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1246
약먹는 천재마법사 1246화(1246/1265)
약먹는 천재마법사 1246화
견뢰 토벌전(37)
극뢰마법(極雷魔法).
레녹에게서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카이세는 곧바로 그 의미를 이해했다.
동시에 그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개념을 이르는 말인지 역시 깨달았다.
“모든 인과에 앞서, 선행하는 벼락이라고?”
카이세가 무표정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건…… 불가능하군. 그런 종류의 힘이 이 세계 아래에 온전하게 존재하고 있을 리는 없다.”
회귀를 거듭해 온 카이세는 시공간의 개념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극뢰라는 개념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것인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인과란 무언가에 앞서거나 뒤처질 수 있는 개념이 아니야. 그저 그 자리에 존재하며 순환하는 현상을 가리킬 뿐이지. 그것을 인간이 넘어서야 할 대상으로 여길 수 있단 말인가?”
삼라만상 모든 물질과 현상에 존재하는 원인과 결과.
그 절대적인 법칙에 직접 개입하는 능력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인과의 역전과 개변. 원인과 결과를 뒤집거나 바꾸는 초월적인 권능.
역사상 유달리 강대했던 몇몇 승천자들은 그러한 힘을 실제로 지니고 있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그것 역시 결국 원인과 결과라는 ‘순환’ 안에서 이루어지는 기적일 뿐.
인과의 순환을 벗어나, 그보다 먼저 우선하는 개념일 수는 없었다.
만약, 그런 힘이 존재한다면-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 우선한다면, 말 그대로 모든 속성과 상성에 대해 절대우위를 가지게 된다. 애초에 필멸자가 상상할 수 있는 도달점이 아니지.”
“그래서?”
“그건, 말 그대로 시공간조차 초월해 매 순간 원형 그대로 존재하는-”
거기까지 말한 카이세가 무심코 말을 뚝 멈췄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들어 올린 카이세를 보며, 레녹이 웃었다.
“너라면 이해할 거라 생각했지.”
“……너는.”
회귀하는 시공간조차 초월해서 존재하는 절대성.
역행하는 시간의 흐름보다 우선하는 존재가, 이 순간 보란 듯이 카이세의 눈앞에 서 있다.
레녹은 카이세의 회귀와 함께 움직이며 그와 같은 시간선 위에 서 있던 것이 아니다.
카이세가 어떻게 시간을 역행하든, 무엇보다 그곳에 우선하여 존재하고 있었을 뿐.
세계의 인과를 선행하여, 그 어떤 변화보다 먼저 그곳에 존재하는 벼락의 인과.
레녹이 말한 극뢰의 의미는 처음부터-
“아켄드리아스에게 이야기를 들은 순간부터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지.”
할 말을 잃어버린 카이세를 두고 레녹이 걸음을 옮겼다.
“극뢰마법이란 내 벼락이 9레벨에 올라 도달하게 될 형태 중 하나라는 걸.”
“…….”
“그래서 토벌전이 끝나는 시점에 맞춰 이 분기점을 손에 넣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검푸른 뇌광을 얼굴에 드리운 레녹이 나직하게 말했다.
“네가 만약 카이세 바쥬르 본인이 맞다면 이 전쟁의 결과가 정해지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을 테니.”
“…….”
“언제나 최악의 가능성을 상정하고 있었어.”
레녹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항상 가능성을 남겨놓으려고 하지.”
“……견뢰.”
“카이세. 이건 내가 토벌전이 시작되기 전부터 준비한 가능성이다.”
눈을 감은 레녹이 말했다.
“오래된 이야기에 결말을 지어주기 위해…… 내가 선택한 대답이지.”
벼락의 인과를 삶에 새긴 순간부터, 뇌광은 언제나 생애의 가장 앞자리에 선다.
번개란 그 무엇보다 빠르고 강렬하게, 찰나의 순간 스쳐 지나가는 깨달음과 같은 것.
극뢰(極雷)는 이해라는 과정을 역행하는 깨달음.
존재하지 않으나, 존재해야 하는 선각(先覺) 그 자체다.
모든 인과에 우선하기에, 극뢰는 존재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과거와 현재 양쪽에 존재하며-
아무리 회귀하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도 결코 변하지 않는다.
극뢰를 쥐고 있는 이 순간, 레녹은 모든 과거에서 지금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다.
