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1211
약먹는 천재마법사 1211화(1211/1243)
약먹는 천재마법사 1211화
견뢰 토벌전(2)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복도를 레녹은 걷고 있었다.
화려하게 치장된 천장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높은 층고. 복도 반대편의 거리감이 잡히지 않을 정도로 긴 아득한 너비.
“야, 반. 좀 같이 가……!!”
투덜대며 걸음을 옮기던 밀라가 그 자리에서 넘어져 머리를 박았다.
쿠앙!!
“꿱……!!”
균형조차 잡지 못하고 머리를 박은 채 주르륵 미끄러지는 모습.
뒤에서 지켜보던 딜런이 푸핫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하핫!! 씨발, 밀라. 그거 존나 꼴불견인데? 혹시 반을 웃겨보려고 한 거냐?”
“흐……음.”
“크, 크큭…….”
딜런의 옆에 서 있던 펠릭스와 웨이안조차 웃음을 참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밀라가 악귀같은 얼굴로 뒤에서 따라오는 일행을 노려보았다.
“……샷건으로 대가리를 뚫어버리기 전에 입 닥쳐. 니들이라고 뭐 다를 것 같아?”
“지가 바닥에서 자빠져놓고 아가리는 아주…… 우앗?”
투덜거린 딜런이 한 발을 내디뎠다가 제 자리에서 화려하게 나뒹굴었다.
딜런의 목이 반대 방향으로 우득 꺾이며 나서는 안 될 소리를 냈다.
“꺽…….”
“꺄하하핫!!! 내가 말했잖아, 이 등신아!!”
레녹의 뒤에 엎어진 채 배를 잡고 폭소하는 밀라와, 목이 꺾인 채 거품을 문 딜런.
그제서야 조용히 뒤를 따라오던 마탑의 동료들이 하나둘씩 레녹을 돌아보았다.
용병들 중에서도 유난히 센스가 좋은 두 사람이 균형조차 잡지 못하고 넘어지는 것 자체가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
레녹이 그 모습을 바라보다 대수롭지 않은 듯이 말했다.
“공간의 마찰계수를 마력으로 조절할 수 있게 설계했는데 아직 불안정한 모양이군.”
“……마찰계수? 뭐라고?”
“남은 시간이 사흘 정도였던가…….”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돌아섰다.
“서두르지. 오늘 안으로 새로운 마탑의 내부 시설을 모두 돌아봐야 할 테니.”
탑의 동료들과 다 함께 방문한 거대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황금빛의 구조물.
레녹은 지금 새롭게 시공을 끝낸 마탑의 입구에 동료들과 같이 서 있었다.
열병식에 참석하기 전부터 계획하여 기초 시공이 끝난 새로운 마탑의 모습.
거의 보름 내외로 틀이 잡힌 셈이지만, 이 세계의 마법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탑에 소속된 고위 마법사들은 물론이고, 협력 사업체의 도움을 받아 물자를 조달한 시점에서 부족한 것은 거의 없었으니.
하지만 정작 시공을 마친 새로운 마탑의 내부 모습은, 탑의 동료들에게도 무척 의외인 듯했다.
“보이는 것들이 모두 보석처럼 빛나는군…… 너무 빛이 나서 눈이 아플 정도야.”
“마탑 내부 시설이 이 정도로 넓었던가? 바깥에서 보면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것 봐. 복도 양쪽으로 방이 수십 개씩 있어. 마탑이 아니라 궁전에 들어온 것 같은데.”
끝이 보이지 않는 화려한 복도 양옆에 나 있는 무수한 방의 형상.
시설이나 가구가 놓여 있지는 않지만, 내부 공간은 눈이 아플 만큼 빛이 난다는 걸 제하면 깔끔하고 정갈하다.
복도 천장과 벽면에 새겨진 복잡한 형태의 법진과 문양이 각도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며 회전했다.
레녹의 뒤를 따라 걸으면서 복도의 시설과 너비를 가늠하고, 방문을 하나씩 열어보는 동료들의 모습.
“라얀, 밀지 마!”
“내, 내가 한 게 아니야!”
간간이 한두 명씩 넘어져 머리를 처박거나, 레녹의 옆으로 주르륵 미끄러지길 반복한다.
그 와중에도 빠르게 요령을 깨닫고 균형을 잡는 이들도 있었다.
“체내마력을 회전시켜 중심을 잡아라. 아무래도 요령이 좀 필요해 보이는군.”
