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1243
약먹는 천재마법사 1243화(1243/1243)
약먹는 천재마법사 1243화
견뢰 토벌전(34)
“바……!!!!”
에단 바쥬르.
폐허가 된 외곽구역의 지평선 너머에 홀로 흐릿하게 서 있는 그 모습.
무표정한 얼굴로, 오래전부터 그곳에 존재했던 것처럼 조용히 이쪽을 지켜보는 남자의 얼굴.
레녹이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동시에, 죽어가던 초인들 역시 동시에 그를 볼 수 있었다.
마치 레녹이 그를 마주 보고 인식한 뒤에야 다른 이들도 그의 존재를 깨달을 수 있었던 것처럼.
하지만 그 사실에 위화감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여유가 남아 있는 이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견뢰 토벌전.
군단을 갈아 넣어 승천의식을 저지했던 그 모든 여정이, 견뢰 본인을 위한 발판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직후.
그가 손에 넣은 9레벨의 전격마법을 마주하며 끝을 알 수 없는 절망감에 잠식되기 직전.
마지막 순간 전장에 도착한 원수를 보고 그들이 떠올릴 수 있는 감정은 하나밖에 없었다.
“원수께서, 돌아오셨…….”
“마, 마침내……!!”
목숨을 걸고 견뢰를 상대해, 의식을 저지하고 마법사를 깎아냈던 일들은 헛되지 않았다.
군단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한 군인들의 결의. 견뢰를 토벌하기 위해 사지에 뛰어든 초인들의 각오.
그 모든 희생이 군단의 원수가 도착할 시간을 벌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었다면.
자신들의 죽음에 의미를 남길 수 있다면.
“헛되지 않았어…… 헛되지, 않았…….”
죽어가며 숨을 헐떡이고, 감격에 젖거나 회한에 잠긴 초인들.
그들의 옆에 쓰러진 시체들과 같은 결말을 향해 나아가면서 삶에 대한 미련을 놓아버린다.
충격파에 휩쓸려 쓰러져 있던 데이머스가 초점을 잃은 시선을 들어 힘없이 속삭였다.
“에단…… 님…….”
“…….”
데이머스의 흐릿한 눈동자로는 에단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폐허가 된 지평선 너머에서 그림자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만을 알 수 있었을 뿐.
눈을 감았다 뜬 순간, 저 멀리 서 있던 그림자가 데이머스의 앞에 다가와 있었다.
후욱!!
“…….”
아무런 말도 없었지만, 에단이 가까이 다가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데이머스가 그제서야 힘없이 눈을 감았다.
“면목, 없…… 토벌전은, 실패……”
“…….”
에단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흔들리는 곱슬머리 아래로 물끄러미 데이머스를 내려다보았을 뿐.
데이머스는 이 순간이 자신의 마지막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렇군.’
고통은 없다. 그것이 데이머스가 그동안 얼마나 자신의 몸을 혹사시켜 왔는지를 짐작케 했다.
죽음을 고통이 아니라 안식으로 느낄 수 있다는 건 군인에게 있어 축복인가 저주인가.
어느 쪽이든 분명한 것은, 데이머스가 이 결말을 순순히 납득하고 있다는 점에 있었다.
‘생각보다…… 오래 버텼어.’
토벌전이 시작된 이래 단 한순간도 쉴 시간 없이 이어졌던 격전.
헤아릴 수 없는 사투 속에서 데이머스의 몸에 차츰차츰 쌓여갔던 부상과 폐해.
이벨린의 발을 묶어두기 위해 수명을 대가로 보석술식을 사용했던 순간까지.
어쩌다 운 좋게 목숨을 붙여 연명해 왔을 뿐. 끝이 머지않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데이머스가 아직 살아 있었던 것은, 어쩌면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토벌전의 지휘관이자 책임자로서, 그가 섬기는 원수에게 마지막으로 결과를 보고하기 위한 지금.
“죄송합니다. 저는…… 먼저…….”
데이머스가 숨을 헐떡이며 중얼거렸다.