그렇기에 카이세의 회귀에도 변하거나 흔들리는 일 없이 그의 곁에 남아 있을 수 있던 것.
말 그대로 모든 시간선에 우위를 지니는 회귀자의 천적과도 같은 힘.
“결착을 내자, 카이세.”
파직……!!
흔들리는 뇌광과 함께 천천히 눈을 뜬 레녹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말했듯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다.”
무한히 이어지는 회귀 속에서 서로의 가능성을 겨루는 일이다.
카이세와 레녹이 체험한 시간은 이미 수십년을 훌쩍 넘겼지만, 격돌은 찰나에 불과했다.
싸움은 한순간 시작되어 끝난다.
그조차도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
파지지지직!!!!
검푸른 뇌광이 레녹의 손안에서 번뜩이며, 시공간을 넘어 일렁인다.
카이세가 회귀하는 그 모든 시간선에 우선하여 존재하는 초월의 번개.
그 검푸른 뇌광의 의미를 제대로 마주하는 순간, 카이세 역시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시간을 되돌리고 회귀해도 변치 않고 그대로 존재하는 선각의 벼락.
인과에 우선하는 저 벼락이 태어난 시점에서,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어졌다는-
“……아니.”
쾅!!
차르르륵!!!
태역쇄겁엽의 시곗바늘이 거칠게 회전하며, 시공간을 다시 한번 크게 휘저었다.
사납게 날뛰는 세계선의 끝에 올라탄 카이세가 섬뜩한 얼굴로 레녹을 내려다보았다.
“돌이킬 수 없는 건…… 변하지 않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모든 것을 바꾸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지.”
“…….”
“견뢰. 네가 이 모든 시공간에 우선하며 내 회귀를 끝낼 생각이라면-”
몸을 홱 틀어 돌아선 카이세가 전력을 다해 마력을 끌어올렸다.
“나는 그조차도 의미를 잃는 순간까지 계속해서 다음 회차로 나아가겠다.”
철컥!!!
모든 인과에 우선하여 존재하는 극뢰마법.
하지만 그건 레녹이 승천자가 된 것이 아니라, 9레벨에 도달한 벼락의 도달점을 다루고 있는 것에 가깝다.
지금 카이세와 마주하고 있는 레녹은 승천의식이 실패하고 아직 필멸자로서 남아 있는 이 세계의 존재일 뿐.
끝없이 회전하는 시계 속에서 마모되는 부품처럼, 무한한 회귀를 통해 모든 것을 닳아 없애버린다.
그때까지 무한히 회귀를 반복하며 카이세 하나만을 이 거짓된 시간선 위에 남겨놓는다.
할 수 있다.
셰계를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꿔버리겠다 결의한 카이세 자신이라면.
극뢰를 손에 넣은 레녹 본인보다 오래 버티면서 끝까지 나아갈 수 있-
차르르르르르르르르륵!!!!!
태역쇄겁엽의 시침이 그 어느때보다 빠르고 거세게 회전하며 날뛰었다.
레녹과 카이세가 이 세계에 존재해 온 시간을 넘어, 그보다 더 먼 과거로 향한다.
회귀를 반복하는 도중에도 카이세가 마지막까지 보여주지 않았던 시간으로 향했다.
블랙컨슈머 프로젝트의 실패과 종말.
그 사이에 있었던, 카이세 바쥬르의 분기점으로.
* * *
[14번째 대운하 계획 실패. 회귀 개시.] [42번째 승천 실험 중단. 회귀 개시.] [81번째 편람 공략 폐기. 회귀 개시.] [144번째 교단 포섭 시나리오 실패. 회귀 개시.]…….
회귀를 돌려 이 세계의 모든 실패를 남김없이 들여다보겠다는 프로젝트의 전말.
벌써 수백 번의 회귀를 거듭했음에도 카이세는 포기하지 않았다.
[할 수 있어. 몇번이라도.]프로젝트를 시작한 뒤로 유의미한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카이세가 지닌 능력을 사상전역의 형태로 안정화시키는데 성공한 회차의 이야기.
계획대로 회귀의 권능을 완성시킨 시점에서 카이세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프로젝트를 시작한 시점에서 이 정도 시행착오는 얼마든지 각오하고 있었다.
고작 수백 번의 실험 정도로 멸망을 피할 수 있었다면 이 세계는 진작 누군가에게 구원받았을 터.
