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1260
약먹는 천재마법사 1260화(1260/1265)
약먹는 천재마법사 1260화
전후처리(13)
승천자 비색(秘色).
프로젝트를 조사하던 도중 레녹은 그 이름을 몇 번 들어본 적이 있었다.
아나테마의 추방에 협조해 권한을 대행했던 승천자. 쿤다라 구겁에 방문해 흔적을 남겼던 초월자.
역대 승천자들 중에서도 이질적인 기원을 지닌 데다, 워낙 독특한 성격을 지녀 바깥 대륙을 여행하는 것을 즐긴다고 했던가.
평범한 방법으로는 교류조차 불가능하지만, 특정한 절차를 갖추면 소통하여 힘을 빌릴 수 있는 존재라고 들었다.
그 이름만을 가끔 전해 들었을 뿐, 정작 모습이나 자취를 이 세계에 거의 남기지 않았던-
“비색의 영혼이 이 태도 안에 들어 있다…….”
휘오오오……!!
귀기를 흘리는 태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레녹이 팔짱을 낀 채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설명에는 딱히 신빙성이 느껴지지 않는군. 그 정도의 격을 담은 유물이라면 적어도 주인이 죽을 때는 반응을 보여야 할 텐데.”
“…….”
“송하가 싸우는 모습을 몇 번 보긴 했지만 그의 태도에서 무언가 특별한 힘을 느낀 적은 없었다. 이유가 뭐지?”
송하는 에단 바쥬르와 함께 시해검종의 모든 검리를 배우고 8레벨에 도달한 검사.
하지만 레녹은 송하 본인이 아니라 그가 지닌 무구에서 별다른 위화감을 느낀 적은 없었다.
송하의 태도가 자아를 지닌 병기라는 사실은 놀랍지만, 승천자의 영혼이 들어 있다는 것은 그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
애초에 그 정도 격을 갖춘 영혼이 무구로서 존재한다면, 송하가 죽는 시점에는 어떤 식으로든 개입해야 하지 않았겠는가.
바라간의 눈앞에서 송하가 죽는 모습을 방관했던 레녹으로서는 박사의 말에 신빙성이 생기지 않는 것도 사실.
“비색은 승천자들 중에서도 이질적인 존재이자, 아르스노바가 건재하던 시절부터 계약과 약속을 주관해왔던 초월자다.”
하지만 박사는 그런 레녹의 말에 딱히 반박하지 않고 담담하게 설명했다.
“특정한 절차에 따라 그는 자신을 찾는 이들에게 힘을 빌려주고, 그 증거로서 자신의 영혼을 나누어주지.”
“……영혼을 나누어준다고?”
“그 태도는 비색의 영혼 일부가 담긴 물건이자, 그가 프로젝트에 협조했다는 증거…… 이른바 형태화된 계약의 징표와도 같은 것이다.”
박사가 레녹의 앞에 비스듬히 꽂힌 은백색의 태도를 바라보았다.
“본래라면 계약의 주체가 사망한 시점에서 비색 본인에게 돌아가야 했을 힘을 하이레아의 능력으로 잡아두고 있을 뿐. 사실상 현시점에서 존재해서는 안 되는 물건이지.”
“…….”
“토벌전의 전리품으로 존재할 수 없는 무형자산을 이쪽의 능력으로 잡아 남겨두었다면, 그 자체로 새로운 가치를 창출했다 할 수 있지 않겠나?”
하이레아가 지닌 재능은 만물의 양면을 동시에 관측하는 양면성의 재능.
그를 통해 본래 비색에게 회귀해야 할 영혼의 조각을 억지로 이 세계에 잡아두었다는 뜻인가.
하지만 레녹은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보다도, 눈앞의 태도가 지닌 가치판단에 집중했다.
‘비색의 영혼이라…….’
카이세는 반복되는 회귀 중에서 언젠가 비색의 힘을 빌리는 데 성공했다 말한 적이 있다.
