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1271
약먹는 천재마법사 1271화(1271/1283)
약먹는 천재마법사 1271화
네 번째 논문(4)
레녹이 마탑의 승급을 마무리 짓고 오르메온과 함께 별관 대강당에 도착하기 대략 5분 전.
기술자문위원회를 이끄는 리더, 상원의원 에이다 로밀 브리지스는 최상층 객석에서 이변을 인지했다.
객석 뒤쪽으로 드리운 두꺼운 커튼 너머, 텅 비어 있는 통로와 복도 사이에 위치해 있는 휴식공간.
유독 나이가 든 노인을 중심으로 에워싸듯 서 있는 중앙의회 상하원 시의원들의 모습.
대책위원회를 이끄는 메이어를 바라보는 다른 의원들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메이어 의원.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하원을 이끄는 고위 의원들 중 하나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반대 파벌 의원들을 이렇게까지 강하게 처벌한다는 이야기는 없었을 텐데요.”
“…….”
침묵하는 메이어를 향해 다른 의원들이 성토하듯 말했다.
“아치우드와 일리마 의원을 비롯해 정재계 인사들이 대거 구속당했네. 이대로라면 재판에서도…….”
“손속이 지나치게 과했어. 군단과 내통했다 해도, 본보기를 보일 방법은 얼마든지 있지 않나.”
“의장께서 메이어 의원에게 전후처리를 맡긴 것은 이런 일을 위해서가 아니었을 텐데요.”
메이어는 전후처리 과정에서 상원의 권한을 대행하는 존재.
토벌전과 관련된 모든 문제를 수습하고 정리하는 역할을 맡은 상원의원이다.
그렇기에 메이어는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의장에 뜻에 따라 시의회 내부에 산적한 문제들을 정리해 왔지만.
군단과 내통했던 의원들을 대거 척결하는 과정에서 다른 시의원들의 격렬한 반발이 있었던 것이다.
“이제 막 복귀한 오르메온 시장이야 그렇다 쳐도, 메이어 의원이 이렇게 독단적으로 나오시면 안 됐습니다.”
“대책위원회가 시장에게 지나치게 협조하면서 견뢰가 필요 이상으로 권한을 몰아받았어. 이건 분명 옳지 못한 일일세.”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날카로워지는 분위기 속에서도 메이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다른 의원들의 책망 어린 말을 들으며 가만히 서 있었을 뿐.
그런 메이어를 마음에 들지 않는듯이 바라보던 의원들이 천천히 걸음을 돌려세웠다.
“의장께서 복귀하신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
“메이어 의원. 오늘의 월권행위는 반드시 기억해두겠습니다.”
“이번 개선식에서 그만한 결과를 내지 못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져야 할 거야.”
다른 의원들이 모두 떠난 뒤에야 메이어가 지팡이를 짚고 걸음을 돌렸다.
커튼 뒤편에 서 있는 브리지스를 쳐다보지도 않고 노의원이 입을 열었다.
“구경하기에 썩 기분 좋은 광경은 아니었을 텐데, 브리지스 의원.”
=메이어 의원.
브리지스가 기계로 개조한 몸을 움직여 목소리를 흘렸다.
=상원 내부의 분위기가 많이 좋지 못한 모양이군요.
“대책위원회의 권한을 생각보다 과하게 끌어다 쓰기는 했지.”
메이어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군단과 내통했다고는 하나, 같은 의원을 구속해 재판에 넘겼으니 다른 의원들이 위협을 느끼는 것도 이해하네. 언제 비슷한 처지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다 생각하겠지.”
=…….
“내가 오르메온 시장에게 협조해 견뢰에게 권한을 몰아준 것도 내키지는 않았을 거야. 승전의 대가라는 걸 감안해도 과했다 느낀 이들도 많았을 걸세.”
대책위원회는 상원의장이 메이어를 직접 지명하여 창설한 토벌전 전후처리를 전담하는 태스크포스.
상원의 권한을 일시적으로 메이어가 대리하고 있지만, 그것이 메이어가 진정으로 의장에 비견되는 권력자가 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전쟁을 명분 삼아 의회 내부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권한을 간섭당했다 느낀 다른 의원들이 반발하는 것 역시 예정되어 있던 일.
방금 메이어를 찾아온 의원들뿐만 아니라, 각계의 유지들도 작금의 사태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이들이 많다.
이번 개선식에서 자그마한 흠이라도 잡힌다면 메이어의 정치적인 입지 역시 위태로워질 정도로 무리한 결과.
그만큼 많은 것들이 이번 발표에 달려 있는 셈이었다.
