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97)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96화(97/412)
#96. 가을야구를 위해
‘재미있는 녀석들이야.’
차례로 홈플레이트를 밟은 후 어깨동무를 하고 덕아웃으로 돌아오는 1년 차 콤비를 보며 이창모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올 시즌이 시작할 때만 해도 리드오프 자리에 섰던 그다.
무릎 부상의 후유증으로 인해 단독 도루는 거의 불가능한 몸 상태.
하지만 이창모는 팀에서 자신에게 원하는 게 뭔지 잘 알고 있었기에 아무 군말 없이 리드오프로 나서며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이창모가 1번에서 버텨주는 사이 다른 선수들이 성장했다.
최고참 조성오는 확고한 중심타자로 자리를 잡았고, 만년 백업이던 장덕수 역시 단숨에 중심타선의 한 자리를 꿰찼다.
안치욱의 발전도 눈에 띄었다. 공수 양면에서 시즌 초와는 전혀 다른 선수가 되었다.
한수혁에 대해서는 뭐라 할 말이 없다. 빅리그를 경험한 이창모는 그곳에서도 저 녀석만큼 압도적인 포스를 뽐내는 선수를 본 적이 없다.
얼마 전 한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
빅리그 경험자로서 한수혁이 만약 시애틀에 입단했다면 어느 정도 성적을 기록했을 거라 예측하냐는 그런 상투적인 질문.
‘최소 3할, 20홈런, 아니, 어쩌면 홈런 30개 정도는 쳤을 거 같군요.’
다음 날 그 인터뷰 내용이 인터넷에 올라왔고 몇몇 악플러들이 달라붙어 말도 안 되는 국뽕이라는 댓글을 달아댔다.
솔직하게 말하면 조금 줄여서 말한 거다. 이창모가 생각하는 한수혁은 지금 당장 빅리그에 던져 놓아도 그 이상의 성적을 기록할 것 같은, 자신이 감히 평가할 수 없는 그런 선수였다.
그런 상황에서 서형주가 이 팀에 입단했다. 그리고 자신에게서 리드오프 자리를 빼앗아갔다.
어느 정도 바라던 바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타순이 6번, 7번까지 밀린다는 건 사실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어쨌든 상위 타선에 선다는 건 그만큼 많은 공격 기회를 부여받는다는 뜻이고, 그것은 바로 선수에 대한 평가와 연봉으로 직결되는 문제이니까.
그럼에도 이창모는 이상하게 서형주라는 후배가 밉지 않았다. 아니, 자꾸만 눈길이 갔다.
빠른 발과 정교한 타격은 자신이 예전 빅리그에 진출하기 전 전성기 때의 모습을 연상시켰고, 동기인 한수혁을 넘어서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밀어붙이는 것 역시 빅리거들을 이기기 위해 노력했던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게 했다.
그래서일까, 이창모는 시간이 날 때마다 서형주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형주야, 발이 너무 벌어진 거 같다. 오픈 스탠스는 너한테 오히려 독이 될 거야.’
‘배트를 조금 짧게 잡아보는 건 어떨까? 상대 투수 신경을 건드리는 데는 그게 직빵이거든.’
‘1루에 나갔다고 해서 꼭 뛸 필요는 없어. 가끔은 뛰는 것보다 뛰는 척하는 게 오히려 투수를 더 힘들게 할 때도 있거든.’
처음에는 왠지 자신의 예전 모습을 떠올리게 해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서형주가 그걸 하나도 빼놓지 않고 흡수하는 모습에 그만 재미를 들리고 말았다.
그렇기에 이창모는 오늘도 여전히 서형주를 향해 조언과 충고, 그 사이 어딘가에 놓인 말을 던져본다.
“형주야.”
“네, 형님.”
“의욕도 좋지만 빠른 공이 들어올 때는 몸 좀 사려라. 아무리 엉덩이나 허벅지라도 저 정도 공 잘못 맞으면 부상당할 수도 있어.”
“명심하겠습니다.”
“오냐.”
