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arlock RAW novel - Chapter 92
92. 약속 (1)
T구역 27번 거리.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오염구역에서 퍼펫이 나타나 수많은 해결사들을 죽였는데, 이곳 거리는 여느 때처럼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뭐, 딱히 억울하거나, 화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애당초 해결사라는 직업 자체가 그런 거였으니.
다만, 신기하기는 했다.
시 방위군과 성기사가 적잖은 난리를 쳤음에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퍼펫의 존재는커녕 사건이 일어난 것조차 모르다니.
마치 다른 세상에 사는 기분이었다.
같은 시간대, 같은 공간에 있음에도 말이다.
딸랑딸랑.
올리버가 레스토랑 포레스트의 문을 열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참으로 오랜만에 방문한 기분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데이브 씨. 이리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느 때처럼 알이 나와 반겨주었다.
그는 평소에도 친절하고 예의 발랐지만, 오늘은 유독 더 그런 거 같았다. 올리버를 한층 더 대단하게 본다고 할까?
“예, 안녕하십니까. 알 씨····. 별일 없었는지요?”
“저야 늘 평온하지요. 사장님을 뵈러 오신 건지요?”
“예, 오염구역 일을 끝마쳤다고 보고하려고 왔습니다.”
사실, 통신장비로 해도 되지만, 이것저것 물어볼 게 있어 직접 찾아왔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얼굴을 맞대고 싶었다.
“그렇군요. 실례가 안 된다면 잠시 기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주인님께서 잠시 일을 하고 계셔서. 아주 잠시면 됩니다.”
정중하다 못해 조심스러울 정도로 알이 부탁했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올리버는 구태여 묻지 않고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바쁘신 분이니.”
“예,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잠시 기다릴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올리버는 고개를 끄덕이곤 알을 따라갔다.
알이 안내한 곳은 레스토랑의 한 테이블로, 주위를 둘러보니 벌써 층의 2/3가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중에는 안경을 쓰고 양복을 빼입은 화이트칼라 계층도 있었고, 해결사로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뭔가 안 어울리면서도 어울렸는데, 올리버는 그 가운데에 앉았다.
“커피 괜찮으십니까?”
“예.”
대답하기 무섭게 알이 커피 한잔을 가져왔다.
올리버가 미리 커피값과 팁을 주려고 했는데, 알이 정중히 거절했다.
“괜찮습니다.”
“예? 하지만····.”
“제가 말하긴 주제넘지만, 오염구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었습니다. 감히 부탁드리건대 그냥 마셔주셨으면 합니다.”
알의 말은 진심이었다.
올리버는 고개를 끄덕이곤 커피를 마셨는데, 반쯤 마셨을 때쯤 알이 다시 다가와 말했다.
“사장님께서 이제 들어오시면 된다고 하십니다.”
***
올리버는 포레스트의 진짜 사무실이 있는 지하 깊숙이로 내려갔다.
이제는 익숙해졌는데, 사무실에 도착하니 그는 사람 머리통만 한 커다란 통신기기를 통해 누군가와 바쁘게 통화 중이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
올리버가 모습을 보이자 그는 통화를 급히 마무리하며 올리버를 반겨줬다.
“왔구만. 어서오시게.”
“예, 오랜만에 뵙는 거 같네요.”
“실제로는 그리 오래 안 됐지만, 나도 오랜만인 것 같네····. 괜찮나?”
“예? 무엇이 말씀입니까?”
“이야기 들었네. 퍼펫과 싸웠다고 하지 않았나? 몸에 문제인 곳은 없나?····. 아, 실례, 손님을 불러 놓고 세워 뒀군. 일단, 자리에 앉게.”
올리버는 딱- 딱- 쿼터스태프로 바닥을 두들기며 자리에 앉았다.
포레스트는 여느 때처럼 술을 따라 한잔 내밀어줬는데, 올리버는 손으로 한쪽 눈을 가리며 주변을 살펴봤다.
확실히 변화가 있었다.
그다지 눈에 신경을 집중하지도 않았는데, 건물 너머는 물론 지상의 감정들이 보였고, 눈앞의 포레스트의 경우에는 감정이 예전보다 훨씬 자세히 보였다.