“아, 대충 알겠네. 자이로스코프 같은 느낌인가?”
“자, 자이…… 머라고?”
레녹이 뒤에서 따라오는 동료들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탑 전체에 공간왜곡과 확장술식을 걸었으니, 바깥에서 보이는 것에 비하면 내부 면적은 더 넓을 거다.”
“정확하게 얼마나 넓은 건데?”
“글쎄…… 발칸의 외곽 구역 두어 개가 들어갈 정도?”
“……뭐?”
웨이안이 입을 쩍 벌렸다.
발칸 중심부 내부구역과는 달리, 외부구역은 넉넉잡아 소도시에 버금가는 면적을 지니고 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평생 동안 외부구역을 벗어나는 일 없이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정도.
그러한 외부구역이 두 개나 들어갈 정도로 마탑 내부 공간확장이 이뤄져 있다는 건가.
다른 동료들 역시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아니, 그렇게 넓으면 탑을 왔다갔다 하는데도 하루 종일 걸리겠네…….”
“내부시설 규모와 면적이 지나치게 넓은데, 우리가 전부 사용할 수 있는 건가?”
“탑을 차후 증축하는 것보다, 넓게 지어두고 압축하는 게 더 효율적일 테니까.”
레녹이 대답했다.
“애초에 탑의 구조와 설계방식이 미로에 기반한 만큼 광대한 부지를 필요로 하기도 하지.”
“미로? 아, 맞네!”
딜런이 두리번거리다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말했다.
“나 지금 어디까지 온 건지 전혀 모르겠어. 여기 길을 잃기 딱 좋게 만들어져 있잖아!!”
“그건 네가 자기 월급날도 기억 못 하는 멍청이라서 그런 것뿐이고.”
제니가 그렇게 대꾸하며 복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처음 설계도를 봤을 때 생각했지만, 확실히 거리감을 잡기 어려워. 일부러 이런 미로 같은 구조를 택했다는 거지?”
“쿤다라를 여행하는 도중 승천자 진둔이 사용하던 항하사미궁의 견본을 볼 기회가 있었지.”
레녹이 걸음을 옮겼다.
“그때 보았던 미궁의 구조를 탑의 입구와 초입부 설계에 적용한 거다.”
“처음 오는 사람은 무조건 길을 잃을 수밖에 없겠군요.”
아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건 침입자를 대비하기 위해 일부러 길을 꼬아 만든 공간인 건가요?”
진둔의 결계술을 받은 것은 천분의 신분으로 한 일이었지만, 견뢰의 신분으로 쿤다라에서 진둔의 항하사미궁 구조를 관측할 기회가 있었던 바.
그렇기에 레녹은 탑의 설계에 항하사미궁의 원리와 구조를 일부 차용하는 일을 굳이 망설이지는 않았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다면……
“아니, 여기 봐. 무슨 괴물 같은 게 있어!!”
우우우우웅!!!!
복도와 복도 사이를 연결하는 거대한 공동.
공동 중심에는 눈부신 황금빛으로 발광하는 거대한 신상이 여럿 세워져 있었다.
아홉 개의 뿔이 달린 사자. 전신을 단단한 사슬로 휘감은 용종. 목이 길고 부드러운 지느러미를 지닌 기린.
대륙에 존재하는 마물이나 짐승과는 전혀 다른 형태를 지닌, 신비롭고 거대한 형상을 지닌 신수들의 모습.
황금빛으로 번뜩이며 당장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처럼 역동적인 자세를 취한, 인간의 수십 배에 달하는 거대한 조각상의 형상.
“잠깐만, 이거…….”
공동 사방에 자리한 신상을 바라보던 웨이안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특유의 감응력으로 이 조각상들이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챘던 것.
“이거, 혹시 살아 움직이기도 하는 거야?”
“쿤다라에서 상대한 최고위 진혈종의 외형을 본 따 만든 신상이군.”
일행들이 모여 있는 거대한 혈기린의 신상을 돌아본 레녹이 대답했다.
“탑의 연결부와 관문을 보호하는 용도인데, 능력 정도는 비슷하게 따라 할 수 있을 거다.”
“……진혈 장생종의 외형이랑 능력을 모방해 만든 물건이라고?”
레녹의 대수롭지 않은 설명에 다른 동료들의 표정이 괴상해졌다.
떨떠름한 기색으로 수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신상을 올려다보던 밀라가 중얼거렸다.
“아니, 장생종의 시체를 직접 여기 박제해두어도 그런 일이 가능할 것 같지는 않은데.”
