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1203
약먹는 천재마법사 1203화(1203/1203)
약먹는 천재마법사 1203화
대가(4)
에단 바쥬르의 목에 베인 상처가 없다.
상처가 아물어 붙은 듯한 흉터도, 그 흔적이나 절단면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에단 본인의 육체를 온전히 보존하고 있는 것처럼, 피부 위로 어떠한 손상도 없었다.
“……!!!”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그 모습을 확인한 레녹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일렁이는 푸른 불길 너머 무표정한 에단의 얼굴. 지금 이 상황에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않는 듯한 담담한 반응.
그 눈길을 마주하는 순간 레녹의 생각이 빠르게 가속하며 사방으로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상처가 없다. 어째서지?’
쿤다라의 구겁에서 카이세의 머리가 베였다는 사실을 안 이후, 레녹은 그 범인이 에단 바쥬르일 거라 생각해왔다.
그가 지금껏 군단에 복귀하지 않고 대륙을 떠돌다 이제서야 사령부에 돌아온 이유.
사천사화마경에서 다시 육신을 얻고 새롭게 태어났다는 일련의 소문.
작전 회의에서 자신의 목을 ‘떠받치고’ 있던 모습과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온 피.
결정적으로 프로젝트의 실패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듯한 일련의 언동까지.
마음 속으로는 결론을 내리고, 그 사실을 두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을 앞두었다 생각했음에도.
에단의 목을 확인한 시점에서 그 모든 전제와 결론이 레녹이 생각했던 것과 어긋나고 있었다.
레녹의 눈앞에 서 있는 에단은 카이세의 머리를 자신의 육체에 잘라 붙인 존재가 아니었던 것인가.
이 세계에 태어난 자신의 육신 그대로, 카이세가 아닌 에단으로서 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던 것일까.
그렇다면, 레녹이 지금까지 전해들은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카이세가 아니라 에단의-
우득.
찰나의 시간 동안 엄청난 속도로 뻗어나가던 레녹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레녹의 심장을 관통한 에단이 손을 비트는 것과 동시에, 푸른 불길이 폭발하듯 흘러넘쳤다.
푸확!!
완벽하게 부서진 결계의 파편이 사방으로 흩날리며 아름다운 유리색을 발했다.
푸른 불꽃으로 타오르는 정원 한복판에서 유리색 광채와 함께 비산하는 생명의 빛.
레녹의 몸이 복도 반대편 벽에 처박히며 강렬한 충격파를 내뿜었다.
콰아아앙!!!
“……!!!”
사방에서 불타 무너지는 사령본부의 거대한 구조물. 그 사이로 옮겨붙은 불길이 힘을 잃고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찰나에 가까웠던 레녹과 에단의 교전.
하지만 그 결착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이른 시각에,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벽에 처박힌 채 경련하는 레녹을 두고 에단이 천천히 목을 매만지며 일어섰다.
“내 목에 상처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군.”
“…….”
“무언가를 베어냈거나, 반대로 접합한 흉터 같은 것이 있을 거라 믿었나.”
레녹을 바라보며 에단이 표정 없는 얼굴로 말했다.
“어느 쪽이든 네가 기대하는 결과는 아니었던 모양이군. 유감이다.”
“……너는.”
굳은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보는 레녹의 입가에서, 피가 주륵 흘러내렸다.
에단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그의 공격을 억지로 한번 받아내고 거리를 좁힌 대가.
심장 부근을 불꽃으로 흩어 공방을 무시한 반동이 한발 늦게 찾아오고 있던 것.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말해두지.”
천천히 레녹의 어깨를 짚은 에단이 희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네가 바라는 그런 사람은 더욱 아니지.”
“…….”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한번 손에 넣었던 것을 되찾기 위해 여기에 있다. 그러니…….”
푸슛!!
그 순간, 에단이 다른 손으로 자신의 목을 픽 그어 상처를 냈다.
목을 타고 떨어지는 자신의 피를 손에 적신 에단이 중얼거렸다.
