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1247
약먹는 천재마법사 1247화(1247/1265)
약먹는 천재마법사 1247화
카이세 바쥬르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 카이세를 떠난 동료들 중에는 사별한 연인이 있었다.
나이를 역행해 젊어지는 카이세와는 달리, 타고나길 건강이 좋지 못했던 사람.
카이세는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슬하에 아들을 남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에단이라고 합니다.]겁먹은 소년이 조심스럽게 카이세의 눈치를 보다 말했다.
[어, 어머니께서 카이세 님을…… 찾아가면 된다고…….] […….]에단 바쥬르.
카이세의 단 하나뿐인 아들이자, 바쥬르의 피를 물려받은 계승자.
프로젝트가 시작하기 몇년 전 얻은 아들이었기에, 에단의 탄생은 회귀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카이세가 얼마나 시간을 되감으며 실패를 반복하든, 항상 불안한 표정으로 서서 가족을 갈구했을 뿐.
[……네 어머니를 많이 닮았구나.]조금씩 기억을 잃어가던 당시의 카이세에게도, 에단의 어머니는 작지 않은 의미로 남아 있었다.
서투르던 카이세에게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감정을 교류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던 인생의 스승.
당시 수백 번의 회차를 반복하던 카이세조차, 에단의 얼굴에서 그녀를 겹쳐보고 짧은 감상에 잠길 만큼.
[반갑구나. 에단.]무릎을 꿇고 시선을 맞춘 카이세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부터는 내가 널 보살펴 주마. 원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말하거라.] [바라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머뭇거리던 소년이 물었다.
[아버지라고…… 불러도 될까요?]카이세는 연인이 남긴 아들을 슬하에 거두어 친구들과 함께 키워보려 했다.
부성이라던가, 의무감이라던가. 그런 거창한 감정이나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모든 것을 되감기만 하던 자신에게서 다음이라는 가능성이 파생될 수 있는지. 그것이 궁금했다.
그래서 에단이 역천의 재능을 모호하게 물려받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오히려 안도했다.
이 저주받은 재능을 애매하게 물려받았다면, 에단은 자신과는 달리 고통받지 않아도 될 테니.
[아버지. 송하와 함께 시해검종에 들어가려 합니다.] [지금은 위상을 잃었지만, 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검리(劍理)를 가르치는 곳이라 하더군요.] [아버지의 계획에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지만…….]역천의 마력을 지니지 않은 에단은 카이세와는 차원이 다른 무재를 지니고 있었다.
송하와 함께 시해검종을 순식간에 제패하고 그곳의 모든 검리를 흡수해 성장할 만큼.
에단은 대부분의 회차에서 금방 뛰어난 경지에 도달해 이름을 알리는 강자가 되었다.
길레온이 이끄는 친위대에 들어간 에단은 오래지 않아 두각을 드러내고 카이세의 곁으로 돌아왔다.
때론 에단의 무력에 카이세 역시 도움을 받아 곤경을 헤쳐나가기도 했다.
에단 역시 카이세를 돕는 것을 인생의 보람으로 여기고 최선을 다했다.
그렇기에-
수만 번의 회귀를 반복한 카이세가 에단을 원했을 때, 누구도 그 이유를 예상하지 못했다.
* * *
[싫습니다.]에단은 완강히 거부했다.
[제가, 아버지의 몸을 차지하고 대신 회귀를 이어나가라니……!!] [에단. 바쥬르의 피를 이은 너는 반복되는 회귀 속에서 버틸 수 있는 얼마 되지 않는 존재다.]카이세는 에단을 설득하려 노력했다.
[내가 어떤 시기에 돌아와도, 너는 언제나 내 곁에 있었지. 너는 가장 가까이서 내 계획을 지켜보아 온 동료다.] […….] [프로젝트를 이어나갈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어. 부탁한다.] [……저는, 그런 위대한 도전을 이어나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에단의 표정이 흐려졌다.
