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1250
약먹는 천재마법사 1250화(1250/1265)
약먹는 천재마법사 1250화
전후처리(3)
“다 끝났군요.”
“…….”
“생각보다 길었네요. 아니, 생각보다 짧았다고 해야 하나?”
테이블에 앉은 평범한 인상의 여성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르텔 사장단의 일원, 앙헬은 말없이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대도시 발칸 중심지구.
10번 구역에 위치한 마천루 최상층에 위치한 어느 고급 카페.
바깥의 풍경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창가의 귀빈석에 앉은 여성이 느긋하게 턱을 괴었다.
“이틀…… 아니, 사흘인가. 너무 오랜만에 외유를 나와서 그런지, 현세의 시간은 아직 잘 가늠이 안 가네요.”
“…….”
“하지만 저 안에서 있었던 일은 고작 사흘로 끝날 일은 아니었을 테죠.”
앙헬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여성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카이세 바쥬르…… 그가 지금껏 되감은 시간이 대체 얼마나 되었을지. 어쩌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 이미 일겁이 지났을지도 모르겠어요.”
“…….”
“역천의 재능도 가능하면 갖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저는 혈계능력도 어떤 의미로는 초능력의 일종이라 생각하는 편이라.”
“정말로 그럴 생각이었다면 저와 이렇게 시간을 죽치고 있지는 않았겠지요…….”
앙헬이 희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린 앙헬이, 눈앞의 친구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펠리아…… 처음부터 이 전쟁에 깊게 개입할 마음은 없던 것 아닙니까?”
“맞아요.”
아펠리아가 태연하게 긍정했다.
그녀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앙헬을 바라보며 커피잔을 기울였다.
“성의는 다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오늘은 친구를 보러 온 거니까.”
“…….”
이능개화전단의 영좌, 아펠리아 이오닉스 자엘다르크.
대륙 역사상 최강의 연결자라 불리었던 인외마물이, 인간의 육신을 빌려 현세에 내려온 지금.
언제나 그녀의 목소리를 덮고 있던 노이즈도, 뇌리를 직접 찌르는 듯한 섬찟한 전성도 없다.
모두 씻은 듯이 사라지고 평범한 여성처럼 앙헬의 앞에서 빙글빙글 웃고 있을 뿐.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전단이 처음 세워질 당시 함께했던 이들을 만날 때면, 그녀는 종종 이렇게 예전처럼 돌아오곤 했으니까.
타고난 재능을 통제하지 못하는 이능력자들을 거두어 살아갈 방법을 가르쳐주겠다던 그때처럼.
모든 것이 순수하고 올바르며 올곧았던 그때를 억지로 회상하며 연기하듯이.
앙헬은 아펠리아와 함께 전단을 세웠던 몇 안 되는 생존자들 중 하나였다.
“군단 열병식에서 우연히 옛 친구를 만났거든요. 덕분에 앙헬 생각이 났어요.”
“…….”
“마침 발칸이 궁금하기도 해서 오늘은 이렇게 우연히-”
“아펠리아. 토벌전은 모두 끝났습니다.”
앙헬이 조용히 말했다.
“대륙 전역에서 지켜보던 전쟁인 만큼 반응이 격해요. 시정부 중앙 네트워크의 트래픽이 폭주하다 못해 완전히 마비되었다고 하더군요.”
“…….”
“통신사업부를 맡고 있는 저는 할 일이 많아…… 이만 돌아가 봐야 합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지금 해주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아펠리아의 얼굴이 한없이 무표정해졌다.
화사하게 꾸며내던 감정과 인격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지워지는 듯한 위화감.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은 아펠리아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카바힘을 멸망시켰어요. 그곳에 남아 있던 왕족의 혈계이능과 외신의 잔해물을 입수했죠.”
“…….”
아펠리아의 미소가 섬뜩하게 변했다.
“비록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를 쥐었을 뿐이지만…… 이 정도면 제가 중앙에서 움직일 인과가 되기엔 충분할 거예요.”
“……그건.”
“그러니까, 그 전에 전단에 돌아오도록 해요.”
