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87)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86화(87/412)
#86.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는 걸까
“한수혁 선수, 오늘 정말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셨습니다. 아까 베이스러닝 중에 잠깐 충돌이 있었는데 혹시 몸 상태는 괜찮으신지요?”
평소에도 잘 웃는 선수는 아니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표정이 차가워 보이는 한수혁을 향해 리포터가 조심스럽게 마이크를 내밀었다.
오늘 하루 한수혁이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모두 본 그녀는 지금 한수혁의 표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홈런 2개 포함 8개의 타점을 올린 선수의 얼굴이 왜 이렇게 굳어 있단 말인가.
“아무 이상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표정보다 더 차가운 대답이 돌아왔다. 리포터의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이런 식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가는 돌아가서 어떤 질책을 당할지 모른다.
위기감을 느낀 리포터가 대본에는 없던 질문을 꺼내들었다.
“오늘 대전 선수들의 투혼이 대단했습니다. 상대하면서 어려움은 없으셨는지요.”
“투혼이요?”
한수혁의 차갑던 표정이 더욱 심각하게 굳어졌다. 리포터는 자신이 뭔가를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미 상황은 벌어진 상태였다.
그녀가 저도 모르게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네, 그, 네, 투혼…….”
“만약 그런 게 투혼이라면 저는 야구계에 투혼 같은 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네?”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오늘 컨디션이 별로 안 좋아서.”
“아, 네, 그럼 오늘 경기 승리하신 거 다시 한 번 축하드리고…….”
* * *
“수혁아, 진짜 별일 없는 거지?”
“별일은 무슨, 괜찮아. 아무 일 없어.”
“음, 그래. 별일 없으면 된 거지. 혹시나 나한테 뭐 할 말 있으면 언제든 전화하고.”
“아, 글쎄, 알았다니까? 하루 종일 걱정만 하지 말고, 우리 이제 퇴근합시다. 그나저나 형은 연애 안 할 거야? 예전에는 돈이 없어 그랬다 치고, 이제는 내가 연봉 충분히 주잖아. 가서 여자나 좀 만나.”
“넌 지금 누가 할 소리를… 하아, 됐고. 그래, 네 말대로 퇴근이나 하자. 내일 휴식일인데 빨리 가서 푹 쉬어.”
대전과의 3연전이 모두 끝났다.
그리고 나는 성훈이 형의 잔소리를 들으며 구단 사무실을 빠져나오는 중이었다.
류한결이 선발등판한 대전과의 1차전에서 홈런 2개 포함 8타점을 올린 나는 2차전과 3차전에서는 단 하나의 안타도 추가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었다. 대전 투수들이 나를 보면 거의 경기를 일으키며 볼만 던져댔으니까.
하도 좋은 공이 안 들어오길래 완전히 빠지는 공을 억지로 받아쳤더니, 그 다음부터는 숫제 고의사구로 날 내보냈다.
대전과의 홈 3연전 스윕.
그렇게 우리는 대전을 스윕했지만 순위는 그대로 3위에서 변동이 없었다. 1위 인천과 2위 수원의 독주가 워낙 거센 탓에 2위를 노리기는 아직 무리였다.
한편 구단주의 지시로 결사항전 모드에 들어갔던 대전은 결국 창원에 5위 자리를 내주고 6위로 굴러 떨어졌다.
1차전에서는 내게 워낙 많이 두드려 맞았고, 2차전에서는 맥스가 오랜만에 역전 홈런을 터뜨렸고, 3차전에서는 선발 천상진 선배의 호투와 양기철 선배의 마무리로 대전을 침몰시켰다.
1차전 때만 해도 내게 이빨을 드러내던 김세준 포함 몇몇 선수들은 2차전부터 내 눈을 아예 쳐다보지도 못했고, 몇몇 선수들의 양말은 다시 발목으로 내려와 있었다.
그렇게 완전히 박살 난 채 대전으로 돌아간 팔콘스 선수들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
“안녕하세요, 수고 많으시네요.”
“어이구, 한수혁 선수. 이제 퇴근하시나 보네요. 단지 내에 아무 이상 없으니 안심하고 들어가서 쉬세요. 허허.”
