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92)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91화(92/412)
#91. 롤모델
내가 어깨 부상으로 투수를 완전 포기한 후, 그러니까 클리블랜드의 3번 타자로 자리를 잡아가던 시절의 이야기다.
시즌 MVP가 거의 확정되어 가던 나에게 어떤 기자가 물었다.
롤모델로 삼은 선수가 혹시 있냐고.
글쎄, 그 기자는 내 입에서 무슨 얘기가 나오기를 기대했던 걸까.
현대 야구에서 투타 겸업이 가능하다는 걸 최초로 증명한 오타니 쇼헤이?
아니면 뉴욕 양키스의 영원한 캡틴 데릭 지터, 수비력으로만 치면 역대 최고라 인정받았던 아지 스미스, 2,632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세웠던 칼 립켄 주니어 같은 전설적인 유격수들?
내 대답은 ‘그딴 건 생각해 본 적이 없다’였다.
이제 와서 굳이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는 건 오늘 수훈선수 인터뷰에서 내게 똑같은 질문이 날아왔기 때문이다.
“한수혁 선수, 오늘 홈런 1개 포함 5타점으로 12 대 2, 팀의 대승을 이끌며 수훈선수로 선정되셨습니다. 소감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사실 저보다는 한국 무대 데뷔 첫 타석에서 그랜드슬램을 때려낸 월터 스미스, 그리고 6이닝 동안 무실점을 기록한 라이언 스타크, 두 명의 용병에게 수훈선수가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둘을 대신해 제가 이 자리에 섰다고 생각하겠습니다.”
한수혁이 경기 후 수훈선수 인터뷰를 한 게 한두 번이 아니건만 오늘따라 유난히 겸손이 철철 흘러 넘치는 답변이었다.
저도 모르게 흐뭇한 표정이 되어버린 리포터가 다음 질문을 던졌다.
“오늘 홈런으로 6월 말까지 스물아홉 개의 홈런을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조금 이르긴 하지만 신기록 도전에 대한 팬들의 응원도 쏟아지고 있고요. 음, 아직까지 이 질문은 누구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요. 혹시 롤모델로 삼고 있는 선수가 있으신지요?”
한국, 혹은 미국에서 홈런 신기록을 달성했던 레전드들의 이름이 나오길 기대하는 듯했다.
하지만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롤모델 같은 건 없다는 대답을 하려던 순간.
저 멀리 서 있던 조성오 선배, 그리고 이만식 선배와 눈이 마주쳤다.
10년 넘게 이 팀을 지켜온 투타의 베테랑, 그리고 경기가 끝난 후에는 한 가정을 지키는 가장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평범한 남자들.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저런 삶을 살 수 있을까?
좋아하는 일에 평생을 바치고, 그리고 누군가와 가정을 이루는 그런 평범한 인생이 가능할까?
저도 모르게 입에서 대답이 흘러나왔다.
“저희 팀 조성오 선배님, 그리고 이만식 선배님처럼 되고 싶습니다.”
“네?”
“두 분처럼 되는 게 제 목표입니다.”
“아, 네, 무슨 뜻인지 이해했습니다. 역시 팀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신 한수혁 선수군요. 그럼 올시즌 반드시 홈런 신기록을 경신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오늘 인터뷰 정말 잘 들었습니다. 앞으로도 야구팬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살짝 당황했던 것 같은 리포터의 표정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해라… 글쎄, 정말 내 대답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질문을 던진 리포터뿐만 아니라 주변 모든 사람들이 내 대답을 선배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정말인데.
“야, 수혁아. 고맙다. 내가 날 그렇게 생각하는 줄은 몰랐네.”
“흐흐, 형님, 이놈이 은근 기특한 구석이 있어요.”
“그러게, 아무튼 말이라도 진짜 고맙다.”
당사자인 둘조차 이런 식이니 뭐.
“존경합니다. 선배님들, 아니, 형님들.”
* * *
엊그제 시즌이 시작된 것 같건만, 6월 일정이 모두 마감되었다.
현재까지 워리어스는 38승 3무 33패로 매지션스에 한 게임 반 차 뒤진 4위를 기록하고 있다. 우리 바로 뒤에는 여전히 팔콘스가 쫓아오고 있고 말이다.
1위 인천과 2위 수원을 제외한 중상위권 다툼이 치열하다.