살짝 고개를 숙인 아펠리아가 속삭였다.
“내가 황성의 ‘특권’을 손에 넣고 모든 것을 마음대로 바꿔버리기 전에.”
“…….”
“지금까지는 앙헬의 뜻을 존중해 줬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러기 싫어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아펠리아가 기괴할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역시, 제가 좋아하는 것들은 손에 직접 쥐고 있는 게 마음이 편하잖아요?”
“…….”
전단이 세워진 이래, 아펠리아는 언제나 자신을 따르는 능력자들을 위해 노력하고 인내해 왔다.
끝을 모르는 것처럼 느껴졌던 그녀의 선성과 인내심에 브레이크가 걸린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아펠리아…… 이능개화전단은 이미 너무 많이 변해버렸고, 우리도 더 이상 그때로 돌아갈 수 없어요.”
앙헬이 복잡한 표정으로 시선을 들어 올렸다.
“처음 했던 ‘약속’과는 많은 것이 달라졌기에…… 그래서 당신도 제가 전단을 떠나는 것을 막지 못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럴지도 모르죠.”
아펠리아가 수긍했다.
“하지만 앙헬. 이제 우리에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당신도 ‘보고’ 있었잖아요?”
“……그건.”
앙헬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아펠리아가 시선을 돌렸다.
“오늘 이 전쟁에서 저 마법사가 보여준 힘은 대륙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던 종류의 기적이었어요.”
창밖으로 일렁이는 검푸른 벼락의 광채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모자이크처럼 갈라졌다.
“운명, 재능, 소질, 천성이나 저주…… 많은 말들로 그 결과를 설명할 수 있겠지만, 결국 무엇 하나 제대로 된 원인이 아니지요.”
“…….”
“원인 없이 존재하는 결과라. 어쩌면 저런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이 세계의 결말이 머지않았다는 징조가 아닐까요?”
“……아펠리아.”
순간적으로, 앙헬이 놀란 표정으로 아펠리아를 올려다보았다.
모든 사람들에게 인자하고 온화했으며, 타인에게 먼저 손을 내밀던 예전의 그녀조차.
이런 식으로 타인의 재능과 운명을 극찬하고 눈여겨본 적은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
모든 능력자들을 인도하면서도, 반대로 아무런 기대조차 하지 않던 그녀가 직접 재능을 입에 담을 정도의 마법사.
천천히 몸을 돌린 아펠리아가 속삭였다.
“이 전쟁이 끝난 뒤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부르고 있는지…… 속삭임이 들려요.”
“…….”
“극뢰(極雷), 진성(震星), 뇌제(雷帝)…… 확실히, 그만큼 사람을 죽이고도 숭상받는다는 점에서는 황제와 무척 닮았을지도.”
작게 키득거린 아펠리아가 앙헬을 스쳐지나 걸음을 옮겼다.
“그러니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게요. 저만한 구도자와 제대로 대화하려면 저도 능력을 좀 더 조정해야 할 테니까.”
“아펠리아, 저는…….”
망설이던 앙헬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아펠리아는 사라져 있었다.
텅 비어버린 맞은 편 자리. 그녀가 입을 댄 커피잔이 그 자리에서 붕괴하고 있다.
치이익……!!
방사선을 쏜 것처럼 물질의 연결 자체가 끊어져 망가지는 듯한 기현상.
그녀가 떠난 자리에 어떠한 자비조차 남기지 않는 비인간적인 정취.
모든 것이 잘못되고 망가졌다는 사실은 오래전에 알고 있었다.
복잡한 표정으로 아펠리아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던 앙헬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 * *
“이야~ 결국 이렇게 끝나버린 겁니까?”
낡은 조명이 희미하게 깜박이는 어두운 수술실.
삐딱하게 기대앉아 벽에 걸린 작은 TV를 올려다보던 그림자가 낄낄거렸다.
“4개 이상의 군단과 전단 십좌까지 동원해 꼬라박은 결과가 수뇌부의 몰살이라니, 이거이거 군단의 체면이 말이 아니군요.”
“…….”
