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1265
약먹는 천재마법사 1265화(1265/1265)
약먹는 천재마법사 1265화
전후처리(18)
쿠르르릉!!!
크레인과 트럭이 바쁘게 오가며 흙더미를 실어나른다. 철근 사이로 술식문자가 새겨지고 결합되며 형태를 갖추었다.
실시간으로 조형을 마치고 구조물의 형태를 취해가는 빌딩과 상가 건물의 형상.
거대도시 발칸 49구역.
토벌전의 여파로 쑥대밭이 되어 있던 구역은 일주일 사이 절반 가까이 수복이 끝나 있었다.
“소식은 이미 들었겠지만, 중앙의회에서 메이어 상원의원을 필두로 전후처리에 나섰어.”
공사현장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을 지나 걸으며 제니가 말했다.
“메이어 의원은 의회 내부에서도 네게 우호적인 사람인만큼, 49구역에 한해 굉장히 많은 편의를 봐주고 있지.”
“그렇군.”
“주거지역이나 상업지구는 대부분 수복이 끝났어. 모든 구역 중에서 가장 빠른 속도일 거야. 남은 건 네 마탑을 다시 짓는 일인데…….”
거침없이 설명을 이어나가던 제니가 말끝을 살짝 흐렸다.
그간 레녹이 군단을 상대로 마탑을 어떻게 활용해 왔는지, 우로보로스 마법체계를 익힌 제니 역시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미궁의 형태를 취하고 구겁의 환경을 모방해 침입자를 영혼부터 찍어누르는 마경.
전쟁병기를 초월한 출력을 지니고, 자유자재로 형상을 변환하는 기능과 권능을 동시에 보유한 구조물이다.
마지막까지 남아 상황을 조율했기 때문에, 레녹의 마탑이 얼마나 특별한 설계를 갖추고 있었는지도 이해했을 터.
그만큼 마탑을 다시 한번 짓는 것이 어려운 일이 되리라는 사실을 제니도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쟁 직전에 완성했던 마탑은 내 술식의 성능을 최대한으로 끌어내기 위한 테스트베드에 가까웠지.”
레녹이 제니의 옆에서 걸으며 대답했다.
“토벌전에서 성능실험을 진행하기 위해 파손을 감안하고 설계했던 부분이 많다. 새로운 마탑은 다른 형태로 만들 생각이니 부지확보에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형상변환에 필요한 기능과 형태를 수십 종 정도 더 추가할 생각이지만, 어차피 대부분의 시도는 지상에서 이뤄지지 않을 거다. 향후 어떤 식으로든 49구역의 수복 과정에서 방해가 될 일은 없겠지.”
“지상에서 이뤄지지 않을 거라니, 마탑의 형상을 대체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데?”
“따로 생각해 둔 형상이 있다기보다는…… 초월성을 얻은 시점에서 더 이상 물리법칙에 구애받지 않아도 될 테니까.”
한참 수복작업이 이뤄지는 49구역의 상공을 올려다본 레녹이 중얼거렸다.
“탑에 극뢰를 ‘보관’하는 것만으로도 한계를 어렵지 않게 뛰어넘을 수 있겠지. 어쩌면 탑 전체를 거대한 벼락기둥으로 바꾸는 것도 가능할 거다.”
“…….”
“어느 쪽이든 괜찮아 보여서 고민이 되는군…… 일단 49구역의 하늘에 수백 미터 크기의 낙뢰를 박아놓고 형태를 조율해 볼까?”
“……발칸 전역에서 난리가 나는 걸 보고 싶어? 미안하지만 나한테 물어봤자 어떤 느낌인지 전혀 감도 안 오거든.”
떨떠름한 표정으로 레녹의 말을 듣고 있던 제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고 싶은 대로 해. 어떤 형태가 되든 새로운 마탑의 형상에 맞춰서 업무 과정을 개편하면 되겠지.”
