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arlock RAW novel - Chapter 695
695. 복수 (2)
“뭐······?”
멀린의 입술 사이로 얼떨떨한 듯 멍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카이브로서 너무 많은 것을 알고, 너무 많은 것을 경험해 어떠한 일에도 담담하던 노인이 동요의 기색을 내비친 것이다.
케빈의 선언에, 케빈의 복수에.
그 증거로 멀린이 제대로 된 반응을 보인 것은 한참이 지난 후였다.
“그, 그게 무슨 뜻인가······?”
“말 그대로입니다. 제가 그대의 자리를 이어받겠다는 뜻입니다. 제가 아카이브가 되겠다는 뜻입니다.”
멀린은 노쇠해져 정신이 온전치 못한 아비에게 말하듯 강하고, 명확한 어조로 자신의 뜻을 밝혔다.
케빈 본인이 멀린의 아카이브 자리를 이어받아 주겠다고 말이다.
멀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 안 되네. 이 자리는-”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나도 압니다!”
케빈이 멀린의 말을 잘랐다.
“그 자리가 금으로 만든 자리가 아닌, 가시덤불로 만든 자리인 걸 저도 누구보다 잘 압니다! 지난 수십 년, 매일 밤 자신이 저지른 짓에 후회하는 바보 곁에 있었으니까요······!!”
“······.”
“그따위 표정 짓지 마십시오. 당신을 용서하는 게 아니니. 자신의 죄를 잊지 않기 위해 살아있는 죄악의 증거인 나를 곁에 뒀다 하더라도, 내게 마법과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을 가르쳐줬다 하더라도, 동포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 뭔지 알려줬다 하더라도, 매일 밤 죄책감에 제대로 잠들지 못해 머리털이 다 빠지고, 근육이 빠져 괴로운 나날을 보낸다고 하더라도, 그대가 저지른 죄악은 없어지는 게 아니니까요!! 혹시, 오해할까 봐 말해두지요······.”
자신의 감정을 쉴 새 없이 토해내던 케빈이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멀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당신이 저지른 죄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건 옳지 못하니까요.”
멀린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또 당신이 저질렀던 죄는 용서받지 못할 겁니다. 그대에게 당한 자들은 모두 죽었으니까요.”
멀린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무엇보다 전 당신이 내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 친구 그 외의 동포들에게 했던 짓을 용서 못 합니다. 그대가 당한 고통은 그들이 겪었던 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도 안 되니까요.”
“······맞아. 다 맞아.”
침묵하던 멀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기 위해. 멀린이 눈에 눈물이 맺혔다.
케빈은 피범벅이 된 멀린의 얼굴에 자신을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며 속삭이듯 말했다.
“하지만 그대가 내게 저지른 죄만큼은 용서해 주겠습니다······. 그대는 내게 죄를 지었지만, 난 그대를 용서해 주고, 은혜를 베풀어 주겠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진심인가?”
“이게 내 복수입니다! 이걸로 증명된 거라 이 말입니다!! 제가, 우리가 당신들보다 더 나은 존재라고. 그대들보다 나은 존재라고요! 죄인인 그대를 용서해줬으니까요!! 거기다 은혜까지 베풀었으니까요. 명심하십시오······. 이로써 그대들은 내게 빚을 진 겁니다. 멀린, 모든 아카이브는! 이 홍인 마법사에게 죽었다 깨어나도 씻을 수 있는 빚을 진 거라 이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멀린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눈물이 맺히던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눈물에 멀린의 얼굴에 묻은 피가 아주 조금 지워졌다. 가슴 속에 쌓인 고통도.
“하아······. 그러니 닥치고 제게 넘기십시오. 그런 다음 고통스럽고, 편안하게 눈 감으십시오.”
눈물을 흘리는 멀린을 보며 케빈이 말하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희미하게나마 고통과 슬픔이 묻어 있었다.
절대 꺼지지 않는 분노, 복수심과 함께 있던 모순된 감정이.
한줄기 눈물을 흘리던 멀린은 잠시 목을 가다듬더니 약간 흔들리는 음성으로 마지막 말을 하였다.
평생 동안 차마 하지 못했던 그 말을.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그 말과 함께 멀린의 몸에서 강렬한 빛이 터져 나왔다.
