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86)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85화(86/412)
#85. 초토화
– 어억! 이게 뭔가요? 류한결이 초구를 던지는 순간 한수혁 선수가 홈으로 파고들었습니다! 세이프! 세이프! 판정을 기다릴 필요도 없는 명백한 세이프입니다! 기습번트로 1루로 나간 한수혁 선수가 도루 2개로 순식간에 1점을 만들어냅니다!
– 우와… 정말 감탄밖에 안 나옵니다. 이게 대체 뭔가요? 주자 견제에 있어서도 국내 최고 수준인 류한결 선수를 상대로 홈스틸이라뇨. 차원이 다른 플레이네요!
– 어지간한 일에는 표정조차 안 변하는 류한결 선수가 곤혹스럽다는 듯 인상을 쓰며 괴로워합니다.
– 저도 투수 출신이잖습니까? 저런 걸 당하면 정말… 하아, 죄송합니다. 트라우마가 도지려고 하네요.
* * *
‘미친!’
기습번트로 1루에 나간 후 다시 도루와 상대 실책을 묶어 3루까지 진출한 한수혁이 마침내 홈스틸에 성공하는 순간, 워리어스 수석코치인 벤자민 레이놀즈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두 번 연속 초구 도루라니, 대체 저 루키의 심장은 강철로라도 만들어졌단 말인가?
야구를 잘 모르는, 아니, 알더라도 어설프게 아는 사람이라면 너무 무모한 짓이라 욕하기 십상인 그런 플레이였다.
하지만 벤자민은 알고 있다. 방금 그 순간 한수혁이 얼마나 영리한 판단을 한 것인지.
갑작스러운 기습번트와 도루, 그리고 실책으로 내야 전체가 흔들거리는 상황.
빅리그 스카우터들 앞에서 망신을 당한 투수의 얼굴이 달아올랐고, 중심을 잡아줘야 할 포수는 그런 에이스의 기분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거기에 오늘 벤클을 일으킬 뻔했던 상대 3루수는 한수혁과 몇 마디 말을 주고받더니 혼자 흥분해서는 기본 중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베이스 커버를 소홀히 했다.
그 상황에서 류한결이 선택한 공은 바깥쪽으로 공 한 개 반 정도가 빠지는 커브.
지난 시즌까지 조성오가 약점을 보여온 바로 그 공이었다.
문제는 3루에 있던 한수혁이 이미 그 공을 예측했다는 것이었다.
투수가 공을 채 던지기도 전에 주자가 스타트를 끊어버렸다.
그와 동시에 투구 동작이 시작되었고, 우측으로 살짝 빠져 있던 포수가 크게 당황했다.
만약 3루수가 제정신을 차리고 베이스를 잘 지켰다면 저렇게 쉽게 도루를 시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홈스틸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투수와 포수 배터리뿐만 아니라, 3루수의 역할도 상당히 크다.
하지만 한수혁과의 충돌과 말싸움으로 살짝 이성을 잃은 상태인 팔콘스 3루수는 그만 그 기본 중의 기본을 망각한 상태였다.
그렇게 선택의 폭이 확 좁아진 상황에서 바깥쪽으로 공이 날아들어왔고 포수가 전력을 다해 그 공을 블러킹 하는 순간, 한수혁이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으로 홈에 들어와 버렸다.
이건 정말 알고도 하기 힘든 그런 플레이였다. 적어도 보통 인간이라면 말이다.
벤자민은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우아아아아!”
“한수혁! 한수혁! 한수혁!”
“집어치워! 이 멍청한 놈들아! 그것도 야구냐! 어?”
워리어스 팬들이 내지르는 엄청난 환호성, 일부 팔콘스 팬들의 야유가 한데 뒤섞이며 잠실야구장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실점에 팔콘스 에이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고, 이번 실점의 책임 상당 부분이 자신에게 있다는 걸 깨달은 3루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수혁아, 나이스!”