“군단의 통합…… 꼭, 이루시길…….”
“살아라.”
데이머스의 목소리가 잠시 멎었다.
에단은 데이머스를 무표정한 눈길로 내려다보다 말했다.
“너는 군인이다. 지휘관이 살아 있다면 군단을 통제하는 일을 맡겨도 괜찮겠지.”
“…….”
“네 죽음을 이 자리에서 한번 되감아 주겠다.”
“군인, 입니까…….”
데이머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말을 듣는 순간 데이머스는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빠르게 엄습하는 추위에 몸을 떨면서 목소리를 자아낸 데이머스가 말했다.
“군인에게, 두 번째 기회는…… 없는, 법입니다…….”
“…….”
그것이 페이샤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말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을까.
침묵하는 에단을 두고 데이머스가 속삭였다.
“지휘관…… 항상, 책임…….”
토벌전이 여기까지 이어지는 동안 얼마나 비참한 실패만이 가득했는지. 얼마나 많이 좌절했는지.
목숨을 바쳐 시도했던 그 모든 발악이, 견뢰를 위한 과정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마나 절망했는지.
어쩌면 그 마법사는, 이 순간을 데이머스에게 보여주기 위해 지금껏 그를 살려두었던 것이 아닐까.
눈짓 한 번으로 데이머스를 죽일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았던 것은, 단지 알려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그가 저질렀던 모든 실패가 어떠한 의미로 돌아오게 될지 깨달을 수 있도록. 그 책임을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결국 정답은 알 수 없다. 데이머스가 알고 싶다고 해도 마법사는 답해주지 않겠지.
아니, 애초에 데이머스가 진정으로 그것을 궁금해하는지도 이제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실패만이 가득했던 토벌전을 계획하고 주도했던 군단의 지휘관.
언젠가 누군가 말했던 것처럼, 데이머스의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되었어야…….”
견뢰가 군단과 제대로 싸울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그 사실을 통해 군단의 대장들을 설득하고 방향을 바꿀 수 있었을까.
모르겠다. 사실 이제 와서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토벌전이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가망이 없는 일을 고민하는 것은 괴롭기만 했으니까.
호흡이 가늘어지며 목소리도 속삭이듯 변했다.
느릿하게 숨을 쉬던 데이머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부하들을, 만나러…….”
휘오오오!!!
바람이 불고 떠난 자리에 데이머스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숨이 끊어진 데이머스의 시체를 바라보던 에단이 천천히 일어섰다.
“원수님…….”
“정신을, 차리셨…….”
사방에서 숨이 끊어져 가는 군인들이 느릿하게 그를 불렀다.
하지만 에단은 서서히 죽어가는 부하들과 로베라이드를 돌아보지 않았다.
에스테반과 염주의 시체, 하반신이 잘린 채 죽은 추기경과 기계화병단의 주검을 지나쳤다.
검푸른 벼락이 일렁이는 권역의 중심부.
쓰러진 바라간을 앞에 두고 있는 레녹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을 뿐.
“에단…….”
바라간이 이를 악물고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시선을 들어올렸다.
“에단……!!!”
대답하지 않는 그를 보며 바라간이 끓어오르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왜…… 왜 이제 온 거냐……!!”
“…….”
“왜……!! 송하는, 이미……!!!”
더 이상 송하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바라간은 알고 있었다.
주술을 사용해 송하를 되살리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났다.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어질 만큼 늦어 있었다.
데드라이즈 최고의 재능이라 불리던 검사. 수십년을 넘게 에단과 함께 했던 그의 친구.
수뇌부의 부재에도 한마디 불평조차 없이 묵묵히 군단을 위해 헌신했던 대장.
송하는 마지막 순간 에단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죽었다.
핏발이 선 바라간의 두 눈에서 분노가 뒤섞인 피눈물이 흘러나왔다.
“발칸으로, 돌아가자고……!!! 모두……!!! 네 바람을 위해……!!!!”
“…….”
