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91)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90화(91/412)
#90. 레전드
길고 길었던 1회초가 끝났다.
5번 월터 스미스에게 만루 홈런을 허용한 루카스 베넷은 이어진 6번 이창모 선배에게 다시 안타를 맞았지만 7번과 8번, 9번, 세 타자를 범타로 처리하며 간신히 이닝을 마무리했다.
이제 고작 1회가 끝났건만 투구 수는 벌써 36개에 5실점, 게다가 휴식일을 하루 앞당긴 등판.
창원 감독이 제정신인 이상 오늘 저 투수는 5회를 넘기지 못할 것이다.
‘조금 깊숙이.’
끄덕
서형주가 팀에 합류한 후 리드오프라는 부담감에서 해방된 이창모 선배는 이제 수비에 더욱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다.
이대준 감독은 덕아웃에서 수비 시프트 사인을 잘 내지 않는다.
아직 경험이 부족한 장덕수 선배를 위해 배터리에게 사인을 내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수비의 경우 그라운드에 서 있는 선수들끼리 자발적으로 사인을 맞춰 움직이는 게 더 효율적이라는 주의다.
이에 얼마 전부터 내야에서는 이창모 선배가 적극적으로 수비 위치를 지휘하고 있다.
내가 나서도 되지만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이창모 선배의 생각과 내 생각이 거의 같다는 건 충분히 확인했으니까.
그의 사인에 따라 내야수들이 반 보, 크게는 한 보 정도 뒤로 물러섰다.
따아악!
첫 번째 공을 골라낸 창원의 1번 타자가 2구를 강하게 잡아당겼다.
1루수와 2루수 사이를 향해 날아가는 빠른 타구.
터억
하지만 그 총알 같은 타구를 이창모 선배가 건져냈다.
올 시즌 초반 리드오프로 나서면서도 도루가 고작 1개밖에 되지 않는다는 입증되었듯이 그의 발은 예전의 기민함을 잃은 지 오래다.
하지만 수비에서만큼은 이야기가 다르다. 느려진 발을 경험과 예측으로 커버하고 있다.
“아웃!”
총알 같은 타구를 건져낸 후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며 1루로 가볍게 송구.
까다로운 창원의 1번 타자를 약간의 수비 시프트와 예측 플레이로 잡아낸 이창모 선배가 담담한 표정으로 다시 수비 위치로 돌아갔다.
빅리그에서 실패를 맛보고 패잔병처럼 돌아온 이창모, 그런 이창모를 워리어스가 잡은 걸 비웃은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하면 저 선수가 없었다면 지금 워리어스가 이만큼 돌아갔을까 의문이 든다.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팀 전체를 부드럽게 돌아가게 만들어주는 윤활유 같은 존재.
그것이 바로 이창모라는 야구 선수의 정체성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1루수, 2루수 제자리, 유격수와 3루수는 2루쪽으로.’
다시 한번 이창모 선배가 수비 시프트 사인을 냈다. 이번에도 역시 덕아웃이 아닌 스스로 내린 판단이다.
타구의 90% 이상이 우측으로 가는, 극단적으로 잡아당기기를 고집하는 창원의 2번 타자 차례다.
3루 쪽을 거의 비워두다시피 했지만 이대준 감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배터리 코치를 통해 포수와 투수에게 몸쪽 승부를 지시했을 뿐이다.
따아악!
1구 볼, 2구 스트라이크, 3구 파울, 그리고 4구 타격.
라이언이 던진 몸쪽 슬라이더가 제대로 배트에 맞았다. 평소 같았다면 무조건 2루수 옆으로 빠져나갔을 그런 타구.
하지만 이미 그 자리에서 대기 중이던 이창모 선배가 가볍게 공을 걷어올려 1루로 송구했다.
“아웃!”
시프트가 걸린 걸 알면서도 잡아당길 수밖에 없었던 타자가 고개를 푹 떨군 채 덕아웃으로 돌아간다.
“우우.”
“그 따위로밖에 못 하나?”
“내가 이 꼴 보려고 팀 갈아탄 줄 알어? 이 멍청이들아!”
부산이 만년 꼴찌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이 창원에 새로 창단된 야구단 창원 랩터스.
덕분에 부산 팬들 중 상당수가 창원으로 응원팀을 바꿨다.
이에 보답이라도 하듯 창원 랩터스는 창단 9년 만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고 말이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지금 10개 구단 중에서 21세기, 그러니까 2000년 이후 27년 동안 한 번도 우승을 하지 못한 팀이 세 팀이나 되는 걸 감안하면 대단한 성과다.
어쨌든 안타가 될 뻔했던 두 개의 타구가 모두 수비 시프트에 걸려 아웃이 되고 말았다.
창원 야구장이 야유로 뒤덮인 가운데 이번 시즌 국내에서 뛰는 용병 중 가장 몸값이 비싼 창원의 3번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그리고 라이언이 던진 초구를 마음껏 잡아당겼다.
따아아아악!
제대로 배트에 걸린 타구가 좌중간을 향해 날아간다.