“잘했어.”
“최고다!”
하지만 그런 엄청난 광경을 만들어낸 당사자인 한수혁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정확히 말하면 평소에도 그랬지만 오늘따라 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덕아웃에 들어와 털썩 앉아 버렸다.
‘으음…….’
벤자민 코치는 자신이 이 팀의 수석코치로 오게 된 순간을 떠올렸다.
수십 년간 빅리그와 마이너리그를 오가며 코치로 일해온 그가 굳이 KBO, 그것도 감독이 아닌 수석코치 자리를 승낙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작용했다.
마이너리그 시절 그가 무척 아꼈던, 그리고 빅리거로 대성한 후에도 친분을 유지했던 애제자 박재철의 제안을 받은 후 엄청난 고민에 빠졌었다.
하지만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미국이라고 해서 조직 내 권력다툼이 없을 리 없다. 레이놀즈는 자신을 따르는 코치들에게 좋은 일자리를 제공해 주고 싶었지만,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그것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에게 들어온 제안에는 한 팀의 코칭스태프 구성 전권을 주겠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비록 감독은 한국인이지만 그 아래 수석코치부터 타격, 투수, 수비, 배터리, 거기에 2군까지 모두를 총괄할 수 있는 권한.
미국에서의 권력 다툼과 거기서 희생되는 휘하 코치들 때문에 고민하던 벤자민은 결국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한국으로 온 벤자민에게 박재철이 가장 먼저 건넨 말.
‘여기 웬만한 빅리그 유망주보다 더 키울 맛 나는 녀석이 있을 겁니다. 기대하셔도 좋을 거예요.’
흔한 립서비스라 생각했다. 그냥 고마워서 하는 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처음 한국에 와서 한수혁이라는 선수를 본 순간.
그가 마운드에서 104마일에 달하는 포심을 던지는 순간, 그리고 타석에서 말도 안 되는 홈런을 펑펑 날려대는 걸 본 순간.
벤자민은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대체 뭘 가르치지?’
정작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한수혁이라는 선수는 단순한 신인이 아니었다.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몰라도 이미 자신만의 플레이 방식을 몸에 익힌 상태였으며, 거기에 개인코치까지 붙어 있었다.
가끔 오랜 야구 경험에서 나오는 연륜 같은 걸 전수해주려 해도 그중 많은 부분을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결국 벤자민은 한수혁을 가르치는 대신 보호하는 길을 택했다.
자신의 야구 인생에서 처음 본 유망주이자, 어쩌면 전 세계 야구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길 이 천재를 보호하는 게 자신에게 주어진 숙제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데 오늘, 그 천재가 처음으로 분노하는 것을 보았다.
예전 벤클 때 보았던 그런 분노와는 뭔가 결이 달랐다.
상대의 야구를 부정하고, 완전히 부숴버리려는 의지가 느껴졌다.
‘으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아마 저 천재는 자신이 아무리 그 이유를 물어도 제대로 대답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은 그냥 할 일을 할 뿐이다.
“몸 상태 체크하고, 혹시 무슨 일이 있는지도 다시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네, 벤자민. 부탁합니다.”
보스에게 허락을 받은 벤자민이 온화한 미소를 띄우며 한수혁에게 다가갔다.
“챔피언, 잠깐 이쪽으로. 방금 플레이는 정말 멋졌어. 음, 혹시 불편한 곳은 없고? 뭐든 좋으니 나에게 한번 말해보지 않겠나?”
* * *
퍼억
“아악!”
– 아앗! 저게 뭔가요? 한수혁 선수가 2루를 돌아 3루로 향하려는 순간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일단 한수혁 선수는 3루에 무사히 도착한 상태입니다. 고형철 선수는 발목을 잡고 괴로워합니다.
– 네, 대전의 2루수가 멍청한 짓을 했네요.
– 멍청한 선택이요?