“한 번 정도는 더 선을 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나는 네 재능과 존재가 프로젝트의 결과물이었는지 확인하려 한다.”
레녹의 상처 부위를 향해 자신의 피를 가져다 댄 에단이 말했다.
“하지만 인간의 재능이나 소질이라는 건 간단한 테스트로 판단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한 개념이 아니지.”
“…….”
“그러니 나는 네가 보유한 재능과 잠재력을 한계까지 폭주시켜,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류값을 확인할 생각이다.”
피가 묻은 손을 레녹의 심장 부근에 밀어 넣으며 에단이 답했다.
“오래전 내가 인간의 재능을 편집하던 방식으로 오류를 일으키는지. 그걸 확인하면 네가 프로젝트에서 기원한 존재인지 알 수 있을 테니.”
“잠재력이라는 건, 그렇게 수치화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닐 텐데…….”
에단의 손에 가슴이 꿰뚫린 채, 레녹이 힘겹게 기침을 토해내며 대꾸했다.
“인간의 재능이나 소질을 특정해 강제로 폭주시킨다는 건, 애초에-”
“아니. 이미 군단 내에서 여러 번의 실험을 거쳐 성공을 거둔 일이다.”
“……뭐?”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레녹이 멈칫한 사이, 에단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오퍼레이션 시스템의 본래 목적은 재능의 계승과 보존. 속되게 말하면 프로젝트의 열화본에 가까운 힘이지.”
“…….”
“네게는 시스템이 효과를 보지 못한 모양이지만, 내 피를 트리거로 삼으면 비슷한 일을 하는 건 어렵지 않아.”
파아아앗!!!
에단의 피가 레녹의 몸에 스며드는 것과 동시에, 레녹의 몸에 복잡한 선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육신 전체가 복잡한 회로처럼 분해되어, 레녹의 내면에 강제로 각인되는 듯한 기묘한 모습.
인간의 내면에 강제로 ‘명령어’를 재설정해 삽입하는 듯한 현상.
“큭……!!”
파아아앗!!!!
그 순간, 레녹의 전신에서 강렬한 빛이 폭발하듯 새어 나와 솟구치기 시작했다.
육신을 구성하는 모든 세포와 조직이 일제히 활성화를 거쳐 강제로 각성하는 듯한 현상.
직후 레녹의 몸에서 마력이 미친 듯이 흘러나와 에단과 레녹을 휘감고 강렬한 폭풍을 터트렸다.
콰아아아아!!!!!!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다. 프로젝트를 쫓아온 구도자도, 너 같은 초월자도 그렇게 많지 않았으니.”
“…….”
“이 시점에 내 피를 사용하면 나 역시 반동을 피할 수 없겠지만…….”
표정없는 얼굴로 레녹을 내려다보던 에단이 중얼거렸다.
“네가 나를 보며 그러했듯이,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네 존재를 규명할 필요가 있다 생각한다.”
“그래…….”
천천히 시선을 들어올린 레녹이 중얼거렸다.
“무리해서라도 내 존재를 확인하려 할 만큼, 아직 미련을 놓지 못한 건가.”
화르르륵!!!!
그 순간, 레녹의 전신에 휘감긴 불길이 그 육신을 남김없이 불태우기 시작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 레녹의 눈빛은 아까와는 달리 선명한 초점이 잡혀 있었다.
“그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이 순간에 의미가 있군.”
“……마르티네스.”
예상과는 다른 레녹의 반응에 에단이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본래라면 이미 이 시점에 레녹의 심신이 완전한 활성화를 거쳐, 한계 이상으로 각성해야 하는 상황.
하지만 레녹은 에단의 피를 받아들인 뒤에도 그에 반응하거나 휩쓸리는 대신 이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직감한 에단이 서늘한 음색으로 중얼거렸다.
“설마, 처음부터 본인이 아니라-”
쿠화아악!!!!
레녹의 팔과 어깨, 목과 얼굴이 푸른 불꽃으로 불타 뒤덮여 나간다.