[저는 그저…… 동료들과 함께 아버지를 도울 수 있다면 충분합니다. 이대로 세계의 멸망까지 최선을 다할 수만 있다면…….]역천의 재능을 애매하게 이어받은 에단은 어머니를 닮아 태어날 때부터 몸이 좋지 못했다.
카이세와는 달리 경이로운 무재를 지니고 있었지만, 그것이 무색하게 느껴졌을 정도로.
그래서인지 늦은 나이에 얻은 아들은 어떤 회차에서도 내성적이고 소탈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세계를 구한다는 결과가 아니라, 그를 추구하는 여정에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도 의미를 둘 만큼.
[그렇구나.]카이세는 에단에게 자신의 뒤를 잇게 하는 일을 포기했다.
누군가를 오래 설득하기에 그는 이미 너무 지쳤으니까.
힘겹게 가장하고 있던 인간성은 허무할 정도로 쉽게 무너졌다.
[그럼 네가 죽은 다음 내가 그 몸을 받겠다. 그건 괜찮겠지?] [아버지……!!!!]에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카이세가 그를 바라보며 품평하는 시선으로 말했다.
[네 몸을 받으면 앞으로 어느 정도는 더 버틸 수 있겠지. 나는 네가 지닌 재능에 도박을 걸어야 한다.] [아버지가, 어떻게 제게……!!!]카이세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경악에 빠져 있었다.
오랜 회귀 속에서 지쳐 있던, 언제나 무뚝뚝했던 아버지.
애정을 받고 자란 기억은 많지 않지만, 항상 존경했던 위대한 구도자.
끝없는 회귀 속에서 그가 얼마나 망가져 있었는지, 이제야 그의 아들 역시 깨달았던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깨달았을때는 이미 모든 것이 늦어 있었다.
그렇게 에단과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이한 언젠가.
매 회차마다 에단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지고 회귀를 반복하던 어느 날.
무언가 결정적으로 변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아버지.]31구역에 위치한 식물원.
카이세의 손을 잡고 서 있는 어린 여자아이의 모습.
굳은 듯이 서서 두 사람을 바라보는 에단을 향해, 카이세가 시선을 돌렸다.
[에단. 늦었구나.] [……어떻게.]아이스크림을 하나 쥐어주고 보호자의 손에 아이를 돌려보낸다.
해맑게 웃으며 꾸벅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는 아이를 둘이서 함께 지켜보았다.
짧은 시간이지만, 그것만으로 오랜만에 가족이 다 같이 모이는 기분이 들었다.
[바라간이 네가 자리를 비우는 시간이 불규칙해졌다고 귀뜸을 해주더구나.] […….] [송하는 어떻게든 숨기려 한 모양이지만, 그 아이가 내 명령을 거스른 적은 한번도 없었지.]얼어붙은 에단을 향해 돌아선 카이세가 말했다.
[내 얼굴을 알고 있더구나. 나를 발칸 시장으로 알고 말을 걸어오더군.] […….] [그건 내가 ‘지난 회차’에서 시도했던 발칸 탈환 계획이었는데 말이다.] [……아버지.] [내가 이 나이에 손녀를 보게 될 줄은 몰랐구나.]카이세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것도 내 회귀를 무시하는 재능을 타고난 손녀를 볼 줄은 말이다.]세계의 시간을 역행하여 회귀하는 카이세 바쥬르.
자신의 육체를 역행하여 부활하는 에단 바쥬르.
그리고, 그 모든 역행을 무시하는 재능을 타고난-
[제니시아…… 예쁜 이름을 지어주었구나. 잘 어울려.] […….] [그 아이가 필요하다.] [아버지!!!!]처음으로, 에단이 살의 어린 시선으로 카이세를 노려보았다.
자욱한 살기가 안개처럼 번지며, 식물원을 찾아온 사람들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혼절했다.
젋은 나이에 이미 시해검종의 하백을 뛰어넘고 8레벨의 검사에 도달한, 송하에 비견되는 천재.
