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1270
약먹는 천재마법사 1270화(1270/1283)
약먹는 천재마법사 1270화
네 번째 논문(3)
휘오오오-
거대한 푸른 빛의 눈동자가 아름답게 회오리치며 느릿하게 깜박인다.
의사당의 넓은 홀을 내려다보며 관조하듯 초점이 잡혔다 흐려지기를 반복하는 모습.
그 시선은 의사당이 아니라, 마치 발칸이라는 도시 저편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약속의 눈동자]는 카이세가 회귀 도중에 설계했던 시나리오의 부산물 중 하나였죠.”
사파이어 지팡이를 쥔 채 눈동자를 올려다보던 레녹이 시선을 돌리자, 의원석에 엎드려 있는 금발의 소년이 보였다.
턱을 괸 채로 이쪽을 빙글빙글 웃으며 바라보던 시장, 오르메온이 말했다.
“세계의 모든 계약과 권한을 대행하는 의사권능(意思權能)을 창조하는 계획이었는데 실패로 끝났어요. 승천자 비색이 관리하던 대륙 바깥의 계약은 이쪽에서 손댈 수 없던 개념이라.”
“…….”
“뭐, 그 일을 계기로 비색과 접촉하는 데 성공했으니 무의미한 실패는 아니었지만 카이세는 그걸 그렇게 마음에 들어 하지는 않았죠.”
시장이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해당 시나리오의 결과물을 개조해 발칸 전역의 모든 권한과 자격을 관리하는 역할로 만든 것이 중앙의회 본관에 예속된 영령, 약속의 눈동자인데…….”
“쓸데없이 설명이 길군.”
레녹이 말을 끊었다.
푸른 빛의 지팡이를 잡고 돌아선 레녹이 의사당의 넓은 홀을 걸었다.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 힘인지는 이해했다. 자격이나 권한 같은 무형의 개념을 직접 관리하고 분배하는…… 선천이능을 개조한 시스템의 일종이겠지.”
“…….”
“내 마탑을 발칸 최고위 집행기관으로 승급시키는 요청에 대해서는 승인을 마쳤다. 다른 작업은 차후 내 대리인을 통해 마무리하면 충분해.”
우우우웅!!!
레녹의 손에 잡힌 푸른 빛의 지팡이를 중심으로, 새파란 마력의 광채가 물결처럼 부드럽게 회오리쳤다.
형태가 없는 개념과 자격을 다루는 방법을 순식간에 이해하고 그것을 자유자재로 다뤄내는 마법사의 모습.
지팡이를 짚고 소년의 앞에 선 레녹이 말했다.
“본론으로 돌아가지. 발칸이 중앙전선에 직접 진출하려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지?”
거대도시 발칸. 동대륙 남부에 위치한 이 도시는 대륙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의 도시국가다.
수천만 명에 달하는 인구. 소도시에 비견되는 크기의 수십 개의 구역을 두고 있는 국가에 가까운 체제.
대륙 최대 인구와 면적. 발칸 내에 존재하는 압도적인 내수시장은 도시를 외부 유입에 의존하지 않고 존속할 수 있게 만들었다.
오히려 발칸의 내수를 노리고 다른 도시나 세력에서 지속적으로 자본을 투자하거나 유입을 시도해 올 정도였으니.
수십 년 전 도시확장개발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뒤, 발칸의 규모는 더 이상 커지지 않고 오랫동안 현상을 유지해 왔던 바.
미개발지구 바깥에 버려져 있던 위성도시가, 라 헤이븐의 성공과 동시에 재개발되기 시작한 것도 극히 최근의 일이었으니.
그만큼 발칸은 오랫동안 현 기조를 유지해 왔기에 레녹 역시 시장의 말을 유념해서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앙과의 직통라인이 필요하다면 그런 식으로 움직일 필요는 없을 텐데. 중앙전선을 지배하는 초대형 세력 중 하나가 되길 원하는 건가?”