– 느린 화면 보시죠. 2아웃 주자 1루 상황에서 한수혁 선수가 우익수 옆으로 빠지는 큰 타구를 날렸죠? 1루에 있던 서형주 선수는 여유 있게 홈까지 들어왔고요. 우익수가 공을 더듬는 걸 본 한수혁 선수가 2루 베이스 바로 앞에서 다시 스피드를 올렸는데요.
– 네, 정말 그렇군요.
– 이를 본 2루수 고영철 선수가 손으로 한수혁 선수의 다리를 잡아채려 했습니다. 한수혁 선수는 당연히 그 손을 피하느라 스텝이 엉켰고, 그 과정에서 수비수의 오른쪽 발목을 밟고 말았네요. 아, 저런 짓은 하면 안 돼요. 본인이나 주자에게나 너무나 위험한 짓입니다.
– 네, 다시 보니 고의성이 다분했네요.
– 무슨 심정인지 이해는 갑니다. 위에서는 제대로 하라고 쪼아대지, 경기는 계속 밀리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저런 멍청한… 아, 결국 들것이 들어옵니다.
– 다행히 한수혁 선수는 괜찮은 것 같네요. 벤치를 향해 괜찮다는 듯 손을 들어 보입니다.
– 네, 보기와 달리 굉장히 유연한 선수이니까요. 상대 선수의 발을 밟는 과정에서 발목에 무리가 갔을 수도 있지만 일단 큰 이상은 없는 것 같습니다.
– 다행입니다. 실려 나간 고영철 선수에게도 별다른 일이 없기만을 바랍니다.
–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진짜 멍청한 짓이었습니다. 지금이 어느 때입니까? 2027년입니다. 머리 깎고, 양말 올려 신고, 수비수에게 스파이크 들어 올리고, 주자의 주루를 방해하고, 이런 건 진짜 없어져야 합니다!
– 이번만큼은 저도 공감합니다, 위원님.
– 안 되겠네요. 정말 이 기회에 한수혁 특별보호법이라도 만들어서…….
– 그라운드가 정리되는 동안 광고 보고 돌아오겠습니다. 여기는 잠실입니다.
* * *
따아아아아악!
“우아아아!”
“와아아아!”
“한수혁!”
“수혁 오빠!”
1회말 한수혁의 기습적인 홈스틸, 그리고 다시 3회 한수혁의 1타점 2루타로 2 대 1, 한 점 차로 워리어스가 앞서가고 있는 상황.
이어진 5회말 공격, 1번 서형주가 볼넷을 골라 나간 후 2번 안치욱의 땅볼 타구를 팔콘스 3루수가 더듬으며 무사 1, 2루가 만들어졌다.
팔콘스의 막장 수비에 길들여진 평소의 류한결이라면 크게 신경 쓰지 않을 상황.
하지만 타석에 한수혁이 들어서는 순간 류한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고, 온몸에서 굵은 땀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따아아아악!
대전 배터리가 심사숙고 끝에 선택한 초구를 한수혁이 그대로 받아쳤다.
맞는 순간 홈런임을 직감할 수 있을 정도의 엄청난 타구.
순식간에 5:1로 점수를 벌리는 석 점짜리 홈런이 터졌다.
워리어스 응원석이 미칠 듯이 달아올랐고, 분노한 팔콘스 팬들이 그라운드 안으로 쓰레기를 마구 집어던졌다.
그런 풍경을 만들어낸 당사자.
평소 같으면 멋진 배트플립을 선보였을 한수혁이 1루 베이스 앞까지 배트를 들고 가더니 옆으로 툭 던져버렸다.
그리고 아무런 세레모니 없이 홈을 밟고 덕아웃으로 들어가버렸다.
마치 무언가에 화난 듯, 혹은 이런 홈런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그 뒷모습이 너무 안쓰러웠던 민예린이 다시 한번 크게 소리쳤다.
“수혁 오빠!”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관중들의 환호가 들려오면 덕아웃에서 다시 나와 답해주던 그에게서 아무런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는다.