카이세가 에단의 몸을 받겠다고 말했을때도 차마 그를 미워하지 못했던, 심약한 그의 아들이 처음으로 그에게 반항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이세는 에단의 살기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네 손에 죽는 것은 여덟 번째로군. 마지막에는 심장이 뜯겨 죽었던가.] [……!!]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다른 동료들에게는 수백 번 넘게 살해당해 봤거든.]손을 덜덜 떠는 에단을 보며 카이세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마지막에 누군가 성공할 수만 있다면, 그런 것이 무슨 대수일까.] [……아버지.]반복되는 회귀 속에서 지쳐버린 카이세는 에단에게 많은 것을 말해주지 않았다.
에단은 언제나 카이세가 말해주지 않은 것을 스스로 추론하고, 또 기대해야 했다.
혹시나 아버지가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꾸지 않을까. 이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한 거짓말은 아니었을까.
헛된 기대와 실망을 반복하며 평생 주어지지 않은 가족애를 갈구하고 또 염원했다.
이른 나이에 얻은 딸의 존재를 카이세에게 숨긴 것도 어쩌면 그래서였을지도 모르지.
그조차도 얼마 지켜내지 못하고 다시 아버지에게 내주어야 했다.
겨우 얻은 행복조차 다시 빼앗기고 카이세의 앞에 선 이 순간.
에단은 이제 카이세를 향한 감정이 사랑인지 증오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마지막까지 두 사람의 관계는 비틀리고 어긋나며,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일그러지고.
[하겠……습니다.]에단이 허리춤의 검을 내려놓고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에단은 자신이 결코 카이세의 의지를 거스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초월적인 무력도, 카이세에게 물려받은 역천의 재능도, 그가 지휘하는 친위대도.
모두 회귀 한 번이면 물거품처럼 사라져 무의미해질 결과에 불과할 뿐.
카이세가 딸의 존재를 인지한 순간,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어졌다는 것을.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무엇이든…… 하겠습니다.]수천 명의 사람들이 혼절해 쓰러져 기괴한 침묵이 내려앉은 식물원.
그 중심에서 카이세를 향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에단의 모습.
[제 몸이 필요하다면, 원하시는 날에 드리겠습니다…….] […….] [대신, 하나만…… 약속해 주십시오.]그날, 그 식물원에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거래가 있었다.
무한한 회귀를 거쳐도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향하는 약속.
한없이 얄팍했던 부자관계를 완전히 끝내 버리는 어떤 거래가.
에단은 그 뒤로 카이세의 가장 강력한 검이 되어 오랜 내전을 종식시키고 발칸을 통합하는 일에 일조했다.
그가 이끄는 카이세의 친위대는 끝없이 힘을 키워 나가며 발칸 최강의 군세가 되었다.
그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두 사람은 서로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프로젝트가 실패하고, 모든 것이 파국을 맞이한 그날.
“그렇군.”
불타는 연구실의 중심부에 마주 서 있는 부자의 모습.
피가 묻은 검을 쥔 에단과,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선 카이세의 모습.
레녹은 검푸른 벼락을 쥔 채, 모든 것이 끝나는 순간을 마지막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 * *
블랙컨슈머 프로젝트의 시작과 실패.
그 막바지에 존재했던 카이세와 에단의 거래.
카이세가 무엇을 원해 아들의 몸을 빼앗았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에단이 무엇을 바라고 자신의 육신을 내주었는지도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프로젝트의 진실을 쫓아온 모든 나날이 그러했다.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아무것도 알 수 없어서 곤란하고 당혹스러워 하다가도.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그때 품었던 미혹을 돌아보고 정답을 알아낼 수 있었다.
하나의 단면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어도, 어느새 모든 것을 퍼즐처럼 끼워맞추게 되는.
유구한 시간의 흐름처럼 방대하면서도 거스를 수 없는 순리가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이곳이…… 프로젝트의 마지막이었나.”
블랙컨슈머 프로젝트의 종막.
그 처절하고 화려했던 실패의 결말.
카이세의 죽음은 프로젝트의 실패를 노린 누군가의 암살이 아니었다.
아버지를 갈구하고, 존경하며, 끝내 그 육신마저 스스로 내어주었던 부활자의 결말.
