를 말아먹고 2군으로 떨어지면 결국 손해를 보는 건 자신뿐이다.
누군가의 발목을 노렸다가 실패했다면 그 책임 역시 자신이 지면 된다. 누굴 봐서 참았다느니, 그런 말로 굳이 자신의 비겁함을 감출 필요는 없다.
출장 정지를 각오했다면 펀치를 날리면 되고, 그게 싫다면 입 닥치고 야구로 밟아주면 된다.
그 간단한 사실을 모르는 놈들은 나이를 먹어도 아무 소용 없다. 골목대장 놀이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플레이!”
중요한 건 그나마 지금 대전 선수들 중에서 내게 이렇게나마 적의를 드러내는 게 오직 김세준, 이 한 놈뿐이라는 거다.
국가대표 에이스라는 류한결조차 평정심을 잃은 게 한눈에 보일 정도이고, 내 번트 타구 처리와 도루 시도 때 연달아 실책성 플레이를 저지른 내야수들의 눈동자에서는 생기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게임 전 박박 깎은 머리로 투지를 불태우던 모습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투지를 상징하던 올려 신은 양말은 어리버리 촌스러운 아마추어 선수의 그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간신히 멘탈을 회복한 류한결이 신중한 표정으로 나를 한 번 노려보더니 다시 타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야구선수치고는 조금 둔탁하기는 하지만 투수를 하기에는 이상적인 체형이라는 류한결의 몸이 천천히 힘을 끌어 모으며 움직인다.
그렇게 그의 오른발이 땅에서 채 떨어지기도 전에, 나는 홈을 향해 전력으로 달려들었다.
타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