“네 일을 방해할 정도로 불편해지지는 않을 거다.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레녹은 그 뒤로 제니와 함께 새로운 마탑의 형태 후보를 논의하며 공사현장을 걸었다.
“중앙의회에서 개최하는 개선식 관련 공문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이 몇 가지 있어.”
복도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제니가 말했다.
“메이어 의원을 필두로 의회 측에서 확실하게 네 손을 들어주기로 결정했거든. 이번 전쟁에서 네 귀책사유가 없다는 걸 분명히 하고 싶어 해.”
“그 과정에서 따로 준비가 필요하기라도 한 건가?”
“맞아. 개선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우리 쪽에 협조를 부탁했는데, 이 부분은 역시 네 확인이 필요할 것 같아서 말이야.”
우우웅……!!!!
사방에 녹아내린 거대한 황금빛의 잔해물 사이를 가로지른다.
토벌전에서 부서진 채로 며칠 넘게 방치되어 있는 마탑의 망가진 부품들.
바람이 폐허 잔해 사이를 스치며, 마치 악기와 같은 기묘한 공명음을 냈다.
49구역의 공사현장을 돌아본 두 사람이 전쟁이 끝났던 폐허로 돌아온 이유.
“중앙의회의 초청에 맞춰 개선식을 준비하려면 이쪽도 서둘러야겠지.”
제니가 그렇게 말하며 황금빛 잔해물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이 근처야. 바로 들어갈게.”
키이이잉……!!
제니의 체내에서 마력이 회전하는 것과 동시에 황금빛의 헤일로가 손목을 타고 회전한다.
탑의 동료들이 사용하는 헤일로와 비교해도 단연코 선명한 광채가 현실에 내려앉은 순간.
제니의 손짓에 따라 수십 미터에 달하는 황금빛 잔해물이 격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기능을 다한 부품이 억지로 작동하듯, 서로 회전하며 충돌하고 깎아내며 우격다짐으로 공간을 만들어낸다.
그때마다 지축이 거세게 흔들리며 육중한 굉음을 쉴 새 없이 터트렸다.
쿠구구구궁!!!!
잔해물이 서로 충돌하고 밀려나며, 그 안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지하공동의 풍경.
레녹이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이 손을 내린 제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자. 일단 가면서 설명해 줄게.”
“…….”
공동 안쪽으로 뒤엉킨 덩굴과 나무 뿌리를 바라보던 레녹이 제니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공간 사이를 탑의 잔해물로 격리해서 가둬놓은 감옥과도 같은 풍경.
열 명이 채 되지 않는 부상자들이 온몸이 묶인 채로 각방에 갇혀 있었다.
쿠우웅!!!
부러진 철갑날개와 함께 사슬에 묶여 있는 유령편대의 부대장.
하반신이 으스러진 채 간신히 숨이 붙어 있는 귀도교단 고위 사제.
생명연장 프로토콜을 사용해 의식을 유지하고 있는 기계화병단의 지휘관.
전쟁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군단 측의 생존자들이, 무너진 마탑 잔해물을 감옥 삼아 갇혀 있는 풍경.
“탑의 잔해물을 쌓아 포로들을 수용하는 감옥으로 만들어 버린 건가.”
“전쟁이 끝난 뒤 포로의 신변을 회수해 응급치료를 마치고 이곳에 가둬놓았어.”
잔해물을 쌓아 만들어진 복도 사이를 걸으며 제니가 말했다.
“거의 파손되긴 했지만, 네 마탑에 사용된 자재의 강도는 엄청난 수준이라 버려두기 아까웠거든.”
우로보로스 마법체계를 익힌 제니는 레녹을 대신해 마탑을 조작할 수 있는 유일한 관리자.
망가지고 무너지긴 했지만, 탑의 잔해물을 조작하여 특정한 형태를 갖추는 것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겠지.