“어어어……!”
그 공을 때려낸 타자는 홈런이라고 생각했는지 타석에 그대로 서서 자신의 타구를 감상했고, 관중들의 입에서 이제 막 함성이 쏟아져 나오려던 순간.
타악
턱
한 발로 외야 펜스를 박차고 점프한 중견수 서형주의 글러브 끝에 그 타구가 잡혀버렸다.
“아아!”
“뭐야! 시발!”
“그걸 왜 잡어? 어?”
“이거 반칙 아냐? 미친!”
좌중간 외야석을 가득 메우고 있던 창원 팬들이 서형주를 향해 엄청난 야유를 쏟아냈다. 하지만 이 겁 없는 신인은 그 관중들을 향해 방금 잡은 야구공을 던져주기까지 했다.
“뭐야! 장난해!”
“필요 없다!”
“아주라! 아주라!”
“저건 또 먼데? 여기가 부산인 줄 아나? 저걸 왜 아를 주는데?”
“버려! 재수 없는 공 버리라고!”
자신이 만들어낸 그 혼란스러운 풍경이 마음에 드는지 서형주가 씨익 웃으며 덕아웃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내 입에서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저거 진짜 제대로 또라이네.”
* * *
그렇게 1회말 창원의 공격이 무산된 후 다시 돌아온 2회초 워리어스의 공격.
타자가 일순하며 다시 1번 타자 서형주가 타석에 들어섰고 대기 타석에는 2번 안치욱과 3번 한수혁이 자리를 잡았다.
덕아웃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월터 스미스가 저도 모르게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거 듣던 것과 꽤 다르군. 왜 이 팀이 4위밖에 못 하고 있는 거지?’
입단 전 에이전트로부터 전해 들은 워리어스라는 팀은 한때 명문이었지만 지금은 몰락한, 다른 팀에 비해 턱없이 얇은 선수단 뎁스와 스타 플레이어의 부재에 시달리는 그런 팀이었다.
하지만 실제 두 눈으로 본 워리어스라는 팀은 전혀 달랐다.
한때 볼티모어의 주전 2루수였다는 LEE, 이름이 너무 어려워 아직은 성으로밖에 부를 수 없는 그 선수의 내야 수비 시프트 지휘는 꽤나 인상적이었다.
덕아웃의 지시 없이 선수들이 그 자리에서 호흡을 맞추는 모습은 빅리그 경험이 있는 월터에게도 꽤나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인상적인 건 그 2루수뿐만이 아니었다.
“볼.”
첫 타석 안타를 치고 나가 대량 득점의 물꼬를 텄던 1년 차 애송이, 1회말 수비에서는 펜스를 타고 오르는 플레이로 홈런 타구를 건져 올린 그 애송이가 또다시 볼넷을 골라 1루로 진출했다.
그렇게 베이스로 나간 애송이가 또다시 기민하게 움직이며 투수의 신경을 건드린다.
월터는 그 모습에서 누군가를 떠올렸다.
‘저건 마치 케니 로프턴을 보는 것 같군.’
시간이 흐르며 선수들의 실력과 기술은 계속 발전해 왔지만 그 본질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월터다.
그런 의미에서 월터는 현역 선수들보다는 그보다 한참 전 빅리그에 큰 발자취를 남긴 선수들을 더욱 존경하고 있었다.
1회와 2회 워리어스의 중견수가 보여준 플레이.
크지 않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덩치 큰 동료들에 밀리지 않는 배트 스피드, 베이스에 나가기만 하면 투수의 신경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리는 주루 플레이, 거기에 빠른 발을 이용한 엄청난 외야 수비력까지.
그 모습에서 월터는 예전 1990년대 알버트 벨, 매니 라미레스, 짐 토미 같은 대스타들과 함께 클리블랜드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케니 로프턴을 떠올렸다.
빅리거치고는 왜소하다고 봐야 할 체구였지만 단단하고 빠른 플레이로 한 시대를 풍미한 중견수, 리키 핸더슨의 뒤를 이어 빅리그 도루왕을 밥 먹듯이 차지했던 대도.
고작 KBO, 거기서도 이제 데뷔 몇 달밖에 안 된 신인을 그와 비교하는 건 너무 실례라 생각되었지만, 왠지 자꾸만 그가 연상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안치욱! 안치욱! 안치욱!”
그렇게 월터에게 케니 로프턴의 향수를 느끼게 해준 서형주가 1루에 자리를 잡고, 이어 타석에 2번 안치욱이 들어섰다.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에서 워리어스의 지난 경기 영상을 계속 돌려보았다.
거기서 월터가 한수혁 다음으로 주목했던 게 바로 저 선수다.
서형주와 마찬가지로 올해 데뷔한 신인 3루수.
거대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부드럽고 깨끗한 스윙.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강한 라이너성 타구.
아직은 헛점투성이이긴 하지만 저 녀석의 타격 매커니즘은 월터가 좋아하는 누군가를 쏙 빼닮았다.