무언가 그 이상의 방법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이해하고 있었다.
회귀의 반동이나 위험함에 대해서는 카이세 역시 진작 인지하고 있었다.
인간의 정신과 관련된 논문. 선천이능과 술식을 모아 최악의 사태에 대비한다.
영혼을 보호하기 위한 아티팩트 관련 자료를 들여다보며 카이세가 중얼거렸다.
[아직은 문제가 없지만 정신에 부담이 가해지는 건 사실이야. 이 반동이 계속 쌓인다면 내가 어떻게 될지도 알 수 없고. 그러니 지금부터 미리 대책을 생각해야 한다.] [육체의 노화와 정신의 마모는 별개의 문제니까.]카이세의 옆에 서 있던 포혈공이 말했다.
그녀가 카이세의 옆에서 펜을 들고 무언가를 한참 써내려가고 있었다.
[장생종이나 귀족도 유구한 시간의 흐름에 언제까지나 버틸 수 있는 건 아니지. 무언가 대안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동의해.] [실패할 것 같은 회차는 빠르게 포기하고 돌아오는 방식도 궁여지책에 불과해. 술식이나 아티팩트도 회귀에 가져갈 수 있는 건 정말 극히 희귀하고…….]카이세가 고민에 잠겼다.
[가장 좋은 건 나 자신이 ‘절대정신’이나 ‘영륜순환’ 같은 능력을 얻는 것이겠지만…… 얼마나 더 수련을 거듭해야 그만한 경지에 이를 수 있을지.]카이세는 전신의 피와 마력이 반대로 흐르는 체질을 지녔기에, 남들과는 타고난 감각이 완전히 달랐다.
남들에게는 그렇게 어렵지 않은 무예와 술식의 수련조차도, 카이세에게는 지극히 어려운 고난도의 작업.
모든 부분에서 타인에게 배움을 구하지도 못하고 홀로 맨땅에 부딪혀가며 시행착오를 거쳐야만 했으니.
그럼에도 카이세가 위계를 완성했다는 것 자체가, 그가 얼마나 노력해 왔는지를 방증하고 있었지만.
무한한 회귀 속에서 프로젝트와 개인의 수련을 양립한다는 건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다.
[육신을 버리고 군령이 되는 것은 어떻겠느냐.]포혈공의 맞은 편에,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오니온.] [요르타에는 살아 있는 인간을 군령으로 만드는 기술이 존재하지. 네가 원한다면 군령도시에 데려다주마.]오니온이 무표정한 얼굴로 힐끗 시선을 들어 올렸다.
[육신을 버린다는 제약으로 정신과 영성은 굳건해지고, 시간의 흐름에는 둔감해지지. 천 번을 회귀해도 잠깐이 지난 것처럼 느껴질게야.] […….] [여차할 경우에는 내 술식으로 군령이 된 네놈을 거둘 수도 있겠지.] [이봐. 당신 그냥 회귀자를 자신의 수중에 두고 싶은 거 아니야?] [아니. 그런 방식은 안 돼. 시간의 흐름에 둔감해지면 매 회차를 의미 있게 여길 수 없을 테니까.]구태여 부정하지 않는 오니온을 흡혈귀가 삐딱하게 노려보는 사이, 카이세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실패할 것 같은 회차는 빠르게 포기해야겠지만, 그건 모든 시도마다 최선을 다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니야.] [으음.] [얼마나 더 실패해도 매 순간에 최선을 다하려 한다. 그걸 알기에 너희들도 나를 도와주는 거겠지.]논문을 내려다보는 카이세의 눈빛이 선명하게 빛났다.
[회귀라는 기적에 기대지 않고, 나 자신만이 도달할 수 있는 답을 찾아야 해. 앞으로 얼마나 더 실패한다 해도-]그때 카이세가 말한 ‘얼마나’는, 몇번의 실패를 각오하고 내뱉은 말이었을까.
카이세는 오래지 않아 그것을 뼈져리게 실감하게 됐다.
* * *
[227번째 반궁 부활 시나리오 실패. 회귀 개시.] [393번째 사도화 계획 폐기. 회귀 개시.] [523번째 역성혁명 실패. 회귀 개시.] [740번째 구겁 잠입 실패. 회귀 개시.] [952번째 실패. 회귀 개시.] [1465번째 실패.] [2218번째 실패.]…….
