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89)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88화(89/412)
#88. 애송이들
‘하필이면…….’
한수혁이 먼저 건넨 인사에 새 용병이 삐딱한 반응을 보이자 몇 사람의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가장 불안감을 느낀 건 다름 아닌 주장 조성오였다.
함께 야구를 한 지 몇 달밖에 안 되었지만 그는 한수혁이라는 인간에 대해 제법 깊은 이해를 가지게 되었다.
구단에서의 생활 외에도 제이콥의 연습실에서 함께 훈련하며, 또 몇 번 그의 집을 드나들며 알게 된 한수혁의 진짜 모습.
그가 보는 후배 한수혁은 야구선수로서 엄청난 프라이드를 가졌으며, 좀처럼 타인에게 곁을 내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안치욱이나 서형주 같은 동기들, 그리고 자신을 포함한 선배들, 거기에 이제는 팀을 떠난 용병 맥스까지.
겉으로 보기에는 두루두루 친분 관계를 유지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들과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세우고 있다는 걸 조성오는 눈치채고 있었다.
그런 한수혁이 왜 먼저 저 새 용병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일은 벌어졌다.
먼저 건넨 인사와 악수에 기껏 돌아온 대답이 이름 말고 성으로 깍듯하게 불러라라니.
‘젠장.’
나이와 상관없이 이 팀의 중심이 되어버린 한수혁, 그리고 팀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긴급 투입된 새로운 용병.
앞으로 저 둘 사이에 냉기류가 흐르는 건 아닐까 조성오가 걱정하던 그때.
그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스미스 씨? 싫은데, 그냥 월터라고 부를게요.”
“안 된다. 스미스 씨라고 불러라.”
“월터가 싫으면 브라더라고 부를까요?”
“…….”
예상치 못한 한수혁의 넉살에 그 말을 알아들은 몇몇 선수들의 얼굴이 멍하게 변했다.
그리고 당사자인 월터 스미스 역시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모르겠다.
조성오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대체 왜 난생 처음 보는 미국인에게 한수혁이 저렇게 친근하게 구는 걸까?
* * *
“자, 오늘 라인업이다. 다들 확인하고.”
‘으음.’
오늘자로 급하게 팀에 합류하게 된 새로운 용병 월터 스미스, 그가 통역의 도움을 받아 덕아웃에 붙은 라인업 용지를 확인했다.
1번 중견수 서형주
2번 3루수 안치욱
3번 유격수 한수혁
4번 1루수 조성오
5번 지명타자 월터 스미스
6번 2루수 이창모
7번 우익수 김수학
8번 포수 용지훈
9번 좌익수 최민석
투수 라이언 스타크
‘5번 지명타자라…….’
외야수로는 바로 출전이 가능하다고 말했지만 이제 막 팀에 합류한 자신을 배려한 것인지 감독은 자신을 지명타자로 내세웠다.
어쨌든 팀에 합류하자마자 중심타선에 들어가게 되었다.
에이전트로부터 이 팀에 대한 설명은 충분히 들었다.
10년 전만 해도 우승을 밥 먹듯이 하던 팀, 하지만 그것도 모두 옛말, 몇 년 전부터는 줄곧 하위권에 박혀 있던 꼴찌 팀.
시즌 전 구단의 소유주가 바뀌었고, 코칭스태프까지 모두 물갈이 되어 거의 새로운 팀이나 다름없게 변했단다.
그 점은 마음에 들었다. 수석코치부터 휘하 코치들과 언어가 통한다는 점.
그리고 한수혁이라는 루키.
자신이 뛰던 시애틀에서 350만 달러라는 계약금을 책정했던 동양의 유망주, 그 유혹을 뿌리치고 한국에 남아 KBO를 박살 내고 있는 슈퍼 루키.
어차피 야구를 하는 데 나이 따위는 아무 상관없다.
처음 선수단과 마주하게 된 그 순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 팀이 저 루키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걸.