“당장 시작할 생각은 아니지만, 전후처리가 끝나는 대로 팀을 꾸리고 본격적으로 관련 정책을 입안할 거예요.”
소년이 그렇게 말하며 테이블을 두들겼다.
“시작은 발칸 외곽구역에 존재하는 인프라를 옮기는 것부터. 그 뒤에는 조금씩 권한과 범위를 늘려나가서 중심구역의 행정기관 이전까지 염두에 두고 있죠.”
[행정기관의 이전이라니, 꽤나 본격적이로구려.]의원석에 앉아 있던 올리닉이 느릿한 전성을 내뱉었다.
그의 머리를 대신하는 금속구체가 느릿하게 회전하며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중앙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는 수준을 넘어, 행정수도의 이전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인가.]“그러한 일이 실제로 가능한 것인지 모르겠군. 일개 도시국가가 직접 중앙진출을 선언한 적이 역사상 존재했던 적은 있었나?”
“가당치도 않은 일이야. 거창한 목표임은 차치하고서라도 지나치게 많은 예산을 필요로 할 텐데.”
“관련 정책을 입안하는 것만으로 상당한 반발에 부딪히게 되겠군. 시장직을 오래 유지할 생각이 없나?”
발칸 내 인프라 일부를 동대륙 중심부로 이전하는 수준을 넘어, 행정기관의 위치를 일부 옮기겠다는 설명.
곁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초월자들조차 난색을 표할 만큼 시장의 말은 파격적인 종류의 것이었다.
이 도시에서 오랫동안 머물며 위상을 쌓아 올린 만큼, 이제 와서 환경의 변화를 반길 수는 없는 처지겠지.
“본 시해검종은 수십 년 넘게 발칸에 머무르며 검리를 잇는 것을 과제로 삼아 존속해 왔소.”
하백이 말했다.
“이제 와서 도시를 이전하는 것은 본 검문의 역사와 정체성을 통째로 부정하는 일이나 마찬가지. 우리가 그 제안을 따라야 할 이유가 있는가.”
“거대도시를 통째로 중앙으로 이전하겠다는 말이 아니에요.”
주변의 반발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던 소년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애초에 불가능한 일인 데다, 그런 결정 자체를 사람들이 용납할 리도 없겠죠. 알잖아요?”
“…….”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시의회가 나아가야 할 거시적인 방향성…… 보험이나 활로를 미리 만들어둬야 한다는 이야기에 가까워요.”
의자에 걸터앉아 다리를 흔들던 소년이 시선을 돌렸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발칸의 중앙전선 개입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일 테니까. 일이 닥친 뒤에야 움직이는 것보단 미리 준비하고 대비하는 게 좋잖아요?”
“발칸 시의회가 추구하는 방향성을 이 자리에서 미리 공유해 두고 싶다는 뜻인가?”
“군단이 패배하고 동대륙 중심부 금지를 확보한 지금이 아니라면, 이렇게 많은 초월자들이 모여서 논의할 기회는 없겠죠.”
레녹의 질문에 시장이 수긍했다.
“2사령부가 주둔해 있던 금지는 현재 발칸의 인프라를 부담 없이 이전할 수 있는 유일한 후보지…… 사실상 중앙전선으로 가는 길목과 직결된 전략적 요충지예요.”
“…….”
“개선식이 끝나는 대로 본 의회는 견뢰의 마탑이 금지에 지부를 설립할 수 있도록 수혜를 주고 관련 정책을 입안할 거예요. 협조할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의회의 방향성을 이해하고 있어야 차후 서로 어긋나더라도 손해를 최소화할 수 있겠죠.”
“미안하지만 그 전제조건부터 납득이 가지 않는군.”
카바힘 전직 기사단장, 키리야 유베르츠가 차가운 표정으로 시장을 내려다보았다.
