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90)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89화(90/412)
#89. 그랜드 슬램
투수의 기량을 결정하는 요소는 여러 가지가 있다.
포심의 구속과 회전수, 변화구의 각 등을 모두 포함하는 구위, 원하는 곳에 던질 수 있는 제구력, 그리고 주변 상황과 상관없이 자신의 투구를 가능케 하는 멘탈.
이 셋의 공통점은 매 경기마다, 혹은 경기 중에도 언제든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투수란 그만큼 예민한 생명체이니까.
그럼 이 중에서 한번 흔들릴 경우 가장 회복하기 힘든 게 뭘까?
구위? 제구력? 멘탈?
당연히 멘탈이다.
구위나 제구력은 반복 훈련을 통해 어느 정도 보정이 가능하지만 타고난 멘탈을 단련한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흔들리기 시작하면 대미지가 크다. 그리고 회복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한번 터진 마무리 투수는 계속 터진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닌 거다.
어쨌든.
내 앞 1번과 2번 타자의 연속안타, 그리고 이어진 도발에 당한 상대 투수가 새빨개진 얼굴로 나를 노려본다.
저 마음이 뭔지 알 것 같다.
야구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어디 술집에 틀어박혀 실컷 취해버리고 싶겠지.
내가 왜 이 좆 같은 야구를 직업으로 선택했을까 자책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헛된 희망일 뿐이다.
이 그라운드에 일단 발을 디딘 이상, 감독이 빼주지 않는 한 어디에도 도망갈 곳 같은 건 없다.
“플레이!”
1회부터 시작된 무사 1, 3루 위기. 거기에 짧은 외야 플라이만으로도 홈으로 뛰어들 수 있는 발 빠른 3루 주자.
투수로서는 정말 상상하기도 싫은 최악의 상황이다.
이럴 때는 굳이 승부를 서두를 필요가 없다.
당장 안타를 때려 1점을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팀에서 휴식일까지 당기며 등판시킨 에이스를 완전히 털어버릴 수 있는 찬스이니까.
가을야구에서 대전이 아닌 창원을 만나게 될 수도 있다.
이 기회에 확실히 밟아 놓는다. 창원이라는 팀도, 그리고 그 팀의 에이스도.
“볼.”
몸 깊숙한 곳으로 들어오다가 존 안으로 휙 꺾이는 파워 커브.
좋은 공이다. 멘탈이 흔들린 상태에서도 이 정도 공을 던질 수 있다니.
역시 이 기회에 확실히 부숴 버려야겠다.
“스윙!”
바깥쪽으로 흘러 나가는 슬라이더에 배트가 따라 나가다 멈췄지만 1루심이 스윙 판정을 내렸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사실 KBO에서 뛰게 된 후 내가 가장 역체감을 한 건 좁고 낡은 라커룸 환경이나 열악한 선수단 지원 같은 게 아니었다.
심판들의 수준이 가장 내 신경을 건드린다.
이해는 간다. 아마추어부터 시작해서 마이너, 메이저까지 엄청난 규모의 인프라를 가진 미국의 심판들과, 좁아 터진 이 나라의 심판 수준을 단순 비교하는 건 무리일 테니까.
하지만 정도가 있지 않은가? 방금 그게 스윙이라고?
도리도리
내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자 1루 베이스에 붙어 있던 안치욱이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좌우로 젓는다.
뭐야, 나 지금 저 녀석한테 훈계를 들은 건가?
흐흐.
그래, 저 애송이의 말처럼 야구나 하자.
뜻하지 않게 볼 카운트 하나를 이득 본 상대 투수의 표정이 약간 밝아졌다.
루카스 베넷이라는 투수가 매년 100만 달러가 넘는 연봉을 받으며 창원의 에이스로 활약하고 있는 비결이 바로 저거다. 흔들린 멘탈을 부여잡고 꾸역꾸역 자신의 투구를 할 수 있다는 점.
하지만 그걸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지.
따아악!
“파울!”
몸 쪽 낮은 코스로 들어오는 포심을 있는 힘껏 잡아당겼는데 아쉽게도 좌측 폴대를 살짝 넘어가는 파울 홈런이 되어버렸다.
투수의 얼굴이 다시 하얗게 변했다.
원정 응원석에서 갑자기 큰 함성이 들려왔다. 눈을 돌려보니 민예린이 안전망에 딱 붙은 채 관중들의 목소리를 하나로 모으고 있었다.
“우리가 한수혁 선수에게 기운을 줘야 합니다! 여러분 아시겠죠?”
“네!”
“좋아요! 그럼 다 같이 날려버려!”
“날려버려!”
“다음은 부숴버려!”
“부숴버려!”
“오케이, 죽여버려!”
“…죽여버려.”
음.
죽인다는 걸 너무 쉽게 입에 담는 여자다.
