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arlock RAW novel - Chapter 94
94. 신분증 (1)
예상치 못한 요안나의 선물.
올리버는 흔쾌히 그것을 받아들였다.
책을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그녀가 선물할 때 어떠한 기대 혹은 희망을 품고 있기도 해서인데, 그녀가 무슨 의도로 이런 호의를 베푼 건지 알고 싶었다.
아마, 이 선물을 읽고 난 뒤면 물을 수 있을지도.
그래서 올리버는 요안나가 선물해 준 파테르 경전이라는 것을 읽어봤다.
식사할 때, 로스번에게 숫자와 글을 가르칠 때, 퍼펫에게서 노획한 송장인형 서적을 읽을 때, 코드어를 독학할 때, 개인적인 흑마법 실험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주야장천 파테르 경전만 읽었는데,
그 결과 이 책이 상당히 기괴하다는 걸 깨달았다.
파테르 경전의 기본 구성은 이랬다.
파테르 경전 속 인물의 이야기를 서술하며 각각 중요한 대목에 대화나 구절 따위를 쓰고, 이에 대한 해석을 내놓아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이드 라인을 제시하는 거였는데.
문제는 이것이 올리버가 보기에는 꽤 모호하다는 거였다.
이야기가 나쁘다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허나, 이야기와 구절은 사람마다 해석이 제각기 다를 수 있는 법인데, 파테르 경전이라는 것에서는 자의적인 해석을 내놓아 이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게 문제였다.
책이란 지식을 얻고 사고의 폭을 넓히는 것인데,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 파테르 경전이라는 것은 책의 기능을 다 하지 못하는 셈이었다.
그 외에도 모순되고, 앞뒤가 안 맞으며, 자신의 주장을 스스로 부정하는 행동 따위가 난무했는데, 그런 덕분에 책을 이해하는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모되었다.
그래도 요안나가 준 선물이기에 올리버는 몸도 회복할 겸 한동안 휴식 기간을 가지며 파테르 경전을 읽어봤다.
포레스트 역시 딱히 뭐라 하지 않았다. 그사이 괜찮은 일을 탐색해 두겠다고 말할 뿐.
참으로 친절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천천히 시간이 흘렀는데, 그사이 놀랍게도 시에서 이번 오염구역 청소에 참여한 인원과 사망자들에게 적잖은 보상금을 제공해 주었다.
중개인 조합이 시(市)와의 끈질긴 협상 끝에 얻어낸 거라 하였는데,
원래라면 사망자에게만 보상금을 주고, 보상액 역시 일괄 지급될 거였으나,
시 공무의 허술한 일 처리와 생각보다 큰 중개인들의 피해에 시에서 한 발 양보하였다고 포레스트가 설명하였다.
자진 참여한 해결사들은 미리 계약서에 적힌 보상금의 3배,
시에서 지정해 억지로 참가한 해결사들의 경우에는 그들이 여태까지 달성한 임무와 그 액수에 따라 차등지급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죽은 자들뿐 아니라 올리버에게도 통용됐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 3천만 란다.”
올리버가 십만 란다권으로 구성된 300장의 지폐를 바라봤다.
“·····원래 이렇게 많이 챙겨주나요?”
“절대 아니지. 시(市)가 예산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펑펑 쓰는 건 결코 아니야. 오히려 만만하다 싶으면 쥐어짜기까지 하지. 오죽하면 란다 최악의 악덕 사업체가 시(市)라는 이야기가 있을까?”
포레스트가 청산유수처럼 말했다.
단순히 말을 잘하는 것을 넘어 진심으로 란다를 그렇게 생각하는 게 느껴졌다.
그가 다시 말했다.
“···하지만 그게 단점이자 장점이기도 하지. 도움이 된다는 전제하에서는 꽤 크게 투자하거든.”
“투자요?”
“그래, 투자. 가령, 지금 자네가 받은 보상금은 다른 해결사들에 비하면 훨씬 많은 축이야.”
“그래요?”
“그래. 퍼펫을 상대로 살아남은 해결사란 그런 거니까. 그 말은 즉, 자네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는 거지. 그 보상금 역시 일종의 신호인 셈이네.”
“고맙긴 하지만 어째 약간 부담스럽게도 들리는데요?”
“정확히 봤네. 썩 좋은 일은 아니야. 여차하면 부려먹겠다는 뜻이니. 물론, 이를 기회 삼아 거물 밑으로 들어가 더 높은 곳으로 가는 방법도 있지만, 자네는 그게 싫을 거고.”
사실이었다.
올리버의 목표로 거물들과 인연을 맺는 것은 있었지만, 그들 밑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조직이나 누군가에게 소속되면 그쪽 일을 우선해야 하는 것도 있었고,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수도 있으니.