“여기 사용된 재료. 비싼 보석이긴 하지만 특별한 재료는 아니잖아.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거지?”
“권역이라는 건 술자의 기억과 체험에 기반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환경을 구축하는 힘이니까.”
경악하는 동료들을 지나치며 레녹이 대답했다.
“그건 다시 말하자면 내가 겪은 ‘경험’을 권역 내에 인위적으로 재현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
“…….”
“어떤 환경을 탑에 구축하고 재현할지는 생각해 두었어.”
레녹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남은 것은 내가 원하는 법칙과 규율을 권역에 적용시키는 일뿐이다.”
우우우우웅!!!!
거대한 신상들이 둘러싸고 있는 공동의 중심부에 위치한 황금빛의 관문.
사방의 마력이 부드럽게 순환하며 복도와 복도를 이어붙이고 경유하고 있다.
귀를 타고 들려오는 부드러운 공명음을 들으며 타티아나가 말했다.
“내부 시설의 구조와 위치를 유기적으로 조절하기 위한 일종의 연결 부위로군.”
“형태와 구조를 바꿀 수 없는 미로라는 건, 고위계 초인을 상대로 아무런 의미도 없을 테니까.”
레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탑의 모든 시설은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접합과 탈착할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 최심부는 조금 구조가 다르지만 기능은 동일하지.”
“방이나 복도를 원하는 대로 붙였다 뗄 수 있다니, 하지만 바깥에서 본 마탑의 모습은 그런 게 가능한 형태가 아니었는데…….”
“마탑의 외형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하지. 일단은 이쪽이다.”
쿠구구구궁……!!!
관문의 앞에 선 레녹이 손을 들어 올리는 것과 동시에, 일행이 서 있던 복도의 풍경이 그 자리에서 격변했다.
벽과 천장이 분리되어 이탈하고, 그 자리에서 다른 층계와 공간이 실시간으로 이어 붙었다.
관문을 중심으로 내부 시설 전체가 움직이면서 레녹의 눈앞에 또 다른 풍경을 펼치는 장관.
레녹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계단이 없으니 한결 보기 좋군.”
“……반?”
제니가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마탑 내부에 이런 말도 안 되는 기술을 적용한 이유가…….”
“이런 일이 가능한 건 탑의 모든 시설이 하나의 시스템 안에 동조하도록 설계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제니의 말을 흘려넘긴 레녹이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탑의 외벽과 내벽, 부품과 골자, 지지대에 술법진을 새겨넣고 보존처리를 한 뒤, 마지막에는 결계를 덮어서 봉인했지.”
“…….”
뒤통수를 찌르는 제니의 시선을 슬쩍 피한 레녹이 설명했다.
“일단 시스템에 동조하고 나면 내부 시설의 손상이 운용에 지장을 주는 일은 없다. 모든 구조물이 독립적으로 운용되며 컨트롤만 중앙통제를 따르는 식이지.”
“반. 그런데 막상 마탑이 시공되는 내내 너는 거의 연구실에만 있던 것 아니었어?”
벽을 쓱쓱 쓸어보던 웨이안이 신기한 표정으로 손바닥을 보며 물었다.
“어떻게 직접 손도 대지 않고 이렇게 복잡한 시스템을 완성한 거야?”
“공사를 끝내고 술법진을 새긴 건 다른 사람들이 한 일이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건 내 권역이 주체이니까.”
레녹이 대답했다.
“여기 새겨진 술법진은 모두 내 권역 아래서만 작동과 운용이 허락되는 법진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내 권역 없이는 완성될 수 없는 술식이라는 뜻이지.”
“……그건.”
“법진을 새기는 일이라 다른 사람에게 맡겨도 완성도가 떨어질 일은 없어. 어차피 부족한 부분은 내 힘으로 보강해 끼워 맞추면 그만이니까. 중요한 건…….”
시선을 들어 올린 레녹이 말했다.
“그 모든 일을 가능케 할 압도적인 ‘동력원’의 존재뿐이지.”
쿠오오오오오!!!!
새로운 마탑 최심부에 위치해 있는 동력실. 거대한 순백의 피라미드가 일행의 눈앞에 펼쳐졌다.
광대한 동력실 공동 대부분을 차지하는, 가히 수십 미터 크기에 달하는 압도적인 백색의 제단.
피라미드의 정상에 위치해 있는 황금빛 옥좌 위에는, 붉은 불꽃이 떠올라 고고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그 형상을 알아본 타티아나가 중얼거렸다.