바쥬르의 이름을 이은 두 사람이 다른 결말을 맞이하고 영원토록 갈라지는 이 순간.
카이세 바쥬르의 마지막 회귀.
“이걸로 만족했나?”
불타는 연구실의 뒤켠에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레녹이 물었다.
“이곳이…… 네가 원했던 카이세 바쥬르의 마지막인가?”
“……어째서.”
피가 묻은 검을 쥐고 고개를 숙이고 서 있던 에단이 입을 열었다.
눈물에 젖어 있던 얼굴은, 어느새 모든 감정을 잃어버린 것처럼 무표정하게 변해 있었다.
에단의 몸을 빼앗아, 이 모든 회차를 반복해온 카이세가 삐걱대는 시선을 돌려 세웠다.
“왜, 너는-”
“네게 답해주기 위해서지.”
파직, 파직……!!!
끝없이 일렁이는 검푸른 벼락을 쥔 채, 레녹이 조용히 말했다.
“아무리 회귀해도 변치 않는 것이 있다는 걸. 그 어떤 실패보다 우선하는 소망이 있다는 걸.”
“…….”
“그래서 이 이야기의 마지막을 내 눈으로 확인하려 했을 뿐이다.”
결국, 레녹은 블랙컨슈머 프로젝트의 실패나 전말을 모두 상세하게 들여다보지는 못했다.
카이세의 회귀는 그 규모와 범위가 너무나 방대하여, 수백 년의 시간으론 헤아릴 수 없었으니까.
끊어진 회차 저편에는 레녹이 미처 확인하지 못한 비밀이 퍼즐 조각처럼 남아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모든 기억을 다 들여다 본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이것으로 충분했다.
끊임없이 다음 회차로 나아가던 카이세가 레녹을 돌아보는 이 순간을 위해.
카이세 바쥬르의 이야기에 진정으로 결말을 지어주는 이 순간을, 레녹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과거를 반복해도 매번 미래를 바꿀 수는 없다.”
레녹이 흘러넘치는 뇌광을 쥔 채 걸음을 옮겼다.
“실패를 되감아도 언제나 더 나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야.”
“…….”
“단 한 번뿐인 기회이기에 의미가 있는거다. 그렇기에 그 실패조차도 소중히 여기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
카이세의 앞에 멈춰선 레녹이 차분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실패를 통해 더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실패한 과거에 묶여 얽매이기에…… 회귀는 대답이 될 수 없는 거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결국 불가능한 일이었다.”
침묵하던 카이세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공허한 눈빛으로 선 채, 레녹을 바라보며 그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아무리 되돌려도, 아무리 회귀해도…… 모든 것은 변하면서 망가지고 어그러지지.”
“…….”
“견뢰. 너도 알게 될 거다. 너와 같은 천재성을 지닌 구도자도. 위대한 실패자와 승천자들조차…… 영원토록 버틸 수는 없다는 걸.”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카이세가 저지른 실패란 돌이킬 수 없을만큼 처참한 것이었지만, 레녹은 그를 비난하지 않았다.
이미 이 세계의 진실을 파헤치며 그보다 더한 실패자들을 몇 번이고 보아왔으니까.
수백만 명을 죽이고, 나라를 멸망시키고, 세계를 짓밟아 버렸던 위대하고 추악한 실패자들.
그들에 비하면 카이세가 바란 것은 한없이 순수하고 미약하기 그지없는 소망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카이세가 회귀하면서 역량의 부족함을 느낀 것을 레녹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레녹 역시 항상 그랬으니까. 천재적인 재능을 쥐고도 언제나 그 이상이 필요해 갈구해 왔으니까.
약하니까. 부족하니까. 모자라니까. 그렇기에 후회하고 실수하며 되돌리고 싶어 한다.
회귀자의 재능이란 그 무엇보다 강렬한 결핍에서 시작되는 기적.
모래알처럼 흘러내리는 시간을 어떻게든 붙잡아가며 발버둥쳐왔다.