그건 아마 비색의 힘을 빌리기 위한 ‘계약’의 절차를 카이세가 입수했다는 뜻이었을 터.
그렇다면 이 태도는 비색이 계약에 따라 자신의 힘을 프로젝트에 빌려주었다는 증거이자-
“현시점에서 비색과 소통을 시도할 수 있는 유일한 매개체라는 뜻인가.”
“정확히 핵심을 찌르는 질문이로군.”
박사가 웃었다.
“대장 중에서 송하가 유백을 갖고 있던 건 아마 다른 이유도 있었을 거다. 유백의 영성이 초능력을 제어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수도 있고, 태도 자체로 뛰어난 무구였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
“하지만 그와 별개로 이 무구의 가장 큰 가치가 승천자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우리는 그 사실을 활용할 수 있는 능력과 지식을 갖고 있지.”
실제로 송하의 태도는 화신체의 벼락을 정면에서 얻어맞고도 부러지지 않았으니, 어느 쪽이든 가능성이 낮은 추측은 아니었다.
레녹이 생각에 잠긴 사이에도 박사의 설명은 막힘없이 이어졌다.
“내가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오퍼레이션 시스템을 파헤치며 관련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그를 통해 토벌전이 끝난 뒤 이쪽의 능력으로 회수할 수 있는 비품과 유물을 미리 선정해 두었었지.”
“회수할 수 있는 유물을 미리 정해두었다고?”
“이번 정산에서 회수한 다른 장비 역시 마찬가지. 마탑 측에서 금술이나 인신공양 관련 아티팩트 회수를 우선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기에 유의미한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겠군.”
겸양 섞인 대답과는 달리, 레녹은 박사의 판단이 정확했음을 그 시점에서 깨닫고 있었다.
화신체가 권사의 힘으로 군단 측 초인들을 학살하던 순간, 레녹 역시 마지막 결전을 위해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으니까.
전장에서 시선을 떼고 있지 않던 레녹의 신경이 분산되는 찰나, 하이레아와 체비엔을 필두로 마탑이 우선하지 않을 유물들을 챙긴 것인가.
화신체의 힘을 보자마자 방침을 바꾸어 행동에 나섰다면, 판데모니엄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전장에서 나름의 성과를 낸 것 역시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오히려 패배한 군단 측에 서 있었으면서도 그만한 결과를 얻었다는 것이 박사의 유능함을 짐작케 했다.
“차후 회수한 유물들을 공개하고 소유권을 정해야겠지만, 이건 틀림없이 그 전장에서 가장 진귀한 가치를 지닌 유물 중 하나다.”
박사가 물었다.
“빅터, 토벌전에서 가장 큰 전공을 올린 네가 이것을 가져가는 것을 동의하겠나?”
“…….”
레녹은 대답하는 대신 자신의 앞에 비스듬히 꽂힌 은백색의 태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칼날의 길이가 어찌나 긴지, 레녹 자신의 키보다도 더 크고 면적이 넓은 기형적인 태도.
투명한 은백색의 검면 너머에서 희미한 음영이 일렁이며 레녹과 시선을 맞추는 듯하다.
유백(流魄)이라. 영혼이 흐르는 무기라는 이름이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병기.
“그거, 가져갈 생각 없으면 제가 다음 순번으로 가져가도 되죠?”
미술관 천장에 걸린 샹들리에 위에 걸터앉은 흡혈귀가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저 괴물 같은 조작술사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만, 저도 토벌전이 끝날 때까지 남아 있었으니까. 공헌도를 따지면 자격이 없는 건 아니잖아요?”
“…….”
“사린. 그쪽이 이 무기를 탐낼 줄은 몰랐군.”
레녹이 무시하는 사이 박사가 느긋한 말투로 물었다.
“혈류가속을 사용하는 흡혈귀의 특성 때문에 본인의 피로 이루어진 무구만 사용하는 것 아니었나?”
