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1195
약먹는 천재마법사 1195화(1195/1203)
약먹는 천재마법사 1195화
열병식(9)
철컥!!
레녹이 병실로 들어서는 것과 동시에 병동 사방에서 군인들이 걸어 나온다.
3군단의 휘장을 가슴에 박은 이질적인 군복. 차가운 표정으로 레녹을 응시하는 군인들의 손에는 온갖 총화기가 들려 있었다.
완전무장을 마친 채 마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리고 레녹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는 모습.
그 서슬 퍼런 기세에 레녹을 안내한 장교와 에넬은 물론이고, 병동의 의료진들조차 표정을 굳혔다.
“지, 진료 중에는 부디…….”
레녹이 병동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쏟아지던 살의 어린 기척과 시선.
그건 로베라이드 중장을 호위하는 3군단의 군인들이 보내는 감정의 역류였던 것.
“장성을 호위하는 경호임무를 맡았는데도, 감정을 숨길 생각이 별로 없어 보이는군.”
하지만 레녹은 등 뒤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군인들의 살의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이런 자들을 호위랍시고 데리고 다니면 기껏 되살아난 목숨이 아까워지지 않겠나.”
“이……!!”
“푸하하핫!! 틀린 말은 아니로군.”
목에 핏대가 솟은 군인들이 총을 강하게 움켜쥔 순간 로베라이드가 웃음을 터트렸다.
화상으로 일그러진 턱을 쓰다듬은 중장이 군인들을 향해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본관의 3군단 강습부대는 본래 이런 임무에 투입되어야 할 전사들이 아니니까. 그대가 보기엔 미숙해 보이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사령관님……!”
“제시. 뒤로 물러나 있어라.”
로베라이드가 단호한 눈빛으로 군인들을 멈춰 세웠다.
“감히 너희가 상대할 수 있는 사내가 아니야. 본관이 직접 맞이해야만 격을 맞출 수 있는 손님이다.”
“이 마법사에게 3군단 강습부대의 30% 가까이가 궤멸당했습니다……!!”
제시라 불린 군인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동료들을 잃었는데, 이 자리에서 참고 넘어가란 말씀이십니까?”
“군단을 위해서 한 일이었다.”
로베라이드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의를 위한 헌신이었고, 실패했다면 그것으로 끝일 뿐. 아니면 너희들은 다른 목표를 위해 군단에 복무하고 있기라도 했단 말이냐?”
“…….”
“부하들의 죽음은 슬프고 비통한 일이나, 그것으로 이 사내가 군단에 들어올 마음을 먹었다면 의미가 없던 것은 아니다.”
레녹을 물끄러미 바라본 중장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본래는 본관의 죽음조차도 이 사내를 움직일 이유가 되어야 했을 터. 그럼에도 살아서 얼굴을 보게 되었으니 부끄러움이 앞서는구나.”
“용암구덩이 속에서 목욕을 하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군.”
레녹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어떻게 그곳에서 살아 나온 거지? 미르바의 말에 의하면 시체조차 건지지 못한 줄 알았는데.”
로버트 로베라이드의 전투에서 레녹은 지옥불 환상궁을 사용해 그의 소우주를 강제로 폭주시켰다.
로베라이드의 소우주, 천둔(遷鈍)은 의념에 따라 중량을 더해가며 폭발적으로 위력을 늘려나가는 강화기.
그렇기에 소우주가 폭주한 시점에서 로베라이드는 자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지반 아래 용암 속에 처박혀야 했다.
아무리 뛰어난 육체능력자라도 용암 안에서 영원히 버틸 수는 없으니,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핏물이 되어야 했을 터.
하지만 로베라이드는 전신에 화상을 입긴 했어도, 보란 듯이 살아남아 레녹의 앞에 나타나 있었다.
“그대가 폭주시킨 본관의 소우주 때문이었지.”
중장이 침상에 누운 채로 느긋하게 말했다.
“본관도 구체적인 경위는 잘 알지 못하지만, 본관의 소우주는 본디 근원심상이나 성취에 기반한 힘이 아니야.”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지?”
“군단에 충성하는 본관조차도 매료되었던 힘의 극치. 가히 투신(鬪神)이라 부를 법한 위대한 전사에게 전해 받은 깨달음에 가까우니.”
로베라이드가 시선을 돌렸다.