“중앙의 관계자들도 이렇게 압도적인 결과를 예상하지는 않았을 텐데. 아,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저도 멀리서 구경이나 할 걸 그랬습니다.”
TV 화면을 보며 몸을 흐느적거리던 그림자가 이내 고개를 휙 돌렸다.
“확실히 요즘 들어 저쪽 도시에 재미있는 일이 많이 일어난다니까요. 그쪽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집중하는 중에는 내게 말 걸지 말라고 했을 텐데.”
수술대 앞에 고개를 숙인 채 서 있던 다른 그림자가 말했다.
그가 느릿하게 손을 움직일 때마다 수술대에 드러누운 ‘무언가’가 힘겹게 꿈틀거렸다.
그림자는 그런 상대의 저항을 신경조차 쓰지 않고 그 내용물을 헤집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감각을 되찾으려면 연습이 필요하단 말이다. 놀아주고 있을 때가 아니니 입 다물도록.”
“그 감각을 되찾느니 뭐니 하는 얘기 카바힘에서부터 계속하고 있잖아요. 한참 전에 집 나간 그 친구는 대체 언제 돌아오는 겁니까?”
“그만큼 네 술식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정교하면서도 난해한 조정이 필요하다는 뜻이지.”
수술대 앞에 서 있던 그림자가 말할 때마다 검게 죽은 피가 옆으로 튀었다.
수술복 사이로 흘러 떨어지는 피와 살점을 돌아보지도 않고 그가 말했다.
“애초에 견뢰가 근래 태어난 필멸자 중 독보적인 재능을 지닌 술사라는 건 알고 있었다. 군단의 원수가 패배한 것은 의외지만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도 아니군.”
“또, 또. 재미없게 그딴 소리만 할 겁니까? 결과가 나온 다음에 사실 그럴 줄 알고 있었지~ 라고 지껄이는 건 그쪽 수술대에 누워 있는 장난감도 할 수 있다구요.”
“결과론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이미 나온 결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거다. 이번 일에 대해 먼저 내 의견을 물어본 건 네놈이었을 텐데.”
“그런 재미없는 감상을 듣고 싶은 게 아니니까 그렇죠. 특질계 술사답게 뭔가 좀 아이코닉한 의견이나 소감을 내놔보라 이겁니다.”
“그런 건 잘 모르겠지만, 갑자기 네 창자와 내장을 그런 식으로 꿰매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는군.”
섬찟한 상대방의 대꾸에 TV 앞에 앉아 있던 그림자가 아랑곳하지 않고 낄낄댔다.
“토벌전에 이쪽 멤버들도 몇 명 참가한 걸로 아는데 살아 있을지 모르겠네요. 기왕이면 박사 정도는 죽어줘도 재밌을 텐데.”
“아터마이어 박사를 말하는 건가? 그가 이번 사태에서 사망했을 것 같지는 않군.”
“아니, 박사라고 얘기하면 바로바로 알아들어야죠. 근데 당신이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그가 이번 일에서 사용한 ‘소체’를 가공하는 일을 내가 도와주었으니까.”
“……예?”
“엔도로즈에서 유망한 공학자라 그랬던가? 그 소체의 뇌를 개조해 박사의 영성을 담을 수 있게 처리하느라 애를 먹었어. 덕분에 좋은 연습이 됐다.”
수술대 앞에 서 있던 그림자가 그렇게 말하며 몸을 휙 돌렸다.
“그 때문에 방금 연습을 마지막으로 대충 감각이 잡혔군. 준비가 끝났으니까 수술대에 누워라.”
“아니, 박사랑은 또 언제 접촉해서 그런 일을 한 겁니까? 답지 않게 유용한 재주를 지닌 건 알았지만 생각보다 외향적인 편이었군요. 별로 안 어울리게. 다시 한번 말하지만, 별로 안 어울립니다.”
“아터마이어 박사의 부탁이라면 빚을 지워둘 가치가 있다 생각한 것뿐이다. 헛소리가 길군.”
장갑을 고쳐 쓴 수술대 앞의 그림자가 대꾸했다.
