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88)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87화(88/412)
#87. 스미스 씨라고 불러라
누군가 내게 가장 원하는 것을 말하라면 나는 주저 없이 나를 포함한 주변 사람 모두의 건강을 선택할 것이다. 어머니와 성훈이 형을 잃은 트라우마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렇다.
그리고 다음으로 하나만 더 말해보라 한다면 그것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제발 한 번에 몰아서 일어나지 않기를 부탁할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안 좋은 일은 한 번에 몰려오게 마련이다.
성훈이 형의 긴급 회의 요청을 받은 나는 지금 사무실에서 그와 머리를 맞대고 한꺼번에 찾아온 불행들에 대한 대책을 마련 중이다.
“수혁아, 이거 큰일이네. 아무리 봐도 마땅한 선수가 없다. 기껏해야 대만에서 뛰던 애들인데 이게 대체가 되려나 모르겠다.”
“용병은 그렇다 치고, 백업 포수 쪽은?”
“거기도 마찬가지야. 박재철 단장이 가져온 최종 리스트 봤는데 솔직히 우리 팀 용지훈보다 어디가 나은지 모를 정도더라. 아직 전반기도 안 끝나서 그런지 나온 매물이 거의 없어.”
“환장하겠네…….”
“포수는 그렇다 치고 당장 시급한 게 용병인데, 사실 하나 있기는 있어. 작년에 일본에서 홈런 스물다섯 개 친 놈이 있는데 이거 대놓고 뒷돈을 요구하네.”
“누구? 카를로스 그놈?”
“어.”
“됐어, 그놈은 치워. 비싼 건 둘째 치고 그놈 일본에서도 돈만 밝히기로 유명했다며? 그런 놈은 팀워크에…….”
음, 말하다 보니 뭔가 내 얼굴에 침을 뱉는 것 같기도 하고.
지난 대전과의 3연전에서 갑자기 냉각되었던 내 기분은 성훈이 형과 민예린이 준비한 집들이 이후 조금씩 평상심을 찾아갔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대체 내가 왜 그렇게 열을 냈던 건지 모르겠다.
대전 놈들이 무슨 야구를 하건 말건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어쨌든 시즌은 계속되었다.
이어진 광주와의 경기에서 2승 1패, 창원과의 3연전에서 1승 2패, 하지만 매지션스와의 경기에서 다시 2승 1패를 기록하며 순항을 하던 우리 팀은 1위팀 인천과의 첫 번째 경기에서 커다란 암초를 만나고 말았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둘이나 되는 암초를.
“하아… 예전에 네가 뭐라고 했더라? 홈런왕은 포드 어쩌구…….”
“홈런왕은 캐딜락을 타고, 타격왕은 포드를 탄다?”
“어, 그래, 그거. 진짜 세상 잘 안 변해. 그 말이 처음 나온 게 1950년대라며? 80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는데 여전히 홈런 타자는 비싸구나.”
사실 저 이야기는 당대의 홈런타자였던 랄프 카이너가 타율을 올리기 위해 밀어치는 연습을 하고 있자, 그 모습을 보던 투수 프리츠 오스터뮐러가 한 말이다.
정확한 원문은 ‘밀어서 안타를 치는 타자는 포드를 몰아. 반대로 잡아당겨 홈런을 치는 타자는 캐딜락을 몰지’였다. 쓸데없이 안타 치는 연습 하지 말고 홈런이나 더 쳐라, 뭐 그런 뜻이다.
어쩌면 내가 바로 저 이야기의 가장 열렬한 신봉자일지도 모르겠다.
빅리그 시절 초반, 내 몸값과 이름값을 높이기 위해 미친 듯이 큰 것만을 노렸으니까.
하지만 그 이야기는 이제 비수가 되어 우리 팀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6월 셋째주 금요일에 펼쳐진 인천과의 1차전에서 우리는 두 명의 주전 타자를 잃었다.
먼저 문제가 생긴 건 용병 맥스 워커였다.
첫 번째 타석에서 옆구리에 통증을 느낀 그는 곧바로 교체되어 병원으로 향했다.