=그렇게까지 무리해서 견뢰의 편을 들어준 이유가…… 대체 뭐죠?
“지금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일 테니까.”
메이어가 대꾸했다.
“의회 내부의 반대파를 척결하고, 마탑을 승급시키고, 혜택과 특권을 몰아줄 수 있는…… 이런 권한이 다시 내게 쥐어질 날이 언제 올지 알 수 없기 때문일세. 내 나이를 감안하면, 어쩌면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일지도 모르지.”
=…….
“처음 그와 만나 도시의 정상에 오르겠다 약속한 지도 이제는 시간이 많이 흘렀어.”
비어 있는 단상 아래쪽을 내려다보며 메이어가 조용히 말했다.
“더 늦기 전에…… 내가 약속을 지킬 수 없어지기 전에 할 수 있는 일은 해두고 싶네.”
=……메이어 의원.
침묵이 흘렀다.
메이어가 자신의 남은 시간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전신을 기계로 개조한 브리지스는 이해하면서도 공감해 줄 수는 없었기 때문.
하지만 메이어 역시 이해나 공감을 바라고 그녀에게 이 사실을 답해준 것은 아니겠지.
=많은 것이 걸려 있는 이번 개선식에서…… 오늘 발표의 성패에 따라 메이어 의원의 거취 역시 결정되겠군요.
브리지스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을 잃어버릴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괜찮겠나요?
“내게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결과를 확신하는 재주는 없지.”
메이어가 몸을 돌렸다.
“하지만 반이 발표를 직접 지켜보기 위해 오고 있네. 그거면 충분해.”
=…….
대강당의 문이 열리며 걸어들어오는 레녹의 모습.
무표정한 마법사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메이어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난 이제 후회하지 않네.”
* * *
와아아아!!!!
무표정한 얼굴로 단상 위에 놓인 마이크를 향해 걷는 에반 바일런.
강당 최상층 객석에 앉아 말없이 교수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견뢰.
“…….”
양지의 거인과 음지의 삼두령에 속하는 초인과 초월자들.
교수와 연구원은 물론이고, 정부 공직자와 시의원 모두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발칸 역사상 가장 급진적인 기술발전을 이뤄낸 연구원과 홀로 수만 명을 학살하고 전쟁을 종식시킨 초월자.
가진 바 재능으로는 독보적인 수준에 도달한 두 사람이, 양극단에 위치한 삶을 살아 지금에 도달하기까지.
두 사람이 무엇을 원해 협력을 맺고 서로의 재능을 공유해 왔는지.
그 결실이 이제서야 비로소 오늘 이 자리에서 밝혀지게 되었음을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
브리지스는 견뢰의 무표정한 옆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바일런 교수의 세 번째 논문은 공용마법체계 학습과 관련된 테마였지.’
에반 바일런의 세 번째 논문은 공용마법 학습장치의 개발.
오직 마법사들만이 사용 가능한 고유마법체계를 대신해, 재능이 없는 이들도 사용할 수 있는 공용마법체계 연구에 있었다.
당시 그가 발표한 공용마법은 작은 빛을 만들거나 회로를 접지하는 수준의 간단한 마법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 발칸 전역의 반응은 어마어마했으니.
고작 3종의 마법을 학습할 수 있는 학습장치를 구매하기 위해 수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족히 몇 달 넘게 암거래가 성행하지 않았던가.
학습장치의 구조가 워낙 단순하여 불량품과 가품이 난무해 시정부 측에서 규제에 애를 먹었다는 이야기는 학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브리지스 역시 학습장치를 뜯어보곤 그 조악한 구조 안에 어떻게 공용마법체계와 같은 복잡한 시스템을 넣었는지 감탄했던 기억이 선했다.
‘바일런 교수는 단순한 연구자가 아니야.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그 수단까지도 골라낼 안목을 갖고 있어. 그래서 위원회에 직접 들이고 싶었지만…….’
공용마법체계를 개발한 것도, 학습장치를 양산한 것도 바일런의 연구성과였지만 브리지스가 정말로 감탄한 부분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연구실에 칩거하며 공식석상에 제대로 얼굴도 비추지 않는 저 연구자가, 어지간한 사업가나 투자자보다 사람들의 소망을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다는 것.
그건 단순한 노력이나 연구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타고난 직관이나 감각에 가까운 재능이었다.
마법이나 이능을 향한 사람들의 선망이 얼마나 강한 것이었는지, 학습장치가 시중에 풀린 뒤에야 많은 이들이 절절히 실감하지 않았던가.