“그렇기에 그대가 폭주시킨 소우주는 본관의 근원심상을 완전히 망가뜨리지 못하여, 본관은 보다 이른 시점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것이다.”
“…….”
다소 난해한 대답이었지만, 레녹은 로베라이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요약하자면 중장의 소우주가 본인의 근원심상에 기반한 능력이 아니기에, 소우주가 폭주해도 심상이 망가지는 일은 없었다는 뜻.
그리고 그건 그의 소우주가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 받은 깨달음의 잔재였기 때문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8레벨의 군단장이나 되는 작자가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나 싶긴 했지만, 정작 본인이 이렇게 살아나왔으니 마냥 부정할 수는 없었다.
용암 속에 처박힌 중장을 도와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으니, 본인이 직접 움직이지 않고서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을 테고.
“확인사살을 제대로 못 할 만큼 손속이 느슨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레녹이 느릿하게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럼 이제서라도 그때 했던 싸움의 결착을 내주면 되겠나?”
철컥!!
이번에야말로 군인들이 레녹의 등을 향해 총구를 겨눈 채 방아쇠에 손을 얹었다.
“꺄아악!!”
“자, 잠시만요!! 잠깐!!”
안색이 파리해진 의료진들이 더듬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초인이 아닌 그들로서는 이 병실에 난무하는 마력만으로도 쉽게 버티기 어렵겠지.
하지만 레녹은 모두 의료진과 군인들을 일체 신경조차 쓰지 않고 전 3군단장을 바라보았다.
유프리아 아오셀의 치료대상이 하필 로베라이드 중장이라는 것은 지독한 우연에 가까웠지만.
일이 이렇게 된 시점에서 그때의 싸움에 결론을 내야 한다는 사실을 모두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
“불쟁이. 그대는 본관을 아주 멍청이로 보는구나.”
하지만 로베라이드는 레녹의 서슬퍼런 질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호탕하게 웃었다.
“본관은 우직하지만, 우둔한 사람은 아니다. 그 싸움에서 본관이 졌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할 만큼 어리석은 장수로 보였나?”
“…….”
“그날의 싸움에 후회가 남지 않았다 거짓말을 할 수는 없겠지. 죽은 부하들에게 마음의 빚을 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레녹을 강한 눈빛으로 노려본 로베라이드가 말했다.
“그대 같은 강대한 마법사가 군단에 합류하는 것은 그 모든 원한과 인과관계를 뛰어넘는 의미가 있으니.”
“…….”
“이는 군단이 내건 대의에 그 어느 때보다 한 발짝 가까이 다가서는 진보나 마찬가지. 그를 위해서라면 패배의 아픔이나 원한조차도 감수해야겠지.”
이 자리에서 3군단의 미련을 잘라내려는 것처럼 중장의 목소리는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그것이 바로 군단에 충성하며 목숨을 바친다는 의미인 것이다.”
“제멋대로 넘겨짚고 결론을 내리는 건 여전하군. 한번 죽다 살아난 뒤에도 배운 게 없나?”
레녹이 냉소했다.
“네가 그 싸움에서 진 이유는 내 능력을 멋대로 재단하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걸 깨닫지 못했다면 몇 번을 다시 싸워도 결과가 똑같겠지.”
“그럴지도 모르겠군.”
로베라이드가 침상에 누운 채 히죽 웃었다.
“그래서, 본관을 이제 와서라도 다시 죽일 생각인가?”
“…….”
“그대가 원한다면 이 비루한 목숨 하나 정도는 기꺼이 다시 내어주도록 하지. 싸움에서 패배한 순간 어차피 그대의 것이었다.”
“사령관님!”
뒤에서 소리치는 군인들의 목소리를 무시한 레녹이 생각에 잠겼다.
로베라이드가 살아 있다는 사실은 의외였지만, 그건 레녹이 알지 못하는 그의 소우주가 지닌 비밀로 인한 일이었을 뿐.
중장의 존재가 레녹에게 중대한 위협이 되거나, 살려둘 수 없을 만큼 위험한 비밀을 들킨 것도 아니다.
기껏해야 지옥불 환상궁의 진짜 능력을 그를 상대하는 과정에서 공개했다는 정도.
여기서는 그를 죽이는 대신, 유프리아에게 맡겨두고 본래 목적에 집중하는 편이 좋겠지.
“유프리아.”
“이제야 끝난 겁니까.”
