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1244
약먹는 천재마법사 1244화(1244/1265)
약먹는 천재마법사 1244화
견뢰 토벌전(35)
사상전역과 자성영역이 충돌하며 하나의 시공간에 동시에 겹쳐지는 찰나.
아득한 시공의 저편까지 거대한 원반이 펼쳐지며, 두 사람의 발아래서 느릿하게 회전했다.
콰르르르르륵!!!!
끊임없이 돌아가는 거대한 시계의 대지.
시침과 분침을 나룻배로 삼아, 시간이라는 거대한 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역천의 마력을 동력으로 삼아, 시간이라는 개념을 직접 조작하는 카이세 바쥬르의 근원심상.
무한히 시간을 되감아 실패를 반복하더라도, 반드시 대답을 찾아내겠다던 선각자의 마음.
자성영역 전개
사상위계 심상구현
[태역쇄겁엽(胎易鎖迲葉)]콰과과과과과과과과!!!!!!!
크기를 재단할 수 없는 거대한 시계 위에 레녹과 카이세가 서 있었다.
지면 아래 엿보이는, 숫자를 알아볼 수 없게 뒤틀린 눈금의 형상.
느릿하게 움직이는 시침과 분침 위에 선 레녹과 카이세가 서로를 마주본다.
쿠구구구……!!!
고개 숙인 레녹을 바라보는 카이세의 공허한 눈빛.
마모되어버린 회귀자의 시선이 마법사의 신형을 느릿하게 쫓았다.
무한한 회귀를 거쳐온 그조차 이 순간을 예상해 본 적은 없던 것처럼.
“……네가.”
사상전역과 자성영역을 전개하는 영창은 둘. 하지만 세계를 뒤덮고 펼쳐진 근원심상은 하나였다.
서로의 심상이나 술식이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겹쳐지며 확장되는 기적.
두 사람이 동시에 같은 영역을 전개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
순간적으로 의심했지만 틀림없었다.
레녹은 카이세와 동시에 같은 자성영역을 전개해 시공간에 펼쳐냈던 것이다.
그것도 역천의 마력을 지닌 카이세만이 지니고 있던 태역쇄겁엽의 심상을.
“처음부터 토벌전은 네게 어떠한 의미조차 되지 못했군.”
카이세가 입을 열었다.
“타인의 영역을 훔쳐 사용하는…… 그런 초유의 권능을 지금까지 사용조차 하지 않았나.”
“훔친 것이 아니다. 카이세.”
고개를 숙이고 있던 레녹이 조용히 말했다.
“이건 수십 년 전의 네가 내게 직접 전해준 대답이니까.”
“…….”
“처음 시작할 때의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어떤 결말이라 해도 후회하지 않을 거라 말했었지.”
카이세를 바라보는 레녹의 표정은, 무어라 말할 수 없을 만큼 흐릿해져 있었다.
“모든 것이 가짜여도 선택만큼은 진실이라면…… 다음을 위한 메아리가 되어 줄 수 있다고.”
“…….”
“그때 네 대답을 대신 받았기에 여기에 있다.”
한발 앞으로 걸어 나온 레녹이 말했다.
회전하는 분침 위에 선 레녹이 카이세를 바라보았다.
“너를 대신해 네 결말을 지어주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지.”
“……너는.”
“카이세. 이건 수십 년 전의 네가 지금의 너에게 보내는 메시지다.”
천천히 눈을 감은 레녹이 말했다.
“예전의 너를 이루는 모든 것이 가짜였다 해도…… 그 마음만큼은 틀림없이 진실이니까.”
카이세를 향해 레녹이 나직하게 답했다.
“대답을 갈구하는 존재라면, 내 세계에서는 마지막까지 진실된 존재여야 하니까.”
“오만한 말이로군.”
카이세가 물었다.
“너 자신의 심상을 기준으로 삼아 이 세계를 재단할 생각이냐.”
“…….”
카이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폐쇄구역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레녹을 위해 희생한 과거의 카이세가 남긴 대답이, 이 순간 전혀 다른 의미로 변해 들려온다.
그때와는 이미 모든 것이 달라졌다면. 그 기억조차 카이세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다면.
오직 레녹 자신의 내면에서만 진실로 남아 있을 뿐이라면.
결국, 마지막까지 서로의 대답을 관철할 수밖에.
카이세가 걸음을 옮겼다.