“왜……!!!”
“바라간.”
레녹이 조용히 그를 불렀다.
“아직 모르겠나?”
파직……!!!
검푸른 뇌광에 비쳐 음영진 얼굴을 들어 올린 레녹이 물었다.
“지금 네 앞에 서 있는 바쥬르가 누구인지. 그저 알면서도 부정하고 싶은 것뿐인지.”
“……뭐?”
“모든 일이 끝난 뒤에야 이렇게 나타난 것 자체가, 그가 누구인지 무엇보다 확실하게 알려주고 있는데.”
손에 쥐어진 흑청색의 벼락이 우아하게 회전하며, 느릿하게 번뜩였다.
레녹이 그것을 들어 올려 천천히 에단을 가리키며 말했다.
“결과가 확정되는 순간을 확인하러 왔겠지. 그 전에 ‘돌아가면’ 혹시라도 결과가 바뀔 수 있을 테니까.”
“…….”
“어차피 되돌릴 생각이니까 죽음에도 감흥은 없어. 고통과 실패조차 지나가는 시행착오에 불과하지.”
“…….”
“그렇게 모든 실패와 좌절을 남김없이 맛보고 마모되어 왔기에…… 네가 아직 여기에 있는 것 아니었나?”
오랫동안 갈피를 잡지 못했던 질문에 정답을 내리는 이 순간.
어쩌면 레녹은 처음부터 정답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가 누구인지. 어째서 이렇게 돌아와 레녹의 앞에 서 있는지.
에단의 목에 흉터나 절단면이 없었음에도 알고 있었고, 그를 만나기 전에도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마지막 순간 이렇게 그것을 확인하는 것은, 레녹에게도 그만큼 프로젝트가 특별한 의미였었기에.
이 세계에서 눈을 뜬 이래 반평생을 쫓아왔던 프로젝트의 진실을.
한때는 레녹 자신의 기원일지도 모른다 생각했던 프로젝트의 끝을.
레녹 자신의 손으로 직접 지어주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언젠가는 이 순간을 맞이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
대답하지 않는 그를 바라보며 레녹이 웃었다.
“오랜만이다. 카이세 바쥬르.”
“…….”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바라간이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에단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무표정한 얼굴로 레녹을 올려다보는 에단은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마치 그 이름을 처음으로 들어본 사람처럼 눈을 감았을 뿐.
“카이세, 바쥬르…….”
에단이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누군가 나를 그런 식으로 부른 것이…… 얼마만의 일인지 모르겠군.”
“…….”
“그 이름을 버리기 위해 여기까지 왔는데, 결국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
소리도 없이 고요하게 걸음을 옮기며 에단이 중얼거렸다.
끔찍할 정도로 서늘한 적막 속에서 레녹과 에단의 시선이 동시에 교차하고.
“너는 나를 알고 있군.”
카이세가 물었다.
“아니…… 내가 회귀자라는 사실을 아는 자인가.”
“알고 있다? 그 말에는 어폐가 있군.”
레녹이 웃었다.
천천히 걸음을 돌려세운 레녹이 말했다.
“너희들이 금제를 사용해 마지막까지 감추려 했던 비밀. 블랙컨슈머 프로젝트의 실패 끝에 찾아낸 대안.”
“…….”
“그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다면…… 같은 결론에 도달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나?”
카이세는 레녹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레녹은 카이세를 기억하고 있다.
폐쇄구역에 남아 있던 과거의 잔상.
모든 것이 변하기 전 세상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던 과거의 카이세.
그가 마지막 순간 레녹을 위해 바친 희생이 아직도 레녹의 내면에 남아 있었으니까.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레녹을 이렇게 움직이고 있다.
파헤칠수록 이해할 수 없고, 들여다볼수록 공허했던 블랙컨슈머 프로젝트.
그 결말을 마지막까지 확인할 수 있게 도와준 것은, 다름 아닌 카이세 바쥬르 본인이었다.
그렇기에, 레녹은-
“오랫동안 쫓아왔던 미혹에 결착을 지어주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지.”
