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1241
약먹는 천재마법사 1241화(1241/1243)
약먹는 천재마법사 1241화
견뢰 토벌전(32)
황금빛 날개가 부러져 겹쳐져 쌓인 잔해물의 중심부.
부서진 옥좌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잠든 흐릿한 뇌신의 형상.
모든 일을 마치고 안식에 접어든 그 모습은, 직전의 격전이 거짓말처럼 평온했다.
파직, 파직……!!!
수만 명을 학살하고, 무수한 초인들을 불태운 흑청색 벼락이 희미하게 번뜩인다.
메마른 바람이 불며 사방에 산처럼 쌓인 시체들을 부드럽게 휘감았다.
견뢰를 향해 목숨을 불태우고 숨이 끊어진 수십 수백의 고위계 초인들.
토벌전에 참가했던 전쟁병기들의 파편과 산산이 부서져 녹아내린 마탑의 잔해.
그 중심부에 비틀거리며 멍하니 시선을 들어 올린 데이머스의 모습까지.
“콜록!! 데드라이즈…… 에르몽…….”
피투성이가 된 사린이,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우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화신체에게 단 한 번 멱살을 잡혔을 뿐인데, 의식을 유지하는 것조차 힘겹다.
사방에 널브러진 군단과 초인들의 유해를 돌아보던 사린이 힘없이 웃었다.
“축하해요. 우리가 성공했어요. 당신들은 이미 죽어서 못 보겠지만.”
“…….”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하죠?”
사린이 옥좌에 앉아 잠든 견뢰를 멍하니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박사가 죽어버려서 계획을 말해줄 사람이 없네.”
“견뢰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리지.”
쿵!!
철쇄용왕이 무표정한 얼굴로 사린의 옆에 섰다.
“의식이 실패한 이상 언젠가는 깨어나 이성을 되찾겠지. 본룡은 견뢰와 직접 대화하겠다.”
“아, 저는 그냥 이대로 도망치고 싶은데…….”
뺨을 타고 흐르는 피를 닦아내며 사린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알았어요. 마지막에 어떻게 됐는지는 보고 가는 게 좋을지도 모르고.”
“…….”
“그런데 저 사람들, 그냥 내버려 둬도 괜찮겠어요?”
사린이 힐끗 시선을 돌렸다.
“이미 가망이 없어 보이는데.”
치이이익!!!!
사지가 뜯겨나간 바라간이 잿덩이가 되어 머리부터 처박혀 죽어 있었다.
쏟아져 내린 창자는 모조리 불타 으스러져 회생의 여지조차 남지 않은 시체.
두 눈은 불타 녹아내렸고, 혀와 성대가 말라붙어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
바라간보다 20미터 앞에 쓰러진 에스테반의 모습 역시 마찬가지.
등 위로 척추뼈가 드러난 채, 핏물조차 말라붙은 처참한 모습.
척수 사이로 달라붙은 신경이 불타 말라버린 채 흉측한 몰골을 내비쳤다.
이미 완전히 숨이 끊어져 시체가 되어버린 두 초월자의 주검.
토벌전에서 가장 큰 공적을 세운 두 기둥이 끝내 결과를 마주하지 못하고 스러진 이 순간.
“괜찮다.”
대답은 철쇄용왕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얼굴을 천으로 가린 황족이 그들과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흘러내린 소매로 자신의 손을 감춘 에제키엘이 느릿하게 말했다.
“방식은 다르지만 그들 역시 죽음을 각오하고 이 전쟁에 몸을 불사르려 했을 테니.”
“…….”
“이 전쟁을 위해서라도 한 번쯤은 죽음을 무마할 수단을 지니고 오지 않았겠느냐?”
“죽음을, 무마할 수단이요?”
사린이 어색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혈왕성 출신인 그녀는 아직도 제국 황족과의 대화가 어색했다.
하지만 에제키엘은 그런 사린의 반응을 신경조차 쓰지 않고 말했다.