“피의 속박으로 인한 제약이 있기는 한데, 그렇다고 아예 다른 무구를 사용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에요.”
사린이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쓸데없이 크긴 하지만 어쨌든 검이긴 하니까, 제가 못 다룰 무기는 아니거든요. 승천자의 영혼이 담겼다는 말도 흥미가 있고.”
“…….”
“무엇보다, 송하 그 사람이 사용하던 검을 혈왕성에 가져간다는 건 각별한 의미가 있어서.”
양 무릎 위에 손을 올린 채 턱을 괸 흡혈귀가 빙글빙글 웃는 얼굴로 레녹과 시선을 맞췄다.
“개인적으로는 꽤 탐이 나는데, 그쪽만 괜찮다면 혈왕성에서 적절한 대가를 받고 유백을 우리에게 넘기는 걸로 어때요?”
“아까부터 이놈이고 저놈이고 시답잖은 제안만 하는군.”
레녹이 싸늘한 대꾸에 체비엔의 인형이 살짝 움직임을 멈췄다.
“원하는 게 있다면 먼저 뭘 내놓을 수 있는지를 말해라. 혈왕성의 이름을 대충 지껄이면 내가 냉큼 제안을 받아들일 줄 알았나?”
“어머, 죄송해요. 저같은 진조는 구속이 걸려 있어서 거래의 형태가 아니면 혈왕성의 능력에 대해서는 말하기가 어렵거든요.”
사린이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혈계이능이나 체질 변화에 도움이 되는 물건이에요. 개인의 힘으로는 절대로 얻을 수 없는 종족특성을 인위적으로 부여하는…… 그런 종류의 힘이라고만 말해두죠.”
“…….”
그 말을 들은 레녹이 순간적으로 끌어올리던 마력을 멈췄다.
레녹 역시 사린이 돌려 말하는 예의 물건이 무엇을 말하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기 때문.
사린이 그런 레녹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살랑거렸다.
“그쪽의 생각이 맞아요. 특히나 당신 같은 뒤틀린 재능을 가진 특질계 술사에겐 천금 같은 가치를 지닌 물건이죠. 어쩌면 당신의 위계를 바꿔줄 수 있는 물건일지도 몰라요.”
“…….”
“어차피 그쪽은 검사도 아니잖아요? 대태도를 보상으로 받아봤자 결국 유용하게 사용하기는 어렵지 않겠어요?”
침묵하는 레녹을 꼬드기듯이 사린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색의 이름만 믿고 그걸 가져가느니, 확실하게 자신의 술식에 도움이 될 법한 보상을 챙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텐데.”
“착각을 하고 있군.”
레녹이 팔짱을 낀 채 냉소했다.
“내가 검사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유백의 사용처를 고민하고 있던 게 아니다.”
“네?”
“현시점에서 이것의 가치를 어느 정도로 매겨야 하는지를 생각하고 있던 것뿐이지.”
흑요석 가면 너머로 레녹의 안광이 번뜩였다.
“잠깐 고민하긴 했지만 가져가지 않을 이유가 없군. 비켜.”
“……비키라구요?”
순간 사린이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갸웃거린 찰나, 그녀의 뒤에서 섬뜩한 기척이 느껴졌다.
마모된 옷자락이 스치는 듯한 소리. 진조 흡혈귀인 그녀가 직전까지 눈치채지 못했을 만큼 비인간적인 기척.
사린이 섬뜩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무언가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사아아악-
“……!!!”
낡은 로브를 뒤집어쓴 매부리코의 거인이, 여덟 개의 팔을 거미처럼 샹들리에 아래로 뻗으며 내려오는 기괴한 광경.
지켜보던 멤버들이 순간적으로 마력을 끌어올리며 경계하다, 뒤늦게 그것의 정체를 깨닫고 멈춰 섰다.
“잠깐, 설마…….”