제니는 다른 어떤 수감시설보다 레녹의 마탑 잔해물로 쌓아 올린 감옥이 이들을 가둬두기에 믿을 만하다 판단한 것 같았다.
“이곳은 네 마탑의 잔해물을 감옥으로 삼은 격리공간인 만큼,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탈출이 불가능하지.”
“…….”
“근처에는 장송귀해선이 있어서, 행여나 누군가 탈출에 성공한다 해도 바로 장례지도사에게 발각당할 거야.”
주티야와 함께 발칸을 찾아왔던 장례지도사가 포로들의 감시를 맡아주고 있던 것인가.
토벌전에 참가하지 않은 시점에서 조력을 기대하지는 않았는데, 전후처리 과정에 손을 거들어주고 있었던 모양.
“다만, 이곳에 가둬놓은 포로들이 워낙 위험한 초월자들이라 다른 사람들에겐 출입을 금지하고 있었는데…….”
쿵!!
그 순간, 황금빛 잔해물 사이로 뒤엉킨 나무덩굴이 사납게 날뛰며 섬찟한 주력을 내뿜었다.
레녹도 익히 알고 있는 주력이 담긴 덩굴과 뿌리가 잔해물을 쥐고 공동을 거세게 흔들었다.
마치 레녹이 도착한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흉험한 의념을 흩뿌리는 주술사의 기척.
하지만 그 주력과 의념은 레녹은커녕 제니에게조차 닿지 못하고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니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반 네가 있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테니까. 그럼 당장 깨어 있는 사람부터 볼까?”
“그렇게 하지.”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돌렸다.
의식을 잃은 포로들이 갇혀 있는 격리실을 지나, 잔해물이 쌓인 채 닫혀 있는 독방.
“……여어.”
의자에 구속되어 있던 거구의 여성이 레녹을 보고 힘겹게 시선을 들어 올렸다.
왼쪽 상반신이 뜯겨나간 여성이 어깨를 꿈틀거리다 오른손을 들어 경례하는 시늉을 했다.
무표정한 레녹의 얼굴을 보며 그녀가 먼저 말을 건넸다.
“오랜만이군, 승천자 나으리…….”
“…….”
데드라이즈 6군단장 아티야 엘릭슨.
화신체와의 전투에서 왼쪽 상반신을 통째로 잃어버리고 반신불수가 된 육체능력자.
“몸은 좀 괜찮나?”
“글쎄……? 내 몸을 아작 낸 당사자에게 들으니까 묘한 기분인걸.”
아티야가 느릿하게 대답하며 몸을 뒤로 젖혔다.
“그쪽이 데리고 있는 의사가 꽤나 실력 있는 사람이라서 말이야. 덕분에 많이 나아지긴 했지.”
“…….”
“환지통이 심하긴 한데, 오른쪽 몸은 잘 움직여. 덕분에 길거리에 나앉아도 구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군.”
어깨를 으쓱인 아티야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정작 그쪽은 혼자서 우리 모두를 짓밟아 놓고도 멀쩡해 보이지만 말이야.”
“…….”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어쩌면 우리가 전쟁에서 패배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네 모습을 보니 새삼스럽게 그런 생각이 드는걸.”
오른팔로 목을 긁적이며 쓴웃음을 짓는 그녀의 팔을 따라, 굵직한 사슬이 흔들렸다.
“뭐,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 그래서, 우리의 처우에 대해 뭔가 정해진 사항이 있-”
쿠우웅!!!
그 순간, 황금빛 잔해물이 튕겨 나가듯이 밀려나면서 아티야의 말이 뚝 끊겼다.
아티야를 가두고 있던 잔해물이 치워지면서, 그녀를 가두고 있던 공간이 개방되는 모습.
묘한 침묵이 흐르고, 왼쪽 상반신이 뜯겨나간 군인이 힘겹게 일어나 복도로 걸어 나왔다.
“이제와서 묻는 것도 모양 빠지는 일이긴 하지만 말이야.”