“네가 나와 같은 자성영역을 전개한 이유는 알고 있다. 시간을 되감는 태역쇄겁엽의 능력을 사용해 내 회귀에 직접 개입할 생각이었겠지.”
“…….”
“하지만 그것 자체가 회귀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와는 별개로 무의미한 시도에 불과하다.”
대답하지 않는 레녹을 두고 카이세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회귀란 세계의 순리를 완벽하게 거스르는 기적. 그렇기에 그 권능은 세계의 법칙을 고쳐 쓰는 사상전역의 존재 없이는 사용할 수 없지.”
“…….”
“자성영역의 전개방식으로 추정컨대 네가 사용한 태역쇄겁엽은 내가 프로젝트의 테스트베드를 설계하던 당시의 가능성…… 그 능력은 물체나 대상의 시간을 되감아 수복시키는 정도로, 역천의 재능을 기술의 영역으로 체화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회귀란 세계의 법칙을 고쳐 쓰는 권능의 영역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성립하지 않는 기적.
그렇기에 카이세는 회귀 능력을 완성시키기 위해 프로젝트를 통해 사상전역을 손에 넣었다.
그조차도 카이세 본인이 역천의 재능을 지니고 그것을 근원심상으로 품은 이례적인 천재이기에 가능했던 일.
과거의 카이세가 전해준 자성영역의 힘만으로는 카이세의 회귀에 제대로 개입할 수 없다.
카이세는 레녹이 전개한 태역쇄겁엽의 정경을 보고 그 시기를 곧바로 추측해내는 것과 동시에.
레녹이 어떠한 수단을 써도 그와 같은 시간선에 설 수 없음을 직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견뢰. 네가 준비한 방법으로는 회귀에 간섭할 수 없다. 나와 같은 시간선에 서는 것도, 내 회귀를 멈추는 것도 불가능하지.”
무표정한 얼굴로 레녹을 돌아본 카이세가 말했다.
“애초에 역천의 재능을 지니고 있지 않은 네가, 시간의 역행이라는 기적을 온전히 감당해 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나?”
“아니. 아마 인간이라면 불가능하겠지.”
하지만 레녹은 그 말을 부정하지 않고 웃었다.
카이세가 그렇게 말할 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그래서 너조차도 여기까지 와서 에단의 몸을 손에 넣은 것이 아니었나?”
“…….”
“회귀할 거라면 해 봐라, 카이세. 나는 따라가지 않을 테니.”
순간적으로 대답하지 않는 카이세를 두고, 레녹이 팔짱을 꼈다.
고개를 기울인 레녹의 시선이 검푸른 안광을 휘감고 번뜩였다.
“태역쇄겁엽을 사용한 건 마지막으로 전할 말이 있어서일 뿐…… 애초에 회귀는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지.”
“…….”
“우리가 무엇을 하든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다. 어느 쪽이든 싸움은 금방 끝날 테니까.”
흘러넘치는 시간 속에서 법칙을 무시하는 초월자들이 맞붙는 토벌전의 최종 결전.
현실의 시간으로 따지면 그 격돌조차 찰나에 불과하다.
서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모든 준비는 끝났어.”
레녹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원했던 결말은 아니지만, 이 전쟁에 결착을 지어주기엔 충분할 거다.”
“……그런가.”
카이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녹이 무엇을 원하고 그와 같은 영역을 전개한 것인지. 아직은 알 수 없다.
그가 무엇을 노리고 카이세의 회귀를 굳이 막지 않으려 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다.
토벌전을 통해 초월의 벼락을 손에 넣고도, 카이세와 오래 싸울 생각조차 없어 보이는 초연한 태도.
하지만 카이세는 그 모든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굳이 이유를 묻지 않았다.
회귀를 시작한 이래, 그가 질문을 던지는 것은 한 번이면 족했으니까.
레녹이 남긴 미혹과 의문을 확인하는 것은, 지금이 아니라-
“다음 회차에서 직접 확인해 보지.”
차르르르르륵!!!!!
초침이 빠르게 역행하며 분침과 시침까지도 반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며 속도를 높인다.
시침과 분침을 나룻배로 삼아 시간이라는 거대한 강을 직접 거슬러 올라가는 기적.
이 세계에서도 오직 카이세 바쥬르 한 사람에게만 주어진 회귀의 권능.
그것을 사상전역과 자성영역의 형태로 이미지하여 세계를 ‘거스른다’.
이 세계가 존재해 온 시간 자체를 부정하고 거부하는 역천의 정점.