진짜 저러고도 연예계 생활을 계속 할 수는 있는 걸까?
“플레이!”
볼 카운트 원 볼 투 스트라이크.
일반적으로 여기서는 어떤 투수든 볼 한두 개 정도는 게 정답일 것이다.
하지만 루카스 베넷이라는 투수의 특징 중 하나가 볼 카운트와 상관없이 적극적인 승부를 한다는 거다. 방금 전 내게 던졌던 포심처럼.
어쩌면 저런 성격 때문에 빅리그에서는 성공을 못 한 것일 수도 있다. 힘으로 억누를 수 있는 한국타자들과는 달리 미국에서는 빠른 승부가 곧 장타로 이어졌을 테니까.
그렇다면 한번 노려본다. 완전히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존 안에 들어오면 일단 친다.
타격 존을 조금 넓게 잡고, 그립의 위치를 살짝 올려 큰 것보다는 정확한 타격을 준비하고, 몸쪽 공에 대비해 살짝 오픈 스탠스로.
슈웅
따아악!
바깥쪽 가장 낮은 코스로 걸쳐 들어오는 포심을 그대로 밀어쳤다.
타구가 1루수의 머리를 넘기는 순간 3루에 있던 서형주가 거의 걷다시피 홈으로 들어왔고, 1루에 있던 안치욱은 거구의 몸을 이끌고 죽어라 3루를 향해 달렸다.
선취득점, 스코어 1 대 0, 거기에 다시 무사 2, 3루.
홈플레이트를 밟은 서형주가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한번 으쓱하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에 창원 선수 몇의 표정이 확 변했지만 서형주는 곧바로 우리 덕아웃으로 뛰어들어가 조성오의 품에 안겼다.
내가 봐도 진짜 얄밉네, 저거.
저러다가 혹시나 한 대 맞을 수도 있겠다 싶지만, 음…….
장덕수 선배가 있으니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4번 타자 1루수 조성오]간신히 부여잡고 있던 루카스 베넷의 멘탈이 내 2루타와 서형주의 도발로 침몰 직전까지 내몰렸다.
“볼.”
“볼.”
“볼.”
“볼.”
시즌 초반만 해도 비슷한 공에 무조건 따라 나오던 조성오 선배의 방망이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네 개 연속 들어온 유인구를 조성오 선배가 모두 골라내는 데 성공했다.
무사 만루 찬스.
그리고 타석에 우리 팀의 새로운 용병, 월터 스미스가 들어섰다.
* * *
창원의 요청으로 잠시 경기가 중단되었다.
상대 투수코치와 통역, 그리고 포수가 마운드에 올라갔고, 타석에 들어섰던 월터 스미스가 다시 발을 빼고 뭔가 생각에 잠겼다.
노아웃 만루.
평소 습관대로라면 여기서는 무조건 풀스윙이다.
그러다가 자칫 내야수 정면으로 가는 강한 타구가 되며 병살이 나올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투구의 결을 따라 가볍게 밀어치는 그런 타격 따위는 월터의 머릿속에 없었다.
하지만 지난 시즌을 끝으로 계약이 해지되고 한동안 무직 상태로 지내며 그의 신념도 조금씩 꺾여가는 중이었다.
일본과 한국, 아시아의 야구 방식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히 공부했다.
이런 상황에서 가볍게 공을 받아쳐 외야 플라이를 만드는 걸 장려한다고 했지.
정말 그래야 하는 걸까?
순간 오늘 경기 전 한수혁이라는 애송이가 한 말이 떠올랐다.
‘월터, 찬스가 오면 망설이지 말고 자기 스윙을 해요.’
‘스미스 씨라고 불러라. 그리고 네가 뭔데 그런 말을 하는 거지?’
‘그런 사소한 건 신경 쓸 필요 없고, 아무튼 자기 스윙을 해요. 그 결과가 어쨌든 누구도 월터 탓을 하지는 않을 테니까.’
건방진 이야기였다. 나이 차이를 떠나 이미 10년 가까이 현역 생활을 한 베테랑에게 애송이가 할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내용이 너무 달콤하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야구 철학과 딱 맞아떨어지는 그런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부웅
방망이를 한번 돌려본다.
지난 시즌까지 그를 괴롭혔던 무릎과 팔꿈치의 통증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20대 초반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다. 너무 아무렇지 않아서 이상할 정도였다.
부웅
그렇게 다시 한번 방망이를 돌려보았다. 그리고 월터는 결심했다.
애송이의 말을 따르는 건 아니다. 그저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걸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빅리그에서는 간신히 2할을 넘을까 말까 한 타율이었지만, 그래도 장타력 하나만큼은 자신 있었던 월터 스미스.
“플레이!”