정밀검사 결과 옆구리 근육 두 군데가 각각 4㎝와 2㎝가량 찢어진 것이 발견되었다.
애초에 뭔가 문제가 있었는데 이 미련한 놈이 그걸 숨기고 계속 경기를 뛴 모양이다.
담당의의 소견으로는 완전히 회복하려면 최소 한 달 정도가 필요했다.
용병치고는 홈런 개수가 조금 부족했지만 6번 타석에서 타점을 잘 먹어주던 그가 그렇게 허무하게 라인업에서 빠졌다.
그날, 경기에서 교체되어 병원으로 향하던 맥스의 허망한 눈빛이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4회말 수비가 끝난 후 어깨와 무릎에서 불편함을 느낀 장덕수 선배가 감독을 찾았다.
웬만한 일로는 눈 하나 깜짝 않는 그였기에 이대준 감독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당장 한 경기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장덕수가 팀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그렇게 두 번째 선수가 라인업에서 빠졌다.
다행인 것은 회복에 한 달이 필요한 맥스와 달리 장덕수 선배의 경우 며칠 쉰 후 포수로 나서는 경기수를 좀 조절하면 된다는 담당의의 의견이었다.
결국 맥스 워커가 빠진 우익수 자리에 김수학 선배가 들어섰고, 지명타자 자리에 강진석 선배가 다시 투입되었다.
주전포수는 포수의 탈을 쓴 1루수 용지훈 선배가 대신 나섰다.
그리고 우리는 인천과의 3연전을 모두 내주고 말았다.
넉넉했던 승패 마진이 확 줄어들었다.
시즌 성적 35승 3무 30패, 심지어 매지션스에 3위 자리를 내주며 4위로 한 계단 내려앉았다.
팀 전체에 암울한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여기까지가 내가 지금 이렇게 골머리를 싸매고 있는 이유다.
“그러니까 일단 형 생각은 용병 타자는 교체, 그리고 어떤 대가를 치르던 백업 포수도 하나 데려오겠다는 거지?”
“그래. 맥스한테는 조금 미안하지만 어차피 우리 선택이니까 잔여 연봉은 다 지급될 거야. 그 친구 부모님도 아프시다며? 어쩌면 이게 전화위복이 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인 친분을 생각하면 그에게 조금 더 기회를 주고 싶기는 하지만 이제 7월로 접어드는 시점에서 용병 타자의 한 달간 공백은 너무나 치명적이다.
그래, 지금은 성훈이 형과 박재철 단장의 뜻을 따르는 게 맞겠지.
“알았어, 그럼 백업 포수는?”
“인천에서 세 번째 포수를 줄 수 있다고는 하는데, 미친… 천상진을 달라고 하더라.”
“꺼지라고 하고, 다른 데는?”
“부산에서 포수 구재현을…….”
“구재현 선배? 그 양반을 주겠다고? 정말?”
아무리 야구선수보다는 동네 슈퍼 평상에 앉아 있는 게 어울릴 것 같은 주당이지만 그래도 10년 이상 포수 마스크를 쓴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다. 그런 선수를 주겠다고?
“거기서는 누굴 달라는데?”
“서형주, 아니면 안치욱에 최정수.”
“크크크. 장난하나, 이것들이.”
갑자기 분노가 확 치밀어 오르네. 일단 그놈들은 다음에 만나면 응징하기로 하고.
대안이 필요하다. 대안이… 대체 용병, 그리고 백업 포수.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당장 계약이 가능한 용병 선수 명단을 살펴보았다.
가장 숫자가 많은 건 대만 리그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이었다.
1년 단위 계약이 보편적인 한국, 일본과 달리 대만 프로야구에서는 월 단위 계약이 일반적이다. 때문에 현재 대만에서 뛰고 있는 선수라 해도 연봉만 맞춰주면 바로 데려올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문제는 그들의 기량이 딱 대만 리그 수준이라는 거다. 일본이나 한국에서 뛰다가 밀려난 딱 그 정도 수준.