[회귀 개시.]부아아아아아아앙!!!!
분침 위에 서 있던 레녹의 모습이 멀어지고, 시침 위에 올라탄 카이세만이 남는다.
모든 것이 빛으로 흐려지는 광경 속에서 카이세가 망설임 없이 걸음을 돌렸다.
* * *
역천의 재능이란 축복이 아니라 저주다.
카이세 바쥬르는 태어날 때부터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마력이 거꾸로 흐르는 체질을 타고났군.’
언제나와 같이 ‘실패하고’ 대륙을 떠돌던 나날.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나 술잔을 나눈 돌팔이 의사는 그렇게 말했다.
‘전신의 혈액순환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마력이 흐르며 끊임없이 충돌하지.’
‘네 시간은 오래지 않아 남들과는 다르게 흐를 테고, 오래 살 수도 없을 거다.’
‘가족이 있다면 미리 작별인사를 해두는 게 좋겠군.’
의사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술을 마시고 잠든 그날 밤, 의사는 직접 그를 죽여 시체를 손에 넣으려 했으니까.
역천의 재능.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특질계의 혈계능력이자 피를 타고 흐르는 저주.
카이세의 재능을 눈치챈 이들은 하나같이 그 능력과 육체를 탐냈고, 죽여서라도 빼앗으려고 했다.
그때는 그들이 왜 그렇게까지 이 능력을 갈망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때는 왜 그렇게 이 능력을 두려워하는지 알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카이세 바쥬르가 살아온 모든 시간이 그러했다.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제때 손에 들어오지 않고, 언제나 한참 늦은 뒤에야 깨우칠 뿐.
모래알처럼 손안에서 흘러나가는 시간 속에서 항상…… 후회하고 있었다.
그때 조금 더 잘 해낼 수 있었다면. 그때 느낀 위화감을 무시하지 않았다면. 그때 봤던 비밀을 조금 더 파헤쳐봤다면.
실패하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후회는 미련이 되고, 미련은 회한이 되어 가슴 속에 깊게 남는다.
남들과는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카이세의 내면에서 [후회]는 그의 기원이 되고.
어느새, 카이세의 근원심상은 그 후회를 거스르기 위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차르르르륵!!!!
사상전역 태역쇄겁엽.
평생을 후회해 온 카이세가 자신의 마음 안에서 만들어낸 역천의 정점.
후회하지 않기 위해 시간조차 거슬러 모든 것을 개변하려는 천재의 정취.
끝없이 되감기는 시간 속을 홀로 걷는다.
돌아가는 시계바늘 위에서 카이세가 지나쳐온 시간을 통째로 되감는다.
카이세가 마주해 온 풍경과 기억이 눈앞에서 역행하는 듯한 환상.
동시에 카이세의 심신이 타들어 가며, 그 원형조차 남지 않고 융해되기 시작했다.
“…….”
치이이이익!!!!
회귀란 세계의 법칙과 순리를 무시하고 시간을 거스르는 기적.
하지만 시간을 역행하는 과정에서 술자의 심신이 피폐해지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
수적석천(水滴石穿). 아무리 단단한 바위도 흐르는 물방울을 이길 수 없는 것처럼.
시간의 강을 거슬러 오르다 보면 흐르는 물결에 영혼과 정신이 닳아 없어지고 만다.
성격. 지성. 인간성. 끝내는 기억에 이르기까지 자아를 구성하는 정체성을 파괴하고 끝내는 유구한 시간의 일부가 되는 결말.
카이세가 에단의 육체를 손에 넣은 것은 그 리바운드를 피할 수단을 원해서였다.
부활자의 재능.
카이세와 같이 시간을 되감는 재능은 아니었으나, 육체의 손상을 역행하여 죽음조차 무시할 수 있는 재능.
에단의 능력이 더욱 강해져, 그를 죽음에서 부활시킬 정도가 되자 카이세는 아들에게 다른 가능성을 보았다.
아무리 많이 회귀를 해도 영혼과 정신이 마모되지 않을 수 있는 그릇.
회귀의 부작용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져, 예전처럼 끝없이 ‘도전’할 수 있는 힘.
카이세가 오랫동안 시행착오를 거쳐, 자신의 아들이 지닌 육체를 손에 넣은 이유.
빠지지지직-
시간의 강을 거슬러 오르며 필연적으로 맞이하는 영혼과 정신의 마모.
언젠가부터 회귀할 때마다 매번 그를 미치게 만들었던 고통이 빠르게 잦아든다.