“봉황전(鳳凰殿)…….”
“기존에는 탑의 엔진 역할을 하던 불꽃이었지.”
레녹이 말했다.
“하지만 새로운 마탑의 동력원으로 삼기에는 속성이 맞지 않아. 이제부터는 탑의 엔진이 아니라 방향키로서 기능하게 될 거다.”
“속성이 맞지 않는다니, 그 말은…….”
견뢰의 마탑과 맞는 속성이라 한다면, 애초에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지 않았던가.
“설마, 벼락의 성물이나 보구 같은 걸 발견한 거야? 어지간한 유물이나 아티팩트로는 동력원 역할을 해낼 수 없을 텐데.”
봉황전이 탑의 엔진 역할을 맡았던 것은, 선대 블레이버 마탑주의 유지를 불태우는 불꽃이었기 때문.
탑의 대종사에 비견되는 대마법사의 사리가 아니라면 애초에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없다.
“맞다. 처음부터 평범한 벼락을 엔진으로 삼을 생각은 없었어.”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돌렸다.
“적어도 살아 있는 인간을 직접 앉혀놓지 않는 이상, 탑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겠지.”
“……살아 있는 인간?”
자연스럽게 일행의 시선이 맨 뒤를 향해 돌아섰다.
뒷짐을 진 채 서 있던 토르번 마탑주가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고 안색이 창백해졌다.
“잠깐, 설마…… 아니겠지.”
“할아범, 뭐해?”
밀라가 엄지 손가락으로 옥좌를 가리켰다.
“빨리빨리 올라가쇼. 괜히 시간 끌지 말고.”
“사이즈도 딱 맞는 것 같은데. 오래 앉아 있어도 허리가 배길 일은 없겠네요.”
“저기 앉아 있으면 허리를 걱정할 생각도 들지 않을걸. 전기마사지를 평생 공짜로 시켜주는 거 아니야?”
“놔, 놔라. 이놈들!!”
아무도 붙잡지 않았는데 토르번이 격렬하게 저항하듯 몸을 비틀었다.
“이 배은망덕한 비전격마법사 놈들이 감히……!! 네놈들이 어찌 내게 이럴 수가 있느냐!!!”
“말조심해. 누가 보면 할아범이 우리에게 뭐라도 해준 것처럼 보이겠어.”
이미 토르번을 확정 짓고 재촉하는 동료들의 모습.
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누구 하나 탑주를 동정하는 사람이 하나 없다.
“허구한 날 탑의 기물과 시설을 박살 내고 다니면서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거야?”
“탑의 배터리를 그렇게 많이 처먹었으면 이제 본인이 배터리 노릇을 할 때도 됐지.”
“그, 그건……!!”
토르번 역시 그 말에는 반박할 수 없었는지, 창백해진 표정으로 어깨를 움찔 떨었다.
순식간에 몇 년은 늙어버린 듯한 얼굴로 토르번이 레녹을 바라보았다.
“사, 사질…… 물론 내가 탑의 기물을 이것저것 가져다 쓰긴 했지만, 이런 처사는 너무하지 않느냐…….”
“즐길 만큼 즐겼으면 슬슬 그만두지.”
레녹이 고개를 저었다.
“당연하지만 토르번 마탑주를 엔진으로 삼을 생각은 없다. 그런 짓을 했다가는 대륙 전역에서 교단 같은 공적으로 몰려도 이상하지 않겠군.”
[사실 지금도 취급이 크게 다르지는…… 흠흠.]“…….”
다비의 속삭임을 무시하는 사이 펠릭스가 황금 옥좌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토르번 마탑주가 아니라면, 반 자네가 직접 엔진을 맡을 생각이기라도 한 겐가?”
“아니. 그런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게 아니다.”
천천히 돌아선 레녹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레녹이 프리랜서로 활동하던 시절부터 이어져 왔던 인연. 마탑을 세운 뒤로 새롭게 받아들인 동료들.
수십 명이 넘는 사람이 함께하고 있음에도, 그 모든 이들을 언제 어디서 만났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건 레녹이 그만큼 이 도시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며,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일들을 직접 처리해 왔기 때문이겠지.
어떤 일이든지 직접 결론을 내려고 노력해 왔기에, 그 번거로움과는 반대로 이렇게 쌓아 올린 결실이 있다.
처음 이 세계에서 눈을 뜬 이래로 지금까지, 레녹이 해야 할 일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니-
“말했듯이 나는 토벌전에 혼자 나가려고 한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일행을 바라보며 레녹이 말했다.