“미궁에서 소환했던……!!”
49구역 미궁 중심부에서 빅터가 영역을 전개하기 직전 소환했던 특질계 인공소환수, 허수차원의 재단사.
전장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멤버들이 그 모습을 기억해내고 흠칫한 찰나, 매부리코의 거인이 움직였다.
[낄낄낄…….]음침한 웃음소리를 느릿하게 흘리면서 여덟 개의 팔을 휘감아 거미처럼 지상을 향해 기어 내려가는 모습.
침묵에 잠긴 미술관의 로비 중심에서, 매부리코의 거인이 거꾸로 매달린 채 천천히 손을 뻗었다.
비쩍 마른 잿빛의 손을 뻗어 레녹의 앞에 비스듬히 꽂힌 은백색의 태도를 움켜쥔 순간.
철컥.
[……낄.]동시에 재단사가 흘리던 웃음소리가 잦아들고 섬뜩한 적막이 흘렀다.
철컥, 철컥.
재단사의 마른 손가락 사이로, 은백색의 태도가 그 손길을 거부하듯 흔들렸다.
하지만 레녹은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변조시킨 목소리로 담담하게 말했다.
“영혼에는 형태가 없기에, 영조병장이란 결국 영혼을 특정한 형태로 굳혀서 고정시킨 물건에 가깝겠지.”
“…….”
“송하라는 주인이 있었기에 태도의 모습을 하고 있을 뿐, 주인에 따라 그 형태를 바꾸지 못할 것도 없다. 그리고 그 주인이 인간이 아니라 술식의 본질을 대변하는 소환수라면-”
레녹이 고개를 기울였다.
“자연스럽게 가장 내가 사용하는 술식에 가장 적합한 형태를 취하지 않겠나?”
철컥, 철컥, 철컥!!!!
쾅!! 차르르르르륵!!!!
재단사의 손안에서 태도가 더욱 거세게 흔들리며, 칼날에 어린 은백색의 광채가 더욱 격렬해진다.
태도의 흔들림이 심해질 때마다 검날의 형태가 뭉개지며 좌우로 분산되고 원형을 잃어버려가던 찰나.
손등의 핏줄이 보일 정도로 강하게 손잡이를 움켜쥔 재단사가 태도를 강제로 땅에서 뽑아 들었다.
콰아아앙!!!
은백색의 안개가 폭발하듯 퍼지면서 드넓은 로비 홀을 가득 메웠다.
자욱하게 깔린 안개 속에서 재단사의 거대한 인영이 느릿하게 흔들렸다.
낡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지상을 내려다보는 구부정한 모습. 로브 아래 흐느적대는 여러 개의 팔.
그리고 그 어깨에 비스듬히 짊어진 거대한 은백색의-
“……낫?”
휘오오오!!!
바람이 불어오며 안개가 걷히고, 은백색의 대낫 한 자루를 움켜쥔 재단사의 모습이 나타났다.
로브를 뒤집어쓴 매부리코의 거인이 거대한 낫을 들고 낄낄 웃고 있는, 사신(死神)을 형상화한 듯한 모습.
[그흐으으으…….]음울한 웃음을 터트리며 손을 까닥일 때마다, 어깨에 짊어진 대낫이 부드럽게 움직이며 안개를 베어 가른다.
그때마다 영혼을 쓰다듬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속삭임과 귀곡성이 어깨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사라졌다.
그 기괴하면서도 압도적인 자태에 멤버들이 할 말을 잃은 찰나, 지켜보던 레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비교적 어울리는 모습이 됐군.”
“…….”
그제서야 레녹이 한 일의 의미를 이해한 멤버들이 황당한 듯이 중얼거렸다.
“영조병장의 형태를 태도에서 낫으로 바꿔 버린 거냐…… 믿을 수가 없군…….”
“처음부터 본인이 아니라, 소환수에게 들려서 사용시킬 생각이었던 거야?”