이제 와서 생각하니 내가 왜 그렇게 화가 났던 건지 잘 모르겠다.
그 분노가 나를 향해 스파이크를 들어올리던 대전 선수에게 향해 있던 건지, 아니면 그런 선수들을 소유물처럼 부리려는 구단주에게 향했던 건지.
그도 아니면 여전히 구시대적 마인드가 판을 치고 있는 이 나라의 야구판에 대한 것이었는지조차 모르겠다.
하지만 더 이상 생각하고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나는 내 야구를 하면 그뿐이니까.
터벅터벅
그러고 보니 매일 관중석에 앉아 있던 민예린을 오늘 경기에서는 못 본 거 같다.
어쩌면 그 자리에 있었는데 내가 못 봤을지도 모르고.
모르겠다.
오늘은 진짜 쉬어야겠다.
몸도 마음도 너무 피곤한 3연전이었다.
* * *
예나 지금이나 나는 내 뜻을 꺾은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그것이 사적인 일이든, 공적인 일이든 말이다.
이걸 다른 말로 표현하면 주위에 내 고집을 꺾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는 말로 풀이된다.
그렇게 내 하고 싶은 대로 살아왔건만, 막상 계획했던 대로 일이 하나도 돌아가지 않은 걸 보면 내 판단력에 의구심이 들 정도다.
어쨌든 그런 내 인생에 끼어들어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사람이 딱 둘 있다.
하나는 돌아가신 어머니고, 또 하나는 바로 성훈이 형이다.
“흐아암…….”
다음 날 아침, 아니, 이 정도면 새벽에 가까운 것 아닐까?
대전과의 3연전을 끝내고 찾아온 휴식일, 일찌감치 잠에서 깨어 있던 나는 오늘 하루 무엇을 하며 보낼지 고민 중이었다.
팀 훈련도 없는데 굳이 구장에 나가기도 뭐하고, 딸과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될 제이콥을 불러내 개인 훈련을 하기도 뭐하고.
야구가 없는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
띵동
아침 7시부터 울려 대는 초인종이라니, 대체 누가?
궁금증은 그리 길게 가지 않았다. 범인은 바로 성훈이 형이었다.
– 문 열어, 인마.
“으응? 이 시간부터 대체 왜…….”
– 됐으니까 문이나 열라고.
어차피 현관 비번도 알면서 뭐 하러 현관벨을 저렇게 눌러댄담.
덜컥
“끼야아아아악!”
“커헉!”
“야, 이 미친놈아! 왜 옷을 벗고 있어!”
…이래서 그렇게 벨을 눌러 댄 거구나.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드로즈 팬티 하나만 걸친 내 모습에 민예린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버렸다.
으음, 좀 남사스럽기는 하지만 수영장 왔다고 생각하면 될 걸 왜 저렇게 호들갑을.
아니, 애초에 이 시간에 남의 집에는 무슨 일인데? 저 둘은 왜 같이 있는 거고?
“누구랑 같이 있으면 있다고 말을 하지. 잠깐만, 나 그럼 옷 좀 입고 올게.”
“하아… 내가 미치겠네, 정말. 빨리 입고 와.”
안방으로 들어가 트레이닝복을 주섬주섬 걸쳐 입고 다시 현관으로 돌아왔다.
성훈이 형은 대문이 닫히지 않게 붙잡은 채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어디론가 도망갔다 달려온 민예린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뭐 저렇게 호들갑이야. 연예인이면 남자 가수나 배우들하고 수영복 화보 같은 것도 찍고 했을 거 아냐.
“들어와, 그리고 그쪽도 들어오세요.”
“으이구…….”
“네? 아, 네, 그러니까 제가…….”
“일단 들어와서 얘기해요.”
내 말에 두 사람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아니, 근데 진짜 성훈이 형은 그렇다 치고, 저 여자는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형, 민예린 씨, 일단 하나만 물읍시다. 이 시간에 대체 무슨 일이에요?”
“됐고, 일단 나랑 같이 여기 청소부터 하자.”
“청소? 무슨 청소? 지난 주에 일 봐주시는 아주머니가 청소 해주셨는데?”
“그게 대체 언제냐, 됐고, 손님 맞으려면 일단 청소는 기본이지. 민예린 씨, 그럼 10시 반 정도까지만 준비하면 될까요?”