카이세를 짐승만도 못하게 만들었던 정신의 마모와 심신의 손상이 역행하여 돌아온다.
부활자의 재능을 타고난 에단의 육체를 손에 넣은 시점에서 가능해진 기적.
그것을 확인한 카이세가 망설임 없이 다시 회귀를 시작했다.
차르르르륵!!!!
돌아가는 시곗바늘 속에서 심신을 수복하고 다시 시간을 걷는다.
견뢰(堅雷). 토벌전에서 수만 명을 학살하고 9레벨의 전격마법을 각성한 초월자.
자신을 죽이기 위해 시작된 전쟁을 승천의식으로 삼아 초월에 도전한 괴물.
무수한 초월자들을 죽이고 피에 젖은 마음으로 경지에 도달한 천재.
정면에서 맞붙었다면 승리를 확신할 수는 없었겠지.
에단의 육체를 손에 넣긴 했지만, 예나 지금이나 싸움은 그의 특기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카이세는 역사에 남을 천재와 괴물들을 쓰러뜨리고 발칸의 정점에 섰었다.
발칸의 운명을 가르는 내전에서 승리하고, 음지를 지배하며 프로젝트를 설계하고, 초월자들을 회유하여 구원을 꿈꾸었다.
카이세가 무수한 괴물과 천재들을 상대로 끝내 승리하고, 혹은 그들을 끌어들일 수 있던 이유.
그건 카이세가 그들의 ‘현재’와 ‘미래’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차르르르륵!!!!!
견뢰가 존재해 온 시간을 거슬러 올라 계속해서 회귀를 반복한다.
그가 마드리치 오니온을 쓰러뜨리고 8레벨에 도달하기 전으로.
카르텔의 1사장, 파르덴 맥퀸을 죽이고 7레벨을 완성하기 전으로.
전격계열 고유마법을 훔쳐 배워 진정한 마법사가 되기 전으로 향한다.
세상을 준동케 하는 초월자들조차 피할 수 없는, 그들이 미약하고 초라했던 ‘과거’.
화악!!!
눈을 감았다 뜬 순간, 카이세는 너저분한 뒷골목의 한쪽에 서 있었다.
카이세 본인에게도 더할 나위 없이 익숙한. 예전에는 수천 번씩 드나들곤 했던 49구역의 풍경.
하지만 이제는 그 어떤 감흥조차도 남아 있지 않은 오래된 기억.
수십 년이 지나도 용병과 무법자들로 번잡하고 활기가 넘치는 음지의 번화가.
“…….”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사방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조차 저 멀리 아득하게 느껴진다.
시간을 되감아 과거로 회귀하는 이 순간. 모든 것이 카이세와는 동떨어진 것처럼 생경하고 어색했다.
카이세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하나 언젠가 틀림없이 그곳에 존재하고 있었던 시간선.
무표정한 얼굴로 49구역의 뒷골목에 서 있던 카이세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영원히 남들과는 다른 시간선을 걷는 실패자의 고독.
회귀 직후에 느껴지는 이 적막만큼은 언제나 오로지 그의 것이었다.
프로젝트의 실패를 되감아, 끊임없이 재능을 수집하고 편집해 온 뒤로 매번 마주해 왔던 절망.
너무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각임에도, 놀라울 정도로 익숙하고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조차 스쳐 지나가는 무수한 시행착오의 일부일 뿐.
그렇기에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끼익!
낡은 문을 열고, 그 아래로 이어진 계단을 지나 어두운 조명이 내린 술집에 들어선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곱슬머리를 한 날카로운 인상의 여성이 몸을 돌렸다.
“어라, 못 보던 얼굴인데. 새로운 손님?”
“…….”
카이세는 대답하지 않았다.
표정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눈앞에 서 있는 여성을 한참이나 바라보았을 뿐.
미약하게 떨리는 손끝. 카이세 자신의 의지와는 별개로 그녀를 보자마자 반응하는 듯한 위화감.
하지만 여성은 그런 시선이 익숙한 것처럼 심드렁한 기색으로 팔짱을 꼈다.
“미안하지만 그렇게 쳐다본다고 돈이 나오는 건 아니거든. 대신 일거리는 줄 수 있어.”
“…….”
“어라, 농담이 안 먹혔나? 뭐, 됐으니까 문 닫고 들어와.”
대답하지 않는 카이세를 보며, 여성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가 능숙하게 술잔을 정리하며, 바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을 가리켰다.