레녹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바라간을 지나쳐 폐허를 걸어 내려온 레녹이 벼락을 쥔 채 말했다.
“이 세계에서 눈을 뜬 이래 언제나 궁금해했던 프로젝트의 비밀…… 그 설계자였던 네 결말…… 이 도시에 남겨진 실패까지.”
“…….”
“아주 오랫동안 그 사실을 쫓아왔어.”
레녹이 눈을 감았다.
“너희들이 다음에 조금이라도 닿았기를…… 그 모든 여정에 결착을 지어줄 수 있기를 바라면서, 나는-”
천천히 눈을 뜬 레녹이 나직하게 뱉던 말을 뚝 끊었다.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레녹과 카이세가 서로를 마주했다.
토벌전이 끝난 마경의 최심부. 폐허와 시체만이 가득한 공허.
하지만 레녹의 내면에 차오르는 것은 감격도, 두려움도, 경계심도 아니었다.
내면에서 차오르는 순수한 궁금증을 밀어내듯, 레녹이 나직하게 물었다.
“어떤 기분이지, 카이세?”
“…….”
“아들의 몸을 빼앗아 현세에 되살아난 기분은…… 대체 어떤 느낌이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무표정한 에단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그가 지니고 있던 부활자의 재능까지 빼앗아, 그의 운명마저 잡아먹고 다시 태어나는 건. 얼마나 망가져야 가능한 일이지?”
“…….”
카이세가 어째서 그러한 일을 저질렀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에단 바쥬르가 지니고 있던 역천의 재능.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부활자의 능력.
그렇기에, 레녹이 궁금한 것은 카이세가 에단의 몸을 차지한 이유 따위가 아니었다.
블랙컨슈머 프로젝트를 설계한 카이세가, 처음에는 스스로 상정조차 하지 않았을 변절.
아들의 육체를 빼앗아가면서까지 변해버린 그의 감상이 듣고 싶었을 뿐.
“처음 결심했던 모든 것을 저버리고 변해버린 기분은…… 어떤 느낌이지?”
“아무것도.”
카이세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아무런 감흥도 없다. 이것 역시 오래전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실험하여 도달한 결과니까.”
“…….”
“에단의 육체를 온전한 상태로 손에 넣는 데 성공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나…… 그에 대한 시도는 예전부터 계속 해왔었지.”
느릿하게 손을 까닥이며, 레녹의 앞으로 걸어온 카이세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 안에는 끝을 알 수 없는 공허만이 어둡게 비치고 있었다.
“그때 내가 어떤 감상을 품었는지. 그런 것들이 그렇게 중요한 일이었나?”
“…….”
“그때의 마음도, 감정도…… 지금 이 순간조차 지나가는 찰나에 불과할 뿐인데.”
블랙컨슈머 프로젝트는 카이세 바쥬르의 회귀를 중심으로 진행된 계획.
이 세계의 모든 실패를 남김없이 들여다보고, 다음으로 향하는 답을 찾아내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카이세가 마주한 실패는 대체 얼마나 처참하고 막대한 종류의 것이었을까.
실패하고, 또 실패하고 실패해서 실패한 끝에.
끝내 그 모든 실패에 어떠한 감상조차 느낄 수 없게 되었다면.
지금 이 순간조차도 금방 사라 없어질 실패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면.
그것이 바로 레녹의 눈앞에 서 있는 카이세 바쥬르의 결말이었던 것이다.
“그렇군…….”
카이세는 동료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는다. 회귀하여 되살리면 되니까.
군단의 파멸과 붕괴에도 신경 쓰지 않는다. 회귀하여 되돌리면 되니까.
그를 믿고 따르는 부하들도, 그를 위해 죽어가는 군인들도. 그를 위해 함께했던 친구와 동료들도.
모두 실패한 회귀 속에 되돌려야 할 무의미한 시행착오에 불과할 뿐.
하지만 레녹은 그 사실을 본인에게 전해 듣고도 놀라지 않았다.