그는 현재 올리버에 대한 감탄과 자랑스러움이 가득했다.
아무래도 퍼펫을 상대해 살아남은 것 때문인 것 같았는데, 동시에 미세한 죄책감을 품고 있었다.
본인은 그 감정을 부정했지만, 감정이라는 게 그렇듯 쉽사리 떨치지 못했다.
그래서 올리버가 먼저 말했다.
“····제 몸에 별문제는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제 바로 안 온 것은 피곤해서 그랬습니다.”
실로 그랬다. 퍼펫과의 한바탕 난리 후 쉬지도 못하고, 몇 시간씩 취조당했으니.
너무 피곤해 바로 숙소로 가 곯아떨어졌다.
“이해하네. 많이 피곤했겠지.”
“뭐, 그래도 다행입니다. 성기사님들이 나타났을 때 뭔가 큰일이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순순히 풀어주더군요.”
“당연하네. 성기사가 제아무리 대단해도 결국 교단(敎團)에 묶여 있는 존재. 란다와 교단의 계약을 일방적으로 무시할 수 없지. 중개인 조합이 있는 이상 아무런 증거도 없이 끌고 갈 수는 없어.”
“그렇군요. 대단한데요.”
“하지만 너무 방심하지는 말고. 반대로 말해 건수만 있으면 멋대로 끌고 갈 수도 있다는 거니.”
올리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튼이라는 성기사는 실제로 올리버가 무슨 실수를 해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그러던 중 올리버는 문득 의문이 생겼다.
“질문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뭔가?”
“제가 알기로 성기사라는 분들은 인간계를 지키는 분들이라 그 권력이 아주 강하다고 하던데, 왜 저 같은 해결사를 함부로 못 데려가는 거죠? 그러니까 건수가 나오기 전까지요?”
“앞서 말한 대로 란다와 교단이 맺은 도시 협정 때문일세. 란다는 신앙심은 옅어도 매년 엄청난 기부금을 교단에 헌납하거든.”
올리버가 놀라며 물었다.
“돈 때문에 그런 거라고요?”
“그래, 돈 때문에 그러는 거야. 원래 신성(神聖)과 속세(俗世)가 만나면 그렇다네. 썩 나쁜 건 아니야. 그 덕분에 교단은 풍족한 운영비를 받고, 란다는 안전과 자유를 동시에 누릴 수 있으니. 어른의 세계 같은 거지.”
반 정도만 이해가 됐지만, 굳이 말하고 싶은 게 없어 올리버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러던 중 포레스트가 입을 열었다.
“이야기하고 싶은 건 그게 전부인가? 오염구역 일을 다 처리하고 왔다는 거랑 성기사에 관한 거?”
“아뇨, 하나 더 있습니다.”
“말하게. 나도 자네에게 할 말이 있으니. 자네가 먼저 이야기하게.”
올리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오염구역에 퍼펫이 나타난 것에 대해서 알 수 있겠습니까? 물어봐도 대답해 주시는 분들이 없어서요.”
포레스트는 술을 한 모금 마시며 머뭇거렸지만, 이내 대답해 줬다.
“해주지. 자네는 물을 자격이 있으니까····. 이야기가 복잡하고, 확실한 건 아니지만 우리 정보통에 의하면 란다 내무부에서 일하는 시(市) 고위 공무원이 퍼펫에게 매수당한 거 같아.”
“매수요?”
“그래. 그가 퍼펫인 줄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모르겠지만, 매수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공무원이 최근 도박에 손대 막대한 빚을 졌다더군. 그때, 매수당한 걸로 추정하고 있어. 수사 중이라는데 확실한 것 같아. 재밌지?”
올리버는 동의했다. 꽤 재밌었다. 어떤 의미로 웃기기까지 했고.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올리버가 듣기로는 이번 청소에 참여한 인원이 해결사, 용병 다 합쳐 이백에서 삼백 사이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허나, 그중 백 명도 안 되는 사람들만이 살아남았는데, 이 모든 것의 시발점이 한 공무원의 노름빚이라는 게 참으로 흥미로웠다.