“약속대로 지금부터 네 육체조정 수술을 진행하겠다. 마취제를 투입해야 하니 빨리 움직여.”
“일단 거기 수술대에 누워 있는 선객부터 치우고 말이나 해주시겠습니까?”
낄낄거린 그림자가 어깨를 으쓱이며 수술대를 향해 다가왔다.
“제가 비위가 좋은 편이긴 합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초면인 사람이랑 수술대를 같이 쓸 만큼 낯을 안 가리는 건 아니라서.”
“그러지.”
터어엉!!
수술대 아래로 인간의 형상을 잃어버린 무언가가 철퍼덕 미끄러졌다.
그제서야 그림자가 히죽 웃으며 피가 흥건하게 고인 수술대에 앉았다.
소독장치에 집어넣은 메스를 꺼내 들며 다른 그림자가 물었다.
“네 술식특성을 감안한 육체의 조정과 행운의 조작. 두 가지를 메인으로 잡고 감각기관과 호르몬을 만질 거다. 불만은 없겠지?”
“예. 곧 있으면 괴승이 돌아오는 데다, 단장이 움직일 테니 미리 준비를 해둬야겠죠.”
수술대 위에 누운 그림자의 웃음이 광대처럼 기괴하게 변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이제부터는 아마 본격적으로 중앙에서 할 일이 많아질 겁니다.”
* * *
중앙전선 외곽성채. 알파레인 전진기지 패러독스 블루.
푸른 초원이 넘실거리는 거대한 성채의 외곽. 따스한 산들바람이 불어오는 평야.
아르스노바의 콜로니 중에서도 아직 무너지지 않은 중앙의 거점도시.
모든 민간인과 관계자가 대피를 마친 도시 상공에, 수백 미터에 이르는 공중요새가 떠올라 있었다.
백금색 광채를 번뜩이며 상공에서 고고하게 회전하는 거대한 피라미드의 형상.
민간군사기업 데드라이즈 중앙지휘 1사령부, 울티마 얼럿(Ultima Alert).
군단의 모든 작전과 명령을 통제하며 지휘하는 최중요 거점의 심처.
상황실 안에는 섬뜩하기 그지없는 침묵이 흘렀다.
“이럴 수가…….”
“원수께서…… 패배하신 건가……?”
“송하 대장…… 로베라이드, 타운센드…….”
“바라간 님께서 케찰코아틀을 꺼내 들었는데, 어떻게 이런 참패가…….”
발칸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이곳에서도 토벌전의 결과는 더할 나위 없이 잘 보였다.
군단 주력부대가 학살당한 무참한 광경. 각 세력의 지휘관과 초월자들이 시체가 되어 널브러진 참사.
49구역의 안쪽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제대로 보지 못했음에도, 그 결과만큼은 모두가 지켜보았다.
4개 이상의 군단과 3사령부 프리모 얼럿. 블레이버 마탑과 기계화병단. 이능개화전단의 최정예 전력을 동원한 대회전.
5체 이상의 초대형 전략병기와 수만명의 초인들을 동원한 동대륙 최대의 전쟁에서 군단은 패배했다.
남아 있는 것은 감히 추산하는 것조차도 불가능할 정도로 막대한 손해와 손실뿐.
고오오오!!
지휘관들이 탄식을 숨기지 못하는 울티마 얼럿의 최심부에 위치한 암실.
온몸에 튜브를 꽂은 채 힘없이 호흡하던 길레온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카이세…….”
카이세 바쥬르에게 있어 이번은 몇 번째 실패였을까.
죽음에 이르는 실패를 마주하고도 몇 번이나 되감아 현실로 돌아왔을까.
하지만 헤아릴 수 없는 회귀 끝에, 이번에야말로 결말이 찾아왔음을 길레온은 직감했다.
한평생 카이세의 곁을 지키며 살아왔음에도, 길레온은 끝내 그에게 그 이상의 도움이 되지 못했다.
얼마 남지 않은 삶이라도 어떻게든 연명해가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기를 바랬지만.