“네? 아, 네, 네. 그러면 될 거 같아요. 이모가 11시에 음식 가져오신다고 했거든요.”
“오케이, 그럼 이 집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 민예린 씨는 가서 준비해 주시면 되겠네요.”
“알겠습니다!”
성훈이 형과 알 수 없는 말을 주고받던 민예린이 벌떡 일어나 현관문 밖으로 사라졌다.
“…저기, 지금 뭘 하려는 건데?”
“됐고,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대청소부터.”
* * *
모든 일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아침 일곱 시부터 찾아온 성훈이 형과 함께 집 안을 대청소하고 간신히 숨을 돌리려는 찰나, 난생 처음 보는 사람들이 우르르 집 안으로 들어와 뭔가를 준비했다.
그렇게 내가 잠깐 멍하게 있는 사이, 우리집 거실에 계속 뭔가가 셋팅되었다.
간이 식탁과 의자 셋트, 엄청난 양의 음식과 음료수들.
가만, 이거 설마……?
“형, 이거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거야?”
“네가 뭘 생각하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집들이냐고, 우리집 집들이.”
“흐흐, 그래. 맞아. 오늘 너희 집 집들이하기로 했다. 내일 경기 있으니까 낮에.”
아니, 집주인이 모르는 집들이라고?
다 좋다 치고, 저 여자는 왜 저렇게 신이 났는데?
“민예린 씨, 잠시만.”
“네? 아, 저요?”
“잠시만요, 잠깐만 일단 그것 좀 내려놓고.”
손에 뭔가를 들고 열심히 자신의 집과 내 집 사이를 오가던 민예린을 잡아 세웠다.
그리고 내 방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저기… 저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그게 대체 뭔… 아니, 됐고, 진짜 지금 이게 다 뭐예요? 저분들은 누구고요? “
“그냥 수혁 님, 아니, 수혁 오빠는 집주인답게 가만히 소파에 앉아서 손님 맞으실 준비만 하세요. 12시까지 선수분들 오신다고 했어요.”
“선수들이요? 우리 팀 선수들이요? 몇 명이나요?”
“일단 1군 선수단은 전원 오시라고 했어요. 빠지는 분들이 있을 테니 한 스무 분 정도 되려나요? 글구 오빠, 말 놓으시라고 제가 저번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말 안 놓으시면 저 대답 안 할래요.”
“아, 알았어요. 아니, 알았어. 그런데 스무 명이 넘게 온다고? 우리 집에 그 인원이 어떻게 들어…….”
“히힛, 그래서 저희 집하고 반씩 모시려고요. 저쪽에도 테이블 셋팅 중이에요. 양쪽 집 문 다 열어놓고 오빠는 왔다 갔다 하심 돼요.”
이 여자, 스케일 보게.
“아무리 그래도… 그리고 이러면 이웃분들한테 민폐 끼칠 텐데.”
“괜찮아요. 안 그래도 어제 다 만나 뵙고 양해 부탁드렸고요. 방금 음식도 가져다 드렸더니 좋아하시던데요? 동네 잔치 하는 거 같다고.”
음, 민예린이라는 이름값을 그런 식으로 써먹은 건가.
모르겠다… 이거 아무래도 내 손을 떠난 거 같네.
* * *
“수혁아! 우리 왔… 헉!”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약속되었던 12시가 다가오자 워리어스 선수들이 하나둘 입장하기 시작했다.
각자 손에는 화장지와 세제 같은 걸 하나씩 들고.
가장 먼저 도착한 조성오 선배와 안치욱, 서형주가 생각지 못한 상황에 놀라 주춤주춤 뒤로 물러 섰다.
“들어오세요! 저기 저쪽부터 앉으시면 됩니다!”
“어, 어, 네, 그, 그럴게요. 일단 들어가자.”
이상한 표정이 된 안치욱과 서형주가 내게 다가와 묻는다.
“뭐야, 여기 민예린이 왜 있어?”
“몰라… 나도.”
“너희 집인데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오늘 집들이한다는 걸 방금 알게 되었다면 믿겠냐?”
“누가?”
“내가.”
“너희 집 집들이인데 방금 집들이하는 걸 알았다고?”