아카이브의 기억, 지식, 경험 등. 각종 개념이 방대한 마력과 어우러져 폭죽처럼 터져 나온 것으로, 그 광력(光力)은 어둠으로 물든 성황시국의 밤하늘을 밝힐 정도로 강렬했다.
흡사. 해가 수평선 너머로 잠들 때, 한순간 햇살이 강해져 하늘을 밝히듯.
밤하늘을 밝힌 그 방대한 빛은 여느 빛처럼 허공에 산발적으로 흩어져 사라지는 듯했으나, 그 순간 곧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빛들은 흩어지지 않고 한 축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쿠오오오오········!!
천 년간 쌓은 아카이브의 힘과 기억이.
그 축은 다름 아닌 멀린의 손을 붙잡은 케빈의 손이었다.
“······!”
원수를 용서한 홍인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천년이란 세월 동안 쌓은 죄인들의 힘을 죄악과 같이 모두 받아들이고 있었다.
휘오옹······!!
방대한 마력과 기억이 일으키는 회오리바람이 몸을 칼날처럼 베어내도.
빠지직······!!
파도처럼 밀고 들어오는 마력에 온몸의 핏줄이 터질 듯 팽창해도.
까드득······!!
그 압력을 견디기 위해 꽉 깨문 이빨 사이에서 피가 흘러나와도.
쩌저적······!!
내용물을 감당하지 못해 피부에 금이 가도 케빈은 멀린의 손을 놓지 않았다.
멀린이 아카이브의 모든 걸 물려주는 동안, 숨을 거두는 동안 케빈의 그 손을 놓지 않고 끝까지 잡아주었다.
그가 외롭지 않게······.
그러자 잠시 후.
쿠구궁······!!
허공에 흩어져 사라지려던 빛이 케빈의 몸에 모조리 깃들었다.
그와 동시에 주변의 공간이 파도처럼 일렁이며, 빛무리가 주변에 퍼져 나갔다.
방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기이한 침묵과 평온이 찾아왔다. 그러나 바닥에 생긴 깊은 균열이 무슨 일이 있었다고 증언하였다.
그 가운데서 케빈은 숨이 멈춘 멀린의 두 눈을 감겨준 후 정중히 바닥에 눕혀주었다.
멀린이 바닥에 눕자 케빈은 끝까지 놓지 않던 손을 놓아주며 그 손을 가슴 위에 가지런히 얹은 후, 품 안에서 손수건을 허나 꺼내 허공의 수분을 응축시켜 적신 뒤 피범벅이 된 멀린의 얼굴을 말없이 닦아주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그 모습을 몇 걸음 거리에서 지켜보던 올리버가 성황시국에 온 이후 처음으로 먼저 말을 걸었다.
“아카이브가 되신 겁니까?”
“그래.”
케빈이 고개를 돌리며 답했다. 그의 얼굴 한쪽에 미세한 실금이 가 있었다.
***
“······.”
한쪽에 미세한 금이 간 케빈의 얼굴.
올리버는 그 모습을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이미 충분히 예상한 바였으니까.
아카이브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 조건이 필요했다.
우선, 죄책감과 죄악이 필요했다. 이 과중한 과업에서 차마 도망치지 못하게.
하나, 마음만으로는 또 부족했다.
마음이 되더라도 이를 수행할 힘과 능력이 없다면 슬프지만 무의미한 것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아카이브가 된 이들은 하나같이 당대 가장 뛰어난 마법사 혹은 그중 하나라 언급이 될 정도의 실력은 갖춘 이였다.
그만한 능력이 없다면 아카이브란 방대한 내용물을 담을 수 없을 테니.
그런데 만약 그릇의 크기가 내용물을 다 담기 무리라면? 상상은 어렵지 않았다.
여느 그릇이 그렇듯 ‘쨍그랑!’ 깨지는 것 외에는 없었으니까.
케빈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케빈은 분명 아카이브의 제자로서 젊은 나이에 종군 마법사로 실력을 쌓고, 마탑의 교수가 될 정도로 높은 학식을 쌓은 이였지만, 그렇다고 당대 최고라는 수식어가 붙기에는 이른 감이 있었다.