마나중독증을 앓고 있는 레녹 자신에게는 불가능한 육체를 불꽃으로 바꾸는 신기.
레녹이 그것을 에단과의 교전에서 거리낌 없이 사용할 수 있었던 이유.
“대역치고는 꽤 나쁘지 않았지?”
화신체의 몸을 빌려 의지를 전달한 레녹이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번에는 내 차례다.”
푸른 불꽃이 넘실거리면서 레녹과 에단이 서 있는 복도를 휘감고 하늘을 향해 솟구친 그 순간.
사령본부 건물 전체를 잡아먹은 거대한 불기둥이 하늘과 지상을 이어붙이면서 강렬한 빛을 터트렸다.
콰과과과과과과과!!!!!
* * *
“쿨럭……!”
철그렁!!
마른 기침을 토해내며 팔을 휘젓다, 겨우 지지대를 찾았다.
손바닥에 끈적한 기름이 묻는 것과 동시에, 금속성의 물체가 와르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입을 타고 흘러내리는 피를 닦으며, 흐릿한 시선을 겨우 들어 눈 앞을 확인했다.
발아래 기름 범벅이 된 나사와 볼트를 본 뒤에야 레녹은 이곳이 어디인지 깨달았다.
“……열병식 직전에 방문했던 군수공장이군.”
시비를 걸어오는 8군단의 마티스 준장을 태워 죽인 근처인가.
힘겹게 기침을 토해내며 일어선 레녹이 그대로 균형을 잃고 앞으로 넘어졌다.
콰앙!!
작동을 멈춘 컨베이어 벨트에 머리를 처박은 레녹이 어깨를 떨다 축 늘어졌다.
입가를 타고 흘러내린 피가 생산라인을 따라 뚝뚝 떨어졌다.
“바로, 움직여야…….”
에단 바쥬르에게 프로젝트의 진실을 듣고 그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충돌했지만.
레녹은 처음부터 이 자리에서 에단을 죽이거나 무력화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하진 않았다.
에단 본인이 엄청난 강자라는 사실 역시 근거 중 하나였지만, 무엇보다 레녹이 경계했던 것은 에단이 부활자라는 사실.
레녹이 모든 것을 쏟아부어 에단을 죽인다 해도, 그가 다시 살아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하지만 당장 에단이 지닌 능력이나 부활의 원리를 알아내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은 상황.
그렇기에 레녹은 처음부터 철저하게 에단의 목적과 정체를 밝혀내는 일에 집중했던 것이다.
그것도 레녹 자신이 아니라, 레녹 자신이나 다름없는 화신체를 사용해서.
‘계획대로 화신체를 대역으로 내세우는 건 성공했다. 하지만…….’
레녹이 자신의 몸을 화신체와 교체한 것은, 핵융합의 성질변화를 사용해 플라즈마를 터트린 직후.
전신에 플라즈마를 휘감은 건 에단이 화신체에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지만.
동시에 레녹 자신은 할 수 없는, 육체를 플라즈마화 시켜 에단의 공격을 무시한다는 방법을 실현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마지막 순간 공세로 돌아선 에단의 공격을 받아내고 정체를 확인한 것은 좋았지만, 문제는 그다음에 있었다.
그 직후 에단이 레녹의 재능을 강제로 폭주시키기 위해 주입했던 에단 본인의 피.
그 공정에 화신체가 폭주하면서, 레녹 자신에게까지 반동이 역류하고 있었던 것.
쿠구구구……!!
“우욱……!!”
참지 못하고 열기를 토할 때마다, 뜨겁게 달아오른 끈적한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식도를 익혀버릴 것처럼 뜨거운 피가 입안을 타고 역류하며 체내를 망가뜨렸다.
레녹의 내면에서 뜨거운 불길이 몰아치며, 뱃속을 바짝 태워 버리는 듯한 격동이 일었다.
온몸의 장기를 불로 지져버리듯이 몰아치면서 두들기고, 찢어발기는 듯한 거센 반동.