내년, 어쩌면 이번 시즌이 채 끝나기도 전, 서형주의 실력이 자신을 뛰어넘을 수도 있다.
원래 천재란 그런 거다. 이창모 역시 한때 천재라 불렸던 선수이기에 프로에서 나이나 연차 같은 건 아무 의미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창모는 당분간 녀석에 대한 잔소리를 멈출 생각이 없다.
그것이 바로 자신이 이 팀에서 연봉을 받는 이유 중 하나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아, 맞다. 그리고 형주야.”
* * *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쉴 새 없이 울려 대는 스마트폰을 주머니에서 꺼낸 박재철 단장이 테이블 위에 그것을 던져 놓고 다시 그라운드로 시선을 돌렸다.
안 봐도 뻔하다. 지난 트레이드 이후 계속되는 대전 양두석 단장의 폭탄 문자일 거다.
사람이 그런 식으로 살면 천벌을 받는다느니, 나중에 고향에 내려와서 살려면 지금이라도 마음을 고쳐 먹으라느니, 심지어 서형주를 다시 돌려줄 수는 없냐느니.
말도 안 되는 소리일 게 뻔하다. 오늘처럼 서형주가 활약을 하는 날에는 저런 메시지가 계속 날아오곤 하니까.
“안녕하세요, 예전에 정말 팬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인해 드릴까요?”
“네? 아, 네, 감사합니다. 그럼 혹시 여기에…….”
팬이 내민 메모지에 보기 좋게 사인을 해주고 함께 사진까지 찍은 박재철 단장이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평소 같으면 그 팬을 붙잡고 한참 동안 떠들었겠지만 오늘은 아쉽게도 그럴 시간이 없었다.
WBC 때문에 올스타 브레이크가 뒤로 밀렸지만 평소 같으면 전반기가 마감되었을 시점이다.
지금부터 정신을 바짝 차리고 팀의 부족한 부분을 확실하게 파악해 둬야 한다.
KBO의 트레이드 마감일은 보통 7월 31일, 다행인 것은 올해는 WBC 때문에 모든 일정이 밀리며 트레이드 마감일 역시 올스타 브레이크가 끝나는 8월 20일로 연기되었다는 것이다.
온 국민의 관심이 WBC에 쏠려 있는 사이 박재철을 비롯한 각 팀의 단장들은 팀의 부족한 부분을 메우기 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녀야 한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사인 하나 해드릴까요?”
엉거주춤 다가온 관중에게 사인을 해준 박재철이 이제 완벽한 업무 모드로 돌아왔다.
사장실과 단장실, VIP 라운지에서 그라운드를 내려다볼 수 있는 최신 구장들과 달리, 잠실야구장에서 경기를 보려면 이렇게 관중들 사이에 섞일 수밖에 없다.
홈플레이트 바로 뒤, 중계석에서 이어지는 작은 공간에 위치한 관계자석, 그곳에 자리 잡은 박재철 단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수첩을 꺼내 들었다.
‘일단 타자 쪽부터 보면…….’
시즌 초반과 비교하면 선수단 구성이 많이 변했다.
지금까지 장기적으로 팀을 만드는 데 중점을 두었다면 이제부터는 보다 단기적인 목표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대로 팀이 페이스를 유지한다면 무려 6년 만에 가을야구에 진출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위 레인저스, 2위 커맨더스, 3위 워리어스, 4위 매지션스, 5위 팔콘스, 6위 랩터스, 7위 재규어스.
선두 레인저스의 독주와 8, 9, 10위 팀들의 부진으로 2위부터 7위 사이의 승차가 별로 크지 않은, 한마디로 중위권 싸움이 엄청나게 치열한 시즌이다.
저 7개 팀 모두 가을야구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고 있다.
그 경쟁을 뚫고 가을야구에 진출하려면, 그리고 가을야구의 최종 목표인 우승이라는 꿈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팀 전력을 극대화시켜야 한다.
‘지난번에는 위험했어…….’