그가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다시 경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눈에 띌 정도로 멘탈을 회복한 상대 투수의 초구가 날아 들어왔다.
슈웅
몸 쪽 낮은 코스로 들어오는 묵직한 포심.
지난 시즌까지는 무릎 부상으로 치기 어려웠던, 하지만 통증이 사라진 지금에는 아무 부담 없이 잡아당길 수 있는 그 공을 향해 월터의 배트가 힘차게 돌았다.
그 배트와 공이 한 점에서 만났다.
따아아아아악!
– 때렸습니다! 야! 이거 큽니다! 큽니다! 넘어 가느냐! 가느냐! 홈런! 홈런입니다! 워리어스의 새 용병 월터 스미스의 타구가 관중석 최상단에 꽂혔습니다! 그가 한국야구 데뷔 타석에서 만루 홈런을 때려냅니다!
– 엄청난 힘이네요. 보세요. 월터 스미스 선수의 지난 시즌 데이터인데요. 몸쪽 낮은 코스 타율이 0.121에 불과하거든요? 그런데 방금은 그 코스의 공을 제대로 받아쳤습니다. 아, 정말 시원하네요! 마치 한수혁 선수의 타구를 연상시키는 엄청난 홈런이 터졌습니다!
– 홈런을 친 월터 스미스 선수가 3루를 돌아 홈으로 들어옵니다. 대단합니다! 아직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워리어스에 찾아온 위기를 해결해줄 그런 선수가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 하하, 이제 막 입단한 선수치고는 동료들하고 사이가 좋아 보이네요. 먼저 홈으로 들어왔던 동료들이 정말 반갑게 맞아주는군요.
– 한수혁 선수가 등 뒤에서 거의 껴안다시피 매달려 가네요? 저 선수가 저렇게 기뻐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 * *
자신이 때려낸 타구가 좌측 외야 관중석 최상단에 박히는 순간, 월터는 온몸을 관통하는 전율을 느꼈다.
얼떨떨하기만 하다.
옆구리와 무릎의 통증이 거의 느껴지지 않은 덕에 몸쪽 낮은 공을 제대로 잡아당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타구가 만루 홈런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우와와아아!”
타구가 뻗어 나가는 순간 3루 원정석에서 엄청난 함성이 터졌다.
그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월터가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홈런을 친 후 타석에 오래 머무는 건 상대 투수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언제나 그랬듯 가볍게 배트를 옆에 내려놓고, 천천히, 하지만 투수를 자극하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그라운드를 돌았다.
“워어어어얼터어어어어!”
3루 베이스를 도는데 갑자기 엄청난 크기의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굉장한 미모를 가진 한 여자가 안전망에 들러붙어 자신의 이름을 멋대로 불러제끼고 있었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좋았다.
이런 중요한 순간 홈런을 때려낸 게, 그리고 이렇게 엄청난 관중들의 환호성을 들은 게 대체 얼마 만인가?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별명인 월트 디즈니라는 이름만 안 나오면 그걸로 충분하다.
“잘했어! 잘했어요!”
“한국 무대 첫 홈런, 축하해요!”
자신의 홈런으로 먼저 홈을 밟은 3루수와 1루수가 차례로 다가와 축하 인사를 건넨다.
그들을 향해 근엄한 표정으로 고맙다고 말하려던 순간.
턱
“헉!”
무언가 강력한 힘이 월터의 어깨를 덥석 낚아챘다.
돌아보니 그놈이다. 계속 날 월터라고 부르던 그놈이 멋대로 어깨동무를 한 채 말한다.
“축하해! 축하해요, 월터 아저씨!”
“스미스 씨라고 부르… 젠장, 그래 네 멋대로 해라.”
끈질긴 놈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밉지가 않다.
평소 예의가 없는 인간을 가장 혐오하던 월터다.
그런데 오늘 처음 보는 낯선 나라의 1년 차 애송이가 멋대로 이름을 부르며 친한 척을 하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방금, 녀석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뭔가를 깨달았다.
이상하게 이놈이 낯설지가 않다.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는 것 같다.
그럴 리가 없는데.
작년까지 이 나라의 고교팀에서 뛴 놈을 내가 만났을 리가 없는데.
“월터, 나이스!”
“굿 잡!”
“최고야, 그대로만 하자고!”
덕아웃으로 들어오니 한국어와 영어, 스페인어가 뒤섞인 축하인사가 마구 날아온다.
아직 한국어는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지만 저들의 표정만 봐도 자신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좋은 팀이군.’
월터가 저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난 시즌 팀에서 쫓겨난 후부터 시작되었던 짙은 허무감과 외로움이 조금씩 옅어지는 것을 느낀다.
자기도 모르게 흐뭇한 표정이 된 월터가 다시 시선을 한수혁에게로 돌렸다.
이상하다.
정말 어디에선가 본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