“어째서 발칸이 중앙에 진출할 필요가 있는 거지? 이 도시는 중앙전선에서 벌어지는 아귀다툼에서 가장 자유로운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
“내가 태어난 나라는 중원을 향한 집착 끝에 망가지다 끝내 멸망해버렸지. 같은 절차를 밟을 생각이라면 난 협조하지 않겠어.”
대답하지 않는 시장을 향해 키리야의 시선이 날카롭게 변했다.
카바힘의 멸망을 언급하며 단호한 태도를 취하는 키리야의 말에 공감하지 못하는 초인은 이 자리에 없었다.
말없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레이지 미스트라조차도 떨떠름한 듯이 중얼거렸을 정도.
“현재 도시국가 체제를 이룬 문명 중에서 중앙에 직접 진출한 사례는 하나도 없어. 발칸에서 그런 무모한 시도를 해야 할 이유가-”
“왜 없다고 생각하죠?”
미스트라의 말을 끊은 시장이 웃는 얼굴로 시선을 들어 올렸다.
“하나 있잖아요. 아르스노바.”
“……그건.”
“다들 착각하는 것 같은데, 중앙도시는 태어날 때부터 중원을 차지하고 있던 게 아니에요.”
“오르메온. 너…….”
미스트라가 믿기 어렵다는 듯이 표정을 찌푸렸다.
“아르스노바 대신 발칸이 그 도시를 점유해야 한다고 말하는 거야?”
“맞아요. 발칸은 중앙전선에 진출해 아르스노바가 무너진 자리를 손에 넣을 겁니다.”
시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왜냐하면…… 살아남으려면 그게 유일한 방법이잖아요?”
“…….”
침묵이 흘렀다.
발칸의 방향성을 걱정하던 초인들도. 전례 없는 일이라 여기며 반대하던 초월자들조차도.
오르메온이 다름아닌 세계의 결말을 입에 담으며 그 이유를 논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
발칸에서 살아가는 모든 초월자들이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고 여겼던 멸망.
시장은 바로 그것을 언급하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중앙으로 향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프로젝트의 [시나리오] 중에서, 세계의 결말을 예언하고 점친 회차가 몇 번 있었죠. 다들 들어본 적은 있을 겁니다.”
소년이 테이블 바깥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축쇄식 : 점성술’에 따르면 멸망은 바다가 내려오며 세계와 맞닿는 과정…… 말 그대로 외해의 공허가 별을 집어삼키는 결말 그 자체죠.”
“…….”
“대기가 끓어오르고 해수면이 상승할 겁니다. 세계와 우주의 두 바다가 동시에 하늘과 땅에서 차올라 대륙을 동시에 집어삼키겠죠.”
오르메온이 이렇다 할 감정조차 없는 어조로 말했다.
“사방대륙의 도시국가들은 높은 확률로 막대한 피해를 입을 겁니다. 어느 쪽이든 오래 버티지 못하고 종국에는 모든 대륙이 바다 아래 가라앉게 되겠죠. 마지막까지 살아남으려면 결국 중앙과 동대륙 양쪽에 모두 발을 걸쳐두어야만 해요.”
“…….”
“다시 말하죠. 중앙전선 진출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사항입니다. 발칸을 중앙으로 이전할 생각은 없지만, 최소한 중앙도시로 가는 길목은 미리 확보해야 해요.”
침묵 속에서 소년의 설명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2사령부가 주둔해 있던 금지에 마탑 지부를 세우려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유지군이 주둔하는 것만으로는 안 돼요. 발칸의 인프라를 일부 이전하여 직접 관리하지 않는 이상 그곳을 오랫동안 지키기는 어려울 겁니다.”
“……오르메온.”
“가능한 빠르게 중앙전선으로 향하는 길을 만들고, 시정부의 예산과 인력을 투입하여 꾸준히 관리할 거예요. 견뢰의 마탑 지부를 세우는 건 현 정부가 금지에 개입할 좋은 명분이 되어주겠지요.”