레녹의 옆에서 사태를 방관하던 유프리아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단명종의 호승심은 이해하기가 힘들군요. 상대가 꼬리를 말았음에도 숨통을 끊을 이유를 고민하는 겁니까.”
“아니. 이 자를 다시 죽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중장의 처우에 대해서는 맡기지.”
“저는 단명종과는 달리 의미 없는 시간낭비를 즐기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한 유프리아가 로베라이드가 누워 있는 병상 앞에 섰다.
“바로 시작하도록 하죠.”
“아, 그쪽이 지휘부에서 초빙했다던 예의 ‘치료술사’였군.”
로베라이드가 유프리아를 올려다보며 껄껄 웃었다.
“내 치료를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 3군단장의 직위를 임시로 넘겨주었다 들었는데, 군단장 노릇은 할 만했나?”
“몇 번 대답을 한 적이 있지만, 단명종의 군세를 이끄는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흥미도 없습니다.”
유프리아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치료과정에서 복잡다단한 절차들을 생략하기 위해 군단장의 자리를 잠시 맡은 것뿐. 거래가 끝나면 의미가 없어질 일이지요.”
3군단장의 자리를 유프리아가 받은 것 자체가, 로베라이드를 치료하기 위한 안배의 일종이었나.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유프리아와 지휘부의 거래가 어떤 식으로 진행된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뭐, 지휘부에서 그렇게까지 하면서 모셔온 손님이라면 실력을 의심할 필요는 없겠군.”
중장이 손가락을 까닥이며 말했다.
“잘 부탁하네. 이래 봬도 완전히 불타 짓뭉개진 몸이라서 말이야, 애매한 치료술식으로는 거의 효과가…….”
“압니다.”
로베라이드의 말을 끊은 유프리아가 말했다.
“전신의 신경이 뭉개진 건 물론이고, 체내에 응측된 열기 때문에 체온이 내려가지 않아 세포가 융해되고 있군요.”
“…….”
“신진대사가 멈춰 주사로 영양분을 주입하는 것이 한계일 겁니다. 그나마도 의념을 사용해 억지로 무너지는 육신을 붙잡고 있겠죠.”
무심한 시선으로 중장을 내려다본 유프리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슬슬 의식을 유지하는 것도 힘겨울 텐데, 유언을 남길 생각이 있다면 들어드리겠습니다.”
“……거기까지 알고 있다면 더 미룰 이유도 없겠어.”
로베라이드의 입가에 걸려 있는 미소가 살짝 흐려졌다.
“마지막 기회야. 그대가 실패하고 나면 다른 방법을 찾을 시간도 없겠지. 그러니까 생명술식이든 치료술식이든 빨리 결판을 내주겠나? 본관이 살아야 하는지 죽어야 하는지, 어느 쪽이든 슬슬 정하고 쉬고 싶군.”
“유감이지만 군단 지휘부와 한 거래는 당신을 무덤에 안치하는 것이 아닙니다.”
손을 들어 올린 유프리아가 말했다.
“죽고 사는 문제는 치료를 마친 다음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세요.”
그녀의 손이 로베라이드의 상체 위에서 가볍게 쥐었다 펴진 찰나.
로베라이드의 상반신이 쩍 갈라지며, 내부의 근육과 신경, 장기를 그대로 드러냈다.
촤악!!
혈관이 뭉개져 피도 흘러나오지 않는 처참한 단면. 뒤틀린 갈비뼈 사이로 겨우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심장.
로베라이드가 순간적으로 눈썹을 꿈틀거리고, 병동 사방에 서 있던 군인들이 입을 쩍 벌렸다.
“이, 이게 무슨!!!”
“타인에게 생명술식을 사용할 때는 술식효율을 섬세하게 조절해야 합니다.”
경악하는 의료진의 뒤에서 유프리아가 소매를 걷어붙였다.
“이처럼 상태가 심각한 경우에는 신체를 완전히 절개하고 술식을 사용해야 효율을 최대한으로 낼 수 있죠.”
“…….”
“당신에게 설명하는 겁니다, 에반 마르티네스.”
레녹을 향해 시선을 돌린 유프리아가 천천히 마력을 끌어올리며 말했다.
“지금부터 생명술식을 사용해 이 단명종을 치료할 테니, 그 눈으로 직접 확인하시길.”
대륙 어디서도 계통을 찾아보기 힘든 8레벨의 생명술사.