물론 가끔은 기량이 괜찮은 선수들이 있긴 했지만 대만 애들도 바보는 아니다. 그런 선수들은 이미 1년 단위 계약으로 묶여 있게 마련이다.
“대만 쪽은 됐고… 마이너에서 뛰던 애들을 봐야겠네.”
“박 단장 말로는 그쪽도 영 신통치가 않다던데. 물론 그 양반이라도 모든 선수를 다 알겠냐만.”
빅리그에서 15년을 넘게 뛰며 무려 일곱 개 팀을 옮겨 다닌 그다. 어쩌면 현재 한국 야구인들 중 미국에서 가장 넓은 인맥과 정보망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를 인물이다.
계약된 미국 에이전시로부터 들어오는 정보, 거기에 박재철 단장 개인의 정보까지 합쳐진 결과가 그렇다면 더 이상의 반전은 없을 공산이 크다.
스륵스륵
정리된 자료들을 넘기고, 넘기고.
요즘 세상에 이렇게 자료를 전부 인쇄하는 게 자원 낭비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나 역시 태블릿보다는 이런 게 더 익숙하다.
얘는 포지션이 1루라 안 되고…….
이 친구는 괜찮아 보이는데 몸값이 턱없이 비싸고…….
음, 얘는 왜 이 성적으로 새 팀을 못 구한 거지? 아하, 인성에 문제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오십여 명에 달하는 명단을 하나하나 뒤적거려본다.
이미 박재철 단장을 비롯한 프런트 직원들이 모두 확인했을 자료이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니까.
혹시나 내가 아는 이름이…….
뒤적뒤적
있을 턱이 없지. 메이저리그도 아니고 그래 봐야 마이너리그를 전전하는 선수들인데. 가뜩이나 다른 선수들에 별 관심이 없기도 했고.
그렇게 반쯤 포기한 마음으로 자료를 뒤적이던 나는 그 문서의 끝에 거의 다달랐을 때 손을 멈춰야만 했다.
월터 스미스, 30세, 지난 시즌까지 시애틀 산하 트리플A 소속으로 뛰다가 계약 해지, 우투우타, 주 포지션은 포수였지만 부상으로 인해 외야수로 전향.
이 아저씨가 왜…….
* * *
인천에게 스윕을 당한 우리는 이어진 파이터즈와의 3연전에서 1승 2패로 루징 시리즈를 기록했고, 6월의 마지막 일정으로 창원 랩터스와 만나게 되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1, 2차전은 우천으로 취소되었다.
예전 내가 중고등학교 시절 팬으로서 야구를 보러 다닐 때만 해도 우천 취소가 상당히 잦았다.
돔 구장이 문제가 아니라, 야구장 내 배수 시설 자체가 개판이다 보니 비가 좀만 와도 그라운드가 물웅덩이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이제는 옛말이 되었다. KBO 주도 하에 배수시설 대공사가 진행되며 어지간해서는 비로 인한 경기 취소는 사라지게 되었다.
이번 비처럼 말도 안 되는 강수량을 기록한 경우를 제외하면 말이다.
어쨌든 우천으로 인해 두 경기가 취소된 후 맞게 된 3차전.
넉넉히 벌어 두었던 승수를 제법 까먹은 탓에 연패 몇 번이면 5할 승률까지 위협받는 상황.
하지만 지금 내 마음은 그리 무겁지 않았다.
저기, 심각한 표정으로 선수단 앞에 서 있는 우리 팀의 새로운 용병 월터 스미스 때문이다.
“야, 안치욱. 나 저 아저씨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서형주 너 바보냐? 저렇게 생긴 미국 사람이 한둘이야? 영화 같은데 한 명씩 꼭 나오잖아.”
“그런가? 근데 방금 누가 누굴 보고 바보라고…….”
“쉿, 감독님이 쳐다보신다.”
반쯤 벗겨진 머리, 그와 대비되는 덥수룩한 턱수염, 농담 같은 건 씨도 안 먹힐 것 같은 근엄한 표정과 눈빛.
예전 내가 기억하던 그대로의 모습이다. 그때에 비하면 다섯 살이나 젊은데도 어쩜 저렇게 똑같이 생겼을까.