갑자기 가슴에 뭔가가 꽉 막힌 듯 답답해져 왔다.
민예린이 옆에 앉은 매니저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오빠, 저번에 나 화보 들어온 거 있지.”
“화보? 아, 어. 맞아. 에코 애들이랑 같이 좀 찍어 달라고 요청 들어왔었지.”
“그거 한다고 하고, 에코 애들 일정 이틀 뺄 수 있는지 확인해 봐.”
“이틀?”
“깊게 묻지 말고 가능한지만 확인해 봐. 그 조건 아니면 안 한다고 하고.”
“어… 그래.”
* * *
따아아악!
– 이게 무슨 일인가요! 첫 타석에서 홈스틸, 두 번째 타석 1타점 2루타, 세 번째 타석에서 3점 홈런을 터뜨린 한수혁 선수가 만루 상황에서 또 한 번 홈런포를 쏘아 올렸습니다. 이제 스코어는 10 대 2까지 벌어지고 맙니다!
– 엄청나네요. 오늘만 벌써 8타점째네요. 홈스틸까지 생각하면 10점 중에 9점을 한수혁 선수 혼자서 만들어냈습니다.
– 아… 홈런을 허용한 투수가 마운드 위에서 고개를 들지를 못합니다.
– 이게… 너무 엄청난 홈런을 맞은 터라… 저도 투수 출신이라 저 심정이 십분 이해가 갑니다. 저럴 때는 정말 다 집어치우고 어디 산으로라도 들어가고 싶거든요.
– 대전 팬들이 집어 던진 오물이 그라운드로 떨어지면서 잠시 경기가 중단되었습니다. 위원님, 오늘 경기 승패를 떠나 한동안 홈런을 추가하지 못했던 한수혁 선수가 두 개의 홈런을 추가하면서 시즌 28호 홈런을 기록하게 되었는데요. 홈런 신기록에 대해 안 짚어볼 수가 없겠군요.
– 네, 일단 한국야구에서 단일 시즌 홈런 신기록은 56개입니다. 그런데 이게 진짜 오래 됐어요. 2003년, 그러니까 무려 24년 전의 일입니다.
– 아시아 신기록은 몇 개인가요?
– 2013년 야쿠르트에서 뛰었던 네덜란드 국적의 발렌틴이라는 선수가 기록한 60개가 아직까지 최고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 그것도 꽤 오래되기는 했군요. 14년이나 흘렀네요?
– 맞습니다. 아쉬운 점은 일본에서는 최근에도 50홈런을 넘어서는 타자들이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2015년 이후 그 누구도 50홈런 이상을 기록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 어떤 이유인가요?
– 뭐… 굳이 따지자면 고교야구에서 나무 배트를 사용한다든지, 투수들의 구속이 올랐다든지, 들 수 있는 이유는 많겠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건 타자들의 실력이 투수들을 못 따라갔다고 봐야겠죠.
– 제대로 된 홈런타자를 기다렸던 야구팬들이 한수혁 선수에게 더더욱 열광할 수밖에 없겠군요.
– 맞습니다. 근래 들어 투수들의 집중 견제로 페이스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오늘처럼 몇 번 몰아치기를 한다면… 어쩌면 이번 시즌이 끝나갈 때쯤 새로운 역사의 탄생을 보게 될 수도 있겠군요.
– 말씀드리는 순간 그라운드 정리가 끝나고 다시 경기가 재개됩니다. 아, 대전 선수들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네요. 관중석에 남은 팬들 중에는 우는 분들도 계시고요. 보는 제가 다 안타깝습니다.
– 네, 정말 오늘은 한수혁 선수가… 음, 말 그대로 혼자서 대전을 완전히 박살 내버리고 말았습니다. 대전 팬들로서는 정말 환장할 노릇이겠지만 어쩌겠습니까, 이런 게 바로 야구인 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