거세게 숨을 내쉬면서 컨베이어 벨트에 기댄 레녹이 표정을 굳혔다.
‘에단의 능력에 당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이건 화신체 본연의…….’
레녹의 재능을 강제로 폭주시켜 그 기원을 확인하겠다던 에단의 시도.
하지만 레녹은 애초에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레녹의 재능은 승천자와 초월자들조차 한계를 논하기는커녕, 직접 손을 대보지도 못했던 절대성.
프로젝트의 힘을 빌린다고 하더라도 타인이 빼앗거나 거둬갈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에단의 능력에 레녹이 이 정도로 거센 반동에 휩쓸리고 있는 이유.
그건 에단에게 당한 것이 레녹 자신이 아니라, 레녹이 조작하던 화신체였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에단이 숨기고 있는 비밀. 그가 품고 있는 미련과 발칸에 두고 온 목표.
그가 프로젝트를 통해 얻은 ‘힘’을 군단을 통해 다뤄내고 있다는 사실마저.
화신체를 사용해 마지막까지 그와 마주하지 않았다면 결코 알아낼 수 없었을 여러 비밀들.
하지만-
‘열병식 전부터 불안정했던 화신체가, 방금 그걸로 돌이킬 수 없는 수준에 이른 건가?’
레녹의 폭주하는 전격마법을 받아들이면서, 화신체 역시 통제를 벗어나 폭주하고 있던 상황.
그러한 기미를 강제로 억누르고 조작해왔던 화신체가, 방금의 일로 완전히 선을 넘어버린 듯하다.
화신술식을 취소하고 화신체를 회수하긴 했지만 이미 그 반동이 레녹의 몸을 좀먹기 시작한 상황.
“하아, 하아……!!”
에단과의 싸움이 결착에 도달하는 순간, 어떻게든 거리를 벌려 공장지대 근처까지 도착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당장 여기서 멈추는 일 없이 계속해서 움직여야 했다.
사령본부를 완전히 터트렸으니 열병식에 참석한 전 군단이 이변을 알아차렸겠지.
정황을 파악하고 나면 오래지 않아 작전지역을 중심으로 수색을 시작할 가능성이 높다.
쿠화아아악!!
레녹의 전신에서 무형의 마력이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와 주변을 박살 내고 터트렸다.
몸을 추슬러 움직이기는커녕, 앉은 자리에서 겨우 의식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최선.
이 자리에서 만약 혼절해 버린다면 그 시점에서 사실상 죽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레녹이 떨리는 손을 들어 치유의 불씨라도 사용하기 위해 마력을 끌어올린 순간.
“그런 몸으로 마력을 사용했다가는 전신의 피가 역류할 겁니다.”
탁!
옆에서 누군가 차가운 손으로 레녹의 손목을 낚아챘다.
“자중하도록 하는 게 좋겠군요. 이 자리에서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유프리아……?”
무표정한 얼굴의 백발 여성이, 레녹의 옆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을 놓은 그녀가 레녹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마력을 끌어올렸다.
“아직 인지능력이 망가진 건 아니었군요. 이 정도라면 응급조치가 통할 겁니다.”
원시마법(原始魔法) : 창생조술(昌生調術)
육종(六種) – 내법(內法)
[정생(停生)]파아아앗!!!
따스한 녹색의 광채가 레녹의 몸에 깃드는 것과 동시에 온기를 전해준다.
끓어오르던 체온이 조금씩 낮아지며 레녹의 눈동자에 초점이 선명해졌다.
안정되어가는 호흡을 천천히 고르면서 시선을 들어 올린 레녹이 물었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군단 지휘부와의 거래로 치료가 예정되어 있던 두 번째 환자가 예정된 시각에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유프리아가 레녹의 몸에 생명술식을 불어넣으면서 대답했다.
“그 때문에 거래의 대가였던 ‘부품’을 인계받기 위해 공장 인근에서 대기하고 있었죠.”
“…….”
확실히, 그 말을 듣고 나니 기억이 났다.