“군단이 섬기는 초월자가 누구인지 생각하면 어떤 능력을 빌렸을지는 고민할 필요도 없지.”
천에 가려진 그 얼굴은, 저 멀리 시체가 되어 쓰러진 바라간을 향해 꼼짝없이 고정되어 있었다.
“바쥬르의 아들이 어떤 이명으로 불리는지 잊은 것이냐.”
“……아.”
치이이이익!!!
그 순간, 엉망진창이 되어 쓰러진 바라간의 시체에서 연기가 치솟기 시작했다.
쪼개지고 으스러져 불타버린 육편 사이로, 한없이 붉고 선명한 피가 흐르기 시작하며.
동시에 그 몸이 시간이 되감긴 것처럼 ‘역행’하면서 재생되고 이어붙기 시작했다.
쩌저저접……!!!
으스러진 뼈가 형태를 되찾고, 끊어진 신경과 근육이 뼈에 달라붙는다.
녹아내린 안구가 얼굴 근육을 따라 생성되며 초점을 되찾고, 이빨이 드러낸 뺨이 옭아 붙으며 재생했다.
“끄-”
성대 근육이 재생되는 것과 동시에 바라간의 목구멍을 타고 쏟아지는 절규.
“아, 아아아악……!!!!!”
미처 쏟아내지 못했던 비명이 한발 늦게 목구멍을 타고 흘러나왔다.
“끄흐, 흐흐흐흐……!!!!”
고개를 처박고 피와 뇌수를 쏟아내며 미친 듯이 어깨를 들썩인다.
웃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는, 기괴하기 그지없는 울음소리.
콰직!!
뼈가 패인 오른팔을 짚고 천천히 고개를 든 바라간의 얼굴에서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에단…… 에단……!!!!”
“…….”
“네가, 틀렸다. 네가, 이번에는…… 틀렸어…….”
비틀거리며 일어선 바라간의 두 눈빛은 여전히 정신이 나간 것처럼 멍하게 변해 있었다.
“이건, 죽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고…… 빌어먹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린이 감탄하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부활자…….”
“세번째 세계에서 유일무이하게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부활자의 피다.”
에제키엘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를 중심으로 새로운 종교가 생긴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진대, 그 피가 지닌 힘이 어느 정도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겠지.”
“…….”
바라간은 토벌전에 참가하기 전에 이미 에단의 피를 마시고 왔던 바.
49구역의 미궁을 홀로 돌파해 제니를 찾아낼 수 있던 것 역시 그 덕분이었으니.
그의 체내에 흐르던 에단의 피가 숨이 끊어진 바라간에게 기적을 선사해 준 것이다.
“다만 육체의 부활은 이루어졌어도, 그 정신까지는 완벽하게 수습하지 못했구나.”
반라의 몸으로 비틀거리며 좀비처럼 배회하는 바라간을 보며 에제키엘이 고개를 기울였다.
“이는 결국 부활자 본인이 육체와 정신을 별개의 영역으로 치부하고 있기에 일어난 일일 터. 흥미롭다.”
“…….”
“어쩌면 부활자 역시 현세에 돌아왔을지언정, 그 정신은 그렇지 못했을지도 모르겠군. 누가 알겠느냐?”
“그건…….”
할 말을 잃어버린 사린을 두고 에제키엘이 팔짱을 꼈다.
“인간의 마음에 깃든 이능…… 그 이면에 담긴 어둠을 들여다보는 일에는 언제나 풍미가 있다. 제국이 무너진 뒤에도 이리하여 외유를 그만둘 수가 없구나.”
“…….”
멍하니 시선을 돌린 사린이, 옆에 서 있는 무표정한 철쇄용왕을 돌아보았다.
“황족의 유희 따위는 내게 있어 관심사가 아니다.”
흡혈귀의 시선을 느낀 용왕이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말했다.
“그 악취미를 견뢰에게만 들이밀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상관은 없겠군.”
“시건방진 말이로구나, 용종.”
에제키엘이 담담하게 말했다.
“쿤다라가 무너진 뒤에도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이냐.”