어쩌면, 카이세가 원했던 것은 길레온이 아니라 견뢰 같은 존재였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옆에서 손을 내밀어주는 누군가 아니라, 그를 대신해 결말을 지어줄 누군가의 존재.
망가진 기계부품이 고장 난 끝에, 마침내 작동을 멈추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면.
삐빅!!
길레온의 옆에서 시스템 스크린이 떠오르고, 딱딱하게 굳은 지휘관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에단 바쥬르가 부활자의 재능을 지녔다는 사실은 군단 지휘관 대부분이 인지하고 있었던 바.
그렇기에 카이세의 소멸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토벌전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후속조치를 취할 생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발칸에서 군단장과 수뇌부의 사망이 확정된 지금, 최고사령권의 자격을 지닌 것은 길레온 마일로즈 한 명뿐.
한차례 거대한 대회전이 마무리된 지금, 견뢰를 상대로 가장 높은 승산을 점칠 수 있는 이 순간.
[지금 당장 울티마 얼럿을 움직여 동대륙으로 향하겠습니다. 명령을.] [남부전선의 6군단이 아티야 중장을 구출하기 위해 이동 중입니다.] [대륙 전역의 군단이 현재 대장님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습니다.]“……아니.”
하지만 길레온은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힘겹게 시선을 들어 암실 천장을 바라보았다.
두꺼운 벽으로 가로막힌 천장을 넘어, 그 너머의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처럼.
끊어질 듯 희미한 호흡을 내뱉으며 길레온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툭, 툭.
팔에 연결된 튜브를 하나씩 떼어내자, 그때마다 검게 물든 깃털이 잘게 흩날렸다.
파아아아아앗!!!!
순식간에 암실 전체를 가득 메운 깃털 속에서 길레온이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그럴 만한 여유는……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을 거다…….”
[대장님, 그게 무슨 말씀-] [지금 당장 움직이지 않으면 대륙 전역에서 군단의 위상이 흔들리게 될-]콰아아아앙!!!
다른 지휘관들이 길레온의 말을 이해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지축이 흔들리며 하늘이 격동하고, 지상에 발을 딛고 서 있던 모든 것이 크게 휘청였다.
당황한 군인들이 한발 늦게 길레온을 따라 하늘을 바라보고, 그 원인을 깨달았다.
[대체 이게 무슨-] [하, 하늘이……!!!!] [유성우다, 저건……!!!!]새파란 창공 저편에서, 얼룩진 은빛의 유성우가 엄청난 굉음과 함께 떨어지고 있었다.
한때는 분명 티 없이 맑은 신념으로 빛나던 아름다운 은색의 별빛.
이제는 타락하고 오염되어 영락해버린 망가진 승천자의 잔념.
쿠과과과과과과과과!!!!!
수백 갈래 오염된 은빛의 별이 거대한 천구의 형상을 그리며 패러독스 그린을 향해 추락한다.
개개의 별빛이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막대한 마력과 열기를 품고 압축된 파멸의 전령.
단 하나라도 직격당하는 순간 공간을 짓뭉개버릴 타락자의 오염된 염상.
길레온이 눈을 감은 채 속삭였다.
“……왔군.”
[설마……!!!!]그 아득한 유성우가 떨어지는 평야의 저편에, 로브를 뒤집어쓴 거한이 홀로 서 있었다.
두꺼운 로브 사이로 튀어나온 용종의 뿔. 흔들리는 옷자락 너머 비춰지는 오염된 은색의 비늘.
“아둔하고 모자란 추종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이런 것뿐이겠지.”
로브 속에서 은룡의 오염된 눈동자가 흉험하게 번뜩였다.
“데드라이즈. 각오하는 것이 좋을걸세.”
쿠구구구구!!!!!
타락자의 손이 회전하는 것과 동시에, 하늘 저편에서 떨어지던 유성우가 일제히 궤적을 바꾸었다.
호흡기를 뗀 길레온이 비틀거리며 일어나, 시공간을 넘어 타락한 보석룡과 시선을 마주한 순간.
울티마 얼럿을 향해 떨어지는 아득한 별빛의 폭발 속에서 모든 것이 얼룩진 은빛에 뒤덮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