모든 것을 바꾸기를 원했기에, 끝내 그 소망조차 변질되어 망가져간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초심을 유지하려 노력하며 망가진 기계부품이 되는 그날까지.
그 애타는 마음이 언젠가의 레녹과 닮아 있어서. 그 간절함이 언젠가의 레녹과 겹쳐보여서.
카이세가 맞이한 결말이 언젠가 레녹이 맞이했을지도 모르는 것이라 생각해서.
결코 같아서는 안되는 그 결말을 확인하기 위해 지금것 그의 뒤를 쫓아온 것이 아니었나.
“네 말이 맞다. 카이세.”
레녹이 시선을 들어올렸다.
“영원한 것은 없고, 모든 것은 계속해서 변해가지. 내가 보아온 도전자들 역시 모두 그러했으니까.”
“…….”
“나는 다르다고, 나만은 다를거라고. 아무런 근거없이 그렇게 믿는 건 오만이다. 하지만-”
카이세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레녹이 마주해 온 모든 승천자들이, 그들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한때는 레녹 자신이기도 했던 반궁 역시 그러한 영락을 피하지 못했으니까.
영원한 것은 없고, 모든 것은 계속해서 변화한다.
이 우주의 종말 역시 틀림없이 조만간 확실하게 내려온다.
끝내 모든 것이 바다의 물거품이 되어 사그라들고, 아무런 의미도 없이 잊혀지겠지.
하지만, 그렇기에-
파아아아아아아아앗!!!!!
레녹의 뒤에서 황금빛의 광채가 폭발적으로 터져 나와 시공간을 뒤덮었다.
거대한 빛의 고리가 웅장한 공명음과 함께 회전하며 눈부신 만화경의 형상을 그렸다.
우주 저편을 비추는 장엄한 만화경의 빛무리가 아득하게 회전하며 카이세를 내려다보았다.
자성영역 전개 : 분기점 관측
폐쇄구역에 남겨진 과거의 카이세가, 한때 직접 목도하고 경도되어 버린 기적의 정취.
과거와 현재가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가능성을 자신의 기원으로 삼은 구도자의 대답.
“……이건.”
과거를 담은 카이세의 심상과, 미래를 품은 레녹의 심상이 교차하는 이 순간.
눈앞에 펼쳐진 풍경의 의미를 이해한 카이세의 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굳었다.
무한하게 회귀를 반복하며, 온갖 재능과 운명을 편집해 온 카이세조차 처음으로 마주하는.
저 바다의 외신들조차도 결코 꿈꾸지 못할 미래의 권능.
과거의 자신이 이것과 같은 풍경을 보고, 같은 감상을 품었다는 사실을 카이세는 알지 못했다.
회귀를 반복하며 마모된 지금의 카이세가. 모든 것을 바꿔버리고 자신마저 변해 버린 변절자가.
구원을 꿈꾸었던 과거의 자신과 처음으로 똑같은 감상을 품고 만화경의 빛에 경도되어 버린 찰나.
장엄한 황금빛의 만화경을 등지고 선 레녹이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선택만큼은 우리의 것이지.”
“…….”
“모든 것이 변한다 해도, 어떻게 변할지는 직접 선택할 수 있어. 그렇기에…… 우리가 했던 선택을 없던 일로 만들어선 안되는 거다.”
“……그건.”
회전하는 만화경을 따라 레녹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카이세. 나는 너와는 달리 이 세계에 존재했던 실패를 없던 일로 만들지는 않겠다. 그 모든 것을 회귀라는 명목으로 되돌려 잊어버릴 수는 없는 거야.”
“…….”
“우리보다 먼저 도전하고 실패했던 모든 이들의 바람과 소망…… 그 간절했던 모든 마음을 내가 직접 짊어지고 간다.”
아득한 기억속에 남겨진 과거의 시간선에서 다시 한번 그때의 문답을 반복한다.
과거의 카이세에게 레녹이 전해주었던 대답의 의미.
그때 제대로 형태를 맺지 못했던 레녹의 답을, 지금의 카이세에게 다시 전한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네 번째를 만들어 세계를 구한다.”
“…….”
