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95)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94화(95/412)
#94. 2위 팀을 잡아라
꾸욱
2번 타자 안치욱의 석 점 홈런이 터지는 순간, 이대준 감독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말았다.
감독 자리에 오르기 전, 그러니까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팀에서 쫓겨나듯 은퇴한 후 해설위원과 야구 아카데미를 전전하는 동안 막연하게 머릿속으로 구상하던 타선의 완성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가 현역으로 있던 시절만 해도 상위 타선을 구성하는 타자들의 유형은 매우 정형화되어 있었다.
출루율이 높고 발이 빨라 단독 도루 능력까지 갖춘 1번 타자.
작전수행 능력이 좋고, 발도 빠른 2번 타자.
타점 생산 능력이 가장 좋은 3번 타자.
팀 내 최고의 파워히터인 4번 타자.
장타력을 갖고 있으면서 찬스에도 강한 5번 타자.
약간씩 차이는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팀들이 이런 식의 라인업 구성을 선호했다.
하지만 2010년대 중후반부터 세이버매트릭스의 개념이 보다 보편화되면서 메이저리그식 라인업 구성이 힘을 받기 시작했다.
그들이 주장하는 이론은 매우 간단했다.
팀 내 가장 강한 타자들을 앞에서부터 순서대로 배치하는 것이 점수를 많이 내는 최선의 방법이다.
이런 이론에 따르면 팀에서 가장 강력한 타자가 1번에 서야 하지만, 그 경우 1회 첫 타석에서는 무조건 그 최고 타자 앞에 주자가 없게 될 것이기에 2번이 가장 적절하다는 결론이다.
때문에 1번 타자는 기존과 동일하게 발 빠르고 출루율이 좋은 선수가 서고, 그 뒤에 주력과 상관없이 팀 내 최고 타자가 들어서고, 그 다음 타자가 3번에, 또 그 다음 타자가 4번에 서는 것이 득점을 가장 많이 올릴 수 있다는 결론이었다.
은퇴 후 혼자 최신 야구이론을 공부하며 이대준 역시 여기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지금 그가 짠 라인업이 바로 그 증거다.
초반 부진으로 아직 타율이 2할 중반대에 머물고 있지만 아마도 시즌이 끝나갈 무렵에는 3할 가까이 쳐줄 것으로 기대되는, 거기에 도루 능력과 선구안까지 갖춘 서형주를 1번으로 두었다.
원래대로라면 그 바로 뒤에 한수혁이 배치되어야 한다. 팀 내 최고 타자인 데다가 주력까지 갖고 있는 그는 최고의 2번 타자 감이다.
하지만 이대준 감독은 지금까지 몇 경기를 제외하고는 한수혁 2번 카드를 써먹지 못했다.
그 뒤를 이을 3, 4, 5 클린업 트리오가 아직 여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즌 초반에는 조성오, 안치욱, 맥스 워커가 중심 타선을 들락거렸고, 그 이후에는 맥스 워커 대신 장덕수가 클린업에 합류했다.
이후 맥스 워커가 팀을 떠나고 새로 합류한 용병 월터 스미스가 중심타선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문제는 이들 중 조성오를 제외한 나머지 타자들이 아직 확실한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대준 감독은 최근 안치욱의 달라진 모습에서 조금씩 희망을 얻고 있었다.
만약 저 녀석이 지금 저 페이스를 유지해 준다면 많은 시도를 할 수 있다.
팀 내 최고 타자 한수혁을 2번으로 올려 서형주-한수혁-조성오-월터-안치욱-장덕수로 이어지는 좌우좌우 지그재그 타선을 구상할 수도 있고, 상대 선발투수에 따라 서형주-최민석-한수혁-조성오-월터-안치욱-장덕수를 내세워 작전 야구를 시도할 수도 있다.
이 모든 구상에는 두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한수혁이 지금 성적을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둘째, 안치욱이 중심타선을 맡아줄 정도로 성장해야 한다는 것.
첫 번째 가정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는다. 다른 선수는 몰라도 한수혁을 걱정하는 것만큼 쓸데없는 짓은 없을 거다.
두 번째가 문제인데… 사실 서형주를 영입한 후 가장 걱정했던 부분이 안치욱에 대한 것이었다.
한수혁과 서형주, 그러니까 동년배 중 최고라 평가받는 두 친구의 재능 앞에서 안치욱이 좌절하지는 않을지, 그게 걱정이었다.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던 것 같다.
“야, 오늘은 네가 홈런 때렸으니까 한 턱 내라.”
“뭐래, 너도 쳤잖아, 이 새끼야.”
“난 싱글, 넌 쓰리런.”
“흠. 그건 좀 일리가 있군.”
“한수혁, 너도 이리 와서 붙어봐. 치욱이가 한 턱 낸단다.”
안치욱은 기가 죽기는커녕 동기 두 놈의 재능을 빨아들이며 스스로 성장하는 자양분으로 삼고 있었다. 시기보다는 동경, 질투보다는 경쟁이라는 감정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게 보인다.