지난번 이창모와 최민석의 부상, 그리고 주전포수 장덕수의 체력 고갈, 용병 타자 교체 등의 문제가 발생하며 박재철은 초보 단장으로서 많은 경험치를 습득할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말하지 않았는가. 지금 워리어스가 3위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 부상 선수가 거의 발생하지 않은 덕분이라고, 어쩌면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고.
박재철은 알고 있다. 기적은 계속되지 않는다는 걸. 이 뒤에는 지독한 어둠이 찾아올 수도 있다는 걸.
다행히 박성훈 대표로부터 트레이드에 대한 전권과 함께 적지 않은 금액의 트레이드 머니까지 책정 받았다.
이제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넘어왔다.
‘1루수는 조성오, 백업은 용지훈…….’
포수마스크를 쓴 1루수라 불렸던 백업포수 용지훈은 월터의 입단 이후 되도 않는 백업포수를 때려치우고 1루 수비 훈련에 올인한 상태다.
다행인 것은 용지훈의 타격이 제법 괜찮다는 것. 물론 조성오와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하반기 체력이 떨어질 서른다섯 베테랑을 백업할 정도는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박재철이 1루수라고 쓰인 글자 옆에 이렇게 적었다.
-트레이드 필요성 낮음. 외야수 강진석의 1루 전환 가능 여부 체크.
막 그 글자를 적는 순간 오늘 3번 타자로 나선 조성오가 멋진 우전 안타를 치고 1루로 나갔다.
“예스!”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쥔 박재철이 자신을 바라보는 주변 관중들에게 슬쩍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다시 하던 일로 돌아갔다.
‘2루수는…….’
현재 워리어스 부동의 주전 2루수는 이창모, 하지만 시즌 초반 무릎 부상을 당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언제 부상이 터질지 알 수 없는 선수다. 다행히 올해 입단한 유인철이 2루수와 유격수 수비가 가능하지만 타격이 너무 형편없다.
잠깐 뭔가를 생각하던 박재철이 2루수 옆자리에 무언가를 써내려 간다.
-내야진에 여유가 있는 부산과 대구 1순위 타깃, 유인철의 타격이 성장할 동안 백업을 봐줄 선수 시급.
따아아악!
이제 막 마지막 글자를 적는 순간 오늘 4번으로 나선 용병 월터 스미스의 배트에서 거대한 파열음이 들렸다.
“어! 어!”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박재철이 두 눈을 크게 뜨고 타구의 방향을 쫓았다.
새까맣게 솟구쳤던 타구가 조금씩 하향 곡선을 그리며 좌익수를 향해 날아간다.
“안 돼!”
자칫하면 잡힐 것처럼 보이는 타구. 뒤로 돌아선 채 전력을 다해 담장 쪽으로 뛰던 좌익수가 타구를 향해 손을 쭉 내밀었지만.
텅
담장 맨 위에 맞고 그라운드로 튀어 들어온 공이 데굴데굴 파울라인으로 굴러갔다.
“우와와!”
관중들이 내뿜는 커다란 함성에 정신이 반쯤 나가버린 좌익수가 사라진 공의 행방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사이, 1루에 있던 조성오가 있는 힘을 다해 베이스러닝을 시도했고, 결국 2루를 돌아 3루, 그리고 다시 홈까지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거의 홈런이 될 뻔한 1타점 2루타를 쳐낸 월터 스미스가 2루 베이스 위에서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관중들을 향해 한 손을 살짝 들어올려 보였다.
좋은 선수다.
부상 이력 때문에 끝까지 찜찜하기는 했는데 병원 검사 결과도 그렇고, 실제 경기에 뛰는 모습도 그렇고 전혀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다.
3 대 3 동점이 되었다.
저 멀리 응원단상 쪽에서 흥분한 민예린이 이상한 춤을 추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지만 박재철은 그냥 못 본 채 다시 자신의 펜을 들어올렸다. 방금 월터의 모습을 보니 이제야 결심이 선다.
-포수 장덕수, 백업 월터 스미스… 용병 장기 계약에 대한 고민.