그 와중에 내가 기록한 성적은 타율 0.424, 출루율 0.527, 장타율 0.977, OPS 1.504, 홈런 29개, 55타점, 14도루.
딱히 특정 기록을 노리고 플레이를 한 건 아니다.
초반에는 홈런 타자가 부족한 팀 사정을 고려해 최대한 장타를 뽑아내려 했고, 조성오 선배와 장덕수 선배가 각성한 후에는 상황에 맞는 배팅을 하려 애썼다.
도루 역시 기록을 의식하고 한 건 아니다. 그저 날 피해가려는 투수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뛰었을 뿐이다.
음.
그런데 막상 이렇게 기록이 쌓이고 나니 살짝 욕심이 들기는 한다.
특히 24년째 깨지지 않고 있다는 홈런 신기록은 더더욱.
문제는 홈런 신기록의 경우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주변 상황이 도와주지 않으면 달성이 어렵다는 거다.
투수들이 날 피해 다니고, 내가 어쩔 수 없이 장타를 치기 어려운 코스의 공을 건드리기 시작하면서 홈런을 추가하는 속도가 확 줄어들었다는 게 바로 그 증거다.
그나마 다행인 건 조성오 선배와 장덕수 선배에 이어 또 하나의 장타자 월터가 팀에 합류했다는 거다.
이 세 명의 선수가 내 뒤에서 어떤 활약을 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내 홈런 페이스가 달라질 것이다.
어쨌든 이제 곧 7월이 시작된다.
원래대로라면 7월 둘째 주 정도에 올스타 브레이크가 잡혔겠지만 올해는 일정이 조금 다르다.
WBC 때문이다.
올해 전반기 KBO 일정은 이렇게 진행된다.
7월 말까지 정규 시즌 경기가 계속 진행된 후 8월 1일 하루 휴식일을 갖고 다음 날인 2일 올스타전이 진행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20일간의 WBC 브레이크.
대표팀에 선발되지 않은 선수들은 그 20일 동안 휴식을 취할 수 있지만, 나를 포함해 명단에 이름을 올린 선수들은 올스타전이 끝난 다음 날 곧바로 미국행 비행기에 탑승해야 한다.
8월 7일부터 19일까지 진행되는 WBC에 참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미국팀을 제외한 나머지 팀들에게 상당히 불리한 일정이다.
적어도 경기 시작 10일, 아니, 보름 정도 전에는 현지에 도착해 적응 훈련을 시작해야 하는데, 그 기간이 고작 5일에 불과하다니.
모르겠다. 그 짧은 적응 기간이 우리 팀에게 어떤 식으로 작용될지 말이다.
음.
그러고 보니 대표팀 승선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 같다.
이번 WBC 대표팀 최종 명단에 선발된 워리어스 선수는 두 명.
하나는 당연히 나,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수혁아, 내가 대표팀에서 잘할 수 있을까?”
“그럼요, 선배님.”
평생 단 한 번도 국가대표 같은 건 생각해본 적도 없다는 장덕수 선배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사실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다.
5월 대표팀 예비 엔트리에 포함된 워리어스 선수는 총 네 명.
뒤늦게 타격 포텐이 터진 1루수 조성오 선배와 포수라는 포지션 특성상 이름을 올렸던 장덕수 선배, 그리고 올 시즌 안정적인 수비를 보여준 2루수 이창모 선배, 그리고 나였다.
한때 천상진 선배와 양기철 선배의 이름이 오르내리기로 했지만 이번 WBC에 합류하기에는 그들이 뭔가를 보여준 기간이 너무 짧았다.
그리고 최종 엔트리가 발표되었다. 거기 이름을 올린 워리어스 선수는 오직 나 하나뿐이었다.
조금 아쉽지만 모두들 그 결과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WBC 대표팀 최종 엔트리 이름 올린 인천 레인저스 손영진, 손목 부상으로 대표팀 탈락.
-긴급회의 소집한 KBO, 손영진 대신 서울 워리어스 장덕수 대체 선발.
최종 엔트리가 발표된 바로 다음 날, 정대한과 함께 대표팀 1, 2번 포수로 활약해온 인천 손영진이 손목 부상을 당하며 대표팀에서 탈락했다.