“이 세계에 다음이 없다면, 이 세계의 결말이 정해져 있다면 내가 그 다음이 되겠다.”
침묵하는 카이세를 향해 레녹이 말했다.
“이 모든 여정이 오직 그것을 위한 과정이 되기를 바라며.”
콰과과과과과과과!!!!!
황금빛의 만화경이 기울어지며 천지사방에서 카이세를 비추었다.
존재하지 않는 미래로 향하는 무수한 분기점. 그 저편을 비추는 거울이 천변만화의 정취를 품고 회전하며 번뜩였다.
선택할 기회 자체를 힘으로 삼는 기적. 미래를 직접 선택할 수 있는 자격이 레녹의 마음 안에 있다.
“……그렇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이세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존재하지 않는 미래…… 자신의 선택을 기원으로 삼아 구도를 꿈꾸었나.”
“…….”
“너는, 내가 무한한 회귀 속에서 단 한번도 발견하지 못했던 미래 그 자체였군.”
끝없이 과거를 되감기만 하는 카이세는, 미래를 답으로 삼는 레녹과는 반대편에 위치한 존재.
같은 것을 꿈꾸고 같은 것을 바랬음에도, 두 사람은 전혀 다른 곳에 서서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그 사실을 조금 더 일찍 깨달았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레녹을 조금 더 일찍 만날 수 있었다면 무언가 변했을까.
하지만 카이세는 더 이상 그 질문에 대해 답을 내리지 않기로 했다.
존재하지 않는 미래를 대답으로 삼은 구도자를 예측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이해했으니까.
레녹이 손에 넣은 대답이, 카이세가 그토록 원하고 바랬던 ‘다음’과 닿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까.
과거의 카이세가 그러했듯, 현재의 카이세 역시 만화경을 마주하는 순간 이해하고 납득한다.
결과보다 중요한 과정이란 진정 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었다.
이 마법사의 마음만이 우주 끝까지 닿으리라.
하지만, 그럼에도-
“그렇다 해도…….”
천천히 눈을 뜬 카이세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나는, 계속해서 다음 회차를 향해 나아간다.”
“…….”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 해도, 나는 마지막까지 시행착오를 반복하겠다.”
카이세의 공허한 눈빛에, 순간적으로 선명한 초점이 돌아왔다.
“그것만이 내가 잃어버린 모든 것에 의미를 줄 수 있을 테니까. 그것만이 내가 바친 모든 시간을 증거할테니까.”
타인의 대답에 감복하여 수긍하기에는 모든 것이 늦었다.
타인의 구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많은 것을 잃었다.
카이세가 버린 기회. 카이세가 버린 실패. 카이세가 버린 시간선.
의미를 잃고 사라진 그 모든 것들이 지금의 그에게 남아 있는 전부였다.
틀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카이세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
마지막까지 자신이 정한 대답과 선택을 관철하며 최후를 맞이하는 것.
카이세가 틀렸음을 증명하는 것은 카이세가 아니라, 그의 앞을 막아선 마법사가 할 일이었다.
“견뢰. 네 대답이 과거와 현재를 넘어 미래에 도달해 있다면, 선택만이 우리에게 전부라면-”
우우웅……!!
카이세가 레녹을 향해 돌아서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나 역시 마지막까지 내가 선택한 과거를 향해 나아가겠다……!”
쾅!!!!
차르르르르르륵!!!!!
무한하게 가속하는 의식의 저편에서 카이세가 마력을 끌어올리고, 태역쇄겁엽의 사상전역이 날뛰었다.
폭주하며 역행하는 시계바늘 위에서, 카이세가 되돌려왔던 수만 갈래 시간선이 떠올라 거세게 회전했다.
미래를 비추는 만화경에 대응하는, 과거를 되감는 태엽시계.
과거와 미래를 부딪혀 상쇄시키며 서로의 대답을 비추는, 카이세가 마지막 순간 레녹을 이기기 위해 선택한 방법.
쿠과과과과과과!!!!!
수십만 명의 실패한 카이세가 일제히 레녹을 돌아보며 앞으로 걷는다.