1982년부터 2001년까지 오직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한 팀에서만 뛴 프랜차이즈이자 1994년 0.394의 타율로 테드 윌리엄스 이후 첫 4할 타자 탄생의 기대를 품게 만들었던 교타자.
데뷔 초기 빠른 발을 가진 호타준족이었지만 타구에 힘을 싣기 위해 몸을 불려 오직 안타 생산에 모든 걸 걸었던 토니 그윈.
물론 지금 당장 저 신인을 토니 그윈에 비교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짓이다. 그저 기본적인 플레이 자체가 그를 연상시킬 뿐 순수 기술로 치면 아직 그의 발 밑에도 미치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고작해야 한국 리그, 그것도 지난 시즌까지 꼴찌였던 팀의 1, 2번이라 생각하기에 서형주와 안치욱이 준 인상이 너무나 강렬했다.
‘내가 미쳤나 보군. 저런 애송이들을 보면서 누굴 떠올리는 거야.’
따악!
월터가 머릿속에 떠오른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떨쳐버리던 순간, 강한 타격음이 경기장 안에 울려 퍼졌다.
1회와 거의 비슷한 코스로 날아가는 우익수 앞 안타.
수비 시프트가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한가운데를 힘으로 뚫어버린 강한 타구가 우익수 옆으로 굴러갔다. 그 사이 1루에 있던 서형주는 3루까지.
무사 1, 3루.
순간 창원 야구장이 침묵에 잠겼다.
대기 타석에 서 있던 한 선수가 천천히 배터 박스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것이다.
한수혁.
시애틀의 350만 달러 제안을 걷어차고 한국에 남은, 아직 7월도 되지 않았건만 벌써 28개의 홈런과 50개의 타점을 기록하며 리그를 포격 중인 슈퍼 루키.
타격 준비를 위해 덕아웃을 나와 대기타석으로 가던 월터는 그 루키의 뒷모습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봐야만 했다.
상대 투수가 누구건 무조건 박살을 내겠다는 의지가 철철 넘치는 한수혁의 뒷모습.
그런 한수혁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투기에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린 상대팀의 투수.
열광하는 원정팬들, 그리고 침묵에 잠긴 홈팀 응원석.
‘맙소사…….’
고작 1년 차 신인이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니.
서형주와 안치욱, 두 신인과 빅리그 레전드들을 비교한 건 그저 스타일이 비슷해서였다. 먼 훗날에 저 애송이들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당장은 비교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하지만 한수혁은 뭔가 달랐다.
10년 동안 빅리그를 드나들며 수많은 슈퍼스타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뛰었기에 알 수 있다.
저기 저 녀석은 이미 그 레전드들과 경쟁, 아니, 넘어설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걸.
순간 월터는 자신도 모르게 한수혁과 비교 대상에 올렸던 빅리그의 전설적인 유격수들, 그러니까 데릭 지터라든지 노마 가르시아파라, 배리 라킨 같은 선수들의 이름을 지워버렸다.
저기 저 녀석은 그냥 한수혁이다. 누구를 닮은 게 아니라 그냥 워리어스의 한수혁일 뿐이다.
‘104마일을 던진다고 했지?’
심지어 저 괴물 유격수는 마운드에서 104마일의 포심을 던진 적이 있다고 한다. 투구를 위한 몸이 만들어지는 대로 마운드에 설 거라는 말도 들었다.
‘어쩌면…….’
순간 월터는 자신이 포수 마스크를 쓰고 저 루키의 공을 받는 상상을 해보았다.
물론 자신은 이제 포수가 아닌 외야수이고, 이 팀에는 아주 좋은 주전포수가 있다고 들었지만.
어쩌면 그걸 해야만 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
야구란 언제나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스포츠이니까.
그렇게 월터가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있던 순간.
따아아아아악!
“우와아아아!”
거대한 타격음이 야구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몸쪽 높은 곳으로 날아 들어온 포심을 한수혁이 그대로 후려 갈겨버렸다.
맞는 순간 홈런임을 직감할 수 있을 정도로 큰 타구에 투수는 그대로 마운드 위에 무너졌고, 외야수들 역시 수비를 포기하고 멍하니 타구를 바라보았다.
– 한수혁 선수가 마침내! 마침내! 넘어갔습니다! 29호 홈런! 6월이 미처 끝나기도 전 한수혁 선수가 스물아홉 번째 홈런을 기록했습니다!
– 정말 대단하네요! 자, 이제는 정말 진지하게 신기록에 대해 이야기해 볼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도대체 10년 넘게 50홈런 타자가 안 나온다는 게 말이 됩니까? 전 국민이 나서서 한수혁 선수를 보호…….
빅리그에서도 보기 힘든 엄청난 홈런을 날린 루키가 천천히 1루를 향해 출발했다.
상대팀 선수들의 적개심과 질시, 관중들의 응원과 함성, 우리 팀 선수들의 환호와 감동.
수많은 감정들이 휘몰아치는 그라운드 안.
정작 그런 풍경을 만들어낸 한수혁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베이스를 돌고 있었다.
그런 한수혁에게서 월터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