카이세가 회귀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그가 변한 이유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해 왔으니까.
폐쇄구역에서 레녹을 위해 스스로의 가능성을 넘기고 희생한 과거의 카이세와.
에단의 육체를 빼앗아 되살아난 지금의 카이세가 무엇이 다른지 생각했으니까.
그저, 짐작하고 있던 것을 실제로 확인한 씁쓸함만이 그곳에 있을 뿐.
“너는 내가 에단의 몸을 얻기 위해 회귀를 멈춘 사이 발생한 가장 거대한 변수다.”
카이세가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이 세계에 태어났으면서도 이 세계의 운명이 아닌…… 알카이드와는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변인이지.”
“…….”
“그러니 네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묻겠다.”
시선을 들어 올린 카이세가 말했다.
“제니시아를 양도해 줄 수 있겠나?”
“아니.”
침묵하던 레녹이 답했다.
“거절하지. 어떠한 경우라도 내가 제니의 선택을 저버리는 일은 없을 거다.”
“그 아이는 에단을 현세에 붙잡아두는 유일한 미련이다.”
카이세가 눈을 감았다.
“그 아이가 곁에 있어야…… 나는 이 육체를 온전한 형태로 유지할 수 있겠지. 선택의 여지가 없군.”
“네가 제니를 어떤 식으로 이용하려 하는지의 문제가 아니다. 카이세.”
레녹이 웃었다.
“카이세. 너도 그걸 알기에 ‘한 번만’ 묻겠다 말한 거겠지. 그렇지 않나?”
“…….”
카이세는 자신이 마주한 모든 문제를 두번 확인하지 않는다.
한번 답이 정해지고 나면, 회귀해서 다시 답을 바꾸면 그만이니까.
레녹은 카이세의 모든 언동에 회귀자의 면모가 지독하리만치 깊게 배어 있음을 인지하고 있던 것이다.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말해두지.”
천천히 손을 내린 레녹이 말했다.
“앞으로 몇 번을 회귀해도 내 대답이 달라지는 일은 없을 거다. 몇 번을 되돌려도 내 결정이 변하는 일은 없겠지.”
“…….”
“나는 너와는 달리, 처음 그대로 변치 않고자 여기에 있으니까.”
“아니. 그렇지는 않군.”
카이세가 눈을 감았다.
천천히 양손을 들어 올린 그가, 합장하듯 손을 마주하며 답했다.
“모든 것을 저버리고 변해 버렸기에…… 처음 정한 한 가지만큼은 해내려 하는 거다.”
“…….”
“이제는 그게 옳았는지, 틀렸는지도 알 수 없어졌지만-”
그를 위해 희생시켜온 모든 것을 헛되이 할 수는 없으니까.
카이세가 마주한 실패. 되감았던 시간. 그 대가로 잃어버린 추억과 인연.
카이세 자신만이 기억하고 있던, 그리고 잊어가는 모든 것에 의미를 주기 위해 이곳에 있다.
그러니-
“그것 하나 말고는 모두 바꿔 버리더라도…… 망설이지 않아야겠지.”
파아아아아앗!!!!
카이세를 중심으로 퍼져나온 역천의 마력이 거대한 원을 그리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레녹 역시 검푸른 번개를 움켜쥔 채 앞으로 걸어 나오며 뇌광을 한계까지 구부렸다.
견뢰 토벌전.
수만 명의 초인들을 학살하고 발칸 외곽구역을 말소시킨 전쟁의 종막.
그 끝에서 비로소 서로를 마주한 양측의 수장이 격돌하는 최후의 결전.
피를 흘리며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바라간이 중얼거렸다.
“카이세…….”
“바라간. 토벌전의 실패에 대해서는 유감이다.”
흘러넘치는 빛무리 속에서 카이세가 바라간을 돌아보지 않고 입을 열었다.
“다음 회차에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마.”
“……그건.”
다음 회차.