“그래.”
“…….”
동료들이 속속 도착했다. 그런 손님들을 민예린이 마치 안방마님처럼 맞이하고는 능숙한 솜씨로 양쪽 집으로 나눠 안내했다.
웅성웅성 왁자지껄
그렇게 좁지 않은 집 안이 사람으로 가득 들어찼다.
처음에는 꽤나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웠다. 언제나 절간처럼 조용하던 집 안이 갑자기 파티장이 되어버렸으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런 혼란한 감정도 차차 시간이 지나며 잦아들었다.
“아이고, 진짜네! 우리 아파트에 한수혁 선수가 산다더니! 반갑습니다. 나 워리어스 팬이에요!”
“아, 아, 네.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어서 오세요.”
“고마워요. 그럼 염치없지만 음식 좀 얻어먹고 갈게요. 올해 파이팅입니다!”
조금씩 익숙해져 간다.
우리 집에 누가 찾아오는 것도, 누군지 모를 낯선 사람이 말을 시키는 것도, 그리고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그 모든 것을 힘들어하던 내가 지금 이 말도 안 되는 광경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제야 대충 알겠다.
성훈이 형과 민예린이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집들이를 계획한 건지.
평소와 조금 달랐던 내 모습이 저 두 사람에게 어떤 식으로 비춰졌었는지.
그래, 아주 가끔은 이렇게 내 뜻이 아닌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 하루를 보내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은 거 같구나.
“자! 잠시만 주목! 내일 경기도 있으니 길게 놀 수는 없고, 이쯤에서 집주인인 수혁이가 뭐라고 하는지, 한 마디 들어봐야지!”
“오오……!”
“제가요? 갑자기?”
“뭐, 할 말이 없으면 노래 하나 해도 좋고. 그래, 차라리 그게 낫겠다.”
그 무슨 끔찍한 소리를.
갑작스러운 조성오 선배의 장난에 내가 살짝 당황하던 그때.
“제가 할게요. 노래.”
“……?”
내 한 발 뒤에 서 있던 민예린이 쪼르르 달려와 숟가락을 거꾸로 잡았다.
“우… 둘이 무슨 관계이길래 노래를 대신?”
“됐고, 우리도 저 시꺼먼 놈 노래보다는 민예린 씨 노래 듣는 게 훨씬 낫지, 자, 박수!”
“와아아!”
점입가경이다. 손님으로 온 팀원들과 아래 윗집 주민들의 시선이 일제히 민예린에게로 향했다.
옆집에서 놀던 팀원들까지 무슨 일인가 싶어 내 집 안으로 우르르 들어왔다.
그야말로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집 안이 가득 찬 상황.
그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민예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때는 정말 힘들기만 하던 날들도 있었어. 그때는 모두 끝이라 생각했지.
얼마 전 이만식 선배가 노히트노런을 기록한 다음 날, 민예린이 발표해 워리어스에 헌정한 노래 ‘함께 걷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였다.
-네가 힘들어할 때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미안해, 그때는 나도 포기하고 싶었어.
아무런 음향장치도 없는 아파트 거실, 마이크조차 없이 숟가락 하나 들고 노래를 부르는 그녀의 모습이 웃길 법도 하건만,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노랫말에 담긴 의미를 너무나도 잘 알기에,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진심을 느낄 수 있기에 그저 말없이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다시 돌아온 나는 너를 위해, 우리를 위해, 모두를 위해 살아갈 거야.
-내가 가려고 하는 길에 무엇이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겠지. 하지만 괜찮아. 너와 함께 가는 길이니까.
그날 경기 이후 이만식 선배의 응원곡으로 사용 중인,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떤 개인이 아닌, 워리어스 선수단 전체를 위해 불러지고 있는 노래.
노래의 마지막 소절이 울려 퍼졌다.
-너를 위해, 나를 위해, 그리고 모두를 위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 마지막 순간까지…….
어째서일까.
나와는 아무 상관없다 생각했던 그 노랫말이 갑자기 마음 속으로 파고든다.
모두의 시선이 노래를 마친 민예린에게로 쏠렸다.
그리고 그녀의 눈동자는 나를 향해 있었다.
큰일이다.
내가 뭔가를 크게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