아티야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나 오늘 여기서 죽는 건가?”
“이제 와서 널 죽일 생각이었다면 지금껏 살려두지도 않았겠지.”
레녹이 시선을 돌렸다.
“딜런의 요청을 받았다. 네가 가지고 있는 마력방출 기술을 배우고 싶어 하더군.”
“딜런이 누군데?”
“레슬러 마스크.”
“……아하.”
그제서야 미궁에서 조우했던 용병을 떠올린 아티야가 피식 웃었다.
“죽어라 거절하길래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그 재생자 녀석이 그래도 보는 눈이 없는 건 아니었군.”
“너는 앞으로 탑의 용병들에게 네가 지닌 마력방출 기술을 가르치는 일을 맡게 될 거다.”
철컥!
제니가 건네주는 마력 구속구를 받아든 레녹이 그것을 아티야의 손목에 채우며 말했다.
“그동안에는 널 살려주지. 용병들을 지도하기 위해 필요한 개인정비 시간은 보장하겠다.”
“핫, 이 몸으로 어차피 멀리 도망치지도 못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냐?”
“머피는 생명유지장치는 물론이고 의수를 비롯한 대체장비를 만드는데도 일가견이 있다.”
레녹의 말에 아티야가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잘만 하면 네 왼쪽 상반신을 대체할 의수를 만들어줄 수도 있겠지.”
“……흠. 이제 와서 딱히 그런 연명장비에 미련이 생기지는 않는데.”
아티야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뭐, 살려준다는데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군. 시키는 일 정도는 성실하게 해보도록 하지.”
연락을 받고 도착한 수련을 따라가는 아티야를 보던 제니가 고개를 저었다.
“반신불수의 군단장이라.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는 수준이라곤 하지만…….”
“위험해 보이나?”
“몇 번 대화를 해봤는데, 동급의 초인들과 비교해도 굉장히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야.”
제니가 팔짱을 꼈다.
“당장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마냥 우리에게 굴복한 건 아닐걸.”
“그런 사람이기에 아직까지 삶의 의지를 놓지 않고 있기도 하지. 그걸 빌미로 이렇게 거래를 제안할 수도 있었고.”
레녹이 시선을 가라앉혔다.
“아티야의 마력방출은 익힐 수만 있다면 용병들에게 굉장히 도움이 될 기술이다. 그녀의 신체적 특성에 기인한 재주라 해도 요령 정도는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르지.”
“눈썰미도 좋아. 전쟁을 치르는 도중에 상대편 초월자를 거기까지 눈여겨보고 있었던 거야?”
“개인적으로는 딜런보다 오히려 밀라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기대를 하고 있다.”
“밀라?”
“밀라가 보유한 초능력은 아티야의 마력방출과 비슷한 면이 있으니까. 그녀의 정체된 성장에 나름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제니를 보며 레녹이 대답했다.
“아티야 엘릭슨의 성격이 밀라와 꽤 비슷하다고 느끼는 부분도 있거든. 성격이나 의념이 비슷하다면 기술을 따라 배우기도 쉽지 않겠나?”
“성격과 의념의 연관성은 육체능력자들 사이에 떠도는 근거 없는 속설 아니었어? 반 네가 그런 미신을 믿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나 자신이 아닌 타인의 성장을 돕는 부분에서는 그런 심리적인 요인을 아예 무시할 수 없으니까.”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자를 만나러 가지. 슬슬 그쪽도 준비가 된 것 같은데.”
“…….”
황금빛 잔해물을 쌓아 만들어진 거대한 감옥의 최심부.
그중에서도 잔해물 파편을 조각조각 엮어 전신을 찍어누른 비좁은 봉인실.
“……견뢰.”
파편이 쌓인 봉인실에 엎드린 채 쓰러져 있던 남성이 입을 열었다.
그 얼굴을 확인한 레녹이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바라간.”
데드라이즈의 세번째 대장이자, 8레벨의 대주술사.