그 말의 의미를 바라간이 제대로 곱씹을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카이세가 이 자리에서 능력을 사용할 생각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찰나.
레녹과 카이세가 전장의 끝에서 서로를 향해 동시에 앞으로 걸어 나왔으니까.
흘러넘치는 마력의 폭풍 속에서 레녹이 카이세를 보며 픽 웃었다.
“결국, 처음부터 힘으로 해결할 생각이었군.”
“에단의 육체를 손에 넣은 이상 그런 방법도 있겠지.”
카이세가 말했다.
“하지만 그건 내 방식이 아니다. 싸우는 건 동료들의 몫이었지.”
“아니, 내 눈에는 똑같아 보이는군.”
레녹이 냉소했다.
“이 순간의 답을 미루고 ‘되돌릴’ 뿐이라면…… 그게 힘으로 찍어누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지?”
“…….”
“뭐, 아무래도 좋다. 카이세. 옳고 그름을 따지고자 널 기다리던 것이 아니니까.”
흘러넘치는 빛무리 속에서 레녹이 흑청색의 벼락을 바닥에 꽂았다.
손을 들어 올린 레녹이 검푸른 안광을 번뜩이며 카이세를 마주했다.
“결착을 내자. 이 전쟁에-”
그리고, 카이세 바쥬르의 이야기에.
콰아아아아앙!!!
흑청색의 번개가 폭발하며, 레녹의 등 뒤로 장장 수십 미터 크기의 날개처럼 드리운다.
역천의 마력이 노이즈처럼 버벅이며 카이세의 발아래서 반시계 방향으로 역행했다.
수십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블랙컨슈머 프로젝트의 성공과 실패를 초월해.
레녹과 카이세가 동시에 서로를 향해 손을 뻗은 그 순간.
두 사람의 입에서 같은 의미와 다른 형태를 지닌 영창이 흘러나왔다.
“사상전역 현현.”
“자성영역 전개.”
파아아아아아아아앗!!!!
무채색의 파문이 해일처럼 흘러넘치며 시공간을 뒤덮었다.
두 초월자의 근원심상이 현실을 투영하고 개변하며 법칙을 고쳐쓰기 시작했다.
세계를 바꾸고, 세계를 개변하며, 끝내는 세계를 구축하는 대답자의 기원.
의식이 한계까지 가속하며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느려지는 찰나.
시곗바늘이 거칠게 충돌하며 돌아가는 듯한 굉음이 세계를 뒤덮었다.
차르르르르륵!!!!!
무한한 후회 속에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역행의 분기점.
하늘의 순리를 어기고 시간의 흐름을 뒤집어 인과를 뒤바꾸는 역천의 정점.
카이세 바쥬르의 근원심상이 세계를 개변하며 법칙을 고쳐 쓰고 반전시키는 이 순간.
그를 회귀자로서 존재하게 하는 기원이 현실을 잡아먹고 거세게 펼쳐지기 시작한 찰나.
쿠과과과과!!!!
하지만, 카이세는 영창을 시작한 직후 레녹에게 강렬한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각자 사상전역과 자성영역을 전개한 직후.
하지만 정작 이 시공간에 자리해야 할 레녹의 근원심상이 느껴지지 않는다.
토벌전을 이용해 손에 넣은 초월의 벼락조차 잠시 내려놓고, 양손으로 수인을 맺어 자성영역을 전개하는 레녹의 모습.
이쪽을 향해 손을 펼친 마법사의 내면에서, 대신 느껴지는 것은-
“사상위계 심상구현.”
영창을 부르는 목소리는 둘. 하지만 응답하는 마음은 하나.
폐쇄구역에 남겨진 과거의 누군가 전한 마음이, 이 순간 시공을 뛰어넘어 지금에 닿는다.
카이세가 아득하게 느려진 의식의 저편에서 그 사실을 깨닫고 퍼뜩 시선을 든 순간.
레녹과 카이세가 수십 년의 시간을 넘어 동시에 같은 말을 내뱉었다.
“태역쇄겁엽(胎易鎖迲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