너무 어이가 없어 웃기기까지 하달까?
너무나도 상식 밖이고, 비합리적이라 연구해보고 싶기까지 했다.
“나도 어이없다고 생각해. 하지만, 이게 란다의 일상이지.”
“그렇습니까?”
“그래, 란다····. 아니, 세상일 대부분이 바보들의 합창처럼 운영되거든. 이번 청소 건으로 중개인 조합은 시(市)와 한동안 싸우게 될 거야. 물론, 주먹질하는 게 아니라 협상의 형태겠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거죠?”
“죽은 해결사들 유가족에 대한 위로금과 인력을 대거 잃은 중개인들의 손해비용. 그 외의 서로 맺은 규칙 몇 개를 손볼 예정이야. 시와 중개인 조합은 엄연히 갑을 관계지만, 그래도 서로를 필요로 하니····. 이런 사건 터질 때마다 서로 꼬투리를 잡아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거든. 시(市)도 잘못이 크니 너무 과하지 않으면 어느 정도 우리 요구를 수용할 거야.”
“아하, 그렇군요.”
“그 외에도 중개인 조합 내부적으로도 한바탕 정쟁(政爭)이 일어날 거야. 이번 청소에 참여한 B, H, N, T의 중개인들 대다수 큰 피해를 봤으니. 서로 영역 싸움을 하겠지.”
“큰일인가요?”
“몇몇에게는. 경쟁력을 잃고 은퇴해야 할 수도 있으니.”
“포레스트 님도 그렇습니까?”
올리버가 아쉬워하며 말했다. 같이 일했는데.
그러나 포레스트의 표정은 빛났다. 마치, 기다리는 질문을 받은 듯.
“아니, 난 그 반대야.”
“반대요?”
“다른 이들은 인력을 잃은 데 반해 난 그리 잃지 않았거든. 아서 쪽과 협업한 이들이 많아서.”
아, 그러고 보니 아서 쪽 일행 중 포레스트 님과 함께 일하는 해결사들이 몇몇 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무엇보다 자네가 살아서 돌아왔지 않은가?”
“저요?”
“그래, 자네. 내가 관리하는 해결사 중 자네가 가장 뛰어난 해결사거든. 자네가 무사히 살아온 것만으로 난 큰 손해를 피했어. 거기다 퍼펫과 싸워 살아남았다는 소문까지 퍼지고 있으니 오히려 이익이지.”
“이익요?”
“그래, 퍼펫을 보고 살아남았다는 거로, 많은 거물이 자네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거든····. 이 바닥이 실력 위주라 해도 눈에 띄는 사건이 있어야 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모두 기피하는 오염구역 청소로 인해 자네 이름이 제법 알려지게 됐네.”
“아·····. 좋은 이야기 같기는 한데, 이해가 안 되네요? 전 이긴 게 아니라, 졌고 간신히 목숨만 부지했을 뿐인데요?”
“의외로 사람들은 그런 자세한 내막까지 관심이 없어. 퍼펫을 상대로 살아남았다. 이 사실만이 중요하지····. 그런 의미에서 하는 말인데, 지명의뢰가 들어왔네.”
“지명의뢰요?”
“그래, 여태까지 자네가 한 일은 일반의뢰네. 일과 보수를 중개인들에게 무작위로 배포하는 일반의뢰. 하지만, 지명의뢰는 그것과 좀 다르네.”
“뭐가 다르죠?”
“고객이 자네를 지명해 의뢰하는 거야. 자기 일이 중요하고 어렵다고 판단해 실력 있는 해결사를 직접 고르는 거지. 그만큼 일이 어렵고, 위험하며, 까다롭지만, 보수는 기본적으로 센 편이야. 평균 천만에서 때때로 억 단위까지 되기도 하지.”
“·····전 여태까지 천만 단위 일만 한 것 같은데요?”
“그만큼 자네가 어려운 일을 많이 한 덕분이지·····. 자넨 참 특이하구만. 가끔씩은 날카롭고, 속을 알 수 없는데, 평소에는 너무 태평해서 말이야.”