레녹의 마탑에게 금지 관리를 맡기는 것이 아니라, 토벌전에서 승리한 견뢰의 이름을 명분으로 삼기만 하면 충분하다는 말인가.
그 대가로서 레녹의 마탑에게 온갖 특혜과 권한을 몰아주었다면, 지금 이러한 보상과 대가를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긴 하지만-
“물론 다른 초월자나 양지세력의 도움을 받으면 좋겠지만, 일단 청의 눈과의 협력도 염두에 두고 있어요. 필레놈 자치령의 독립 여부와 관련해 적지 않은 부분을 양보해야 하겠지만, 그들의 [등대] 없이는 중앙과 동부의 유기적인 연계를 확보하기가 어렵…… 왜 그런 눈으로 보시죠?”
사방에 기묘한 정적이 흐르는 것을 느낀 소년이 웃는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위계를 초월한 초인들이 무거운 시선으로 금발의 소년을 바라보는 의사당.
“너는 처음부터 가만히 앉아 결말을 기다리고 있던 것이 아니었군.”
무표정한 얼굴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레녹이 말했다.
“멸망이 찾아오는 시기에 맞춰 발칸을 존속게 할 대안을 만들 생각인가.”
“카이세와는 마지막까지 그 부분에 대해 의견이 맞지 않았죠. ”
시장이 웃는 표정으로 고개를 쓱 기울였다.
“구차하게라도 존속을 원하는 마음을 그는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어느 시점에서 프로젝트가 끝나기 전까지 서로 개입하지 않겠다 약속을 해야 했죠.”
“…….”
“그가 떠났으니, 저도 이제는 제 방식대로 움직일 겁니다. 카이세가 회귀하며 원로원에 남겨두었던 [시나리오]…… 멸망을 피하기 위해 강구했던 여러 대책을 실험해 봐야겠죠.”
“이해할 수가 없군…….”
하백이 눈을 감은 채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까지 해가면서 이 도시의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싶은 게냐.”
“시해검주. 난 이 도시의 시장이에요.”
소년이 웃는 얼굴로 턱을 괸 채 웃었다.
“시장이 도시의 발전과 안녕을 위해 노력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닐까요?”
“…….”
멸망에 앞서 손을 놓고 포기하는 대신, 마지막까지 조금이라도 더 살아남기 위해 방법을 강구하는 태도.
프로젝트의 결말과 함께 복귀한 시장은 카이세와는 완전히 다른 실무자였지만, 그것을 틀렸다고 단언하는 이는 없었다.
그가 어떤 이유로 그렇게까지 해가며 발칸을 존속시키려는지, 카이세의 기억과는 다른 모습으로 이곳에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오르메온이 이 자리의 어떤 초월자보다도 강력한 명분을 확보했다는 사실에는 누구도 이견을 제시할 수 없겠지.
고개를 끄덕인 오르메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이해했다면 앞으로는 시정부의 정책에 적극적인 협력을 부탁드리지요. 의회의 모든 일을 도와달라곤 말하지 않겠지만, 최소한 견뢰의 마탑이 새로운 지부를 만드는 일에는 협조해야 할 거예요.”
“탑의 지부를 금지에 세우고 싶다면 입안해야 할 정책과 특권이 한두 가지가 아닐 텐데.”
레녹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단순히 권한을 주고받는 것만으로 실현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나?”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일정을 진행하면서 진지하게 얘기해 보도록 하는 걸로 하죠.”
소년이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마침, 오늘 이 자리를 성사시키기 위해 시의회 측에서 준비한 메인 이벤트가 하나 더 있잖아요?”
* * *
시정부 중앙의회 별관에 위치한 대강당.
수천 명의 인원을 수용가능한 구조로 이루어진 대강당은 무려 6층 구조로 이루어진 대규모 시설이다.
객석에는 이미 참관인들이 발 디딜 틈 없이 자리하고, 그 사이로 무수한 촬영장비가 설치되어 있었다.