야구선수라기보다는 학교 교장 선생이 어울릴 거 같은 저 얼굴로 내게 잔소리를 해댔었지.
네 공만 믿지 말고 다른 동료들을 믿어라, 마운드에 선 투수를 도울 수 있는 건 오직 같은 팀원들뿐이다, 타자를 얕보지 마라, 그 역시 빅리그에서 뛰고 있는 선수다.
그때 시애틀 전체 포수 중에서 세네 번째 옵션 정도 되었던 월터는 가끔, 아주 가끔 주전 포수의 체력이 방전되거나, 혹은 부상을 당했을 때만 빅리그에 콜업되던, 사실상 마이너에 더 가까운 선수였다.
홈런을 곧잘 때려내곤 하지만 체인지업과 커브에 심각한 약점을 갖고 있던, 거기에 오랜 포수 생활로 인해 무릎에 문제가 있던 그는 때로는 포수로, 또 가끔은 외야수로 라인업의 빈자리를 채우는 그런 선수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포지션과 상관없이 언제나 당당하고 진지했다.
내가 커리어 첫 노히트노런을 했을 때 그가 한 말이 아직도 생각난다. 주전 포수를 대신해 마스크를 썼던 그는 웃음기 하나 없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꼬마, 네가 아무리 대단한 선수라고 해도 항상 이렇게 던질 수는 없을 거야. 그때가 되면 너도 내 말을 이해하겠지. 너를 도와줄 수 있는 건 같은 팀원들뿐이란 걸.’
함께 노히트노런을 만든 포수에게 욕까지는 하지 못했지만 나는 그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가 마이너 선수라고 무시했던 건 아니다. 애초에 나는 나를 제외한 모든 선수를 한 수 아래로 내려다봤으니까.
그냥 나를 철부지 동생처럼 취급하던 그 눈빛과 말투가 싫었을 뿐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내가 어깨 부상으로 투수를 그만둘 때가 되어서야 월터가 해준 말들이 떠오르곤 했다.
동료를 믿고 던질 수 있어야 진짜 투수가 될 수 있다는 그 말.
아무튼.
원래대로라면 이 시기 시애틀 마이너리그와 빅리그 사이를 오가고 있어야 할 월터 저 아저씨가 왜 계약이 풀린 채 자유 계약 선수가 되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젊은 시절부터 달고 살아왔다는 무릎 부상은 여전했고, 포지션은 거의 외야수로 고정된 상태였다. 공갈포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타격 매커니즘 역시 여전했다. 내가 알던 월터, 그대로였다.
어쩌면 내가 회귀하고 한국에 남으며, 시애틀의 선수단 구성이 바뀐 게 뭔가 영향을 줬을 수도 있겠지.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내가 알던 시절의 그보다 다섯 살이 젊은 월터가 내 앞에 서 있다는 게 중요했다.
맥스의 퇴단으로 공석이 되어버린 용병 타자의 자리, 그리고 시즌 초부터 우리 팀의 골머리를 썩여 왔던 백업 포수 문제를 해결해줄 구원자로서 말이다.
“자, 다들 주목. 오늘부터 우리와 함께 뛰게 될 선수다. 이름은 월터 스미스. 주 포지션은 외야수, 예전에는 포수로도 뛰었다고 한다. 일단 월터, 인사부터.”
“반갑군. 월터 스미스다. 지금 팀에 어려움이 있다는 걸 들었다. 다행히 취업비자 문제가 빨리 해결되어서 너무 늦지 않게 팀에 합류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한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겠다. 너희들도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 야구는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
첫 마디부터 꼰대스러움이 물씬 풍기는 인사말이다.
그의 성격을 잘 아는 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고, 통역을 통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선수들은 용병답지 않은 그의 태도에 약간 어리둥절한 반응이었다.
아주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견디다 못한 조성오 선배가 나서려던 순간.
내가 먼저 앞으로 한 발 나서며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반가워, 월터. 이 팀에 온 걸 환영해요.”
“스미스 씨라고 불러라.”
흐흐, 여전하네. 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