태고의 신비에 가까운 원시마법 형태로 다뤄내어 인간을 치료하는 일에 집중하는 순간.
레녹의 생명력이나 수명을 생명술식으로 보충할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다.
고개를 끄덕이며 가까이 다가서는 것과 동시에 유프리아가 눈을 감고 양손을 들어 올렸다.
파아아앗!!!
유프리아가 양손을 합장하는 것과 동시에 녹색의 파문이 그녀를 중심으로 회전한다.
“창생조술(昌生調術) 내법(內法).”
원시마법(原始魔法) : 창생조술(昌生調術)
팔종(八種) – 내법(內法)
[유생(留生)]파아아아아!!!!
유프리아의 양손에서 폭발한 녹색의 광채가 순식간에 병실을 가득 메운다.
병동 최상층 하나를 통째로 사용하는 병실을 가득 채우고 바깥까지 뻗치는 따스한 온기.
지켜보는 이들조차 순간적으로 눈을 감는 눈부신 온기 속에서 레녹이 유프리아를 주시했다.
블레이버 마탑주에게 빼앗은 치유의 불씨처럼, 레녹에게 몸을 치료하는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레녹이 원하는 것은 말 그대로 생명체를 조작하거나 생체정보에 직접 간섭이 가능한 능력 그 자체.
그것을 통해 레녹의 수명을 직간접적으로 손댈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를 위해서라면 유프리아가 생명술식을 사용하는 순간을 지켜보고 술식의 요체를 훔쳐 배워야겠지.
치이익!!!
유프리아의 손이 지나는 곳마다 로베라이드의 전신이 녹아내리고, 그 직후 새살이 돋아난다.
화상으로 일그러진 피부와 장기, 혈관과 신경, 내장근육까지 손을 대어 술식의 대상으로 삼는다.
‘단순하게 생명술식을 사용해 육신을 치유하는 것이 아니군.’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레녹이 생각에 잠겼다.
‘고온에 녹아내린 세포조직을 수복하는 게 아니라, 한번 완전히 사멸시킨 뒤 술식으로 재생시킨다.’
생명술식이란 생명을 지닌 존재를 대상으로 삼아 발동하는 기적.
그 힘은 생명의 움직임을 조작하는 것부터, 세포의 사멸과 재생을 강제로 촉발시키는 선까지도 미친다.
유프리아는 로베라이드의 사멸시켜 죽인 뒤, 직후 통째로 재생시켜 망가진 육체를 수복하고 있던 것.
‘확실히, 이런 식이라면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이라 해도 강제로 살려낼 수 있겠군. 하지만…….’
유프리아가 로베라이드를 치료하는 원리는 이해했지만, 술식을 습득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
하물며 그 술식이 평범한 마법이 아니라 원시마법이라면 얼마나 어려운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의념과 마력의 움직임을 관조하고, 술식원리의 근간을 간파하지 않고서는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일.
의식을 고조시킨 뒤, 기감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이 병동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관측한다.
유프리아가 생명술식을 사용하고 있는 로베라이드의 흉부 위쪽.
아물어가는 절단면에 정신을 집중한 순간, 레녹은 무언가 강렬한 기시감을 느끼고 멈칫거렸다.
‘……이건.’
유프리아의 생명술식이 아니라, 상처 입고 피 흘리는 로버트 로베라이드에게 느낀 위화감.
시술 도중 어느새 의식을 잃은 3군단장의 내면의 소우주가 레녹에게 반응하고 있다.
키이이이잉……!!!!
한 사람의 인간을 이루는 정체성이자 기반. 자신을 자신으로 존재하게 하는 마음의 정경.
육신을 무구으로 삼은 전사 역시 근원심상을 현실에 직접 투영하지 않을 뿐, 분명 지니고 있는 바.
레녹은 생명술식을 관측하기 위해 의식을 끌어올렸다, 본의 아니게 로베라이드의 소우주를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오래전 레녹이 자신의 술식으로 로베라이드의 소우주를 직접 폭주시킨 적이 있었기 때문이겠지.
그때 로베라이드의 내면에서 폭주하며 흘러넘친 기억과 의념이, 오랜 시간을 넘어 다시금 레녹에게 흘러들어 온다.
파아아앗!!
로버트 로베라이드의 소우주, 천둔(遷鈍).