실패의 자릿수가 달라질 때마다, 이전 회차의 정리 역시 간략해진다.
계획과 시나리오의 설명도, 실패한 이유도 생략하고 결과만을 적시한다.
그럼에도 카이세는 처음 그대로이고자 노력했다.
회귀하며 같은 순간을 반복하는 자신과는 달리, 동료들은 언제나 이 순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니까.
자신을 도와주는 이들을 위해서라도 언제나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해야 한다.
언제나 그렇듯, 동료들을 모아 프로젝트의 목적과 회귀에 대해 설명한다.
그동안의 회차에서 있었던 일을 정리한 뒤 이번 회차에서 할 일을 정리했다.
하지만-
[카이세……?] [……아.]흘러 떨어지는 코피가 발아래 피 웅덩이처럼 고여 있었다.
충혈된 눈으로 고개를 돌린 카이세가 멋쩍게 웃었다.
[별건 아니야. 조금 피곤해서 그런 것 같군. 조금 쉬면 괜찮아질 거야.] […….] [……미안. 숨겨서는 안 되겠지. 회귀의 반동인 것 같다.]침묵하는 동료들을 보며 카이세가 솔직하게 고백했다.
[지난 회차부터 심해졌어. 아무래도 기억력의 손상이 조금…… 있는 것 같아.] […….]수천 번의 회차를 지나오는 동안 카이세가 살아온 체감시간은 이미 수백 년을 가볍게 넘겼다.
어떤 회차에선 며칠도 넘기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어떤 회차에선 수십 년을 보내기도 했다.
평범한 인간의 정신으로 버티기는커녕, 그 모든 회차에서 있던 일을 기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
가장 먼저 한계가 찾아온 것은 카이세의 판단이나 지성이 아니라 기억력이었다.
서글픈 동료들의 표정을 보면서 카이세가 웃었다.
장발에 가려진 길레온의 수려한 얼굴이 희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언제나 카이세의 뜻을 따라, 그 의지를 존중하던 친구가 처음으로 내보이는 흔들림.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내내 카이세의 측근들과, 그가 모은 동료들이 충돌하는 일은 잦았다.
카이세를 위해 프로젝트에 참가한 이들과, 프로젝트를 위해 카이세를 따라온 이들의 우선순위는 결국 다를 수밖에 없었으니까.
[괜찮아.]결국, 그 간극을 조절하고 균형을 잡는 것 역시 카이세가 할 일이었다.
천재와 괴물들을 상대하고, 포섭하며, 끝내는 동료로 끌어들여 대답을 찾아내는.
올리비에라와 함께 프로젝트를 시작한 순간부터 모두 각오하고 있던 일이었다.
[반갑습니다. 카이세 바쥬르.] [저는 제국 황성 내각 좌승상의 좌를 맡고 있는 유성이라 합니다.]황성에서 사람이 찾아온 것 역시 이 당시의 일이었다.
* * *
[특질계통의 혈계능력. 세상을 바꿀 힘을 지녔으나 파멸이 약속되어 있는 악마의 재능.] [역천의 마력을 타고난 이들은 모두 20살 이전에 단명하며, 마력이 뒤틀려 무예나 술식을 익히는 일에 어려움을 겪지요.] [황성에서는 그 재능을 눈여겨보고 중히 쓰려 시도한 적이 있으나 모두 실패로 끝났습니다.]무수한 회귀 속에서도 거의 엮인 적이 없었던 아르스노바 제국 황성에서 찾아온 손님.
그럼에도 카이세 바쥬르가 지닌 능력의 정체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던 ‘귀족’의 존재.
[카이세. 당신은 그 저주받은 혈계능력을 쥐고 가장 오랫동안 살아남은 존재이자, 그 재능을 통제해 낸 유일한 사람입니다.] [아울러 그 재능을 한계까지 깎아내어 초유의 권능으로 조정해낸 위대한 구도자이기도 하지요.] [당신처럼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탐구자도, 그만큼 답에 가까워진 도달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희는 당신이 끝없는 실패 끝에 찾아낸 재능의 편집에 관심이 있습니다.]스스로를 황성 내각 좌승상이라 소개한 유성은 직위에 어울리지 않게 겸손하고 소탈한 사람이었다.