영 성미에 맞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그러는데, 안 받는 방법 있나요?”
“안 받는다고?”
“예, 약간 부담스러워서. 지금 풍족하진 않지만, 그럭저럭 돈이라면 있고요.”
포레스트가 돈다발을 올리버 쪽으로 밀었다.
“아니, 그냥 받게. 시(市)는 자기 호의를 거절하는 사람을 싫어하거든. 그 사람의 의사와 상관없이.”
“부당한데요?”
“당연히 부당하지. 여긴 란다라고. 도대체 이 도시에서 뭘 배웠나?”
결국 올리버는 포레스트의 권유에 돈을 먹보 주머니에 넣었다.
하긴, 여차하면 지금 신분을 버리는 방법도 있긴 하니 괜찮긴 했다,
‘·····그래도 그건 정말 최후의 방법으로 미루고 싶네. 지금까지 쌓은 게 너무 많아.’
올리버가 해결사로서의 경력과 포레스트, 머피, 책방 노인, 요안나 등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먹보 주머니가 고액화폐 다발을 달콤하게 삼키는 와중 포레스트가 서류철을 몇 개 가져와 올리버 앞에 놓았다.
“혹시 다 쉬었나?”
올리버가 서류철을 확인하며 대답했다.
“아뇨, 아직요.”
서류철 안에 있는 것은 의뢰 내용으로 올리버를 상대로 한 지명의뢰였다.
포레스트가 말한 대로 다들 조건이 후하였는데, 기본 5천 란다였으며, 1억 란다나 하는 일도 있었다.
일의 종류는 다 제각기.
U구역에 있는 한 유리 공장을 파괴해달라는 내용이 있는가 하면, V구역의 밀수 시장을 테러해달라는 내용도 있었고, X구역의 비소속 갱을 살해해 달라는 의뢰도 있었다.
“일이 어째 여태까지 했던 것보다 공격적이네요?”
“돈이 늘어난 만큼 노골적인 요구를 하기 시작하거든. 하지만 꼭 그런 것만 있는 건 아니야.”
실제로 그랬다.
파괴 암살 말고도 경호나 경비 일이 있었는데, 개중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L구역의 한 경매소와 경매 상품을 지켜달라는 거였다.
경매 상품은 식민지에서 가져온 왕의 미라와 황금관, 옥좌 따위가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흥미롭긴 했지만 당장 끌리는 건 없었다.
아니, 끌리는 것 이전에 당장 일을 할 기분이 아니었다.
돈이 좋긴 하지만, 돈은 결국 도구일 뿐.
올리버는 일보다는 이번 오염구역 청소 때 얻은 송장인형을 하루라도 빨리 수리 개조해 보고 싶었다.
잘만하면 단순한 탐구욕을 채우는 걸 넘어 해결사 일에도 사용 가능할 괜찮은 수단이 생길 수 있었는데, 문제는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거였다.
실험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외부로부터 분리된 안전한 공간이 필수.
허나, 당장 올리버 상황으로 구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음·····. 아쉽긴 하지만 일단 실험은 뒤로 미루고 일부터 해서 돈을 모을까? 창고를 살 돈이 한두 푼 하는 건 아닐 테지만. 아니면 창고를 달라고 협상해 달라고 할까?’
올리버가 천천히 창고를 구할 계획을 짰는데, 그 순간 머리가 번뜩였다.
창고를 사기 위해서는 돈뿐 아니라 신분증이 필요했고, 그 신분증을 과거 머피가 마련해 주겠다고 한 적이 있었다.
킴벨 패밀리의 머피가.
“포레스트 님.”
“뭔가?”
“혹시, 머피 씨에게 연락 온 것 없습니까?”
그러자 포레스트가 살짝 눈이 커졌다.
“놀랍군. 어떻게 알았나? 오늘 아침 머피가 내 쪽에 연락 왔는데, 자네에게 할 말 있다고. 이야기 다 끝나면 알려줄 생각이었네.”
진심.
올리버는 머피가 무슨 일로 연락했는지 물었고, 포레스트는 대답했다.
“저번에 말한 대금을 준비했다더군. 편할 때 자기 가게로 오라고 했네.”
***
공장지대에 인접한 T구역 43번 밤거리.
올리버는 이곳을 방문했다.
근처에 노동자 거주지도 있어 이곳에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대다수 무리를 지어 거리에 있는 주점이나 붉은 지붕이 칠해진 정체 모를 가게에 들어갔다.
가끔씩 여자 비명소리나, 욕설, 싸움 소리가 났는데, 이런 곳은 방문해 보지 않은 올리버로서는 참으로 신기한 곳이었다.
감정이 넘친다고 할까?