처음 레녹이 중앙의회 본관에 도착했을 때와 비교해도 크게 부족하지 않은 규모.
견뢰의 케이스와는 달리, 지금부터 진행될 일정은 무조건 중계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쿵!!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것과 동시에, 객석에 자리해 있던 수천 명의 이목이 입구를 향해 집중됐다.
무표정한 얼굴로 걸음을 옮기는 레녹을 보는 것과 동시에, 소란스럽던 강당의 말소리가 뚝 멈췄다.
객석에 앉아 있던 이들이 믿을 수 없다는 기색으로 사방에서 숨을 죽인 채 레녹을 바라보았다.
“저길 봐. 그 사람이다…….”
“정말 왔군. 시의회의 의례적인 말인 줄 알았는데.”
“공식석상에서 보는 건 청문회 이후로 사실상 처음이야. 오늘 일정이…… 그에게 그렇게나 중요했던 건가?”
견뢰는 발칸 음지에서 프리랜서로 시작해 초월성을 손에 넣은 대마법사.
처음 이름을 알린 당시부터 외곽구역을 영역으로 삼아왔기에, 자신의 의지로 공식행사에 모습을 드러낸 경우는 거의 없다.
등대지기의 사건 이후 진행된 청문회에 참석했던 경우를 제하면 사실상 전례가 없다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로 드문 행보.
그만큼 지금부터 예정된 일정이 의회와 견뢰 양쪽에게 중요한 의미라는 뜻이겠지.
착 가라앉은 침묵 속에서, 오르메온은 복잡하게 뒤엉킨 전선과 콘센트를 피해 레녹을 상층부 객석으로 안내했다.
“강당이 좀 많이 넓죠? 별관을 지을 당시에는 오페라나 서커스, 미술품 전시가 가능할 만큼 큰 규모를 원하고 설계했다고 하더군요.”
“당시 재직했던 시의원들이 그런 행사를 좋아했나 보군.”
“아뇨? 관련 분야에 예산을 넣고 떼어먹어도 티가 잘 안 나서 그랬죠.”
“…….”
입을 다문 레녹을 보며 옆에 서 있던 소년이 해맑게 웃었다.
“예술활동에 대한 가치 측정은 항상 정확하게 이뤄지지 않는 법이죠. 좋은 팁을 알려드렸으니 마탑이 비슷한 방식으로 경비처리를 해도 봐 드릴게요.”
“필요 없어.”
파바바바밧!!!!
오르메온과 레녹을 필두로 초인들이 강당을 가로지르는 순간, 관객석 사방에 설치된 조명과 카메라가 미친 듯이 반짝였다.
레녹이 서 있는 장면을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연달아 셔터를 누르는 기자들과 참관인들의 모습.
개중에는 레녹을 직접 보는 것이 처음인 이들이 많았는지, 사방에서 괴상한 감탄이 연달아 들려왔다.
“그 이상한 소문이 사실이었군. 진짜 사진에 안 찍혀……!!”
“정말 어떤 술식이나 마법도 사용하지 않은 건가?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거지?”
“체질이라 해도 말이 안 돼. 객체를 지정하는 행위에서 인간이 반사적으로 이탈할 수 있을 리가…….”
“윽, 눈부셔.”
눈도 깜박하지 않는 레녹과는 달리, 옆에서 쏟아지는 플래시에 표정을 찌푸린 소년의 모습.
“미안하지만 촬영은 좀 있다가 해줄래요? 이 자리에서 찍어야 할 사람은 우리가 아닐 텐데.”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군요, 오르메온.
그 순간, 두 사람의 옆에서 기계음이 뒤섞인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부유하는 작은 의자 위에 올라탄, 전신을 기계로 개조한 여성이 객석 복도 옆에 서 있었다.
=여기 참석한 사람들은 학계 관계자나 전문 연구직이 많아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대한 호기심을 업으로 달고 사는 사람들이죠.
“……아하, 브리지스.”