“마침 방금 당신처럼 일을 찾으러 온 사람이 있거든.”
“…….”
그제서야, 카이세의 무표정한 눈동자가 그 손짓을 따라 돌아섰다.
여성의 맞은편 바에 앉아, 등을 돌린 채 카탈로그를 들여다보는 흑발의 청년.
검은 코트를 걸치고 연초를 문 그 모습은, 한눈에 보기에도 숨길 수 없을 만큼 말라 있었다.
칵테일을 흔들고 있던 여성이 어깨를 으쓱였다.
“반이라고 했던가? 전격마법사인데 실력이 괜찮아. 혹시 같이 일할 생각이 있다면-”
“…….”
여성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카이세가 청년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두 눈으로 보는 것은 처음이나, 그를 보자마자 제대로 도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8레벨에 도달한 초월적인 대마법사. 9레벨의 전격마법을 손에 넣은 초월자.
하지만 그런 천재조차도 미약하고 불안정하며, 힘이 모자라던 시기가 있다.
그가 제대로 된 위계를 쌓아 올리기도 전에 존재했던 과거의 시간선.
이 도시에 흘러들어와 처음으로 프리랜서 일을 시작했던 당시.
카이세는 끝없이 시간선을 거듭해 역행하며, 견뢰가 처음 발칸에서 활동하던 시기까지 회귀한 것이다.
“…….”
카이세의 존재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카탈로그에 몰두하는 과거의 견뢰.
당장이라도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에 있는 견뢰를 향해 다가선다.
지금이라면, 어떠한 일이든 가능하다.
견뢰를 이 자리에서 죽이는 것도. 반대로 견뢰를 회유하여 그의 동료가 되는 것도.
지금부터 그의 운명을 설계하여 카이세가 원하는 방향으로 구부리는 것조차도.
에단의 육체를 손에 넣은 지금이라면, 어떤 방법을 골라도 과거의 견뢰는 인지조차 하지 못하겠지.
실패한다면 다시. 포기한다면 다시.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는 그 순간까지 무한하게 시행착오를 반복한다.
과거의 견뢰와 마주하여 이곳에 선 것은, 카이세가 진정으로 이 세계에 돌아왔다는 첫 번째 증거.
그러니-
“앉지 않을 건가?”
그 순간, 등을 돌리고 있던 견뢰가 입을 열었다.
카탈로그를 들여다보는 모습 그대로 그가 태연하게 말했다.
“여기서 섞어주는 칵테일이 아주 괜찮아. 지금 맛보고 가지 않으면 아쉬울 거다.”
“…….”
“이때는 아직 조든이 건강할 때라, 종종 직접 칵테일을 만들거든. 그때 찾아오면 맛이 더 각별하지.”
굳은 듯이 멈춰선 카이세를 향해 견뢰가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조금 미화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돌아와 보니 그렇지도 않군. 기억하고 있던 그대로야.”
갓 프리랜서 일을 시작한 마법사답지 않은 회한에 젖은 태도.
몇 번 찾지 않은 술집의 칵테일에 대해 상세하게 아는 듯한 답변.
카이세의 존재를 먼저 인식하고 말을 걸어오는 모습까지.
천천히 술잔을 들어 올린 견뢰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하루를 벌어 내일을 사야 했었지. 아무것도 없었고, 때론 잠드는 게 두렵기도 했다.”
“…….”
“많은 것이 변했는데…… 왜 지금도 가끔씩 이때가 생각이 나는 건지.”
무언가, 다르다.
그것을 직감한 카이세가 무심코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이 남자는, 카이세가 회귀한 시간선에 존재하는 과거의 존재가 아니라-
“앉아라, 카이세.”
레녹이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을 따라 검푸른 안광이 번뜩이며 카이세의 얼굴을 비추었다.
“말했듯이, 싸움은 금방 끝날 테니까.”
“……너는.”
시간을 돌려 회귀하기 직전 레녹이 카이세에게 건넸던 마지막 전언.
그것을 깨달은 카이세의 무표정한 얼굴에, 처음으로 숨길 수 없는 균열이 어렸다.
레녹이 카이세와 같은 영역을 펼치고도, 그의 회귀를 직접 따라가지 않았던 이유.
카이세가 시간을 돌려 회귀하는 순간을 눈앞에서 지켜보면서도 막지 않았던 이유.
레녹은, 카이세보다 먼저 회귀한 시간선에 도착하여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