다행히 최종 엔트리 교체가 가능한 시점, KBO에서는 대전 팔콘스의 베테랑 안철용과 장덕수 선배를 놓고 고민한 끝에 결국 장덕수 선배의 손을 들어주었다.
무엇보다 수비 전 분야에 있어 고른 지표를 기록한 게 큰 몫을 차지했다.
물론 주전포수 정대한이 있는 만큼 장덕수 선배의 역할은 극히 제한될 것이다. 아마도 투수들의 불펜 투구를 돕는 게 주 임무가 될 것이고, 어쩌면 중국 같은 약팀과의 경기에서 마스크를 쓰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번 대표팀 합류가 장덕수라는 선수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다만 한 가지 걱정되는 건…….
‘설마 미국에서까지 사람 패고 퇴장당하는 건 아니겠지?’
성훈이 형에게 그런 얘기를 했더니 너나 잘하세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거 나에 대한 오해가 깊은 거 같은데.
* * *
매지션스와 워리어스, 팔콘스, 랩터스 등 네 팀이 중위권에서 치열한 각축을 벌이고, 파이터즈와 재규어스, 버팔로스, 타이탄스가 하위권에서 버둥거리는 가운데 7월이 시작되었다.
그렇다고 1위 인천과 2위 수원의 마음이 마냥 편한 것만은 아니었다.
승차를 벌릴 만하면 쫓아오는 중위권 팀들을 신경 쓰느라 매 경기 전력을 투입하는 탓에 체력 분배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주전포수가 부상으로 빠진 인천에서는 포수 트레이드에 대한 이야기가 솔솔 흘러나오고 있었다. 당장 쓸 만한 매물이라면 타이탄스의 베테랑 구재현 정도일 텐데… 설마 그 아저씨가.
어쨌든 전반기가 끝나기 전 우리의 목표는 3위 자리를 탈환하고 완전하게 자리를 굳히는 것이다. 그래야만 하반기, 조금 더 높은 자리를 노려볼 수 있을 테니까.
7월의 첫주, 우리가 처음 만난 상대는 대전 팔콘스였다.
부산도 그렇고 대전도 그렇고, 이상하게 우리 팀과의 일정이 상반기에 몰려 있다.
그렇게 대전과의 3연전이 시작되었다.
지난 트레이드로 우리에게 앙심을 품은 팔콘스가 전력을 다해 덤벼들었지만 우리는 1차전과 2차전을 모두 승리했다.
그리고 이어진 3차전, 양팀의 선발투수로 나선 건 정태호와 천상진 선배였다.
한때 같은 유니폼을 입고 뛰던 동료.
대전 마운드에만 서면 무적이 되는 정태호를 상대로 우리는 스윕에 도전하게 되었다.
“자, 오늘 라인업이다. 다들 확인하고.”
“네, 감독님.”
“월터, 감기 증상이 있다더니 어때? 괜찮나?”
“다 나았습니다, 보스. 걱정시켜 드려 죄송합니다.”
“좋아, 다행이네. 그럼 이상.”
장덕수 선배의 체력 관리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나오며 용지훈 선배가 백업으로 한두 경기 포수 마스크를 썼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웬만하면 용지훈에게는 포수를 맡기지 말자는 거였다.
오늘은 장덕수 선배가 지명타자로 나서는 날, 그를 대신해 포수 마스크를 쓰게 된 건 우리 팀의 새로운 용병 월터 스미스였다.
이대준 감독이 작성한 라인업은 이랬다.
1번 타자 중견수 서형주
2번 타자 3루수 안치욱
3번 타자 유격수 한수혁
4번 타자 1루수 조성오
5번 타자 지명타자 장덕수
6번 타자 포수 월터 스미스
7번 타자 2루수 이창모
8번 타자 좌익수 김수학
9번 타자 우익수 최민석
투수 천상진
최근 몇 경기 5번 타자로 나서던 월터가 포수 마스크를 쓰며 6번으로 한 칸 뒤에 배치되었다.
대신 오늘 하루 지명타자로 뛰게 된 장덕수 선배가 5번으로 올라왔다.
커다란 덩치에 장타력, 비슷한 부분이 많지만 사실 저 두 사람은 전혀 다른 타입의 타자다.