쓴웃음을 지은 오르메온이 시선을 돌렸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인사를 꼭 그런 식으로 해야겠어요?”
=처음 뵙겠어요, 탑주님.
브리지스라 불린 여성은 소년의 말을 무시하고 레녹을 향해 악수를 건넸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녀의 옆구리에 장착되어 있는 기계 팔을.
=시의회 직속 기술자문위원회를 이끌고 있는 브리지스라고 해요. 편하게 에이다 로밀 브리지스라고 불러주세요.
“편하게 부르기엔 지나치게 긴 이름이군.”
=어머, 실례.
무기질적인 여성의 표정이 살짝 놀란 듯 유쾌하게 변했다.
=생각보다 농담이 통하시는 분이었군요. 지난 전쟁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으신 분인 줄 알았는데.
“…….”
=하기야 감성이 메마른 분이셨다면 이런 발표를 직접 찾아오시지는 않으셨겠죠. 전쟁영웅께 제가 그만 실례를.
“육체를 기계로 개조한 것 치고는 쓸데없는 말이 많은데.”
레녹이 시선을 돌렸다.
“그쪽이 오늘 개선식에서 이번 일정을 주관하는 관리자인가?”
=그렇죠. 오늘 일정은 기술자문위원회 내부에서도 기념비적인 일이니까요.
브리시스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직접 얼굴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인 전문가들이 많아요. 그만큼 오늘 개선식에 오신 귀빈을 기대하시는 분들이 많다는 이야기겠죠.
“…….”
=사실, 이번 일을 누가 주관해야 하는지를 두고 시정부 중앙의회 산하 각 기관에서 정치적인 알력이 잦았어요.
기계음이 섞인 브리지스의 목소리에, 희미한 나른함이 감돌았다.
=이번 일의 결과에 따라 차후 도시 전역에 그 여파가 미칠 것이 예상되는 만큼, 시정부와 의회 각 기관에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죠. 그만큼 여러모로 걸려 있는 것이 많은 자리예요.
“…….”
=사실 오늘 자리를 자문위원회의 이름으로 주관해도 괜찮은지 고민이 있었지만, 오르메온이 저희를 명분으로 삼고 싶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지라.
“브리지스. 그렇게 말하면 제가 꼭 위원회 측에 강요라도 한 것 같잖아요.”
레녹의 옆자리에 앉은 소년이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말했다.
“뭐, 좋아요. 그럼 이제라도 자문위원회가 아니라 다른 기관에게 일을 맡기도록 할까요?”
=늦었어요, 오르메온.
브리지스가 부드러운 웃음과 함께 시선을 아래로 던졌다.
=오늘 이 자리의 또 다른 주인공도 이제 준비가 된 것 같으니까.
후욱!!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단상 너머의 커튼이 걷히며 연구복을 입은 청년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창백한 안색의 연구원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객석에 자리한 사람들의 열기가 더욱 커지고.
단상 위에 놓인 마이크를 잡은 청년이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린 그 순간.
그 얼굴을 본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며 일어나 일제히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와아아아아!!!!
박수 소리에 맞춰 광활한 강당 전체가 천둥처럼 거세게 울리며 흔들렸다.
다른 초월자들조차 그 열렬한 호응을 내심 이해하고 공감하듯, 단상을 향해 의식을 앞으로 기울였다.
시정부 직속 연구기관 라바테논 마법대학 원소학부 석좌교수.
현재 각 학계와 연구분야를 망라하여 가장 많은 인용횟수를 지닌 논문의 저자.
모든 마탑과 연구기관을 통틀어 천문학적인 수준의 로열티를 받고 있는 기술자.
단 몇 년 만에 대륙 전역을 통틀어 독보적인 연구성과를 거두고 이름을 알린 연구원.
쏟아지는 갈채 속에서 눈을 뜬 에반 바일런의 시선에 초점이 잡히고.
객석 저편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단상을 내려다보는 견뢰와 정확하게 시선을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