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99)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98화(99/412)
#98. 투수는 억울할 겁니다
내가 알고 있는 김두영이라는 투수는 아마추어들이 프로에 도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TV프로그램에 출연해 시크한 표정으로 지망자들의 투구폼을 잡아주던 서른 살의 베테랑이었다.
뒤늦게 기량이 만개한 좌타자 스페셜리스트.
그런 김두영이 20대 초반의 나이에 워리어스로 트레이드 되어 원래의 운명보다 조금 빨리 1군 마운드 위에 섰다.
-빠른 볼을 던지는 좌완 투수는 지옥에 가서라도 데려와야 한다.
처음 저 말을 한 게 정확히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야구계 종사자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격언이다.
일단 우리는 김두영 선배를 지옥이 아닌 매지션스에서 데려왔다.
그럼 매지션스가 지옥인 건가?
아무튼.
내가 김두영에 대해 알고 있던 건 그가 언젠가 반드시 터질 선수라는 것이 전부였다.
본래 매지션스에서 쓰리쿼터의 폼으로 150㎞/h에 가까운 포심과 컷패스트볼, 두 가지 구종을 구사하던 김두영이 오버핸드에 세 가지 변형 패스트볼 투수로 개조되어 있었다.
일반적으로 제구를 잡기에, 그리고 변형 패스트볼의 각을 키우는 데는 쓰리쿼터가 오히려 유리하다. 내 생각에는 이것저것 손을 대보다가 김두영이라는 투수에게 저 폼이 가장 잘 맞았을 확률이 높다.
따아악!
수원의 1번 안태규를 삼진, 2번 최연우를 땅볼로 처리한 김두영 선배는 다음 타자인 강태용에게 큼지막한 2루타를 허용했다.
땅볼을 유도하기 위해 던진 컷패스트볼이 잘 꺾이지 않아 배트 중심이 맞은 것이다.
그런데 투수의 반응이 재미있다.
8 대 8 동점, 거기에 경기가 거의 끝나가는 8회초에 등판한 투수가 2루타를 허용하면 백이면 백 얼굴이 하얗게 질리게 마련이다.
그런데 전혀 표정 변화가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살짝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짓고 있다.
멘탈이 강한 걸까, 아니면 표정에 기분이 잘 드러나지 않는 타입일까.
둘 중 어느 쪽이든 범상치는 않다.
따악!
“아웃!”
그렇게 2루에 주자를 내보내 놓고도 전혀 동요하지 않은 김두영은 다음 타자인 피오 페르난데스를 우익수 플라이로 잡아내며 자신의 임무를 완벽히 마쳤다.
수원의 상위 타선을 맞아 손에 땀을 쥐고 경기를 지켜보던 워리어스 팬들이 엄청난 함성을 쏟아냈다.
“와아아!”
“김두영! 김두영! 김두영!”
그런 팬들을 향해 별 일 아니라는 듯 슬쩍 손을 들어준 김두영 선배가 덕아웃으로 들어갔다.
생애 첫 1군 등판에서 하나도 떨지 않는다고?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다.
상황에 따라서는 저 투수를 양기철 선배와 함께 더블 스토퍼로 쓰면 어떨까 하는 그런 생각.
* * *
“야, 태규야. 쟤 뭐냐? 공 진짜 이상하지 않냐?”
“몰라, 시발. 진짜 공 더럽네.”
“전부 다 포심 같은데 정작 포심은 하나도 없네.”
“공 자체는 별 거 아닌데 중심에 맞추기가 너무 힘들어.”
“태용 선배님, 아까 그거 어떻게 치신 거예요?”
“그냥 찍었어. 어차피 셋 중 하나잖아. 투심, 컷패스트볼, 스플리터. 그냥 스플리터라고 생각하고 냅다 휘둘렀는데 와서 맞더라.”
“그게 뭐야! 아, 이상하게 워리어스 쟤들, 우리 만날 때마다 뭔가 하나씩 숨겨뒀던 걸 꺼내는 기분인데?”