유프리아가 군단 지휘부와 거래를 했던 이유는 쿤다라의 재건에 필요한 부품을 받기 위해서라고 했었나.
막연하게 필요한 물건이라고 생각하고 넘겼는데, 설마 말 그대로 공장에서 생산되는 부품이었을 줄은.
“부품을 인계받은 직후 사령부에 문제가 터지면서 관계자들이 모두 이동 중이었습니다.”
유프리아가 무표정한 얼굴로 레녹을 응시했다.
“역시, 당신이 한 일이었습니까.”
“……그래.”
엉망진창으로 망가져 있던 레녹의 체내를 수습하고 활기를 북돋아놓는 솜씨.
운신이 가능할 정도로 기력이 회복되는 것을 레녹이 느낀 찰나, 유프리아가 말했다.
“제가 사용하는 [정생(停生)]은 말 그대로 응급조치에 불과한 술식. 상태를 호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목숨은 부지할 수 있는 선에 멈춰두는 것에 불과하죠.”
“…….”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당신의 육체는 제 생명술식을 굉장히 높은 효율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건 당신이 생명계통의 술식에 엄청난 소질을 지니고 있거나-”
유프리아가 레녹을 빤히 바라보았다.
“저와 같이 원시마법을 익힌 사용자이기 때문이겠지요.”
“…….”
어느 쪽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레녹은 말레온 그노시스에게 원시마법 성련팔극식의 요체를 배워두었으니까.
레녹이 무어라 대답하려던 찰나, 유프리아가 레녹의 상처 부위를 향해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그리고 제가 생각하기에, 어느 쪽이든 당신의 목숨을 살려두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런가.”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면 일어서죠.”
술식을 멈추고 일어난 유프리아가 레녹을 내려다보았다.
“당장 사령부를 떠날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당신이 도망칠 수 있는 방향까지는 동행하겠습니다.”
“…….”
확실히, 유프리아의 말대로 회복 속도가 꽤나 빨라 걸을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레녹이 자리에서 일어나 텅 빈 군수공장의 시설을 힘겹게 걸었다.
오직 레녹과 유프리아의 발소리만이 울려 퍼지는 고요한 공동.
무표정한 얼굴로 걷던 유프리아가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을 수 있겠습니까.”
“……원수를 만나 내가 묻고 싶어 했던 것을 확인했지.”
레녹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생각했던 대로였을지도 모르겠군.”
“…….”
에단을 만나기 전 레녹은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을까.
그가 레녹을 위해 프로젝트의 진실을 답해줄 거라, 혹은 이제라도 레녹을 도와줄 거라 기대했을까.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가 군단에 복귀한 이유가 오로지 자신의 목적이자 방향성을 위해서라는 것도.
애초에 그가 더 이상 레녹이 알고 있는 과거의 인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 역시.
막연하게나마 예상하고 있던 진실과, 그의 변절을 이제나마 두 눈으로 확인했을 뿐.
레녹이 생각에 잠긴 사이, 유프리아가 공동 저편 통로를 가리켰다.
“저 방향이 군수공장 외곽 2사령부 북문으로 향하는 길입니다.”
“…….”
“저곳을 통해 작전지역을 벗어나 북상하면 오래지 않아 북대륙에 도착할 수 있겠죠.”
“……그런가?”
힘없이 웃은 레녹이 천천히 걸음을 돌려세웠다.
천천히 공장 밖으로 향하는 문 앞에 선 레녹이 중얼거렸다.
“미안하지만, 아직 그런 말을 하고 있을 때는 아닌 것 같군.”
“……네?”
철문이 열리고 빛이 쏟아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귀청을 때리는 굉음이 폭발했다.
쿠구구구구!!!!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무수한 군수공장의 생산시설과, 양옆으로 나 있는 아득한 벌판.
눈에 보이는 모든 공간에 대열을 갖춘 채 이쪽을 포위하고 포신을 겨눈 전차들의 군세.