그가 지금껏 발표한 논문들이 하나같이 폭발적인 반향을 일으킨 것도 모두 그런 이유에서였을 터.
그렇기에, 발표가 예정되어 있는 네 번째 논문을 두고 이리도 격한 반응이 나오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브리지스는 에반 바일런이 견뢰와 손을 잡은 이유를 명확하게 추측해낼 수가 없었다.
‘공용마법이 불러일으킨 파장이 엄청나긴 했지만 그건 견뢰의 조력이 없는 독자적인 결과물에 가까웠어. 두 사람이 협력하는 것은 이 네 번째 논문이 사실상 처음…….’
세 번째 논문의 발표는 마탑에서 진행되긴 했지만, 해당 연구 과정에서 견뢰가 개입한 정황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애초에 동대륙 역사상 최고의 재능을 지녔다는 대마법사가, 재능 없는 이들을 위한 공용마법 연구에 관심을 둘 가능성은 거의 없을 터.
그렇다면 오늘 예정된 네 번째 논문이야말로, 바일런과 견뢰가 협력관계를 맺은 이유이자 결실 그 자체겠지.
돌아가는 정황을 아는 이들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객석 아래편에 앉은 라바테논의 학장도. 그 옆에서 나이에 걸맞지 않게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는 라파엘 연구소장도.
의원들과 함께 단상을 지켜보는 상원의원 콘라드 헤이번도.
반대편 층계에 얼굴을 비춘 여러 사업가와 메가테크의 임원들도.
거대도시의 연구사업에 종사하는 모든 관계자들이 견뢰의 악명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직접 얼굴을 비추고 있는 것이겠지.
‘이 자리에서 네 번째 논문의 테마를 먼저 봐두어야 앞으로의 변화에 대응할 수 있어. 그렇다면…….’
우우웅!!
그 순간, 객석에서 마이크를 잡은 시의원들 중 한명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발표가 시작되기 전 강당 후열에서 메이어를 압박하던 의원들 중 한 명.
내키지 않는 듯 바일런을 내려다보던 의원이 쏘아붙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작하기 전에 미리 말해두지. 오늘 자네의 발표는 이번 개선식에서 무척이나 중대한 행사가 될 걸세.]“…….”
[오늘 발표를 위해 시의회에서 많은 준비를 거친만큼, 당연히 그만한 성과가 있어야 할 거야. 적어도 앞선 논문에서 거둔 성과 정도는 충분히-]지지직!!!
그 순간, 바일런이 대답하려 마이크를 들어올리는 것과 동시에 소리에 노이즈가 끼며 버벅인다.
발표를 위해 준비해 둔 마이크가 전혀 작동하지 않고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모습.
객석에 앉아 있던 의원이 손짓하자 수행원이 즉시 확성장치를 작동시켰다.
“바일런 교수. 오랜만에 보는군.”
콘라드가 중후한 음색으로 입을 열자, 그 목소리가 마이크 없이도 자연스럽게 강당 전체를 울렸다.
“세 번째 논문 발표 이후로 이런 자리를 가지는 것은 처음인가. 그때는 여러모로 불미스러운 일이 많았지.”
“…….”
공용마법체계 발표 당시 바일런에게 학습장치의 품질을 걸고 넘어지던 연구원의 일을 언급하는 것인가.
바일런이 무표정한 얼굴로 콘라드를 바라보았지만, 콘라드는 개의치 않고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간 자네를 의심하고 음해하려는 이들이 종종 있었지. 하지만 이제는 모두가 자네의 말에 반박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발표를 기다리고 있네.”
“…….”
“자네가 처음 논문을 발표했던 박람회부터 지켜봤던 공직자로서, 언젠가 이렇게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지. 시의회 역시 본 의원과 같은 생각일 거야.”
생색을 내는 척 하면서 시의회가 바일런 교수를 지지한다는 암시를 흘리는 콘라드 의원의 말.
처음 말을 꺼내 레녹을 압박하려던 의원이 표정을 구겼지만, 콘라드는 개의치 않고 끝까지 말을 이었다.
“오늘 자네의 논문이 어떤 성과를 내든, 본 의회는 앞으로도 물심양면으로 자네의 연구를 지원하고 투자할 것을 약속하겠네. 그럼 발표를 들을 수 있겠나?”
“……알겠습니다.”
단상 앞에 선 바일런이 느릿하게 대답했다.
수척하다 못해, 다소 멍하게 느껴지는 표정으로 시선을 들어 올린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다만 발표가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보여드릴 시연이 그렇게 많지는 않군요.”
“글쎄. 나로서는 발표회에 시연이 있다는 말만으로도 벌써부터 기대가 되기 시작하는군.”