“생각해 보면 작년에 쟤들 털어먹다가 올해 못 턴 만큼 승률이 떨어진 거네.”
“됐다. 다들 정신 바짝 차리고 이번 이닝 막아보자. 쟤들도 1번부터다.”
“네, 주장.”
난생 처음 보는 김두영이라는 투수에게 꼼짝도 못 하고 당한 수원 타자들이 글러브를 끼고 수비 위치로 달려 나갔다.
어느새 경기는 8회말, 수원 포수 정대한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져갔다.
지난 시즌 워리어스를 상대로 14승 2패, 절대적인 우위를 점했던 수원이다.
그러던 워리어스가 너무나도 많이 변했다.
완전히 물이 오른 타선은 둘째 치고, 용병 두 명과 이만식, 천상진으로 이어지는 준수한 4선발 로테이션을 구축하더니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모를 요상한 곱슬머리 마무리 투수를 추가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기존 마무리를 맡았던 최정수와 홍영식을 필승조로 돌리며 내실을 다지더니, 이제는 유일한 약점이었던 좌완 전문 릴리프까지 등장했다.
재미있는 것은 저 선수들이 전부 별 볼 일 없는 선수들이었다는 점이다.
워리어스 2군에만 처박혀 있던 천상진, 타이탄스에서 튕겨 나온 양기철, 그리고 매지션스에서 성공하지 못하고 팔려온 김두영까지.
이건 무슨 외인구단도 아니고, 여기저기서 버림받은 선수들이 하나둘 모여 시너지를 이루고 있다.
“이번 타석도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그래, 항상 활기차 보여서 좋네.”
“저야 뭐, 후후.”
어디 투수들뿐인가.
마치 이 바닥에 10년은 넘게 있던 놈처럼 구는 서형주. 이 녀석도 대전에서 넘어온 놈이다.
지난 시즌만 해도 워리어스의 톱타자는 정기호였다. 그리고 그 뒤에는 송기태 같은 놈이 서 있었고.
상대하기 정말 쉬웠다. 슬슬 성질을 건드려주면 자동으로 얼굴이 붉어져서는 헛스윙 세 번 하고 덕아웃으로 꺼져버렸었지.
그런 자리에 서형주라는 골치 아픈 신인이 들어앉았다.
따악!
“파울!”
“까비.”
제대로 맞은 타구가 3루 라인을 살짝 벗어나며 파울이 되었다.
이 녀석이 좋은 타자라는 건 지금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
8회말 8 대 8 동점, 노아웃 선두타자로 나온 놈이 2루타가 될 뻔한 타구가 파울이 되었는데도 전혀 흥분을 하지 않는다.
얼마 전까지 대전에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놈이, 아니, 애초에 작년까지만 해도 고등학생에 불과하던 놈이 이런 부동심을 유지할 수 있다니.
1년 차 신인이라도 깔보면 절대 안 된다. 정대한은 리그 최고의 리드오프인 파이터즈 이찬호를 상대한다는 마음가짐으로 경기에 임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따악!
바깥쪽 낮은 코스로 들어오는 체인지업을 서형주가 받아쳤다.
배트 밑 부분에 맞으며 스핀이 걸린 타구가 크게 바운드되어 3루수 쪽으로 날아간다.
타악
제자리에서 살짝 점프하며 그 타구를 건져낸 3루수가 전력을 다해 1루로 송구했다.
“세이프!”
“그게 왜 세이프야!”
간발의 차이로 세이프 판정이 내려졌고, 수원 덕아웃에서 마지막 비디오 판독 찬스를 사용했다.
– 위원님, 타이밍이 조금 애매하긴 했죠?
– 애매하긴요. 무조건 세이프입니다.
– 네?
– 수원 최용식 감독도 알고 있을 겁니다. 세이프란 걸요. 그냥 상대의 기세를 잠시 꺾고 투수에게 한숨 돌릴 시간을 주려는 것뿐이죠.
– 아, 말씀드리는 순간 원심이 그대로 유지됩니다. 서형주 선수가 1루에서 팔을 번쩍 들어 올립니다!