“아르스노바의 실패를 보고 배우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군.”
“…….”
철쇄용왕과 에제키엘 모두 서로를 향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대신 무겁고 섬뜩한 의념이 동시에 일어나 허공에서 충돌하기 시작했을 뿐.
쿠구구구구!!!!
“하, 진짜 뭐 하는 건지…….”
냉소한 사린이 뒤로 물러나면서 손을 털었다.
“잘됐네. 중재해 줄 박사도 없는데 여기서 둘이 한번 붙어볼래요?”
“…….”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 부활자의 힘이 강해지고 있다.”
침묵하는 용왕을 대신해 에제키엘이 답했다.
“이 전쟁이 곧 결착에 도달하였구나.”
“끄으, 흐으윽……!!!”
기괴한 신음과 함께 멍하니 전장을 배회하던 바라간이, 쓰러진 송하의 앞에서 멈춰 섰다.
화신체에게 심장이 짓뭉개진 채 피범벅이 되어 고개를 젖히고 쓰러진 처참한 모습.
하지만 그럼에도 송하는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희미하게, 겨우 호흡을 유지하고 있었다.
심장이 뚫린 채로 서서히 죽어가는 그 모습이, 역설적으로 그가 얼마나 뛰어난 초인인지 방증했다.
“멍, 청이…….”
송하의 모습을 바라보던 바라간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오고, 가죽이 들러붙은 입을 뗐다.
“일, 어나…… 뭘, 하는…… 거냐…….”
“……바라간.”
송하가 끊어질 듯 희미한 목소리로 말했다.
“성공……했구나.”
“……그래.”
바라간이 대꾸했다.
어느새 그의 눈빛은 또렷하게 변해 있었다.
“우리가…… 살아남았다. 견뢰는 모든 힘을 쓰고 잠들었어.”
“…….”
“얼마 지나지 않아 육체를 유지할 힘조차 잃고 소멸하겠지. 토벌전은 끝났다.”
“……그렇군…… 잘, 됐네…….”
송하가 가볍게 기침하며 웃었다.
“그래도, 마지막에는, 보고, 갈…… 수, 있어서…… 다행…….”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바라간이 타오르는 듯한 시선으로 송하를 내려다보았다.
“네놈도 에단의 피를 써. 뭘 하고 있는 거냐.”
“…….”
송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에서 무언가를 느낀 바라간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송하!!”
“난, 안 돼…….”
송하가 바보처럼 웃었다.
“열병식, 에서…… 천번을, 상대하려고…… 써버렸, 거든…….”
“……뭐?”
에단 바쥬르 본인조차 스스로의 능력을 사용해 ‘부활’한 것은 오직 한 번뿐.
당연하지만 그의 피를 마신 이들이 같은 기적을 누릴 수 있는 기회 역시 그러했다.
열병식에서 송하가 에단의 피를 마신 것은 분신을 통합하기 위해서였지만, 그 역시 역천의 재능을 이용한 기적이었으니.
처음부터 송하에게 두 번째 기회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에단…… 마지막…….”
가쁜 숨을 내쉬며 송하가 말했다.
“여기서, 끝이라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
“지랄하지 마!!!”
콰아앙!!!
송하의 멱살을 쥔 바라간이 고함을 지르며 주력을 끌어올렸다.
그의 몸에 미친 듯이 회복주술을 걸어 넣으며 바라간이 소리를 질렀다.
“일어나! 일어나라고!!!”
“…….”
송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미약하던 호흡도 멈춘 채 눈을 감았을 뿐.
“……옛날, 생각…….”
바라간의 손에 이끌려 축 늘어진 송하가 속삭였다.
“다 같이…… 라라벨리에…… 즐거웠지…….”
“입 닥쳐!!!”
송하를 들어 올린 바라간이 주력을 끌어올린 채 이를 악물고 돌아섰다.
“아무 말도 하지 마. 그냥 아까처럼 숨이나 붙여놓고 있어!!”
“…….”