“허어…….”
체비엔과 하이레아, 에르몽이 침음성을 내뱉는 사이 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느낌을 원했는지는 알겠군. 하기야 영혼으로 된 무기의 형태를 바꿀 수 있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지.”
“…….”
“다만 굳이 낫의 형태를 고른 건 흥미롭군. 소환수에게 들려주는 것을 감안해도 효율적인 형태는 아닌데, 개인적인 선호인가?”
박사의 말대로 낫은 초인들이 사용하는 무장 중에서 주류에 해당하는 냉병기는 아니다.
당기듯이 휘둘러 베어낸다는 까다로운 사용법을 지닌 데다, 의외로 크기에 비해 사거리가 길지 않기 때문.
가까이서 당겨 베야 하면서도, 정작 상대가 먼저 접근전을 걸어오면 대처하기 어렵다는 모순이 있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간극을 유지하는 거리조절 능력 없이는 사용이 어려워, 레녹도 낫을 사용하는 초인을 거의 만나보지 못했을 정도.
다만 그럼에도 재단사에게 들려줄 무구의 형태로 낫이 정해진 이유는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까다로운 형태의 무구일수록 그 특수성 때문에 이미지가 강하게 잡히지.”
거대한 데스 사이드를 짊어진 재단사를 올려다보며 레녹이 말했다.
“내 술식의 기능을 극대화시키는 데 이렇게 ‘수확’하는 형태가 적절하다 판단했던 것 같군.”
“……왜 본인이 직접 정하지 않은 것처럼 말하는 건데요?”
“박사의 제안대로 비색의 영혼 조각은 이쪽에서 가져가지.”
사린의 의문을 무시한 레녹이 걸음을 옮겼다.
“난 술식을 조정하고 있을 테니, 남아 있는 정산은 너희들끼리 알아서 끝내둬라.”
비색의 영혼 조각으로 이루어진 무구, 유백은 형태가 존재하지 않는 영조병장.
그것을 낫의 형태로 바꿔 재단사의 손에 쥐여주기는 했지만,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조정이 필요하다.
복마전의 다른 멤버들이 토벌전의 성과를 두고 결산을 마치는 시간이면 충분하겠지.
팟!!
레녹이 대답을 듣지 않고 걸음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로비 복도 저편으로 점멸해 사라졌다.
미술관 층계를 공간째로 뛰어넘어 순식간에 건물 옥상에 도착한 레녹의 신형.
반파된 바이루츠의 풍경을 뒤로 하고 레녹이 재단사를 다시 소환하려던 순간.
찰칵.
등 뒤에서 옥상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빅터.”
“…….”
한 손에 묵주를 쥔 하이레아가 미술관 옥상 반대편에 서 있었다.
레녹이 결산 장소를 벗어나는 것과 동시에 하이레아 역시 그를 따라 나온 것인가.
힐끗 시선을 돌린 레녹을 향해 하이레아가 다가오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방해해서 미안하군. 하지만 이번 정산에 대해 몇 가지 해두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다른 놈들은?”
“지금쯤이면 아마 박사가 정산을 대신 맡아주고 있겠지.”
하이레아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배분으로 따지면 그는 이번 토벌전에서 당신 다음가는 우선자니까. 다른 멤버들도 불만은 없을 거야.”
“…….”
빅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계획을 입안하고 미궁에서 승천문을 연 박사의 공로 역시 엄청난 수준.
그가 하이레아를 대신해 토벌전의 성과를 분배한다면 다른 멤버들 역시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레녹은 하이레아의 대답에서 반대로 그녀의 목적을 읽어내고 물었다.
“내게 따로 전하고 싶은 말이 있군.”
“맞아.”
순순히 긍정한 하이레아가 레녹의 옆으로 다가왔다.