페이샤가 타온 맛없는 차를 끝까지 마시고도 한마디 불평조차 하지 않을 만큼 인내심도 넓었다.
카이세는 그것만으로 눈앞의 좌승상에게 약간의 호기심이 생기는 것을 느끼고 그를 떠보았다.
[재능의 편집이라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난 프로젝트를 통해 그런 일을 꾸민 적이 없는데.] [대륙 전역에서 발생하는 역사개변을 우리는 오랫동안 지켜봐 왔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으로는 해낼 수 없는 기적의 총체와도 같았지요.]유성이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당신의 인과는 이미 대륙 전역에 뒤엉켜 얽매이며 모든 곳에 흔적을 남기고 있습니다. 저희가 정녕 읽어내지 못할거라 생각하셨습니까?] […….]알고는 있었다.
대륙 전역을 들쑤시며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도중 발생하는 무수한 나비효과.
원인과 결과가 고정되어 있던 과거의 시간선을 건드리며 발생하는 명동.
제국 최고의 천재들이 모였다는 황성에서 그것을 인지하고 카이세를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것을.
아르스노바 제국 황성을 프로젝트의 협력자로 끌어들일 수 있는지 실험해 보기 위한 포석.
[스스로 ‘연결고리’가 되려하는 당신의 기지를 저희는 무척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침묵하는 카이세를 보며 유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 황성 내각은 그대에게 협력하겠습니다. 대신, 한 가지 거래를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거래?] [시황제(屍皇帝)에 대해 드리고 싶은 제안이 하나 있습니다.]카이세를 바라보는 유성의 미소가 순간, 섬뜩하게 변했다.
[당신이 이어온 무수한 실패에…… 한 가지 의미를 더하고 싶군요.]* * *
[34436번째 실험 중단. 이번 계획도 실패로군.]발칸의 도시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야경.
카이세는 올리비에라와 함께 빌딩의 옥상에 서 있었다.
거리 아래 미친듯이 발버둥치며 괴성을 지르는 이계의 악마들.
[문을 1.75초 열었을 뿐인데 발칸 외곽구역 8곳이 모조리 악마화됐다…… 역시 외세계의 힘은 변수가 너무 많아.]올리비에라의 뒤에 서 수첩을 끄적이던 카이세가 말했다.
[황성의 정보가 아니었다면 멈출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어. 다음 회차에는 변인을 조금 더 잘 조절해서-] [카이세.]올리비에라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만 하자꾸나.] [……뭐?]멈칫한 카이세를 두고 올리비에라가 돌아섰다.
[지금은 몇 번째지?] [말했잖아. 34436번째-] [몇 번째로 34436번째 회차를 반복하고 있지?] […….] [이번 계획은 이상할 정도로 구체적인 수치를 가지고 진행되고 있었지.]올리비에라가 말했다.
[문을 여는 시간, 악마화가 진행되는 규모. 외계의 힘이 영향을 뻗치는 범위. 몇 번이고 같은 실험을 반복하지 않고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침묵하는 카이세를 보며 올리비에라가 조용히 물었다.
[틀린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다음 회차로 넘어가기로 한 것이 아니었느냐?] [……아직, 실패하지 않았으니까.]카이세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의 눈빛은 곱슬머리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외계의 힘에는 아직 우리가 알지 못하는 변수가 있어. 오래전에 멸망해 바다를 떠도는 방랑자들…… 무언가 얻어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 […….] [이렇게 오래 회차를 이어나갈 수 있는 것도 황성과 거래해서 얻은 진혈 덕분이었어. 그들과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때 최대한 이득을 내야-] [아니. 그런 식으로는 안 된다. 그런 방식으로는 결국 네가 버티지 못해.]올리비에라가 나직하게 말했다.
[네가 망가진다면, 우리가 지금껏 쌓아온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 된다.] [이 정도로 무너질 거라면, 처음부터 시작하지도 않았어…….]카이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흔들리는 곱슬머리 너머 그의 시선이 공허하게 흔들렸다.
[아직 더 할 수 있어. 언제까지나, 몇 번이고 실패해서 반드시-] [나는, 모르겠구나.] [올리비에라……!!]베일로 가려져 있던 올리비에라의 눈동자에서, 처음으로 의지가 사라졌다.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카이세와 함께했던 동료가 떠나버렸던 회차.