카이세 바쥬르의 친구이며 프로젝트의 관계자, 에단 바쥬르의 동료이기도 했던 군단 최고위 장성.
날카로운 사슬로 전신이 묶인 바라간이 공동의 봉인실에 갇힌 채 레녹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전신의 주맥이 모조리 끊겨 있어서 억류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어.”
품 안에서 태블릿을 꺼낸 제니가 화면에 적힌 정보들을 읽어내렸다.
“포혈공의 혈마법으로 혈액순환을 억제하고, 주티야의 언령을 걸어 넣은 사슬로 손발을 꿰뚫어 팔다리를 묶었지.”
“…….”
“그런데도 조금 회복되자마자 방금처럼 주력을 사용하려고 하더라. 이 감옥 안에서 그렇게 할 수 있는 술사는 이 자가 유일해서…… 조금 거친 방법을 사용해야 했지.”
제니의 말대로, 날카롭게 갈아낸 사슬의 파편이 바라간의 팔다리를 꿰뚫고 벽에 박혀 있다.
주술사의 육신 전체를 사슬로 꿰어 이 지하공동에 박아넣은 듯한 삼엄한 광경.
“여기서부터 개선식과 관련된 안건이니까 잠깐 들어줘.”
태블릿을 두들긴 제니가 말했다.
“토벌전 전후처리를 위해 편성된 대책위원회 측에서 전쟁포로의 신변양도를 부탁해 왔어. 가능하면 바라간 본인을 원한다더라.”
“군단 수뇌부의 신변을 시의회 측에 넘겨달라는 말인 건가.”
레녹의 대답이 차갑게 변했다.
“유감이지만 그 정도로 시의회를 신뢰하고 있지는 않군.”
메이어 의원이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만큼 신뢰할 수 있지만, 메이어가 소속된 중앙의회는 다르다.
프로젝트와 깊게 관련되어 있으면서도 오래전부터 그 성과를 사사로이 이용해 왔던 발칸의 권력기구.
카이세가 소멸한 시점에서 그들이 다른 마음을 먹지 않을 거라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동의해. 하지만 대책위원회 측에서 아무런 근거 없이 포로의 양도를 요구하는 건 아니야.”
제니가 차분하게 말했다.
“발칸 전역에 남아 있는 데드라이즈 명의의 자산을 네게 양도하기 위해선 군단 수뇌부의 신병이 필요하다고 하더군. 대륙법에 따른 행정절차를 따르는 게 처리 속도가 가장 빠르다고 해.”
“개선식을 앞두고 내게 넘길 보상을 미리 정리해 두겠다는 의미인가?”
“그렇지. 특히 그 부분과 관련해서…….”
바라간을 내려다보는 제니의 시선이 서늘하게 변했다.
“양도할 포로의 생사여부는 상관이 없다고 하더라.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하다고 하더군.”
“…….”
“토벌전이 끝난 시점에서 굳이 네 심기를 거스를 생각은 없다는 거겠지. 난 이 정도면 협조할 만하다고 생각하는데, 네 생각은 어때?”
“죽여.”
대답은 레녹이 아니라, 격리실 너머에 갇혀 있는 바라간에게서 들려왔다.
창백한 안색으로 덩굴에 묶여 있던 주술사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맺혔다.
“내 목을 잘라 시의회에 보내면 되겠군. 네 벼락으로 절단면을 지져버리면 회생의 여지조차 남지 않을 거다.”
“…….”
“그 역겨운 늙은이들이 전쟁에서 이겼다는 증거를 필요로 한다면, 내 머리가 가장 확실한 선물이 되겠지.”
바라간의 사나운 말에 제니가 표정을 굳혔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충혈된 눈으로 레녹을 응시했다.
레녹은 무표정한 시선으로 바라간을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제니. 잠깐 자리를 비켜줄 수 있겠나?”
“……반.”