“난 밀법을 이어받은 대주술사다. 네놈 같은 멍청이 하나 살려내지 못할 것 같아?”
시체가 널브러진 전장을 망설임 없이 지나, 저 멀리 보이는 황금 옥좌를 향해 걸었다.
부서진 폐허 중심에 솟아오른 부러진 옥좌.
그 중심에 기대앉아 고요하게 잠들어 있는 견뢰의 존재.
털썩!!
그 앞에 송하를 내려놓은 바라간이 핏발선 눈으로 돌아섰다.
“판데모니엄. 협력해라.”
“어떤 협력을 말하는 건가요?”
“견뢰의 내면에 남아 있는 힘을 이용해 이 멍청이를 살릴 거다.”
“…….”
바라간이 잠든 견뢰를 노려보며 씹어뱉듯이 말했다.
“의지를 잃고 잠들었지만, 아직 육신을 유지하고 있어…… 이 정도라면 내 주술을 사용해 견뢰의 힘을 생명력으로 치환할 수 있다.”
“…….”
“토벌전은 끝났다. 그러니 놈의 유해를 이쪽에서 먼저 사용하겠다.”
대답을 듣지 않고 돌아선 바라간이 곧바로 주력을 끌어올렸다.
“흡혈귀. 견뢰의 마력을 이용해 피를 만들어줘. 장생종, 네 육신을 떼어 송하의 장기를 대체해 줄 수 있겠냐?”
“…….”
“제국 황족의 ‘특권’까지 있다면 사람 하나 살려내는 것쯤은 어려운 일도 아니겠지. 이 멍청이는 여기서 죽어선 안-”
“거절하겠다.”
뒤에서 들려온 대답에 바라간이 몸을 굳혔다.
천천히 돌아선 주술사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철쇄용왕을 노려보았다.
“……방금, 뭐라고 했냐?”
“견뢰는 쿤다라의 장생종들에게 새로운 삶을 전해준 도시의 은인이다.”
철쇄용왕이 팔짱을 낀 채, 아무런 감정도 없는 얼굴로 말했다.
“그가 은성과의 결전에서 승리하며 목숨을 구함받은 동족이 헤아릴 수 없이 많지. 본룡 또한 본의 아니게 은혜를 입었다.”
“…….”
“본룡이 오늘 이 결전에 나선 것은 견뢰가 토벌전에서 패배하여 완전히 사망하는 사태를 막기 위함이었으니.”
무감정한 용왕의 시선이, 부서진 옥좌 위에서 잠든 견뢰를 보고 순간 부드럽게 변했다.
“그가 목숨을 부지한 시점에서 이보다 더 좋은 결과는 존재하지 않으리라.”
“장생종. 네놈은 처음부터 이쪽의 편이 아니라-”
“그러니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말해두지.”
쿠구구구……!!!
철쇄용왕이 마력을 끌어올리는 것과 동시에 지축이 느릿하게 흔들렸다.
강철처럼 차갑고 단호한 용종의 시선이 바라간을 정면에서 응시했다.
“주술사. 본룡이 네 바람에 응답할 일은 없을 것이다.”
“…….”
“아~ 그러면 저도 패스. 견뢰의 피에 관심이 있는 거지, 다른 인간을 살려주고 싶은 건 아니라.”
사린이 피곤한 얼굴로 손을 흔들며 살짝 물러섰다.
바라간을 올려다보는 흡혈귀의 입가에 싸늘한 비웃음이 맺혔다.
“무엇보다 여기까지 와서 자기 친구만 챙겨나가겠다니, 그건 좀 모양 빠지지 않아요?”
“……네놈들이.”
“신선한 기분이군.”
악귀처럼 변한 바라간이 돌아서기도 전에, 에제키엘이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나에게 명령을 내리려는 필멸자가 인세에 남아 있었을 줄이야.”
“…….”
“하지만 오늘은 진귀한 구경을 많이 하였으니 보아 넘기겠다.”
가려진 소매 사이로 다친 자신의 손을 신기한 듯이 내려다보던 황족이 시선을 돌렸다.