이를 설명해 주듯 케빈의 육체에 미세한 금이 가고 말았다.
그릇이 내용물을 간신히 담았다는 방증. 참으로 위태로운 상태라 할 수 있었다.
조금만 균형이 깨져도 내용물이 그릇을 깰 수 있었으니.
멀린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당연히 올리버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척 보는 것만으로 알 수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말리지 않았다. 자신이 막을 이유가 없었고, 무엇보다.
“왜 아카이브를 계승한 겁니까?”
궁금해서였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원수를 케빈이 왜 용서했는지 알기 위해.
질문을 들은 케빈은 바로 대답하는 대신, 깨진 피부를 한번 만지며 올리버 앞으로 다가왔다.
“알면서 왜 묻지. 이미, 들었잖아?”
올리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케빈의 말대로였다. 올리버는 방금 케빈이 멀린에게 한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더 나은 존재라는 걸 증명하고, 결코 씻을 수 없는 빚을 지우기 위해 멀린을 용서해 주고, 아카이브라는 죄악을 짊어진 걸 알았다.
그럼에도 구태여 물은 이유는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였다.
두 눈으로 보고도 자신의 원수를 품은 그 모습이 믿기지 않아.
심지어 그 죄악마저 같이 짊어진 것은 도저히 엄두도 내지 못할 불가해한 영역이었다.
“이해할 필요 없어.”
혼란이란 감정이 얼굴에 드러난 올리버를 향해 케빈이 말했다.
“거창해 보여도 결국 멀린과 나. 두 사람 사이에 있던 지극히 개인적인 일에 불과하니까. 그를 증오하나, 그가 얼마나 고통받았는지 알기에 내린 지극히 내 개인적인 결정에 불과해. 그러니 그런 것에 네가 일일이 의미를 부여하며 생각할 필요도 없고, 이해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어.”
케빈의 말은 진심이었다. 여태껏 그래왔듯이.
동시에 이 말이 그저 멀린과 케빈 둘 사이에 관한 것만이 아니란 것도 알 수 있었다.
아카이브가 된 케빈은 종말(終末)에 관해서도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아카이브와 정반대로.
“진심입니까?”
“자기 뒤는 자기가 닦아야 하는 법이니까. 남이 닦아 주길 바라선 안 되지. 아무리 더럽고, 부당하더라도······. 그러니 너도 그냥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진심이군요.”
“늘 그래왔듯이.”
케빈은 그렇게 답하며 한쪽 무릎을 꿇어 올리버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 눈빛에는 올리버에 대한 존중과 각오가 비쳐있었다.
“내 말 들어. 넌 세상에 빚진 거 없어. 설사 빚을 졌다 해도 너한테 그 어떠한 것도 강요할 수도, 떠넘길 수도 없어. 그러니 네가 하고 싶은 선택을 해.”
“그렇게 말씀하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아카이브로서?”
“안 될 건 뭐지? 네가 가만히 있는다 하면 지금과 같을 뿐인데?”
“제가 하려던 걸 마저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럼, 막으면 돼. 최소한 시도는 할 수 있겠지. 무엇보다······.”
케빈이 잠시 말꼬리를 흐리며 감정을 빛냈다. 그건 분노였다.
케빈 자신을 위한 분노가 아닌, 올리버를 위한 분노. 부당한 운명에 대한 분노였다.
“고작 꼬맹이 하나에게 누구도 감당하지 못할 짐을 억지로 떠넘겨야 존재하는 세상이라면 차라리 종말을 맞이하는 게 더 나아.”
케빈은 자신의 생각을 못 박으며 품 안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찢어진 올리버의 가죽 가면이었다. 해결사 데이브의 얼굴.
그 찢어진 가죽 가면을 올리버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러니 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나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니까.”
올리버가 말없이 가죽 가면을 받자 케빈이 그리 말을 마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난 케빈에게 올리버가 물었다.
“······그대께선 지금 무엇을 하시려 합니까?”
“기사님을 도와야지. 여자 한 명한테 모든 싸움을 떠넘길 수는 없잖아?”
케빈은 대답과 동시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공간을 뛰어넘었고, 홀로 남게 된 올리버는 바닥에 가지런히 누운 멀린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하고 싶은 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