장덕수 선배의 경우 거대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스윙으로 라이너성 타구를 많이 양산해낸다. 최근 타구발사각을 높이는 훈련을 하며 홈런 개수를 늘리려는 시도를 하고 있지만 어쨌든 기본은 그렇다.
반면 월터는 자신이 정한 존 안에 들어오는 공을 어퍼스윙으로 퍼 올려 거대한 타구를 만드는, 전형적인 슬러거에 가까운 타자다. 그렇기에 가끔은 찬스에서 삼진을 당하는 경우가 많지만, 상대 투수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킨다는 면에서는 장덕수 선배보다 오히려 낫다.
어쨌든 내 바로 뒤에 3할 타율에 10개의 홈런을 기록 중인 좌타자 조성오 선배, 그리고 뒤를 이어 두 명의 오른손 거포들이 줄줄이 들어선다는 건 상대 투수를 굉장히 압박할 것이다.
음.
그런데 하나 확인 못 한 게 있네.
“월터.”
“왜 그러지?”
“원래 스위치히터 아니었나요?”
“뭐?”
월터가 깜짝 놀란 표정이 되어 나를 바라보았다.
당연한 일이다. 그가 마이너리그에서 남몰래 스위치히터 연습을 해왔다는 걸 아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 연습 경기에서나 테스트를 했을 테니 공식 기록에도 남지 않았을 테고.
“그걸 어떻게…….”
멍한 표정이 된 월터를 그대로 두고 그라운드로 향했다. 뭐, 지금 당장 중요한 문제는 아니니까.
안 그래도 첫 포수 출장으로 복잡할 머리를 굳이 더 복잡하게 만들 필요는 없겠지.
그가 좌타석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는 나중에 확인하는 걸로 하고.
“수혁아, 오늘도 잘 부탁한다.”
“네, 선배님.”
“나한테도 형이라고 부르기로 했잖아.”
“아, 맞다, 상진이 형.”
“그래. 훨씬 듣기 좋다. 그나저나 오늘은 꽤 시원하네.”
“그러네요. 정말로.”
오늘 선발등판이 예정된 천상진 선배가 천천히 그라운드를 돌며 몸을 풀기 시작했다.
올 시즌 처음으로 1군 무대에 합류한 데다가 팀 사정상 다른 팀 4선발보다 잦은 등판 횟수, 많은 투구 이닝을 요구받고 있는 천상진 선배는 벌써부터 몸 이곳저곳에 부하가 걸리고 있었다.
그렇게 완전하지 않은 몸을 이끌고 투구를 위해 워밍업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며칠 전 있었던 제이콥과의 대화가 떠오른다.
‘제이콥, 생각보다 조금 일찍 움직여야 할 것 같아요.’
‘뭘?’
‘투타 겸업.’
‘젠장… 내가 몇 번을 말해? 아직 네 육체는 완성되지 않았어. 아니, 애초에 아직 성장도 끝나지 않은 애송이라고. 서두르지 마. 안 돼.’
‘제이콥.’
‘몇 번을 물어도 내 대답은 마찬가지야. 멀리 갈 것도 없어. 마지막으로 투타겸업에 도전했던 그 일본 친구가 어이없는 부상으로 은퇴를 하는 걸 보고도 그런 생각이 든다는 말이야?’
‘나는 다를 거예요.’
‘다르기는 뭐가 달라? 네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인간의 육체에는 한계가 있다고. 내 말대로 해. 절대 서두르지 말고 조금 더 시간…….’
‘내게는 제이콥이 있잖아요. 당신을 믿어요.’
‘하아… 이런 미친 애송이 같으니.’
‘흐흐, 가끔은 무리라는 걸 알면서도 해야 하는 순간이 있는 거예요. 그럼 제이콥, 준비 부탁합니다.’
2군에서 머물며 자신의 앞날을 걱정하던 무명의 투수가 이제는 팬들의 염원, 그리고 팀의 운명을 어깨에 짊어진 채 묵묵하게 그라운드를 돌고 있다.
그 남자의 듬직한 뒷모습에서 나는 ‘헌신’, ‘노력’, 그리고 ‘불굴’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 있었다.
얼마 후 내가 마운드에 등판하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내 뒷모습에서 어떤 단어를 떠올리게 될까?
어디선가 기분 좋은 저녁 바람이 불어온다.
그 바람에 몸을 맡기며 나는 또 오늘 경기를 위한 준비에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