이제 박재철의 관심은 3루수 쪽으로 넘어갔다. 이건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박재철의 펜이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3루수 안치욱, 백업 트레이드 필요
어쩌면 이 팀의 최대 취약 포지션이 바로 3루수일 것이다. 오죽했으면 시즌 초반 연일 삽질만 하던 1년 차 신인이 교체 한 번 없이 주전으로 계속 뛰게 내비뒀을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저 신인이 가끔 부진하거나 에러를 범하는 일은 있어도 단 한 번도 크게 다친 적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행운일 뿐이라는 걸 박재철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2루에 이어 3루 역시 백업 요원이 절실하다. 혹은 그 둘이 가능한 멀티 자원이라면 더더욱 좋다.
따아악!
박재철이 또 한 번 뒤통수를 칠 구단이 어디 없을지 머리를 굴리는 사이 안치욱이 친 타구가 1-2루 사이로 힘차게 날아갔다.
하지만 수원 1루수의 기가 막힌 수비에 걸리며 아웃. 그 사이 2루에 있던 월터 스미스는 3루까지 진출.
3 대 3 동점, 원아웃 3루, 역전 찬스가 만들어졌고, 타석에는 장덕수가 들어섰다.
‘유격수는… 유격수는…….’
1루수와 2루수, 3루수까지 거침없이 써 내려가던 박재철의 펜이 거기서 멈췄다.
출장 정지 때문에 빠졌던 4경기를 제외한 모든 경기에 선발 유격수로 출장 중인 한수혁.
그 녀석이 빠진 경기를 생각하니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쭉 돋고, 손발에 힘이 턱 풀어진다.
어차피 답이 없는 문제라는 걸 깨달은 박재철이 일단 유격수에 대한 생각을 접어버렸다.
지금까지 그랬듯 여차하면 유인철을 세우면 그만이지만 어차피 누굴 데려와도 한수혁의 빈 자리를 메우는 건 불가능하다.
그냥 그에게 별 일이 없기를 빌고, 부상을 당하지 않게 철저히 관리하고, 혹시나 벤클 같은 게 벌어지지 않게 잘 지켜보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다.
‘신이시여…….’
독실한 신자는 아니지만 저도 모르게 마음 속으로 신의 이름을 부른 박재철은 내야진에 3루 백업 요원을 보강하는 방법, 그리고 내야 백업요원인 유인철의 경험치를 먹이는 방법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따아아악!
6번 타자로 나선 장덕수가 상대 투수가 던진 공을 냅다 후려 갈겼다.
방금 전 월터의 타구와는 조금 다른, 빨래줄이라는 표현이 정말 잘 어울리는 그런 타구가 외야를 향해 힘차게 뻗어 나갔다.
터억
빨래줄처럼 날아가 펜스를 때릴 것 같던 타구를 수원의 좌익수가 점프를 하며 간신히 잡아냈다.
관중석에서 약간의 아쉬움이 담긴 탄식이 터져 나왔고, 그 모습을 확인한 월터가 태그업을 하며 홈으로 들어왔다.
4 대 3 역전, 선발 이영주가 1회 시작과 함께 석 점을 줄 때만 해도 암울했던 박재철의 기분이 하늘을 날 것처럼 좋아졌다.
“박재철 단장님, 저기, 죄송한데… 혹시 저희 아이랑 사진 한 장만 찍어주실 수 있을까요?”
“사진이요? 아, 물론이죠. 이리 주세요. 꼬마야. 흠, 꼬마가 아니라고? 좋아, 나이가 몇 살이지? 여덟 살? 그래, 내가 실수했구나. 그 정도면 충분히 자신의 인생을 책임질 수 있는 나이지. 꼬마라고 부른 걸 사과하마. 그러고 보니 어느 팀 팬이지? 뭐? 부산이라고? 음… 소년,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좀 우습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응원팀을 고르는 건 상당히 고민을 해야 해. 잘못하면 늙어 죽을 때까지 후회할 일을 만들게 될 수도 있거든. 그러니까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