“그런가요?”
“그래, 난 그 점이 싫지 않지만, 조심하게. 그런 자넬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있을 테니. 나도 그럴 수 있고.”
“친절하시군요.”
포레스트가 웃었다.
“그렇게 말하면 나에 대한 신뢰가 두터워지거든. 약삭빠른 이들은 전부 이러니 조심하게.”
“예, 명심하겠습니다. 친절한 조언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어쨌건 지명의뢰는 보수가 높아. 경우에 따라 보수를 협상할 수도 있지. 단순히 액수를 높일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걸 요구할 수도 있네.”
“구체적으로 뭘 요구할 수 있죠?”
“유용한 아이템, 정보, 약 같은 거지. 물론, 요구한다고 다 들어주는 건 아니지만, 경우에 따라 들어주기도 해. 가령, 블랙마켓에 관해서 알아낼 수 있고 흑마법 서적을 얻을지도 모르지.”
“흑마법 서적요?”
“그래. 의외로 부유층 가운데서 흑마법 서적을 수집하는 이들도 꽤 있거든. 그걸 달라고 하는 거지.”
돈도 돈이었지만, 두 번째 조건은 더 관심이 갔다.
무작위로 의뢰인을 만나는 것보다 더 확실해졌다고 할까?
“꽤 마음에 드네요.”
“하지만 그만큼 리스크도 높아지지.”
“일이 어려운 거라면 아까 전에 말씀해주셨는데요?”
“아니, 꼭 그것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야. 직접 의뢰는 의뢰인에게도 중요한 일일 가능성이 높아, 그리고 정치적인 일일 가능성도 크고. 의도치 않게 의뢰인의 치부나, 죄악을 엿볼 수 있고, 그 과정에서 해결사들이 덤터기 쓰는 경우도 있어. 이런 일을 대비하기 위해 우리 같은 중개인이 있는 거지만, 솔직히 말해 전부 다 지켜줄 수 있는 건 아니야.”
얼핏 들으면 무책임한 말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이번 오염구역 사건을 통해 올리버가 알게 된 거라면 세상은 생각보다 거짓말을 기반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거였다.
거짓말이 들통나 사건이 커지면 그때 부랴부랴 뒷정리하지만, 거짓말 자체를 없앨 생각은 없는 거 같았다.
사건을 일으키고, 뒷정리하는 게 상대적으로 더 편하니까.
그리고 그것은 중개인이나 해결사라고 다르지 않았다.
뭐가 됐건 먹고살기 위해 하는 일.
직업윤리를 비웃는 사건이 일어나도 그 이상의 힘과 이익으로 꿰면 굴복할 수 있는 게 현실이었다.
오히려 이점을 정확히 짚어주는 포레스트의 태도가 대단한 거였다.
최소한 올리버는 그렇게 생각했다.
“예, 이해했습니다.”
“진심인가?”
“예, 캔트 님도 이에 관해 어느 정도 경고했고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고, 조심하는 게 제 일이죠.”
“·····직접 의뢰면 만나는 상대도 더 위험할 거야. 퍼펫 같은 고위험등급 범죄자는 아니겠지만, 이 바닥에는 아직 수많은 강자들이 있거든. 쉽게 말하면 피라미가 있는 강에서, 피라냐가 있는 강으로 옮기는 셈일세.”
“그렇군요. 괜찮습니다.”
올리버의 대답을 들은 포레스트는 김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
“예상한 태도긴 하지만, 그래도 막상 대답을 들으니 기운이 좀 빠지는군. 그럼, 이왕 온 거 이야기라도 한번 들어볼 텐가?”
올리버가 거절했다.
“아뇨. 오늘은 거절하겠습니다.”
“그래? 의외군. 재촉할 생각은 없지만, 자네라면 바로 보여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예, 약속이 없으면 보여달라고 했을 텐데, 곧 약속이 있거든요.”
“약속? 그거 신기하군. 실례가 안 되면 누군지 물어도 되겠나?”
올리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제게 좋은 조언을 해주신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