수십만 갈래로 쪼개지고 으스러진 시간선이 만화경과 충돌하며 번뜩였다.
과거의 태엽시계와 미래의 만화경이 충돌하며 현재를 향해 수렴하는 격동.
“그래.”
흔들리는 세계선의 중심에 선 레녹이 조용히 말했다.
“내가 알고 있는 카이세 바쥬르라면 그렇게 했겠지.”
카이세 바쥬르.
세계를 구하려다 실패한 구도자인가, 실패하는 것조차 실패하고 망가진 부품인가.
어째서 그것을 원했는지도 이젠 망각하고, 미련과 후회만이 남아 움직이는 태엽시계.
그럼에도 마지막 순간, 카이세는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의 선택을 끝까지 관철할 것을 결정했다.
망가지고 마모되며 변해 버렸다고 하더라도, 그조차도 카이세가 선택해 나아간 하나의 길이었다.
그 어긋난 선택마저도 카이세 바쥬르의 대답이라 여기고 존중하며 납득할 수 있을까.
망가진 기계부품을 잠시나마 멈춰세우고 돌아보게 했다면, 그것을 의미라 여길 수 있을까.
결국, 마지막까지 답은 알 수 없다.
정답은 언제나 저 멀리, 아득하게 빛바랜 과거의 시간 속에-
“반……!”
“카이세.”
폐쇄구역에서 함께 마력이론을 토론하던 그때처럼 서로의 이름을 부른다.
함께 대답을 찾고 있던 과거와는 반대로 서로를 정면에서 마주하는 이 순간.
수십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블랙컨슈머 프로젝트의 실패에 종지부를 찍는다.
프로젝트가 실패한 뒤에도 회귀를 반복하며 대답을 찾던 망가진 회귀자에게.
레녹이 처음으로 같은 시선에서 함께 다음을 논할 수 있다 여겼던 선구자에게.
카이세 바쥬르의 뒤를 쫓아왔던 그 모든 나날에 안녕을 고하며.
콰우우우우우우우우!!!!
황금빛의 만화경 사이로 검푸른 뇌광이 사납게 날뛰면서 암흑의 우주를 비추었다.
만화경을 펼쳤음에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이 시공간에 존재하는 초월의 벼락.
레녹이 손을 들어올리는 것과 동시에 극뢰(極雷)가 부름에 응답했다.
우주 끝까지 뻗어 나간 선각의 번개가 찰나의 순간 별을 넘어 레녹의 손에 잡혔다.
극뢰마법(極雷魔法)
초월현현(超越顯現)
상천신기(上穿神技)
검푸른 뇌광이 날뛰면서 레녹의 손에 압축되고, 이윽고 흑청색의 벼락 한줄기로 화했다.
레녹의 의지가 카이세 바쥬르가 회귀한 모든 세계선을 관통하고 내려앉은 순간.
세계에 지워지지 않는 초월의 벼락이 강림했다.
파아아아아아아아아!!!!!!
흘러넘치는 뇌광의 저편에서, 카이세 바쥬르를 이루는 모든 것이 소멸해나간다.
무한한 회귀 끝에 포기하지 않은 미련도. 카이세가 마지막까지 관철하려 했던 그의 대답마저도.
수만 번 넘게 회귀하며 카이세의 내면에 쌓여 있던 그 모든 기억과 시간이 뇌광에 불타 사라졌다.
모든 인과에 우선하는 선각의 번개가 모든 시간선과 분기점에서 카이세의 소멸을 확정짓는 이 순간.
“……아.”
남김없이 소멸하는 세계선의 끝에서 비춰지는, 카이세 바쥬르의 마지막 기억.
프로젝트를 설명하며 동료들과 즐겁게 웃고 있는 자신을 보며 카이세가 눈을 감고.
심의개변(心意改変)
뇌멸(雷滅)
태역쇄겁엽의 사상전역이 검푸른 뇌광에 꿰뚫려 붕괴하며 49구역의 메마른 하늘위로 솟구쳤다.
콰아아아아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