“이자와 둘이서 대화하고 싶군.”
제니가 불안한 표정으로 레녹을 힐끗 바라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섰다.
제니가 잔해물이 쌓인 복도 너머로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레녹이 연초를 꺼내 들었다.
“제니는 군단 측의 자산이 탐나기보다는, 널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은 눈치지만…….”
치익.
불을 붙이는 것과 동시에 마력장을 펼쳐 소리를 차단한 레녹이 입을 열었다.
“난 네 신병을 시의회에 넘기지 않을거다. 애초에 전쟁이 끝난 시점에서 더 이상 사람을 죽일 생각은 없었지.”
“크크큭, 이 완전히 돌아버린 새끼가…….”
바라간이 웃었다.
“수만 명을 죽여놓고도 그딴 개소리를 태연하게 지껄일 수 있는거냐. 정말 제정신이 아니군.”
“이제 와서 널 죽여봤자 네 시체는 외곽구역에 널브러진 사상자 그 이상도 이하도 되지 못할 테니까.”
레녹이 대꾸했다.
“네 가치는 오히려 네가 살아있기에 존재하지. 토벌전에서 생존한 군단의 최고위 장성. 카이세의 최측근으로 활동하던 세 명의 대장 중 하나.”
“…….”
“너는 살아 있는 한 언제까지나 이 전쟁을 증거하는 존재가 될 거다. 카이세가 소멸한 이 세계에서 프로젝트의 실패를 가리키는 징표가 되겠지.”
바라간은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숙였다.
헝클어진 머리칼 아래 일그러진 그의 표정이, 그가 그 말에 반박할 의지를 잃었음을 짐작게 했다.
전쟁에서 패배하고 모든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채, 목숨만을 연명하고 있는 적군의 지휘관.
레녹은 그런 바라간을 내려다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밀종주술을 이어받은 부족의 일원으로 태어나, 인신공양의 제물이 되기 위해서만 존재했던 삶이라.”
“……뭐?”
바라간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퍼뜩 고개를 들었다.
“너, 그걸…… 어떻게…….”
19구역에 남아있던 회귀자의 기억. 바라간과 카이세가 처음으로 만나던 순간의 기억.
이제는 오직 바라간만이 기억하는 그 순간을 언급하는 레녹의 말에 주술사가 경악한 찰나.
“카이세는 밀림에서 너를 만나 동료로 받아들인 순간을 마지막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바라간의 앞에 선 레녹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네게 밀림보다 더 넓은 세상을 보여줄 수 있던 것을 의미있는 일이라 여겼지.”
“…….”
“공양물로 죽어야 했던 네 운명을 카이세가 바꿨다면, 역시 지금 널 죽이는 건 문제가 될 가능성이 높아…….”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러니 널 살려두는 대신 한 가지 거래를 제안하고 싶군.”
“……거래, 라고?”
“카이세는 회귀의 반동을 없애기 위해 에단의 육체를 빼앗아 현세에 돌아왔지.”
예상치 못한 말에 바라간이 멈칫한 사이, 레녹이 태연하게 팔짱을 끼며 말했다.
“나는 쿤다라에서 구겁을 조사하던 도중 그 부활과정이 사천사화마경에서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에단의 몸으로 부활한 카이세가 열병식에 늦게 도착한 것도 아마 그 때문이었겠지.”
프로젝트는 완전히 끝났지만, 그 인과를 더듬지 않고서는 다음으로 나아갈 수 없다.
카이세가 자신의 부활을 위해 선택했던 사천사화마경. 중앙전선의 제국 황성과 맞닿아 있는 인세의 지옥.
카이세와 절친한 친구였던 바라간이라면 마경에 대해 분명 알고 있는 것이 있을 터.
바라간의 신변을 억류한 지금 레녹은 그를 조사할 기회를 무시하고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사천사화마경에 무엇이 존재하기에, 카이세는 자신이 부활할 장소로 그곳을 선택했던 거지?”