그 말대로, 시연이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객석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당장 바일런이 아무것도 없이 단상 앞에 서 있음에도,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발표를 보려고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
부산스러워진 강당에서 수행원들이 사람들을 진정시키는 모습을 본 콘라드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비전문가의 주제 넘는 참견이었군. 혹시 다른 사람들은 시작 전에 앞서 질문이 있다면…… 이런.”
파바바밧!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섭게 객석 사방에서 수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손을 들어 올렸다.
연구소 직원이나 교수, 혹은 메가테크의 임원과 투자자를 가리지 않고 나서는 모습.
자신의 개입에 대한 형평성을 부여하기 위해 의례상 말을 얹었던 콘라드가 낭패한 표정을 지었지만, 바일런은 태연했다.
“질문에 대답하며 진행하는 식으로 시작하죠. 한 명당 질문 하나를 받겠습니다.”
“……괜찮겠는가?”
“예. 갑작스럽게 잡힌 일정인 만큼, 시작하기에 앞서 논문에 대해 간단하게 소개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바일런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제가 왜 그동안 연구를 해왔는지, 논문을 쓴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시작해도 괜찮을 듯 합니다.”
처음 그를 압박했던 의원의 말에 답할 겸, 네 번째 논문을 저술한 이유와 배경에 대해 잠깐 설명할 생각인가.
논문 발표가 아니라 질의응답에 가깝게 분위기가 흘러감에도 그는 개의치 않는 듯했다.
객석에 모인 이들 역시 바일런 교수가 그간 어떠한 식으로 발표를 해왔는지 알고 있었기에 놀라지 않았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삑-
[테오스카 연구소의 차석연구원 에르민입니다. 교수님의 발표를 참관하게 되어 영광이라는 말씀을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연구복을 입은 짙은 갈색 피부의 여성이 양손으로 마이크를 잡고 일어나 빛나는 눈으로 말했다.
[논문의 내용이 너무 궁금하지만, 교수님께 직접 듣고 싶으니 다른 부분에 대한 질문을 드리려고 합니다. 네 번째 논문의 연구주제는 그간 발표하신 세 논문과 유기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나요?]“왜 그렇게 생각하셨는지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교수님께서 발표하신 논문의 파생연구 과정에서 공통점을 찾으려는 시도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교수님의 모든 논문이 엔트로피 간섭연구의 부산물이라는 가설이 대두되기도 했죠.]예상치 못한 바일런의 반응에 에르민이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실제로 교수님의 논문은 기존에 통용되던 규칙이나 법칙을 거스르고 뒤바꾸는 일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학계에서는 이같은 가설을 통해 교수님께서 굉장히 거시적인 규모의 정성연구를 진행하고 계시는 것이 아닌지…….]“맞습니다.”
[……네?]“제 논문에 대한 파생연구가 그렇게 많이 이뤄졌는데, 제가 직접 쓴 논문의 의도나 방향성을 부정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겠죠.”
에르민이 멍한 표정을 짓는 사이 레녹이 걸음을 돌렸다.
“말씀하신 것처럼 지난 세번의 논문은 모두 하나의 단기적인 목표를 두고 그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얻은 부산물의 일종입니다. 그것을 엔트로피 간섭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유리탈 천체성문회의 조닌이라고 합니다.]반대편 객석에 앉아 있던 건장한 체격의 남성이 마이크를 받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말씀이 사실이라면 교수님께서 발표하실 네 번째 논문 역시 비슷한 방향성을 공유하고 있다고 봐도 되겠습니까?]“아뇨.”
[그렇다면 본 학회에서 추측한 가설 중에서 교수님의 목표와 일치하는 부분이 존재하는지 여쭙고 싶…… 예?]“네 번째 논문은 제가 그동안 발표했던 논문과는 처음부터 다른 목표와 방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레녹이 걸음을 돌렸다.
“지난 세번의 논문은 발표와 동시에 시중에서 해당 기술이 적극적으로 통용되는 것을 기대하고 연구되었습니다. 하이프 사이클의 3단계를 건너뛰고 곧바로 상업성을 입증할 수 있는 수준에서 기술이 사용될 수 있도록 신경을 쓴 결과였죠.”
[…….]“하지만 이번 논문의 테마는 아직 실용성이나 상업성을 입증받기에는 조금 이른 기술일지도 모릅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여기 모인 분들을 조금 실망시키게 될 수도 있을 것 같군요.”
다소 자신이 없다는 듯한 바일런의 대답.