하늘을 비행하는 전투기의 편대와, 저 멀리 사령부의 하늘 위에 떠오른 거대한 공중요새.
지상과 하늘 양쪽에서 헤아릴 수 없는 굉음과 불빛이 공명하며 수천갈래 열기를 피워 올린다.
“잠깐, 이건…….”
[에반 마르티네스.]공장 위쪽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싸늘한 남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군단 사령본부에 저지른 테러. 원수를 향한 하극상. 이하 군법 44조 위반에 의거하여 네 추살명령이 떨어졌다.]철컥!!
전차의 포신이 일제히 기울어지며 이쪽을 겨누었다.
전투기의 소닉붐이 거세지며 지상을 향해 당장이라도 폭격을 퍼부을 것처럼 기울어졌다.
“……그렇군.”
이상할 정도로 주변이 조용하다 싶었더니, 이미 이 부근 전체가 포위당한 상태였던가.
유프리아의 기척이 동요한 것처럼 흔들리는 것을 보면, 역시 이 장생종이 유도한 함정은 아니었겠지.
애초에 그럴 거였다면 그 자리에서 굳이 생명술식으로 레녹을 치료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에반 마르티네스. 움직이죠.”
유프리아가 보기 드물게 빠른 어조로 시선을 돌렸다.
“포위망이 완성되기 전에 이동하면 작전지역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겁니다. 여기서는 일단-”
“아니.”
유프리아의 말을 끊은 레녹이 힘겹게 기침을 하며 걸어나왔다.
“에단을 상대한 시점에서 각오한 일이었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마르티네스?”
천번의 신분으로 발칸을 떠나 동대륙을 주파하던 여정.
유프리아 아오셀과 만나 정복자가 학살한 도시를 돌아보고 구울들을 상대하며.
5군단과 조우하여 열병식에 참석해 진급식을 치르고 에단과 독대하는 순간까지.
어쩌면, 처음부터 이렇게 해야했을지도 모르지.
에단을 만나면 레녹이 그토록 알고 싶었던 진실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고.
프로젝트의 진실을 듣고 나면 비로소 편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외면해 왔다.
블랙컨슈머 프로젝트의 정체를 알게 된 이후에도 아직 풀리지 않는 미혹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진실의 대가를 이제서야 인정하고 비로소 받아들인다.
여기까지 쌓아 올린 그 모든 시간과 인과를 장작 삼아 불태워 마력으로 삼는다.
하늘과 지상에서 쏟아지는 포화의 중심에서 레녹이 눈을 감고 속삭이듯 영창했다.
“해방…… 개시.”
콰우우우우웅!!!!
눈부시게 타오르는 화염체가 레녹을 중심으로 떠올라 일제히 회전하며 열기를 흩뿌렸다.
화염체를 휘감은 복잡한 술법진이 마치 행성의 고리처럼 우아하게 회전하며 광채를 더했다.
한계를 초월한 열기가 물질이 형태를 갖추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모든 것을 흩어버리는 기현상.
레녹을 중심으로 펼쳐진 여러 개의 행성이 각자 다른 궤도를 그리며 공전하는 듯한 압도적인 광경.
불씨를 마력노심으로 삼아 불태우며, 엔진이자 동력원으로 작동하는 증폭계 비술의 극의.
“적색성계(赤色星界) : 태양기정점(太陽氣頂點).”
쿠구구구구!!!
화신체의 폭주를 삼키며 실시간으로 강해지는 반동. 불안정하게 흔들리며 통제를 벗어나는 마력.
하지만 염열마법을 제대로 사용하기 어려워진 지금의 몸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이 아직 남아 있다.
레녹이 천번의 신분으로 새롭게 손에 넣은 여덟 번째 불씨.
적색성계의 모든 항성을 통틀어 가장 압도적이고 방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힘.
대륙 전역에서 집결한 데드라이즈의 군단을 상대로 펼쳐내는-
“제 8항성 : 겁천.”
천천히 눈을 뜬 레녹이 손을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태양선(太陽船) 메기도 소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