그녀가 떠난 뒤에도 마지막까지 노력했지만, 결국 그곳에선 어떠한 가능성도 찾아낼 수 없었다.
다음 회차에서 그 모든 사실을 다시 설명하고 올리비에라를 끌어들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실수를 바로잡을 수 있어 다행이라 여겼지만, 그때부터 무언가 조금씩 변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실험은 끝을 모르고 계속되었다.
* * *
[65917번째 ‘점성술’ 시나리오 실패.] [아아아악……!!!]촤악!!!
피와 살점이 흘러넘치며 타로 카드 위로 쏟아졌다.
축쇄 : 성련식이라는 독특한 기술을 사용해 인과의 궤적을 읽어내는 점성술.
인간이었던 무언가가 온몸이 폭발한 채 카이세의 발 앞에 쏟아져 내렸다.
[…….]얼굴을 뒤덮은 타인의 피를, 카이세가 멍하니 바라보다 몸을 일으켜 세웠다.
온몸이 피로 흠뻑 젖었음에도, 그 눈동자만큼은 공허한 모습.
카이세의 옆으로 다가온 금발의 여성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럼, 약속대로 이 시나리오는 시의회가 가져가겠어요. 괜찮겠죠?]거대도시가 세워진 이래 가장 거대한 권력을 쥔 시장이 카이세를 묘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그쪽이 포기하고 배제한 시나리오. 그 선례를 발칸 시의회 측에 넘긴다는 거래였으니까.] [……그래.]프로젝트에 발칸 시의회를 끌어들여 협력을 구한 것은 몇 번째 회차부터였을까.
당시 발칸 시장이 독특한 능력자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카이세는 거래를 받아들였다.
[아, 점성술사라. 굉장히 유용할 재능이라 마음에 들어요. 분명 어떻게든 써먹을 수 있을지도.] […….] [약속대로 다음 회차에선 그녀를 살려두는 거 잊지 마요. 제가 기억 못 한다고 약속을 어기면-]시장이 떠나가는 것도 무시하고, 카이세가 조용히 시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점성술사가 사용하고 있던 타로카드를 힘겹게 그러모은 카이세가 중얼거렸다.
[또, 가까워졌어…….]점성술을 사용해 멸망의 시기를 점치는 계획은 프로젝트 초기부터 꾸준히 시도해 왔다.
가장 외신들로부터 안전하면서도, 간접적으로나마 외해의 동향을 감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하지만 카이세는 최근 회차에서 무언가 조금씩 이상을 느끼고 있었다.
회귀를 할 때마다 점성술을 통해 점친 멸망의 시기가 조금씩 변하고 있다.
카이세의 회귀와는 상관없이 저 바다에 떠오른 별들이 가까워진다.
저 바다의 종말들이, 카이세의 회귀와는 상관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 돼…… 이건…….]계속해서 실패하고 있는데, 이제 더 이상 위기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매 회차마다 새로운 숫자와 계획을 표기함에도 아무런 감흥이 없다.
잃어버린 퍼즐 조각처럼 무시했던 그때의 문답이, 스멀스멀 떠올라 카이세를 좀먹는다.
동료들이 경고하고, 카이세 자신도 대비하려 했던 감정의 마모. 동기의 손실.
무수한 강적과 천재들을 쓰러뜨렸음에도 끝내 바뀌지 않는 것이 있다고 믿었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카이세의 마음이 아니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이 세계의 종말이었던 것이다.
카이세는 그제서야 비로소 인정할 수 있었다.
[나로는, 안 돼…….]정신을 보호하기 위해 온갖 술식과 이능을 탐구하고, 아티팩트와 영성을 빌렸음에도.
최대한 많은 회차를 반복하기 위해 다양한 수단을 강구했음에도. 시간의 흐름은 그 모든 것을 무색하게 만든다.
카이세 바쥬르는 무한하게 이어지는 회귀 속에서 언제까지나 버틸 수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다른 누군가 이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면, 분명 카이세보다 더 잘 해낼 수 있었을 텐데.
후회하지 않기 위해 회귀를 거듭해 왔음에도, 그 행위 자체를 이제는 후회하고 있다.
카이세가 돌이킬 수 없는 자괴감에 빠져, 회귀조차 멈춰 버린 그 순간.
[아버지……?] [……에단.]거짓말처럼, 다른 사람이 카이세의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