하지만 그 말을 듣자마자 오히려 객석 사방에서 손을 들고 몸을 들썩이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레녹이 방금 대답했던 설명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학계에서 일하는 관계자라면 모를 수가 없었기 때문.
[일륜 투자회사의 펀드매니저 메이슨입니다. 그 말씀은 지난 논문에서는 이론 연구만이 아니라 기술 개발까지 마친 뒤에야 발표를 하셨다는……] [샬로테 사의 모리나입니다. 매 연구마다 기술 생산성을 신경 쓰셨다면, 교수님께서 판단하시는 상업성의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해 꼭 듣고 싶…….]“이런, 하필이면…….”
브리지스 역시 그 말을 듣자마자 기술자문위원회의 다른 위원들과 시선을 교환하고 쓰게 웃었다.
지난 세 번의 논문과는 달리 이번 논문에서는 상업성을 기대하지 않고 연구를 했다는 바일런의 설명.
하지만 그건 달리 말하자면 바일런이 그동안 자신의 논문으로 인한 반향과 상업성을 어느정도 예측해 왔다는 뜻이 아닌가.
대중의 반응이나 상업성이라는 것은 애초에 정확하게 분석하고 예측하여 기대할 수 있는 수치의 영역이 아니다.
자의든 타의든 그것을 실제로 해냈다는 것 자체가, 논문의 성과와는 별개로 바일런이 얼마나 ‘돈이 되는’ 부류의 인재인지.
브리지스가 그 의미를 직감한 시점에서, 이 자리에 모인 다른 영민한 이들이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겠지.
실제로 연구원들에 비하면 소극적인 태도로 대기하던 메가테크와 투자회사들조차 눈에 불을 켜고 질문 기회를 받기 위해 달려들고 있다.
[혹시 논문 발표가 시작되기 전에 미리 투자 의사를 밝힌다면 우선권을 주실 수 있는지…….] [아킬레우스, 당장 멈추세요. 지금 교수님 앞에서 무슨 망언을 지껄이는 겁니까!] [천박하기 그지없군. 발표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돈 이야기를 꺼내다니……!] [위원회가 참관 중입니다. 일어나신 분들은 모두 제 자리에 착석해 주세요.]참지 못한 메가테크의 기획실이 대거 개입하며 난리가 나 버린 대강장의 분위기.
지금 상황조차 잊고 소란스러워진 분위기 속에서 마이크가 오가고 고함소리가 난무했다.
객석 사방에서 물건이 굴러떨어지며, 바일런이 서 있는 단상에 놓인 마이크와 충돌했다.
콰직!! 지지지직!!!
“…….”
마이크가 부서지며 흘러나오는 강렬한 노이즈에 스피커가 찢어질 듯 진동한다.
바일런이 무표정한 얼굴로 부서진 마이크를 끈 다음에야 소란이 다소 가라앉았다.
하지만 브리지스는 그 와중에도 오르메온이 앉은 자리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고 있어?’
대강당 곳곳이 부쩍 소란스러워졌음에도 어떠한 반응조차 드러내지 않는 견뢰의 모습.
턱을 괸 채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 시장의 모습에, 브리지스가 위화감을 느끼기도 전에-
“연구 내용을 말씀드리지도 않고 이렇다 저렇다 떠들어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겠지요.”
단상 앞에 선 바일런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콘라드 헤이번이 켜둔 확성장치를 따라, 그 말은 마이크를 통하지 않아도 강당 전체에 선명하게 잘 들렸다.
“오늘 제 발표가 여러분께 어떠한 의미로 다가오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이제는 잘 모르겠군요.”
“…….”
“하지만 확실한 것이 있다면, 제가 연구를 시작한 이유는 항상 저 자신을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천천히 단상 옆으로 걸음을 옮긴 바일런이 말했다.
“제가 고민하던 것을 명확한 이론으로 풀어 설명할 수 있는지. 제가 얻은 답을 다른 이들에게도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전할 수 있는지…… 모든 것이 그것을 확인하기 위한 과정이었다면.”
“…….”
“결국 그조차도 오늘 발표가 끝난 뒤에야 알게 되겠지요.”
촤악!!
그 말과 동시에, 단상 뒤켠에 드리운 커튼이 젖혀지며 아리스가 걸어나왔다.
그녀의 뒤로 넓게 펼쳐진 작업대 위에서 눈부신 마력광이 회오리치며 빛을 발했다.
객석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작업대를 향해 확 쏠리고, 시연 준비를 마친 아리스가 돌아서는 것과 동시에.
작업대에 양손을 얹은 레녹이 시선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네 번째 논문의 발표를 시작하겠습니다.”