“데드라이즈와 이능개화전단이 원하는 건 어디까지나 내 죽음이지, 탑의 관계자들은 아닐 테니까.”
“…….”
“오히려 그들은 탑의 자산이나 인프라를 그대로 흡수하고 싶어 할 가능성이 높아. 그만큼 현재 제니가 구축해둔 아이템 사업은 높은 잠재력이 있지.”
레녹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내 입장에서는 이번 일에 너희들이 휘말리지 않기를 바란다. 위험한 일이 될 테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변수를 모두 통제한다는 건 불가능할 테니까.”
“반.”
딜런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탑에 들어온 순간부터 우리 모두가 받아들인 일이야.”
“…….”
“이번 전쟁에서 네게 방해가 될 뿐이라면 모를까, 죽음이 두려워서 발을 뺄 생각은 없어. 그러니 확실하게 말해줘.”
마스크를 고쳐 쓴 딜런이 물었다.
“토벌전에서 우리가 너와 함께 싸워서는 안 되는 거냐?”
여기 모인 사람들은 한 번 이상 레녹과 함께 일하거나, 같이 싸워본 적이 있던 이들.
레녹이 어떤 마법사인지, 어떤 힘을 품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탑의 동료들과 레녹 사이에 존재하는 실력 차이가 압도적이기에, 오히려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렇기에 섣불리 먼저 선뜻 돕겠다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음을 레녹은 알고 있던 것이다.
딜런이 한 말은 레녹에게 있어 그 사실을 확실하게 정하고 방향성을 공유해달라는 부탁.
처음부터 토벌전에서 빠져 있는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
레녹이 대답했다.
“토벌전에는 나 혼자 나간다. 이건 결정된 사안이고, 어떤 식으로든 변할 일은 없겠지.”
“그렇다면-”
“하지만 그건 나 혼자서만 전쟁을 수행하겠다는 의미는 아니야.”
딜런의 말을 끊은 레녹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군단을 직접 상대하는 건 내가 하겠지만, 아마 교전이 그 자리에서 정직하게 시작되어 끝날 가능성은 낮겠지.”
“그 말은…….”
그제서야 레녹이 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한 다른 용병들이 놀란 표정으로 변했다.
레녹이 토벌전에 혼자 ‘나선다는’ 말의 진짜 의미.
그 뒤에서 탑의 동료들에게 어떤 역할을 맡기려 하는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
“앞으로 할 이야기는 토벌전에서 우리가 어떤 식으로 움직이게 될지에 대해서가 될 거다.”
숨길 수 없는 안도의 감정을 드러내는 동료들을 보며 레녹이 걸음을 옮겼다.
“방법은 이미 준비해두었어. 남은 것은 방향성을 공유하고 세부작전을 수립하는 것뿐이지.”
“반.”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논의하기 전에 먼저…….”
토르번 마탑주의 앞에서 멈춰선 레녹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가장 중요한 일부터 먼저 처리해두도록 할까.”
“……음?”
토르번의 표정이 순간 당혹스럽게 변하고, 주변의 용병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역시, 탑의 배터리로 써먹으려던 생각이 맞았나 본데.”
“내 저럴 줄 알았지. 언젠가 다 업보로 돌아온다니까.”
“그동안 탑에서 신나게 놀고먹었으면 제 몫을 할 때가 됐지.”
“타세요.”
“사, 사질…….”
땀을 삐질삐질 흘리던 토르번이 옥좌를 바라보다 어렵사리 말했다.
“그, 본노의 존재가 탑의 엔진으로서 반드시 필요하다면…….”
“토벌전이 시작되기 전에 논의하고 싶은 일이 한 가지 있다.”
레녹이 탑주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데드라이즈의 대변인이 토벌전을 선포하며 유예를 둔 기한은 사흘.
1사령부의 지휘 아래 동대륙을 주파한 군단이 발칸에 도착하기 위한 최소한의 시간이겠지.
길다면 길고, 또 짧다면 짧은 잠깐의 유예.
그 시간 안에 가장 효율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었다.
토벌전이 시작되기 전에 레녹이 반드시 준비해야 할 ‘수단’.
파직……!!
손끝에서 번뜩이는 검푸른 전격을 움켜쥔 레녹이 나직하게 말했다.
“전격마법의 폭주를 해결할 방법을 찾았다. 그에 대해 당신의 도움을 빌리고 싶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