–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세이프라니까요? 자, 이제 워리어스 덕아웃이 움직일 차례입니다. 8회말 동점 상황에서 발 빠른 주자가 1루에 나갔죠? 이러면 선택지가 여럿 생기게 됩니다.
– 보내기 번트, 히트앤드런, 강공, 이렇게 보면 될까요?
– 크게 보면 그런데요. 사실 지금은 보내기번트는 빼야겠죠. 한수혁 선수에게 번트를 시킨다? 정신 나갔다는 소리를 듣기 딱 좋겠죠.
– 음, 그럼 히트앤드런, 강공, 둘 중 하나겠군요.
– 맞습니다. 오늘 경기 정말 재미있네요. 여기서 워리어스 이대준 감독이 어떤 선택을 할지 다 함께 지켜보시죠.
* * *
부웅
“…하지 마라.”
부우웅
“…하지 마라고.”
“제가 뭘요?”
“투수 겁주는 그거, 하지 말라고. 이 나쁜 놈아.”
“음.”
차라리 대놓고 쌍욕을 박으면 나도 강하게 맞받아칠 텐데.
정대한처럼 저렇게 나오면 나도 인간인지라 마음이 약해진다.
그래, 어차피 투수 얼굴이 허옇다 못해 퍼렇게 질려버렸는데 여기서 더 겁을 줘봐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
허공에 대고 하던 스윙을 멈추고 본격적인 타격 자세를 취했다.
8회말 동점, 무사 1루.
혹시나 하는 마음에 덕아웃 쪽을 슬쩍 바라보았다.
역시나 아무 사인이 없다. 지금 수석코치의 손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지만 사실은 전혀 의미가 담겨 있지 않은 가짜 사인이다.
굳이 해석하자면 빨리 경기 이기고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가자 정도로 해석하면 될까.
프로야구 선수들은 보통 경기가 시작하기 전 가볍게 배를 채운다.
그리고 경기가 끝난 후에는 구내식당에서 함께 정식으로 저녁식사를 한다.
오늘 잠실야구장의 구내식당에서는 한우 갈비찜이 준비 중이다.
요즘 들어 기력이 조금씩 떨어져가고 있는 선수들을 위해 구단에서 준비한 특별식이다.
기껏 소고기씩이나 준비하고 경기에 지면 바보 소리를 들을 거다. 먹을 거면 기분 좋게 먹어야지.
안치욱 놈이 먹어 치울 소고기값을 생각하니 갑자기 전투력이…….
흠.
“세이프!”
얼굴이 파랗게 질리다 못해 스머프를 연상시키는 수원의 투수가 연신 1루로 견제구를 던져 댔다.
사실 수원도 알고 있다. 여기서 서형주가 뛸 일은 거의 없다는 걸.
팀 내 최고 타자가 타석에 들어선 상황에서 굳이 도루를 시도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서형주는 얄밉게도 당장이라도 뛸 것처럼 계속 자세를 취했고, 정신이 반쯤 나간 수원 투수는 그 장단에 놀아나고 있었다.
“마운드 안 가보셔도 돼요?”
“…….”
기분이 영 별로인 모양이다. 웬만해서는 내 말에 꼬박꼬박 대답해주던 정대한이 입을 꾹 닫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2위 수원과 3위 워리어스 사이의 승차는 3게임 차.
시즌 초반만 해도 함께 독주 체제를 갖춰가던 수원이 주춤거리는 사이, 1위 인천은 멀리 달아났고, 그 밑 중위권 팀들은 턱밑까지 쫓아온 상황이다.
자칫 스윕이라도 당하면 곧바로 순위가 역전된다.
팀의 주장으로서, 투수들을 케어하는 주전포수로서, 그런 상황은 절대적으로 막고 싶을 것이다.
“볼.”
수원의 투수가 던진 초구에는 그런 의지가 담겨 있었다.
차라리 볼넷을 줬으면 줬지, 좋은 공은 절대 안 주겠다는 의지.