질량을 부풀려서 무게를 더하는 소우주의 근간을 들여다본 순간, 레녹은 그 너머에서 누군가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군단과의 거래는 이게 마지막이다, 버러지.]끝없이 펼쳐진 전장. 피에 젖은 거체. 기름져 번들거리는 묵색의 비늘.
헤아릴 수 없는 군인들의 시체 위에 서 있는 거인의 형상.
그것이 로베라이드의 근원심상에 새겨진 투신(鬪神)의 정체임을 깨달은 순간.
“에반 마르티네스.”
시야가 암전하는 것과 동시에, 무표정한 얼굴의 유프리아가 눈앞에 서 있었다.
“치료가 끝났습니다. 일주일 정도 요양하고 재활을 시작하면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겁니다.”
“…….”
“꽤나 집중하고 있던 듯한데. 제 술식을 지켜본 결과는 만족스러우셨습니까.”
레녹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어수선한 병실을 돌아보았다.
눈을 감고 잠든 로베라이드의 몸이 병상에 실려 이송되고 있다.
분주하게 움직이며 상태를 체크하는 의료진과 그를 호위하기 위해 지원을 부르는 3군단의 군인들.
중장을 향한 안도와 환희. 레녹을 향한 경계심과 적의가 동시에 교차하며 어그러지는 공간.
하지만 레녹은 그 와중에도 의식을 잃은 로베라이드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서야 레녹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유프리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혹시 지금 제 말이 들리지 않는 겁니까.”
“……아니.”
한참이 지나서야 침묵을 깬 레녹이 대답했다.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지만…… 도움이 됐다.”
“다행이군요. 이미 두 번째 치료대상에 대해서 이야기를 전달받았습니다. 바로 이동하도록 하죠.”
유프리아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
“이제 곧 전 군단이 지켜보는 가운데 군단장 임명식이 시작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장교의 안내를 따라 걷는 유프리아의 뒷모습을 레녹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녀와는 다른 방향으로 멀어지는 로베라이드의 모습을.
로버트 로베라이드가 사용하는 소우주 천둔(遷鈍).
중장은 그것이 힘의 극치에 도달한 투신에게 전해 받은 깨달음이자, 자신이 살아 돌아온 이유라고 말했다.
레녹이 가벼이 흘려넘긴 대답 끝에서 마주하게 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소우주의 정체.
로베라이드의 소우주, 천둔(遷鈍)은 바로 크로켄 아실러스에게서 비롯된 힘이었던 것이다.
“…….”
요르타에서 크로켄과 만났을 당시, 레녹은 구세계의 대천사 카슈인을 불러내 크로켄을 상대로 함께 싸운 적이 있었다.
그때 카슈인은 크로켄을 천둔(天遁)의 괴물이라 부르면서 경외하고 경멸했지만, 레녹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던 바.
하지만 어처구니없게도,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레녹은 그 두가지 기억에서 연관성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천둔(遷鈍)과 천둔(天遁).
의미는 다르지만 이름은 같았던 로베라이드의 소우주가, 크로켄에게 전해받은 깨달음의 잔재였다면.
의념으로 질량을 더해 중량을 부풀리는 그 능력이, 크로켄의 불가침에 가까운 내구성과 관련이 있는 거라면.
레녹이 로베라이드의 소우주를 폭주시켰음에도 그가 살아돌아온 이유가 그곳에 있었다면.
“사령님. 군단장 임명식이 시작되기 전에 앞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 가면서 듣지.”
에넬의 말에 상념에서 깨어난 레녹이 걸음을 옮겼다.
군단에게 충성하는 중장조차 투신이라 부르면서 경외하는, 힘의 극치라 일컬어지는 위대한 전사.
온몸에 헤아릴 수 없는 저주를 짊어지고, 태어난 선 뒤로 한 발짝 물러선 천성의 강함.
어느 쪽이든 천둔이라는 개념이 크로켄 아실러스와 관련이 있음은 분명하다.
에단 바쥬르가 요르타를 여행하며 직접 견문록을 남긴 일도.
크로켄이 직접 나서서 위령탑을 무너뜨리고 그 흔적들을 전부 없앤 것도.
막연하게 기억하던 다른 시간선의 일들이 사실은 함께 엮여 있을지도 모르는 일.
크로켄 아실러스의 정체와 기원에 대해 군단에서 무언가를 알고 있다.
이번 열병식에서 조사해야 할 목표가 한 가지 더 생긴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