저 세 놈이 정말 이뻐 죽겠다.
“한수혁, 서형주, 안치욱, 이쪽으로.”
“네? 아, 네, 감독님.”
“오늘 경기 끝나고 내 카드 줄 테니까 요 앞에 가서 한우 사 먹는다. 오케이?”
“네? 한우요?”
“그래, 내 개인 카드니까 돈 걱정 말고 마음껏 먹어도 돼. 흐흐, 이쁜 것들.”
“우~ 감독님, 막내들만 챙기기 있습니까?”
“자식들아, 억울하면 너희들도 나가서 홈런 하나 치고 와!”
이대준은 생각했다.
자신이 만들어가고 있는 이 팀이 과연 어떤 성적을 거두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그 결과와 상관없이 후회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그런 생각.
* * *
[대전 팔콘스 스윕한 워리어스, 다시 3위 자리 탈환] [1년 차 신인 트리오, 나란히 홈런 기록하며 팀의 승리 이끌어] [워리어스 새 용병 월터 스미스, KBO 데뷔 후 4경기 연속 안타 기록] [선발투수 천상진, 5이닝 1실점으로 시즌 6승 기록한 후 “모든 것은 동료들의 공”]경기 초반 터진 홈런 3방과 천상진 선배의 호투에 힘입어 우리는 연승을 달렸고, 그 결과 매지션스를 제치고 다시 3위 자리에 올라섰다.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다.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시즌 전반기, 여기서 확실히 3위를 굳혀 놓아야 하반기에 제대로 된 승부를 걸 수 있을 것이다.
구단 전체에 긴장된 분위기가 감도는 가운데 우리 앞을 막아선 건 시즌 초반부터 줄곧 2위 자리를 지켜온 강팀 수원 커맨더스였다.
1위 인천이 주전포수의 부상과 두 번째 용병 투수 데릭 벨(예전 장덕수 선배에게 고구마 심기를 당한)의 부진으로 인해 주춤거리는 사이, 수원 역시 에이스 최경재의 예상 밖 부진과 타선의 불균형으로 인해 격차를 좁히지 못했다.
그런 사이 중위권과 하위권 팀들이 치열하게 격전을 벌이며 상황이 조금 묘하게 변했다.
3위부터 7위 팀까지가 모두 5할 승률 근처에서 엎치락뒤치락 하다 보니 몇 게임 삐끗하면 수원조차 중위권 싸움에 휘말릴 수도 있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수원은 3게임 차로 쫓아온 워리어스와의 경기에 모든 것을 걸 기세였다.
오늘 수원의 선발은 최경재를 대신해 1선발 역할을 하고 있는 도미니카 출신의 라파엘 디아즈.
158㎞/h에 달하는 포심과 쓸 만한 슬라이더를 갖고 있지만 가끔 제구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 때문에 빅리그에서는 적응하지 못했지만 KBO에서는 분명한 에이스급 투수다.
거기에 최근 부상으로 라인업에서 빠져 있던 용병 타자 피오 에르난데스가 복귀하며 1번 안태규, 2번 최연우, 3번 강태용, 4번 피오, 5번 정대한으로 이어지는 수원의 좌타 라인업이 정상 가동된다.
가장 문제인 건 우리 팀의 선발인 5선발 이영주가 좌타자 상대 피안타율이 리그 최악에 가까운 투수라는 점이다.
어떻게 하든 타격전으로 몰고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초반에 모든 게 결정 날 수도 있다.
“자, 라인업이다. 다들 확인하고.”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대준 감독은 오늘 수비보다는 공격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라인업을 가지고 나왔다.
1번 중견수 서형주
2번 유격수 한수혁
3번 1루수 조성오
4번 우익수 월터 스미스
5번 3루수 안치욱
6번 포수 장덕수
7번 2루수 이창모
8번 지명타자 강진석
9번 좌익수 최민석
선발 투수 이영주
김수학 선배가 라인업에서 빠졌다. 그리고 강진석 선배가 지명타자로 들어왔다.
그리고 나는 2번에 배치되었다.
“2번이라…….”
3번도 괜찮지만 2번도 좋다. 미국에서 워낙 오래 그 자리에서 뛰기도 했고.
내 타순보다는 그 앞뒤에 선 선수들의 이름을 보니 조금 싱숭생숭할 뿐이다.
입단한 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중견수.
팀내 주류 세력들에 밀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지내던 최고참 1루수.
계약 해지를 당하고 갈 곳이 없던 상태에서 한국행을 선택한 미국인 우익수.
시즌 초반만 해도 애물단지 취급을 받았던 애송이 3루수.
황성민이라는 쓰레기 때문에 만년 백업에 빵 셔틀까지 하던 포수.
그리고 빅리그에서 실패를 맛본 후 그저 습관처럼 선수 생활을 이어온 2루수.