여기서 나를 볼넷으로 내보내면 무사 1, 2루. 하지만 다음 타자가 3번 조성오 선배인 만큼 희생번트 같은 건 없을 거라는 계산.
어쩌면 그 타이밍에서 마무리 투수인 박도율이 올라올 수도 있다. 수원에는 그 말고도 마무리를 맡을 수 있는 좋은 중간계투들이 있으니까.
이렇게 상대가 좋은 공을 주지 않으려 할 때는 최대한 존을 더 좁힌다.
예전 같으면 무리해서라도 나쁜 공에 배트가 따라 나갔을 것이다. 내가 아니면 점수를 낼 수 없다는 강박관념 같은 게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달라졌다.
굳이 내가 치지 않아도, 그 뒤에 나올 조성오 선배나 월터 스미스, 안치욱, 장덕수 선배, 그들이 나를 홈으로 불러들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렇기에 평소보다 조금 더 타격 존을 좁힌다.
“볼.”
“그냥 자동고의사구도 환영입니다. 선배님.”
“…….”
정말 삐졌나 보다. 이 사람이 이렇게까지 내 말을 씹는 건 처음인 거 같다.
여기서 필요한 건 약간의 연기력이다.
내 속에 들어 있는 진짜 정체성이 서른다섯 빅리그 베테랑이라는 것과 상관없이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1년 차 풋내기일 뿐이다.
아무리 정대한, 그리고 수원 벤치가 나에 대한 연구를 깊게 했다 해도 그 본질은 쉽게 부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기에 나는 연기한다.
부웅
“스트라이크!”
“아우!”
바깥쪽 높은 코스로 날아가는 공에 일부러 헛스윙을 했다. 그러고는 아깝다는 듯 탄식도 내뱉어보고.
치고 싶어 안달이 난 애송이를 연기하는 기분이 그다지 나쁘지 않다.
내 등 뒤에 앉아 있는 정대한은 어쩌면 이게 연기라는 걸 알아차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상관없다. 내 목표는 수원의 벤치에서 여러 가지 선택지를 놓고 고민하게 하는 거니까.
볼 카운트 투 볼 원 스트라이크.
여기서 또다시 완벽한 볼이 들어오면 그냥 포기하고 1루로 걸어 나갈 거다. 그건 수원이 나와의 승부를 완전히 포기했다는 증거이니까.
하지만, 만에 하나, 칠 수 있는 공이 들어온다면 완벽한 코스가 아니라도 무조건 친다.
슈웅
그러니까 지금 이 공처럼 말이지.
따아아아아악!
바깥쪽 낮은 코스, 존에서 공 반 개 정도 빠진 공을 그대로 후려갈겼다.
배트 중심에서 살짝 벗어난 곳에 맞은 타구가 우익수 방향을 향해 빨래줄처럼 날아간다.
– 아아! 한수혁 선수가 친 타구가! 우익수 쪽으로! 파울이냐, 페어냐, 파울이냐, 아! 우측 폴대를 강타했습니다! 홈런! 여기서 투런 홈런이 터졌습니다! 시즌 32호! 한수혁 선수의 전반기 홈런 기록이 또 하나 추가됩니다!
– 엄청나네요! 방금 그 타구는 사실 넘어갈 타구가 아니… 하아, 진짜 제가 투수 출신이라 그런지 보기만 해도 끔찍합니다. 저렇게 맞은 타구가 넘어가면 투수 입장에서는 던질 공이 없거든요.
– 정대한 포수가 마운드에 올라가 울먹이고 있는 투수를 달랩니다.
– 억울할 거예요, 정말 억울할 겁니다. 여기가 메이저리그도 아니고 저게 넘어갈 공이 절대 아니었거든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그 공을 받아쳐서 넘길 타자가 KBO에 존재하니 말이죠.
– 결국 수원의 투수코치가 마운드로 올라갑니다. 또다시 투수 교체가 될 것 같습니다. 10 대 8, 두 점 차로 워리어스가 앞서가는 가운데 8회말 공격이 계속됩니다. 여기는 잠실야구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