폐허가 된 위성도시가 내려다보이는 난간에 기댄 하이레아가 잠깐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철쇄용왕이 이번 정산에서 따로 전리품을 받지 않겠다고 의사를 밝혀왔어.”
“…….”
“단명종의 소지품이나 유물을 나눠 받을 생각으로 참가한 게 아니라고 하더라. 그래서 그의 몫을 네 쪽으로 돌리려고 하는데. 괜찮겠지?”
“토벌전의 성과를 여기 모인 전원이 나눠 가지고도 여분이 남는 모양이군.”
“대부분의 전리품은 마탑 측이 회수를 끝냈지만, 박사의 말대로 그쪽에서 우선적으로 회수하지 않은 장비나 유물들이 있었거든.”
하이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금술이나 인신공양으로 만들어진 아티팩트…… 확실히 견뢰의 마탑은 그쪽에는 크게 관심이 없어. 회수 작업에서 그쪽 물건들을 우선하지 않는 게 이쪽에서도 잘 보이더군.”
“…….”
“프리모 얼럿이나 엔지니움 포트리스처럼 강력한 전쟁병기들은 당연히 가져올 수 없었지만, 이쪽에서만 재활용이 가능한 장비나 부품들이 있어. 박사의 도움을 받아 그것들의 기능을 되살릴 생각이야.”
레녹이 금술이나 인신공양을 지양하는 만큼, 탑의 동료들 역시 금기와 관련되는 물건을 가능한 취급하지 않는 편이다.
하물며 금술로 만들어진 물건들은 직접 사용할 게 아니라면 보관이나 폐기조차도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니.
자연스레 토벌전의 전리품 회수 작업에서 그쪽 계통의 물건들이 후순위로 밀린 것 역시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애초에 레녹이 중간결산에 참가한 것도, 탑에서 회수하지 못한 물건 중 놓친 것이 있는지 확인하려는 목적도 있었으니.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전부인가?”
“아니. 말해두고 싶은 건 그다음의 일이었지. 우리가 지금 토벌전의 성과를 정산하는 것도 다음 계획 때문이었으니까.”
그렇게 말한 하이레아가 손에 들고 있던 묵주를 천천히 돌리면서 입을 다물었다.
마치 무언가를 말하기 전에 한참을 망설이며 단어를 고르는 듯한 묘한 분위기.
힐끗 레녹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뗀 그녀가 말했다.
“당신도 들었겠지만…… 실낙원에서 명왕과 진와가 격돌했어. 사흘 밤낮을 넘은 결전 끝에 명왕이 패배했지.”
“…….”
그 말을 듣자마자 레녹의 기척이 날카롭게 일어섰지만, 하이레아는 움찔거리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명의 추천을 받아 입단한 당신이라면 알고 있었겠지. 하지만 그에 대해 전해둬야 하는 사실이 있어.”
“말해.”
“…… 명왕이 실낙원에 진입하기 직전에, 자신의 유산을 중앙전선 안에 남겨두었어.”
로브 너머로 느릿하게 흔들리던 레녹의 호흡이 멎었다.
하이레아는 그런 레녹의 반응을 지켜보며 조용히 속삭였다.
“그가 가비행을 통해 이루려다 실패한 ‘결실’…… 실낙원 인근에 그것이 아직 남아 있는 것으로 이쪽에서 추정하고 있지.”
“…….”
그제서야, 레녹은 어째서 하이레아가 자신과 독대를 원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이번 정산을 두고 레녹에게 특혜를 주거나, 양해를 구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하이레아가 다른 멤버들 몰래 레녹에게 가장 먼저 전해주려던 정보는, 바로-
“단장의 허락이 떨어졌고, 이미 멤버를 모집하는 중이야.”
레녹을 올려다보며 하이레아가 물었다.
“판데모니엄의 다음 계획은 중앙에서 명왕의 유산을 회수하는 작전이 될 거야. 빅터, 가장 먼저 당신을 엔트리에 올려놓고 싶은데, 괜찮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