누구 하나 엘리트 코스를 밟은 이 하나 없이, 그렇게 어려움을 겪던 선수들이 하나로 모여 가을야구를 향해 전력으로 질주하고 있다.
좋은 팀이다.
처음 이 구단을 인수할 때만 해도 정말 이걸로 될까,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한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회의감에 시달렸는데.
이제는 그런 선수들이 하나둘 성장해 내 뒤를 든든히 받쳐주고 있다.
“딱 봐라. 오늘 전 타석 출루에 도전할 거다.”
물론 서형주 저 녀석처럼 이 팀의 중심이 자신이라고 착각하는 놈도 있긴 하지만.
어쨌든 경기는 시작되었다.
1번 안태규부터 시작해서 2번 최연우, 3번 강태용, 4번 피오 페르넨데스로 이어지는 수원의 좌타 라인.
어떤 면에서 보면 매지션스보다도 더 끔찍한, 정교함과 파괴력을 동시에 갖춘 타선이다.
그래서일까, 오늘 타구가 몰릴 것으로 예상되는 1루와 2루 사이, 조성오 선배와 이창모 선배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 비장하다.
수원의 덕아웃에서 1, 2, 3번 타자가 나와 대기타석에 자리를 잡았다.
지난 봄, 애리조나에서의 연습 경기 때만 해도 우리 팀을 한참 아래로 내려다보던 수원 선수들의 표정이 많이 변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제일 표정이 심각한 수원의 리드오프가 타석에 들어섰다.
1번 타자 유격수 안태규, 본래 대표팀 주전 유격수였던 이태웅의 뒤를 이어 제 2의 유격수로 이름을 날리던 선수.
“기습 번트 대비.”
“오케이.”
확률은 높지 않지만 3루 쪽 기습 번트에도 대비해야 한다. 물론 우리 선발 이영주를 상대로 무쌍을 찍었던 작년 상대 전적을 생각하면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라이언 스타크, 브룩스 파커, 이만식, 천상진, 이 4명의 고정 선발 로테이션이 돌아가는 가운데 5선발로 자주 등판을 하고 있는 2년 차 투수 이영주.
시즌 평균자책점 5.75에 1승 3패를 기록 중인, 누구 하나 쓸 만한 투수가 등장하면 곧바로 선발 자리에서 밀려날지도 모를 그런 선수다.
그런 이영주 선배에게 오늘 경기는 상당한 분수령이 될 수도 있다. 누구 하나 그에게 큰 기대를 안 하고 있는 상황에서 예상 외의 호투를 펼친다면 하반기에 다시 선발 자리에 이름을 올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경기 전 나를 찾아온 이영주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수혁아, 잘 부탁한다.’
‘네? 뭘요?’
‘그냥, 그냥 전부 다.’
하도 표정이 절박하길래 나도 모르게 알겠다고 대답해 주었다.
그냥 잘 치고, 잘 달리고, 잘 잡아 달라는 뜻이겠지. 그거야 뭐 부탁이 없어도 원래 해야 할 일이고.
‘그리고 혹시…….’
‘네?’
‘너 민예린 씨랑 친하다고 했지. 그것도 부탁 하나 좀 하자.’
‘민예린한테 부탁을 왜 저한테… 아무튼 뭔데요?’
‘제발 나 볼 던질 때 죽여버린다고 외치지 좀 말아 달라고, 그렇게 전해주면 안 될까? 그 소리 들을 때마다 심장이 덜컹거려서 공을 못 던지겠어.’
이 말을 할 때 표정이 절박을 넘어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보이길래 그것도 알았다고 대답해줬다.
그리고 경기 시작 전부터 응원단상 바로 앞에 쭈그려 앉아 몸과 목을 풀고 있던 민예린에게 말했다.
‘예린아, 이영주 선배가 자기한테 너무 욕하고 그러지 말아 달라는데?’
‘내가 언제 욕을…….’
‘볼만 던지면 죽여버린다고 협박했다며.’
‘헉! 큰일 날 소리! 그런 거 아니에요, 오빠.’
‘몰라, 알고 싶지도 않고. 아무튼 적당히 해. 저 선배 안 그래도 새가슴인데 그렇게 겁줘봐야 역효과야.’
내 부탁이 얼마나 효력을 발휘할지는 모르겠다. 내 역할은 그저 메신저에 불과하니까.
“이영주 파이팅!”
“파이팅!”
동료들의 격려를 받으며 이영주 선배가 마지막 투구 준비를 마무리했다.
“플레이!”
마침내 주심이 경기 시작을 알렸다.
그리고 이영주 선배가 긴장된 표정으로 천천히 와인드업을 시작했다.
슈웅
“볼.”
바깥쪽 높은 곳으로 빠져나가는 어림없는 볼.
그 순간 홈팀 응원단상 쪽에서 우렁찬 여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야 이 씨, 이영주! 죽어! 그것도 공이라고!”
흠, 나는 분명 전해줬으니까,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