“…….”
“제국 황성의 각 중추기관을 재료로 삼아 타락했다는 마경의 기원. 그곳에 어떤 힘이 잠들어 있는지를 알아야겠다.”
침묵이 흘렀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이 되어 레녹을 올려다보는 바라간의 모습.
그런 주술사를 내려다보며 레녹이 품 안에서 검은 비늘을 꺼내 들었다.
“대답하지 않겠다면 이걸 네 머리에 박아 기억을 꺼내 볼 수밖에 없군.”
“…….”
“편람의 묵린을 사용하면 그녀의 밀종주술을 익힌 네 정신방벽을 뚫고 기억을 뒤져볼 수 있겠지. 다소 거친 방법이 되겠지만-”
“……아니.”
순간, 바라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말해주지. 이제 더 이상…… 그런 것이 우리에게 중요하지는 않을 테니까.”
“……”
“네 말이 맞다, 견뢰.”
수척한 표정으로 시선을 들어 올린 바라간이 말했다.
“카이세가 그렇게 떠난 건 네놈이 정해준 결말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지. 알고 있었어.”
“…….”
“알면서도 부정하려 했을 뿐이다. 하지만, 카이세가 더 이상…… 다음을 짊어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면…….”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한 바라간이 눈을 감았다.
레녹은 가만히 그가 다음으로 할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천사화마경은…….”
바라간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죽은 대장군의 시체가 지배하는 지옥이다. 그곳에서는 매일마다 모든 생명을 죽이고 살리며…… 그들의 죽음을 연료 삼아 불태우고 있지.”
* * *
“끝났어?”
“그래. 다소 만족스러운 결과는 아니었지만.”
바라간과의 대화를 끝마치고 폐허 밖으로 나온 레녹을 보며 제니가 고개를 저었다.
“의외인걸. 그 주술사와 무언가 의미있는 거래를 할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나도 바라간이 내가 원하는 정보를 모두 알고 있으리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레녹이 연초를 태우며 말했다.
“대장이라곤 하지만 오랫동안 군단을 떠나있던 주술사였으니, 카이세 본인만큼이나 많은 것을 알지는 못했겠지.”
“…….”
“하지만 그래도 중앙전선에 대한 유의미한 키워드를 손에 넣었어. 이걸로 마경에 접근할 방법을 찾아낼 수 있다면-”
콰르르르릉-!!!!
그 순간, 머리 위에서 폭발하는 뇌명성에 레녹의 말이 뚝 끊겼다.
구름 한 점 존재하지 않는 하늘 위를 꿰뚫고 폭발하는 천둥.
푸른 빛을 두른 뇌룡이 거세게 포효하며 하늘 위를 사납게 수놓았다.
멍하니 입을 벌리고 하늘을 바라보던 제니가 중얼거렸다.
“……잠깐만. 무슨 일인지 바로 확인해볼게.”
휴대폰을 꺼낸 제니가 즉시 어딘가로 연락을 넣으며 메시지를 확인했다.
빠른 속도로 자판을 두들기며 연락을 주고받던 그녀가 이내 황당한 표정으로 레녹을 돌아보았다.
“그, 토르번 마탑주가…… 네가 움직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나 봐.”
“……뭐?”
[사지이이이이일!!!!!]흩날리는 천둥 속에서 포효하듯 울려 퍼지는 노인의 목소리.
[어디에 있는 게냐!!!! 더 이상은 못 참겠구나!!]“설마…….”
상황을 이해한 레녹이 표정을 찌푸렸다.
“지금 49구역을 날아다니면서 날 찾고 있는 건가?”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제니가 머뭇거리다 말했다.
“지금 직접 여기로 날아오고 있다는데?”
[본노에게 얼른 보여줘야 할 것이 있지 않더느아아아!!!!]“…….”
침묵이 흘렀다.
레녹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내가 직접 나가서 이야기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