그런 녀석이 먼저 인사를 해왔다. 그냥 모른 척 받아들이려 했지만, 초면부터 이름을 부르게 허락하는 건 그의 가치관에 부합되지 않았다.
이름 대신 성을 부르라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의 예상을 넘어선 것이었다.
‘스미스 씨가 싫으면 브라더라고 부를까요?’
브라더라고? 저놈이 날 언제 봤다고?
모르겠다. 전해 듣기로는 세상 거만하고, 자기가 최고인 줄 아는 놈이라 했는데.
하지만 지금 월터가 신경 쓰고 있는 건 한수혁의 태도 같은 게 아니었다.
실직 상태였던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준 새 팀.
그들에게 자신을 선택한 게 잘못된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해야 한다.
지금 이 팀에 필요한 건 중심타선을 맡아줄 장타력 있는 타자, 외야 한 자리를 책임지고 가끔 마스크를 써줄 수 있는 백업 포수.
그거라면 자신 있다. 작년까지 계속 해오던 일이니까.
이제 서른에 불과한 나이, 하지만 매년 반복되는 부상.
시애틀은 그런 자신을 냉정하게 버렸다.
원망하지는 않는다. 다만 아쉬울 뿐이다.
‘올해는 진짜 몸 상태가 괜찮은데.’
이제는 의미 없는 이야기다. 시애틀은 자신을 버렸고, 월터는 이제 워리어스 선수가 되었다.
세상 그 무엇보다 신의와 책임감, 신념을 위해 살아가는 사나이 월터 스미스가 가슴팍에 새겨진 워리어스 로고를 툭툭 두드리며 전의를 다졌다.
* * *
– 고동식 위원님, 6월이 거의 끝나가는 가운데 워리어스에 최대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 하아, 안 그래도 제가 그것 때문에 요즘 입맛이…….
– 네?
– 아닙니다. 사실 언젠가는 찾아올 위기이긴 했습니다. 두텁지 않은 선수층, 특히 백업포수의 부재야말로 워리어스의 최대 약점이었죠. 공교롭게도 그 두 가지 문제가 한 번에 터졌을 뿐입니다.
– 어떻게든 3위 자리를 다시 탈환하려는 워리어스에게는 이번 한 주가 최대 분수령이 되겠군요.
– 괜찮습니다. 그래도 최대한 빠르게 문제점을 수습하고 대체 용병을 데려왔으니까요. 그동안 라인업에서 빠져 휴식을 취하던 장덕수 선수도 오늘은 대타로 다시 복귀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 이번에 합류하게 된 워리어스의 새 용병 월터 스미스… 어떤 선수인지 간략하게 설명 부탁드립니다.
– 올해 30세로 지난 시즌까지 시애틀과 마이너 계약을 맺고 뛰던 선수고요. 시즌이 끝난 후 재계약에 실패해 올 시즌에는 출장 기록이 없습니다. 신장 192㎝에 98㎏, 우투우타이고요. 데뷔 후 5년간은 포수로 뛰다가 이후에는 외야수로 더 많이 뛴 그런 선수입니다
– 덩치가 꽤나 대단하군요.
– 네, 기본적으로 워리어스 선수들을 보면 전부 체격이 좋죠? 한수혁, 안치욱, 장덕수, 조성오, 거기에 이제는 월터까지, 체격만 보면 야구단이 아니라 씨름단 같기도 하네요.
– 하하, 재미있네요. 스윙 연습을 하는 걸 보니 상당히 시원 시원 해 보입니다.
– 네, 일단 기록만 보면 홈런에 모든 걸 건 공갈, 죄송합니다. 장타 위주의 배팅을 하는 선수다, 그렇게 보면 되실 것 같습니다. 물론 이건 미국에서 뛴 기록이니 실제 한국 투수들을 상대하는 건 직접 확인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 잘 알겠습니다. 말씀드리는 순간, 1회초 워리어스의 공격이 시작되겠습니다.
* * *
“야, 너 왜 저 용병한테 그렇게 친한 척하냐?”
“친한 척이라… 그냥 친한 거라고 받아들일 수는 없었을까?”