“네 목을 쳐 저잣거리에 걸어둘 기분이 아님을 다행으로 여기거라.”
“하!! 좋아. 아무래도 상관없어……!!!!”
토벌전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잠시 협력했을 뿐, 판데모니엄은 처음부터 아군이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찢어 죽이고 싶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급한 일이 있던 바.
“나 혼자서도 할 수 있다. 얼마든지……!!!”
판데모니엄의 멤버들이 지닌 능력이 워낙 유용해서 그들의 조력을 빌리는 게 확실했겠지만,
그들이 힘을 빌려주지 않는다 해도 바라간이 시도할 수 있는 주술은 얼마든지 남아 있었다.
8레벨의 대주술사인 그는 토템을 사용해 모든 계통의 주술을 간접적으로 다룰 수 있는 바.
촤악!
견뢰의 앞에 눈을 감은 채 쓰러진 송하의 모습을 두고, 엄지를 깨물어 피를 흘렸다.
송하를 중심으로 순식간에 피의 주술법진을 그린 바라간이, 눈을 감고 수인을 맺었다.
“치환주술 전개. 생명력 변환 공정 개시.”
키이이이잉!!!!!
술법진을 타고 흐르는 피가 발광하면서, 송하의 가슴 위로 줄지어 연결된다.
법진 전체가 생명력을 공급하는 통로가 되어 송하의 육체에 연결되는 모습.
“용왕님. 괜찮겠어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린이 시선을 돌렸다.
“쿤다라의 은인이라면서요. 시체 정도는 지켜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시체가 아니다.”
“예?”
“견뢰가 이 결전에서 사망했다면 은성의 진노가 말 그대로 세계 전역에 울려 퍼졌을 터…….”
철쇄용왕이 심유한 눈빛으로 견뢰를 올려다보았다.
“그렇다면 이 순간 그가 잠든 것조차 후일을 위한 안배였을 것이다. 나설 필요는 없다.”
“영감님. 미안한데 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해줄래요?”
흡혈귀가 고개를 갸웃거린 찰나, 바라간이 견뢰를 향해 다가섰다.
부서진 옥좌에 앉아 검푸른 뇌광을 힘없이 흘리는 초월체의 존재.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잠들어 있지만, 그럼에도 아직 그 육체를 현실에 남겨둔 힘의 정수.
“성공한다. 반드시……!!!!”
견뢰의 힘을 뽑아 생명력으로 치환해 불어넣기만 하면 어떻게든 송하를 살려낼 수 있을 터.
한없이 힘의 정수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기에 분명, 생명력 치환주술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여기서 송하를 살려내고, 견뢰를 완전히 소멸시킨 뒤 발칸을 되찾는다.
그것이야말로 이 토벌전의 완벽한 승리이자 결말이 될 터.
바라간이 견뢰를 향해 손을 뻗어, 망설임 없이 그 존재를 주술에 끌어들이려던 그 순간.
“아니.”
바라간의 등 뒤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건 허락할 수 없군.”
“…….”
바라간은 순간,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작금의 상황조차 잊고 삐걱대는 시선을 돌려세웠을 뿐.
휘오오오!!!
무거운 흑색의 코트가 바람에 흔들리며, 느릿하게 얼굴을 드러냈다.
냉정한 인상을 지닌 흑발의 청년이, 바라간의 뒤에 서 있었다.
“……너는.”
만신창이가 된 다른 이들과는 다른 차분하고 서늘한 기척.
무표정한 얼굴 너머 어렴풋이 느껴지는 불가해의 마성(魔性).
토벌전 최전선에서 싸운 바라간이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얼굴.
하나 그럼에도 바라간은 특유의 영성으로 마주하는 순간 직감할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지금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이 마법사가, 지금 여기 있을 리가 없-
“이 전쟁의 결실을 가져가야 해서 말이다.”
제 자리에 얼어붙은 바라간을 보며 레녹이 웃었다.
“움직일 수 있다면 좀 비켜주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