여기서는 대상에게 별다른 피해를 주지 않고 감정을 추출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조금 진지하게 생각해볼까? 추출 과정만 숨기면 손쉽게 감정을 확보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럼 돈도 아낄 수 있고.’
나쁜 생각 같지는 않았다.
시간을 들여 고민할 가치가 있을지도.
허나, 올리버는 잠시 이 생각을 뒤로 미루고 약속 장소로 갔다.
포레스트를 통해 머피는 올리버에게 부탁한 신분증을 만들었다고 전했는데,
정말 미안하지만, 자기들 가게에 직접 와서 받아가 달라고 부탁했다.
요즘 사업이 바쁘다고 정중히 양해를 구했는데, 때마침 신분증이라는 좋은 선물도 주니 올리버는 별다른 불만 없이 바로 수락했다.
솔직히 킴벨이 말한 가게란 곳도 궁금했고.
“이곳인가?”
올리버가 붉은 벽돌 건물 사이에 있는 내리막 계단을 보며 말했다.
그리 깊진 않았지만, 계단 끝에는 작은 문이 있었고, 적잖은 사람들이 계속해 들어가고 있었다.
포레스트의 말에 의하면 이곳이 킴벨 패밀리가 운영하는 비밀 주점이라고 하였는데, 사실, 그리 비밀 같지는 않았다.
‘구역 경찰들에게 돈 좀 찔러주면 웬만한 건 다 비밀이 되지.’
포레스트의 말이 떠올랐다.
올리버는 잠시 가게를 바라보다 다른 사람들 틈에 섞여 들어갔는데,
외길인데다, 인파에 섞여 가면 됐기에 길을 헤매진 않았다.
뚜벅뚜벅. 계단을 타고 쪽문으로 들어가 지하실에 있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는 겉모습과 달리 제법 화려한 내부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조셉이 좋아하던 블루문 같은 고급 호텔급은 아니었지만, T구역에 있는 가게 중에서는 그나마 가장 화려한 편이었다.
벽돌 벽이긴 하지만 먼지가 없었고, 탁자와 의자는 제대로 된 가구였으며, 술을 주문하는 카운터 뒤에는 온갖 화려한 색의 술들이 가득 배치되어 있었다.
그중 각양각색의 형광빛으로 빛나는 술들은 미세하게나마 마력을 머금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마법주인 듯했다.
“나는 팜 에셀 한 잔 줘.”
“예, 알겠습니다.”
“나는 이페 베지 주시오. 병 채로.”
“죄송하지만, 병 채로는 안 팝니다.”
“제기랄·····! 그럼 일단 한 잔 주시오!”
“슈크 피엑 다섯 잔 주시오. 여기 친구들하고 같이 먹을 거요.”
능숙한 바텐더들이 몰려드는 손님의 주문에 맞춰 잔에 마법주를 따라줬다.
그들은 기꺼이 지폐를 건네주고 술을 마셨는데,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보였다.
“신기하네.”
“뭐가 신기하시죠?”
올리버가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돌처럼 딱딱한 눈에 머리를 한쪽으로 넘긴 머피가 서 있었다.
깔끔한 양복과 손목에 금시계, 빛나는 구두.
그는 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풍족해 보였다.
올리버가 질문을 대답했다.
“병에 라벨이 있는 게 신기해서요. 엄밀히 말하면 밀주인데, 어떻게 라벨이 있죠?”
“제가 주문한 겁니다. 제품 자체도 중요하지만, 포장도 중요하거든요. 여자가 화장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품격을 한 단계 높여주죠.”
머피가 야심과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확실히 설득력이 있었는데, 포레스트가 왜 그를 주의 깊게 보는지 알 것 같았다.
“대단하시군요.”
“칭찬 감사합니다. 단순히 밀주 나부랭이가 아닌, 상품을 팔고 싶거든요····. 그건 그렇고 이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염구역 청소로 힘드실 텐데 괜히 불러서 죄송합니다. 부디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왕이면 직접 전해드리고 싶었거든요.”
오, 소문은 확실히 빨랐다. 벌써 오염구역에 관해 소문이 퍼지다니.
“아뇨, 괜찮습니다. 혹시, 지금 받을 수 있을까요?”
“신분증은 가게 사무실에 있는데, 잠시 따라와 주실 수 있겠습니까?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싶기도 해서요····. 부탁드립니다.”
어째 저번에 만났을 때보다 더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뭔가 속셈이 있는 것 같았는데, 그렇다고 악의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올리버는 알겠다고 대답하며 킴벨 패밀리의 주점 안 사무실로 따라갔다.
때마침 올리버도 물어볼 게 있었고.
‘크라임 펌에 부동산 회사가 있어, 창고 같은 걸 살 수 있다고 하던데, 나도 살 수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