“뭐래, 오늘 처음 본 사람하고 친하고 말고 할 게 어디 있어?”
“흠.”
서형주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내가 월터에게 농담을 걸며 친근하게 다가간 건 그냥 일순간의 변덕 같은 거였다.
이제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아니, 시간의 흐름 속으로 완전히 사라져버린 내 빅리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을 만난 반가움.
그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나를 그렇게 만든 것 같다.
사실 그때 그 시절이 그리운 건 전혀 아니지만…….
모르겠다. 나도 가끔은 내 마음을 이해 못 할 때가 있다.
어쨌든 그건 그거고, 중요한 건 오늘 경기다.
창원 선수들의 눈빛을 보니 오늘도 쉽지 않을 것 같다.
시즌 시작 후 줄곧 팔콘스와 엎치락뒤치락하며 5위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 창원.
10개 구단 단일리그제로 진행되는 한국야구는 전체 팀 중 절반이 가을야구에 진출할 수 있다.
이를 좋게 해석하면 어중간한 전력으로도 우승을 노려볼 수 있다는 거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성적이 좀 애매한 팀들조차 시즌이 끝날 때까지 전력질주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즉, 재수 없으면 한 시즌 내내 희망고문만 당할 수도 있다는 거다.
어떻게든 우리 팀을 잡고 4위 자리를 굳히려는 창원은 에이스 루카스 베넷의 등판일을 앞당기면서까지 필살의 의지를 보이고 있다.
아무리 지난 경기에서 5이닝밖에 안 던졌다고 해도, 글쎄…….
어쩌면 오늘 경기는 타격전이 될지도 모르겠다.
“딱 봐라. 오늘 내가 쟤 꼭 울려버릴 거다.”
“말로만 그러지 말고 어떻게든 1루로 나가봐. 내가 무조건 스코어링 포지션까지 보내줄 테니까.”
“좋아. 내가 진짜 야구가 뭔지 보여주지.”
이제는 그 자리가 너무나 익숙해진 우리 팀의 1, 2번 타자들, 서형주와 안치욱이 전의를 불태우며 타격을 준비했다.
경기 전 인터뷰에서 창원의 루카스 저놈이 뭔가 입을 턴 모양이다. 뭐라더라, 워리어스의 타선이 지나치게 젊어서 상대하기 편할 거라다고 했다나.
틀린 말도 아니지, 뭐. 겉으로 보기에는 1, 2, 3번이 전부 신인인데.
하지만 저 두 놈은 그걸 자신들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인 듯하다.
애초에 워리어스 팬이었던 데다가 이 팀에서 데뷔한 안치욱은 그렇다 치고, 서형주 저놈은 이 팀 유니폼을 입은 지 얼마나 됐다고.
“플레이!”
창원 랩터스의 에이스 루카스 베넷.
오늘 선발로 나선 우리 팀의 에이스 라이언과 상당히 흡사한 타입의 우완 정통파 투수.
묵직한 포심과 그럭저럭 괜찮은 변화구, 안정적인 제구력, 무엇보다 쉽게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멘탈을 가진 용병.
사실 서형주나 안치욱 같은 신인들에게는 160㎞를 던지는 투수보다 저렇게 자기 중심을 잡을 줄 아는 투수가 오히려 상대하기 어려운 법이다.
그의 말처럼 저 두 놈이 애송이인 건 사실이니까.
“스트라이크!”
바깥쪽에서 존 안쪽으로 파고 들어오는 꽤 그럴듯한 커브를 서형주가 그냥 바라만 보았다.
사실 이 팀에서 내가 생각을 제일 파악하기 힘든 게 바로 저 서형주 놈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릇의 전체 크기는 시간이 흐른 후에야 확인할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서형주라는 야구 선수는 천재 과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조차도 저런 놈이 순간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판단을 할지 헷갈릴 때가 있다.
툭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쉣!”
“1루! 1루!”
외부에서 보는 서형주는 리드오프치고는 상당히 강하고 과감한 스윙을 즐기는 타자다.
그렇기에 노 볼 원 스트라이크 상황에서 창원의 내야수들은 반 걸음 정도 뒤쪽으로 중심을 둔 채 서형주의 강한 타구에 대비하고 있었다.
겨우 반 보다. 하지만 서형주의 눈은 그 작은 차이를 놓치지 않고, 곧바로 3루 베이스 라인을 타고 가는 기습번트를 시도했다.
“세이프!”
3루수가 달려가기에는 조금 늦은 상황, 허를 찔린 투수가 살짝 멈칫하는 사이 서형주가 여유 있게 1루로 들어갔다.
확실히 발 빠른 타자의 장점이란 저런 거다. 서형주가 없던 시절 이 팀의 리드오프를 맡았던 이창모 선배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플레이의 다양성.
“안치욱!”
1루에 나간 서형주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안치욱의 이름을 부른 후 크게 스윙을 하는 시늉을 했다. 그걸 본 안치욱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말이다.
신인 콤비의 변칙적 플레이, 이어지는 도발.
이게 사실 투수 입장에서는 굉장히 열받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이곳 대기타석에서도 보인다. 루카스의 혈압이 실시간으로 상승하는 모습이.
저놈처럼 단단한 멘탈을 가진 투수를 내 앞 1, 2번 타자들이 저렇게 뒤흔들어주는 건 나로서는 무조건 환영할 일이다.
대기타석에 선 나는 흥미로운 시선으로 루카스와 안치욱의 대결을 지켜보았다.
“볼!”
웬만해서는 흔들리지 않는다는 루카스의 멘탈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안치욱의 몸 쪽 높은 곳으로 위협구가 날아 들어왔다.
잘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미국에서도 선후배, 보다 정확히 말하면 베테랑과 루키 사이의 엄격한 규율 같은 게 존재한다.
쉽게 말해 함부로 날뛰는 루키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는 베테랑들이 많다는 뜻이다.
예외가 있다면 나 정도다. 실력과 몸값, 거기에 양키들을 한 방에 침몰시킬 수 있는 펀치를 갖춘, 그런…….
음.
어쨌든 1구 위협구를 던진 루카스는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투구를 이어갔다.
“볼.”
이번에는 바깥쪽으로 흘러 나가는 슬라이더를 안치욱이 잘 골라냈다.
사실 잘 골라냈다기보다는 벤치의 사인 덕분이다. 서형주가 뛰려는 의사를 보이자 타자에게 웨이팅 사인이 내려진 것이다.
기습번트로 나간 루키가 계속 도루를 할 듯 말 듯하며 투수의 신경을 건드린다.
그리고 타석에서는 커다란 덩치와 어울리지 않는 정교한 타격이 가능한 좌타자가 진루타를 치기 위해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다.
한숨을 크게 쉬는 것으로 간신히 평상심을 회복한 투수가 자신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좌타자 바깥쪽 포심을 던졌다.
따아악!
하지만 이미 안치욱은 그 코스의 공을 예상하고 있었다.
딱 소리와 함께 서형주가 엄청난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2루를 돌아 3루까지 도달했다.
“하압!”
깨끗한 우전 안타.
1루에 도착한 안치욱이 크게 기합을 넣는 소리에 투수의 얼굴이 더욱 시뻘개진다.
재미있다.
저 어리고 재능 넘치는 애송이들의 성장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게 이렇게 흥미로울 줄이야.
전통적인 테이블세터와는 조금 다르지만, 이제는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우리 팀의 1, 2번이다.
부웅
자, 풋내기들의 재롱은 이제 충분히 보았으니 이제 베테랑의 품격을 보여줄 차례다.
[3번 타자 유격수 한수혁]“우와와아!”
내 이름 석자에 자지러질 듯 고함을 질러 대는 원정석 팬들의 목소리.
기대 섞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동료들의 시선.
그것을 충분히 즐기며 타석에 들어선다.
부웅
배트를 한 번 휘둘러본다.
방금 전까지 울그락붉그락하던 투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간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맺힌다.
한 번 더.
부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